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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4일(화)
* 시작 기도
(삼하 20:1-2)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주님...
이스라엘이 어찌 그리 허망한 갈대와 같이 이리 흔들 저리 흔들 거리는지요?
압살롬의 반역이 평정되고 이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다윗을 향하여 또 다시 세바라는 자가 반역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런 세바를 따릅니다.
결국 후에 반역자 세바는 지혜로운 여인을 통하여 죽임을 당하고 다시 이스라엘은 평정이 됩니다.
이를 보면서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이 흔들리는지 돌아봅니다.
수시로 나의 유익을 따지며 그것에 합하면 언제든지 예수님의 목에 이빨을 들이대는 자가 바로 나임을 고백합니다.
이런 내가 세바를 따라 마음이 요동치는 베냐민 지파요 이스라엘이 아니겠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나를 택하시고 부르신 주님의 은혜 앞에서 그저 입을 가리고 나아가오니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날 위하여 피 흘리신 우리 주님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녀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나라(히 12:28)를 오늘도 바라보며 주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과 같은 분이시기에 그 분 앞에서 내가 어찌 나의 의를 드러낼 수 있겠나이까?
나는 없어지고 오직 주님만 드러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느 11:22-36
제목 : 아삽 자손 중 웃시는 레위 사람의 감독이 되어
22 노래하는 자들인 아삽 자손 중 미가의 현손 맛다냐의 증손 하사뱌의 손자 바니의 아들 웃시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레위 사람의 감독이 되어 하나님의 전 일을 맡아 다스렸으니
23 이는 왕의 명령대로 노래하는 자들에게 날마다 할 일을 정해 주었기 때문이며
24 유다의 아들 세라의 자손 곧 므세사벨의 아들 브다히야는 왕의 수하에서 백성의 일을 다스렸느니라.
25 마을과 들로 말하면 유다 자손의 일부는 기럇 아르바와 그 주변 동네들과 디본과 그 주변 동네들과 여갑스엘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며
26 또 예수아와 몰라다와 벧벨렛과
27 하살수알과 브엘세바와 그 주변 동네들에 거주하며
28 또 시글락과 므고나와 그 주변 동네들에 거주하며
29 또 에느림몬과 소라와 야르뭇에 거주하며
30 또 사노아와 아둘람과 그 마을들과 라기스와 그 들판과 아세가와 그 주변 동네들에 살았으니 그들은 브엘세바에서부터 힌놈의 골짜기까지 장막을 쳤으며
31 또 베냐민 자손은 게바에서부터 믹마스와 아야와 벧엘과 그 주변 동네들에 거주하며
32 아나돗과 놉과 아나냐와
33 하솔과 라마와 깃다임과
34 하딧과 스보임과 느발랏과
35 로드와 오노와 장인들의 골짜기에 거주하였으며
36 유다에 있던 레위 사람의 일부는 베냐민과 합하였느니라.
* 나의 묵상
22절에는 노래하는 자였던 아삽의 자손인 웃시의 계보와 그의 직책이 나온다.
그는 예루살렘에 거하는 레위 사람의 감독이 되어 하나님의 전 일을 맡아 다스렸다.
그가 맡은 일 가운데 하나는 바사 왕이 성전 예배를 위해서 내린 양식과 재정을 관리하고 노래하는 자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바사 왕은 느헤미야 당시의 왕이었던 아닥사스다 왕을 가리킨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성전 예배에 쓰도록 물질적인 후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직분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본문의 웃시 같이 양식과 재정을 관리하는 직분을 맡은 자들이 성실하게 그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부인의 자세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재물에 대한 유혹이 큰 만큼 자기부인이 없으면 그 직분을 수행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열두 제자로 구성된 공동체의 재정을 담당하는 회계의 직분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관리하던 재정을 유용한 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그를 가리켜서 ‘도둑’이라고 표현한다.
(요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즉 유다는 자기 직분에 성실하지 않음으로 도둑이 되고 만 것이다.
급기야 그는 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승인 예수를 팔아넘기기까지 하였다.
(마 26:15) 내(가룟 유다)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30을 달아주거늘
이러한 불상사가 가룟 유다에게 일어난 것은 그에게 자기부인이 없었고 자기 욕심에 따라 직분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일이 비단 교회의 직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 다 적용이 된다.
세무 공무원이 자기부인을 하지 않으면 국민의 혈세를 도둑질하게 되고, 공직자들이 자기부인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부정과 비리가 다 자기부인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겠는가?
이런 차원에서 보면 자기부인은 성도들에게만 요구되는 사항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부인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의 행위로 심판을 받을 뿐이다.
