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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3일(월)
* 시작 기도
(고후 12:2a, 4)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14년 전에 셋째 하늘(3층천)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주님...
사도 바울은 자신이 묵시의 세계에 있는 것을 미리 보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이 땅에서 육신 곧 모형과 그림자로 이 세상을 당당하게 견딜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밤낮 동안 하루 온 종일을 깊은 바다에서 지내기도 했으며, 갖은 위험들을 겪었지만 그것이 그를 어찌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이미 완료하신 묵시의 세계를 보았기에 어떠한 고난과 환난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역시 주님이 완료하신 묵시의 시점 이후에 있는 시간들이오니 그것은 다니엘이 보았던 70이레의 환상 중에 남은 한 이레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 한 이레는 주님께서 이미 완료하신 묵시의 세계의 모형과 그림자이며 헛것에 지나지 않사오니 거기에 연연해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참된 평강을 누리게 하소서.
눈에 보이는 가시적 교회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히려 진짜 교회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거름더미가 되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렇게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나의 온전한 소망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느 11:10-21
제목 : 성 문지기는...
10 제사장 중에는 요야립의 아들 여다야와 야긴이며
11 또 하나님의 전을 맡은 자 스라야이니 그는 힐기야의 아들이요 므술람의 손자요 사독의 증손이요 므라욧의 현손이요 아히둡의 오대 손이며
12 또 전에서 일하는 그들의 형제니 모두 820명이요 또 아다야이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블라야의 손자요 암시의 증손이요 스가랴의 현손이요 바스훌의 5대 손이요 말기야의 6대 손이며
13 또 그 형제의 족장된 자이니 모두 242명이요 또 아맛새이니 그는 아사렐의 아들이요 아흐새의 손자요 므실래못의 증손이요 임멜의 현손이며
14 또 그들의 형제의 큰 용사들이니 모두 128명이라. 하그돌림의 아들 삽디엘이 그들의 감독이 되었느니라.
15 레위 사람 중에는 스마야이니 그는 핫숩의 아들이요 아스리감의 손자요 하사뱌의 증손이요 분니의 현손이며
16 또 레위 사람의 족장 삽브대와 요사밧이니 그들은 하나님의 전 바깥 일을 맡았고
17 또 아삽의 증손 삽디의 손자 미가의 아들 맛다냐이니 그는 기도할 때에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자가 되었고 형제 중에 박부갸가 버금이 되었으며 또 여두둔의 증손 갈랄의 손자 삼무아의 아들 압다니
18 거룩한 성에 레위 사람은 모두 284명이었느니라.
19 성 문지기는 악굽과 달몬과 그 형제이니 모두 172명이며
20 그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유다 모든 성읍에 흩어져 각각 자기 기업에 살았고
21 느디님 사람은 오벨에 거주하니 시하와 기스바가 그들의 책임자가 되었느니라.
* 나의 묵상
15-18절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레위인 가문 및 대표자들의 명단이 소개된다.
19-21절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문지기와 느디님 사람 대표자들의 명단을 다루고 있다.
특히 오늘 본문 19절에서는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성 문지기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악굽과 달몬 그리고 그 형제들인데 모두 172명이었다.
성전 문지기들은 역대상 26:1-10절 사이에도 기록하고 있는데 그곳에 기록된 문지기들은 므셀레먀, 오벧에돔 그리고 호사의 자손들이 담당하였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성전 뜰의 문들을 지켜 이방인과 부정한 자들이 성전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성전의 곳간 즉 보물고를 지키는 것이다.
성벽의 문을 지킨다는 것은 외부인들이나 부정한 자들의 1차적 관문을 지키는 것과 같다.
무엇이든지 제일 처음이 중요하다.
처음에 용납하면 그 다음은 쉬워진다.
마찬가지로 성의 1차 관문인 문이 뚫리게 되면 그 성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따라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성 문지기들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전 뜰의 문들을 지켜 이방인과 부정한 자들이 성전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은 오늘날 이단자들이나 교회를 무너뜨리는 자들이 교회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또한 성전의 보물고를 지키는 일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보물인 복음을 지키고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비교할 수 있다.
이처럼 복음과 진리의 수호자로써의 문지기의 필요성을 실감한다면 구약의 성 문지기들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 있어서 문지기는 누구인가?
교회 건물을 관리하는 관리 집사들인가?
아니면 교회의 재정과 실무를 맡아보는 장로나 재정부원들인가?
교회의 1차적 관문을 지키는 문지기는 다름 아니라 목사들이라고 볼 수 있다.
목사들이 이단자들이나 교회를 무너뜨리고 훼방하는 자들로부터 교회의 거룩성과 순수성 그리고 교회의 보물인 복음과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있어서 최전방에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복음과 진리를 수호한다는 것은 총과 칼을 들고 무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말씀이 곧 총과 칼이 되어 말씀으로 온전히 무장하는 것이다.
이 복음과 진리의 말씀으로 성도 개개인들이 다 완전하게 무장된다면 그 어떤 이단과 교회를 무너뜨리고 훼방하려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틈타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교회 자체인 성도들이 복음과 진리에 대하여 온전히 눈을 뜨고 살아가게 하는 것은 1차적으로 목사가 문지기 역할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오늘 우리 교회의 문지기로써 그 역할을 잘 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저 자신이 없다는 말이다.
목사가 처음 될 때는 불덩이 같이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시작하였지만, 이내 얼마 가지 못해서 새까맣게 다 타버린 숯덩이가 되고 말았다.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살도록 하겠다는 열정으로 시작하였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에게는 그런 열정도 꿈도 비전도 점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내 안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 땅에 속한 번영 신학에 차츰 물들어 가고 있었다.
