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시원한 저녁 가을 바람을 기뻐하였습니다.
어느 새 창문을 닫고, 이불을 덮고 잠을 잡니다.
이런 때도 주님을 생각하고 또 주님을 나지막이 부릅니다.
주일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참 복음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허락하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아버지 품속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0. 제사장 중에는 요야립의 아들 여다야와 야긴이며
11. 또 하나님의 전을 맡은 자 스라야이니 그는 힐기야의 아들이요 므술람의 손자요 사독의 증손이요 므라욧의 현손이요 아히둡의 오대 손이며
12. 또 전에서 일하는 그들의 형제니 모두 팔백이십이 명이요 또 아다야이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블라야의 손자요 암시의 증손이요 스가랴의 현손이요 바스훌의 오대 손이요 말기야의 육대 손이며
13. 또 그 형제의 족장된 자이니 모두 이백사십이 명이요 또 아맛새이니 그는 아사렐의 아들이요 아흐새의 손자요 므실레못의 증손이요 임멜의 현손이며
14. 또 그들의 형제의 큰 용사들이니 모두 백이십팔 명이라 하그돌림의 아들 삽디엘이 그들의 감독이 되었느니라
15. 레위 사람 중에는 스마야이니 그는 핫숩의 아들이요 아스리감의 손자요 하사뱌의 증손이요 분니의 현손이며
16. 또 레위 사람의 족장 삽브대와 요사밧이니 그들은 하나님의 전 바깥 일을 맡았고
17. 또 아삽의 증손 삽디의 손자 미가의 아들 맛다냐이니 그는 기도할 때에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자가 되었고 형제 중에 박부갸가 버금이 되었으며 또 여두둔의 증손 갈랄의 손자 삼무아의 아들 압다니
18. 거룩한 성에 레위 사람은 모두 이백팔십사 명이었느니라
19. 성 문지기는 악굽과 달몬과 그 형제이니 모두 백칠십이 명이며
20. 그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유다 모든 성읍에 흩어져 각각 자기 기업에 살았고
21. 느디님 사람은 오벨에 거주하니 시하와 기스바가 그들의 책임자가 되었느니라
(본문 주해)
10~14절 : 예루살렘에 남은 제사장의 명단 중 일부(대표)가 소개된다.
제사장은 모두 1,192명이다.
15~18절 : 예루살렘에 남은 레위인의 명단 중 일부(대표)이다.
레위인은 284명이다.
‘기도할 때에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자’(17절)는 ‘감사의 찬송과 기도를 인도하는 지휘자’란 뜻이다.
19절 : 그 외 성전 문지기로 봉사하는 자들 172명이 남았다.
20~21절 :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유산으로 받은 땅이 있는 유다 여러 성읍에 흩어져서 살았다.
그리고 느디님 사람들(성전 막일꾼들)은 오벨 성에 자리잡고 살았다.
(나의 묵상)
예루살렘 성에 남아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봉사자들(문지기들과 막일꾼들)이 소개된다.
이들 모두는 성전이 일터인 자들이다.
제사장은 따로 생업이 없는 자들이다. 백성들이 그들을 섬겨주어야 하니 그들의 생계는 안전하지 않다.
하지만 이들이 이곳에 남아야 하는 이유는 성전 중심의 삶 즉 거룩한 말씀과 성전의 은혜가 그 백성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백성들에게 흘러가야 한다. 그리고 그 은혜로 채워진 거룩한 성의 백성들을 통해 또 다른 성읍으로 그 은혜가 흘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레위인 역시 다른 생업이 없이 성전세, 십일조 등을 관리하고 성전유지보수 등 성전의 바깥일을 맡은 자들이다.
또한 어떤 이는 찬양인도자로, 어떤 이는 문지기로 그 역할을 다한다.
특히 느디님 사람들에 대한 기록도 눈에 띈다.(21절)
이 사람들은 히위 족속 기브온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이다.
그들은 속임수로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어 죽지 않고 살게 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일로 이스라엘의 종이 되어 성전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 긷는 자들이 된 것이다.(수9:23)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은 망했고, 이미 있던 성전도 무너졌으므로 이들은 다른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섬기는 자로 남았던 것이다.
그들은 비록 예루살렘 성안에 살지는 않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일하는 자들로 남았던 것이다.
먹고 살기나 할까 싶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남게 된 제사장들, 레위인들, 문지기들 그리고 느디님 사람들이다.
신약시대, 예수님께서 허물라고 하셨기에 건물 성전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이제 성전이란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분께 연합된 자, 즉 성도들이 성전이요, 그 공동체가 성전인 것이다.
이 성전을 위해 제사장이 남고, 레위인이 남고, 문지기가 남고, 막일꾼들까지 남아 성전을 위해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성전 중심의 삶은 느헤미야 시대나 지금이나 사람의 눈에는 불안전한 삶일 것이다.
먹고 사는 가장 기초적인 일에 위협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에 남은 그들의 삶이나, 이 현란한 시대에, 십자가에 못 박혀 가장 처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고 사는 성도들의 삶이나 똑같이 어리석어 보이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성전을 위해 살기로 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주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혜가 있다. 그것은 성령께서 주셔야만 알 수 있는 은혜이므로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어제 오후 예배 때, 우리교회 출신의 목사님이 모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증거 하셨다.
첫 마디가,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참 복음을 만나지 않고 가짜 복음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나는 ‘아멘!’을 했다.
내가 그 증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복음을 만나 바람직한 존재로 변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만을 사랑하는 자로 변했기에 전적으로 아멘이 되었다. 언제나 자아확장만을 위해 살아온 내가 자기를 부인하는 그 십자가에 연합되기를 바라는 자가 되었으니 이런 변화야말로 참 복음의 능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전에 마음을 두고 살겠다는 제사장, 레위인, 문지기 그리고 느디님 사람들의 마음이 오늘날 내게로 전달되니, 그것은 나를 부인하는 십자가에 연합되어 살겠다는 마음이다.
즉 그들이 성전을 일터로 삼아 산다는 것은, 내 마음의 터가 십자가라는 사실과 같은 것이다.
나를 부인하는 십자가는 그리 유쾌하지도, 반갑지도 않다.
‘이렇게 살다가는 내내 초라하고 내내 무시당하고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 인정받고 힘을 과시하는 삶이 참으로 허망한 일임을 말씀에서 확인하고 또 확인하게 되니 그런 삶을 욕망하는 마음이 솟구칠 때마다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렇게 만들어 가신다.)
나는 때로 제사장으로, 때로 레위인으로, 때로는 문지기로 그리고 때로 막일꾼이 되어 주님을 위해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그런 삶의 필수 은혜가 십자가임을 알기에 오늘도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묵상 기도)
주님,
제사장, 레위인, 문지기, 막일꾼....
주님께서 원하는 곳에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시시때때로 다르게 주어지는 모든 역할을 십자가에 연합되어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일을 망쳐버리는 저인 것을 주님이 아시오니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기를 감히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터전, 십자가를 떠나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 성행하는때(고후 11:4) 참복음으로 새롭게 되게 하시는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