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왜국의 첫 왕은 가락국 공주였다
야쓰시로에서 만난 거북
가을날 오후, 바람은 제법 냉기를 품고 있었다. 그곳은 어쨌든 생전 처음 밟은 이국땅이었
다. 아무리 갈 길이 바쁘기로서니 무거운 여행가방도 내려놓아야 했고 날도 쌀쌀해 여독을
풀곳부터 찾아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의 발걸음은 이미 야쓰시로 신사를 향하고 있었
다.
돌이켜보면 그때 숙소 찾기를 서둘러 역 직원에게 물었다거나 시청에 전화를 걸어 숙박할
곳을 안내받았다면 나의 꽃가마배 추적은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십중팔구 야
쓰시로 탐방은 며칠 못 가서 어떤 힘에 의해 제지당하고 어렵게 건넌 그 길을 유배객의 처
량한 신세가 되어 실의만 안고 되돌아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짐을 풀 겨를도 없이 추적의 출발점으로 미리 정해둔 야쓰시로 신사로 직행
했다.
"...실례합니다."
경내를 서성이다가 신관이 기거하는 곳으로 보이는 건물 현관앞에 서서 조심스레 입을 열
었다.
"한국에서 이제 막 도착하는 길입니다."
"무슨 일로..."
나는 한국 PEN 회원이라는 신분과 주소가 적힌 명함을 건넨 후 품에서 한 장의 지도를
꺼내 보였다.
"고대사에 관심이 있어서요. 항로 추적의 제 1보를 야쓰시로에서부터 시작해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은 했지만 신관의 표정은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소?'하는
쪽
이었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다케하라 기요토'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 숙소는 정했습니까?"
야쓰시로 신사의 고풍스러운 전통에 대해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자 그제야 경계를 푼 신
관이 이렇게 물었다. 그렇구나, 숙소 잡는 것을 잊었구나... 신관은 당황하는 나를 보더니 다
시 말문을 열었다.
"새로 생긴 비즈니스 호텔이 있는데 괜찮다면 소개해드리지요."
하지만 나의 관심은 다른 데 쏠려 있었다.
"이 지역 역사를 잘 아는 분이 계시면 소개받고 싶은데요."
신관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있긴 한데 워낙 연로하셔서... 미노다라는 분이지요."
오랫동안 이 고장 소학교 선생을 하면서 이 지역 역사를 연구해왔으며, "야쓰시로사"라는
책을 낸 분이라는 설명이었다. 신관의 각별한 배려는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보
너스는 고대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자전거를 빌려준 일이다. 말하자면 고대의 중국인들이 한
반도 김해 지역에 와서 배를 얻어 탔듯이, 나는 이 고장에 머물며 자전거를 빌려 타게 된
것이다.
노교장 미노다를 만나기 전에 자전거를 타고 우선 할 일이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내
나름대로 추정해온 여왕 비미호의 궁터를 찾는 일이었다.
야쓰시로 평야는 규슈에서도 손꼽히는 곡창으로 구마가와의 흐름을 타고 쉴 새 없이 퇴적
된 금싸라기 땅이다. 그러니 어디를 가나 길은 평탄하고 농로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어
서 가을 햇살 속의 여행길은 더없이 쾌적했다.
...거처하는 궁실과 누관은 엄하게 성책을 설치해서 언제나 무기를 가진 병사가 지키고 있
었다.
우선 "삼국지"가 증언하고 있는 몇 자의 한자에서 이곳에서 찾아야 할 옛 궁터의 지리적
상황에 관한 정보를 알아보기로 했다. 첫 번째로 주시할 점은 왜국 최최의 고대왕국 여왕이
머문 곳은 평지가 아니라 높은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한자의 '루'가 건물이 높다는 것
을 뜻하는데 여기에 '바라볼 관'자까지 붙었으니 그 옛날 중국인들이 파악했던 여왕의 궁실
은 산위에 있었던 것이 확실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그 궁성은 성책으로 된 것이라 하였다. '책'은 나무를 세워 만든 울타리를 가리
킨다. 그러므로 여왕의 성벽은 돌로 쌓은 것이 아니라 통나무를 세워 두른 목책이 된다. 물
론 목책의 나무들이 1천5백년 풍상 속에 오늘까지 있을 리야 없다. 하지만 목책으로 에워쌌
던 대지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 아닌가? 그 옛터를 어느 산마루에서 만날 수 있을까?
비즈니스 호텔에서 쾌적한 하룻밤을 묵은 나는 이튿날 야쓰시로 신사에서 남쪽 구마가와
하구 가까운 곳에 있는 옛절 '슌코지'를 찾아 나섰다. 선종인 이 절에 들렀을 때는 아침 9
시. 한적한 절 안에 노승이 혼자 차를 달여 마시다가 인사를 건네는 나를 보고는 엷은 미
소를 지었다.
"차 한 잔 드시려우?"
차 향기는 언제 대해도 한가로움을 준다. 찻잣을 반쯤 비울 때까지도 노승은 말이 없었다.
상대가 누구든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나도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근처에 성터가 없는가요?"
"성터래야 토성일 뿐이지요. 저기 보이는 마루야마 꼭대기에 성터가 있다 합디다. 가보지
는 못했지만..."
노승은 손가락을 들어 나무가 듬성듬성 들어선 샛길을 가리켰다.
"이 절에서 그곳으로 오르는 길이 있지요. 저편으로요."
노승은 무심히 가리켰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은 이미 산길을 따라 나서고 있었
다.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막 일어서려는데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이미 오래된 이야기지요. 지금은 이렇게 민가가 들어서 있지만 옛날에는 물가였다고 해
요. 배가 드나드는 시설이 있었느데 아마 가메바네라고 불렀다지요."
