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매월당 김시습의 <금오신화>
황원갑 <소설가, 역사연구가>
<금오신화(金鰲新話)>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이다. <금오신화>에는 ‘이생규장전’ ‘만복사저포기’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등 5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이들 작품은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주인공이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고 지리적 배경도 우리나라라는 점이다. 학자들 사이에선 <금오신화>가 중국 명나라 때 구우(瞿佑)가 지은 <전등신화(剪燈新話)>를 모방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김시습이 <전등신화>에서 어느 정도 영감을 얻었을지는 모르나 모방설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하겠다.
둘째, 김시습의 인생관과 철학사상이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평생을 불우하게 보낸 김시습은 주자학의 주리론(主理論)이 이(理)를 만물의 본질로 보는 것은 절대왕권시대의 지배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론에 불과하다고 보고, 기(氣)를 만물의 본질로 보는 주기론(主氣論)에 입각한 인생관과 철학사상으로 세상만사를 객관적이며 합리적으로 보고자 했다.
셋째,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홍건적의 난이나 왜구의 침범 등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넷째, 작품 속에 여러 편의 시가 들어 있으므로 인물의 개성을 뚜렷이 하고, 서정적 분위기 묘사에 정밀성을 더해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다섯째, 작품의 소재가 초자연적이며, 소설의 결말이 모두 특이한 상황으로 처리되었다. 이를테면 산 사람과 귀신과의 사랑, 용궁이나 지옥 여행과 같은 내용이 그렇다.
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지은 곳은 경주 금오산 기슭의 폐사 용장사 옛터였다. 그가 이곳에 금오산실이란 초막을 짓고 매화와 대나무를 가꾸고 차를 마시며 어지러운 세상잡사를 잊고 은거하기 시작한 것은 세조 10년(1465), 31세 되던 해 봄이었다. 뒷날 영조가 그의 절개를 추모하여 매월당사를 지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지금은 아무 자취도 찾을 길이 없다.
비상한 천재 김시습이 황당무계한 귀신과의 사랑이니 용궁이니 지옥이니 하는 꿈같은 이야기를 소설로 쓴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그 의문의 열쇠는 결국 꿈, 매월당의 깨어진 꿈에 있을 것이다. 매월당이 이승에서 맺을 수 없는 사랑을 꿈속에서 한풀이처럼 이루어보고자 한 서민의 바람, 그것이 민중문학 <금오신화>의 사상적 배경으로 보인다.
김시습이 어린 시절 신동 소리를 들을 만큼 빼어난 재주를 갈고 닦고 다듬어 지고의 경지에 다다른 학문과 제세구민의 경륜을 펼쳐볼 꿈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꿈을 무참하게 깨버린 것은 바로 수양대군이 일으킨 유혈 쿠데타였다.
김시습을 그저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만 아는 이가 많지만, 사실 그는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 본 적이 없었다. 생육신이란 사육신처럼 처형당하지는 않았지만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울분하여 공리공명을 등진 채 양심과 지조를 지키며 응달진 시대의 뒤안길을 배회했던 왕조사의 국외자들이다.
매월당은 정치적으로는 불의와 폭력이 정의와 순리를 억누르고 사악한 권세가 정당화되는 현실의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다. 또 문학상으로는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비롯해 2천 여 수의 시와 150편에 이르는 논(論)과 전(傳)과 기(記)를 남긴 탁월한 문인이었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 풍류사와 도교사와 다도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59년의 파란만장했던 일생에서 38년을 설잠(雪岑)이란 법명으로 승려 생활을 한 불교사의 거목이기도 했다.
김시습은 세종 17년(1435)에 서울 명륜동에서 강릉 김씨 일성(日省)과 선사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말뜻을 알았고, 세 살 때에 시를 지었으며, 다섯 살 때에 <대학>과 <중용>을 배워 신동이란 소문이 온 나라 안에 퍼졌다.
비상한 천재를 타고나 시운만 따랐더라면 관직에서나 학문에서나 길이 빛날 업적을 남겼으련만, 모진 운명은 그로 하여금 시대의 뒤안길을 배회하게 만들어 평생을 방랑과 은둔과 가난과 병고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1455년에 매월당은 감수성 예민한 갓 스무 살이었다. 그때 그는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공부를 하다가 그 소식을 들었는데, 사흘 동안이나 대성통곡을 하더니 갑자기 미친 듯이 승방에서 뛰쳐나가 읽던 책을 모두 불태우고 똥통에 들어갔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머리를 깎고 설잠이란 법명의 행각승이 되어 뜬 구름, 흐르는 물처럼 정처없는 방랑을 시작했다. 그는 진한 분노와 슬픔과 외로움에 겨워 속세의 공리공명을 깨끗이 잊은 채 저자와 산수간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다.
그는 기인 광인 걸승 소리를 들으며 왕조사의 뒤안길을 국외자 방랑자가 되어 술 마시고 시 읊으며 기행(奇行)과 만행(萬行)과 통렬한 풍자로 행운유수처럼 한 세상을 살다가 갔다. 세상은 둥근 구멍, 모난 막대기 같은 자신이 그 속에 들어가 어울리기 위해서는 모난 성품을 깎고 다듬어 타협해야 하는데, 그는 모난 막대기 생긴 그대로 세상 밖을 마음대로 굴러다녔다.
지조를 팔아 초로같은 목숨을 부지하고, 절개를 팔아 헛된 벼슬을 산 썩은 선비, 변절자들을 추상같이 질타하며 삼천리 방방곡곡을 주유천하하던 매월당은 성종 23년(1493) 3월 어느 날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 기슭 무량사 승방에서 그토록 고달팠던 발길을 멈추고 일생의 막을 내리니 59세였다. 무량사의 중들이 그의 유언대로 가매장했다가 3년 뒤에 관을 열어보았는데 안색이 생시와 다름없었다. 중들이 모두 놀라 성불했다면서 다비하고 부도를 만들어 세웠다.
약삭빠른 기회주의자, 변절자와 아첨꾼들이 설치고 판치는 시궁창같은 세상에서 죽은 고기처럼 둥둥 떠내려가기를 마다한 채 거칠고 험한 물살을 헤치고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려고만 했던 매월당, 매월당 김시습이야 말로 진정한 이 땅의 선비요 풍류남아요 대장부였다.
세상이 500년 전이나 이제나 어지럽기는 다름없다. 변절자 아첨꾼 정상배 모리꾼 들이 설치는 것도 별 다름 없다. 세상은 갈수록 어지럽다. 갈수록 살기 어렵다고 백성들은 한탄한다. 삶의 원동력인 신명은 사라지는 대신 세태가 갈수록 각박해지기 때문이다. 무엇이 인심을 사납게 만들고 인정을 메마르게 하는가. 존경할 만한 정치지도자도, 사회적 스승도 없기 때문이다. 오만 편견 아집 독선 노탐에 가득찬 정상배와 맹신적 추종자들만 설치니 백성의 삶에서 신명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매월당과 같은 올곧은 선비정신과 멋진 풍류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마음에는 두 문이 있다고 한다. 열어야 할 문과 닫아야 할 문이다. 열어야 할 문은 자비와 사랑과 해원과 상생의 문, 닫아야 할 문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문이다.
<경제풍월>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