교회의 성공, 목회의 성공은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하늘의 생명으로 살아가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히 변질되어 하늘의 것이 아니라 땅의 것에만 천착하는 자가 되어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던 자였음을 고백한다.
나는 교회 문지기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철저히 무너지고 말았다.
지금도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그 선악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끊임없이 무너지고 깨지고 완전히 박살난 자처럼 사는 나의 모습에 자괴감이 밀려온다.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으며, 복음을 전하였으나 정작 나는 생명으로 살지 못하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나는 나 자신을 속이고 성도들을 속이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속인 죄인 중에 괴수이다.
나의 유익과 정욕을 위하여 복음을 팔고 하나님을 팔아 양을 잡아먹는 삯군이었다.
그동안 주님 앞에서 갈등과 번민으로 살았던 이 마음을 이제 다 내려놓는다.
그리고 주의 보혈에 의지하여 나의 모든 죄짐을 벗는다.
이미 내 삶으로 굳어진 죄의 옷을 벗으려니 아프고 힘들지만 벗지 않으면 안 되기에 벗으려 한다.
고통스럽고 힘든 갈등의 연속이었으나 나는 억지로 그것을 놓지 않고 붙잡고 있었다.
아까웠기 때문이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놓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내려놓는다.
이것만이 복음을 따라 생명으로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정욕과 욕심은 끝이 없다.
한 번 용납하면 그 다음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다음, 또 그 다음을 말이다.
이것이 나의 실체요 실상이다.
본질을 벗어나 어긋난 길로 걸어왔던 지난날 나의 모습은 오늘 성을 지키는 문지기의 모습에서 완전히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목사가 문지기의 역할을 1차적으로 하지 못하고 넘어져 있는데 어떻게 교회라는 성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죽어야 성도가 살고, 교회가 살고, 궁극적으로 나도 산다.
표리부동한 나의 모습, 외식적이요 가식적인 나의 모습에서 실패한 문지기를 본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이런 나를 다시 회복시키시며 일으켜 세우기를 원하신다.
아니 이렇게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나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강도 만난 자의 모습과 같다.
살 소망도 없고 거반 죽은 자와 같은 나의 모습이다.
이런 나를 주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셔서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상처를 싸매고 태워 주막 곧 주의 전으로 데리고 가셨다.
여기서 주님의 질문이 의미심장하다.
주님께서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냐고 물으신다.
하지만 그 질문의 진의는 너 곧 네가 바로 강도 만난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짜 거반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이는 오직 예수밖에 없다.
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미 거반 죽은 자, 아니 더 이상 회생 불가능한 자처럼 되었으나 오직 복음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만이 나를 살릴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신다.
그 진리 앞에서 나는 오늘 또 다시 무너진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주님의 보혈을 덧입는 방법밖에는...
그렇게 주의 말씀의 칼은 나를 완전히 발가벗겨, 더 이상 가릴 것이 없도록 드러내 놓는다.
나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수치를 당하기에 합당하다.
그 수치를 주께서 당하셨기에 나도 그 안에 들어가 거한다.
주님은 나를 위해 만인이 보는 십자가에서 발가벗고 수치를 당하지 않으셨는가?
아니 수치만 아니라 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죄인이 되어 거기서 죽으셨다.
또한 무덤에 장사되셔서 나의 모든 죄를 종말처리하셨다.
이러한 주님 앞에서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
그동안 주님은 말씀으로 계속해서 나의 무화과 옷을 벗겨내셨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벗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애써 외면하며 몸부림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주님의 말씀은 나의 심장과 폐부를 찔러 쪼개며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나를 벌거벗기신다.
나의 욕심과 정욕을 끊고, 나의 마음이 가는 곳이 이제는 죄의 자리가 아니라 회개의 자리요, 은혜의 자리를 사모한다.
이제 다시 회복하자.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두 손을 높이 들어 항복한다.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나의 실체요 본질인 죽은 흙의 자리를 기억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 살아날 수 없는 강도 만난 자의 자리로 내려가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주의 품에 거하는 것이 바로 내가 할 일이다.
그곳에 진정한 평안과 위로가 있기에 이제 그곳만을 사모하며 영원을 사는 자로 돌아간다.
거짓과 속임수, 탐욕과 가식으로 점철되었던 무화과옷 같은 나의 삶의 자리는 이제 주와 복음으로 바뀌어 오직 주의 은혜로 살아간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돌고 돌고 또 돌아왔던 지난날의 거짓된 삶을 내려놓고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나의 욕심으로 빚어졌던 삶이 이제는 변하여 오직 주의 말씀과 성령으로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잠시 기울어졌던 나의 마음, 치우쳤던 나의 심령은 바로 잡아 주시고 주님의 십자가와 무덤 그리고 부활에 동참하여 연합한 자가 되어 영생을 누리는 자 되게 하소서.
나에게 주신 문지기의 사명을 잠시 놓치고 헤매었음을 고백합니다.
나를 주의 보혈로 용서하여 주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셔서 주의 일꾼 삼으소서.
강도 만난 자와 같이 거반 죽었던 자입니다.
이러한 나의 영을 소생시켜 주소서.
주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필요합니다.
다시 한 번 그 나라의 영광을 보게 하여 주소서.
그곳만이 평안이 있음을 믿습니다.
의심의 안개와 근심의 구름, 한숨으로 가득한 이 땅의 모래성이 무너지게 하시고, 기쁘고 참된 평화가 있는 그곳에서 다시금 반석 위에 집을 짓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이 시대 복음의 문지기로 선교사님을 세워가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