하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창세전 언약에 따라 하나님이 이끄시는 그 길을 걷는 자들이다.
물론 이 땅에서 연약하기 때문에 불의를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부인이 없어서 불의를 저지른다 할지라도 성령께서 주시는 긍휼과 은혜로 인하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그것이 회개이다.
물론 그 회개를 했다고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과정일 뿐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창세전 언약이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를 당신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그 이유는 그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들의 피로 우리를 속량 곧 죄를 사해 주셨다(엡 1:3-7).
사실 예수를 믿는 믿지 않든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자가 없다고 말한다(롬 3:10, 23).
그런데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주신 그 율법을 지켜보겠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하였다.
물론 그들이 안간힘을 쓴다고 해서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땅에서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다.
하나님이 주신 그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될 택한 백성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나누셨다.
그것은 우리 사람이 불평할 수 있는 게제가 전혀 아니다.
토기를 굽는 토기장이가 어떤 그릇은 귀한 것으로 어떤 것은 질그릇으로 만든다고 해서 이에 대해 토를 달 토기들이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런 토기에 불과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정하신 그 뜻에 따라 구별될 뿐이다.
거기에 나의 행위는 손톱만큼도 가입되지 않는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지 못한 자라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자들은 예외 없이 거기서 예외가 될 뿐이다.
다만 이 땅에서는 누가 택함 받은 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주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 길을 안내하는 것이다.
전혀 믿지 않을 것 같은 자라도 하나님이 택한 자라면 그렇게 제시되는 복음을 받아 믿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한 자가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걸어가지 않고 엉뚱한 길 곁길로 갈 때, 하나님은 그를 그냥 두지 않으시고 고난이라는 하나님의 수단을 사용하여 그를 인생의 코너로 몰아 넣으신다.
바로 거기서 자기부인이 터져나오게 하신다.
그것이 회개요, 결국 나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를 구원하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인정하게 하신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오늘 아삽의 자손 중 웃시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는 것으로 인하여 창세전 언약과 그에 따른 믿음을 살펴보았다.
과연 나는 지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면 아니올씨다,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파레시아로 아버지 품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나의 의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함이다.
나의 주님께서 지금도 나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시며 또한 이미 나를 십자가에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또한 우리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주님과 함께 무덤에 장사된다.
이것이 나를 부인하는 자기부인임을 믿는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계명을 다 지켜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야고보기자는 성경에 그것을 이미 기록하고 있다.
(약 2:9-11)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나는 나의 행동이 얼마나 미숙하고 연약한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행위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버린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나 비록 지옥에 들어가기에 가장 마땅한 자이지만, 나는 하나님의 택한 자녀임을 믿기에 그 믿음 안에서 날 위하여 십자가 대속을 이루신 예수님의 그 은혜로 인함이다.
그 주님의 은혜는 이 세상 그 무엇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가장 크고 놀라운 은혜이다.
따라서 그 은혜를 얻고 아는 이들의 찬양은 ‘어메이징 그레이스(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오늘 이 하루도 그 은혜로 하루를 살아간다.
그 은혜 안에서 가슴 뛰는 감격을 맛보지만, 그 안에는 나의 티끌 됨과 헛것 됨이라는 죽은 흙의 실존을 실감하며 그저 면목 없음과 죄송함으로 나아갈 뿐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주님은 나를 아시고 택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라는 예레미야의 고백(렘 1:5)을 보거나, 에서와 야곱이 아직 태어나지 않고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는 사랑하고 하나는 미워하였다고 말씀하신 것(롬 9:11-13)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창세전 언약이 기록된 에베소서 1:3-7절까지의 내용은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이러한 증거를 통하여 내가 무엇을 잘 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불식하게 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인함임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 땅에서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습니다.
육신의 쾌락을 위하여 산다 한들 그것이 나의 육신의 쾌락에 잠시 유익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이 땅에서 잘 산다 한들 그 역시 나의 구원에 1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순간순간 우리 주님과 더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하여 영원한 그 나라에서 누릴 영광을 이 땅에서 미리 맛을 보고 가기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구약의 율법과 계명들을 포함하여 신약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하라, 하지마라의 계명들은 그것을 잘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무리 용을 쓰고 기를 써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뿐입니다.
예수님 당시 그것을 잘 지키겠다고 했던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짜로 윤리 도덕적으로 가장 정직한 삶을 산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이며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일갈했던 것을 잘 압니다(마 23; 요 8:23).
오늘 말씀을 잘 지켜서 주님 안에 자기부인이 있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의 자녀로 살게 하소서.
하지만 나를 드러내는 나의 의가 아니라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