'가메'는 거북을 뜻하고 '바네'를 굳이 한자로 쓰면 '튀기다'라는 뜻을 가진 탄으로 표기
할 수 있다. '물을 튀겨서 털고 상륙한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으니 일본의 옛 지명에서 '바
네'는 선착장을 가리키는 글자로 널리 쓰여왔다. 가메바네 - 거북 나루터라니!
거북 - 그것은 서기 42년 봄 거북 뫼 마루에서 우리 조상들이 신나게 발춤을 췄을 때부
터 가락국과 인연 깊은 동물이다. 가락국으로 시집온 할머니가 타고 온 꽃가마배의 뱃길을
거슬러 오르려고, 어려운 바다를 건너와서 처음으로 얻어낸 정보가 거북이라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듯 싶었다. 2천 년 전 바다 밑에 형성된 빙상의 파편 한 조각을 주운 기분이었
다.
학교 운동장만한 평지가 나타났다. 황금빛 가을은 구마가와의 강물에만 물든 건 아니었다.
동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야쓰시로 평야 가득히 황금빛 벼이삭들이 그야말로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야쓰시로 시가를 전망할 수 있는 공원이 된 이 평지에 야쓰시로 사적위원회
가 쓴 팻말이 나타났다.
여기 세워진 '이나리 진자'는 본시 마루야마 정상에 있던 것을 1335년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며, 슌코지는 당시 이 고장을 다스리던 성주 일족의 '조상 무덤을 모시는 절'이다.
'이나리'라는 이름을 가진 신사는 일본 열도 도처에 있었다. 이 신사는 짙은 주홍색의 도
리이를 가지런히 세워 마치 터널처럼 보이는 특색이 있는데 그 신전 앞에 '야마이누'라 부
르는, 개 같기도 하고 여우 같기도 한 동물상을 마주보게 하고 있는 것도 여느 신사와는 달
랐다. 그리고 모시는 신주가 '모치우케노오카미'로 되어 있는 것도 특이했다. 말하자면 '먹
을 것을 보장해주는 신'이다.
바로 그것이었다. 이네의 도는 우리말로 '벼' 아닌가. 거기에 연꽃을 의미하는 하자를 붙
여 '이나리 진자'가 됐다. 즉 벼와 연꽃을 모시는 신사다. 생각이 이 대목에 이르자 나는
짐짓 흥분을 감추기 어려워 신사 옆 비스듬한 풀섶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신사
의 한낮, 오가는 인기척은 뜸한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바쁘게 지나갔다.
벼와 연꽃, 두 식물은 말할 것도 없이 인도가 원산지이다. '이나리'라는 말은 우리말의
나리(나으리)를 연상케 한다. 앞의 이자는 접두음이라 볼 수도 있다. 더욱이 신주의 이름이
'보식'이니 옛 사회에서 자기를 부리는 상전, 곧 '나리'는 자신에게 음식을 대주고 지켜주
는 존재가 아닌가?
하지만 초반부터 말의 유사성을 따지는 일에 시간을 소모할 생각은 없었다. 우선은 '나으
리 신사'가 있는 전망대를 돌아 마루야마 정상으로 오르는 옛길을 찾는 일이 급했다.
첫 번째 만난 뱀
전망대 끝을 돌아서 뻗은 산길은 평탄하고 넓었다. 잰걸은으로 가는데 시야가 갑자기 어
두워졌다. 나무들의 터널 속으로 들어선 것이다. 숲길의 엄숙하고 고즈넉한 정취가 내 몸을
감싸고 돌면서 예나 지금이나 여전할 자연의 신비를 한껏 내뿜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막다른 길이 나왔다. 이제까지 평탄했던 것으로 미루어 전망대의 뒤편쯤
에 왔을 뿐 산마루에는 접근하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그곳에 조그만 사당이 있었다. 아주 작
은 사당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문을 살짝 밀어보았다.
"...아, 할머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외마디였다. 석상은 어른 주먹 크기만했다. 분명 신주로 모셨음직한
그 석상은 앉음새며 어깨선의 윤곽을 보아 여인상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나를 자지러지게 한 것은 좌상 머리를 덮은 버섯 모양의 가리개였다.
머리를 덮은 버섯 형상의 가리개라... 왠지 눈에 익은 모습이다.
어김없이 뉴델리 박물관에서 본 고대 인물상을 닮아 있었다. 단지 아쉬움이 있다면 인도
에선 여덟 마리의 뱀이 밀착해서 상당히 극적인 형상을 이뤄내고 있었지만, 오랜 세월 풍우
에 시달린 탓인지 이 산 속에서 만난 석상에서는 뱀의 윤곽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플래시 없이 ASA100의 필름으로는 도저히 찍을 방도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연필로 스
케치를 하고는 다시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찾아 나섰다. 10월 초순, 규슈 중부의 산은 한반
도의 산세와는 판이한 정경이었다. 우거질 대로 우거진 야생풀과 빽빽한 나무 사이에서 한
치 앞으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키를 훌쩍 넘는 수풀, 머리 위를 덮은 나뭇잎들이 정오 가까운 산 속을 이미 어스름한 저
녁 시간대로 돌려놓고 있었다. 더 나아가다가는 어둠 속에 갇혀 되돌아갈 길조차 잃을 것
같았다. 갈 길은 멀었지만 나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 산마루 어딘가에 여왕의 옛 궁터가 있
을 것이다!
가는 길이 끊어진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후퇴하는 일이었다. 우거진 나뭇잎 터
널을 간신히 빠져나와 평탄한 산길을 다시 밟는데, 내리쬐는 가을 햇살 아래 봉긋이 맨살을
드러낸 대지가 따뜻한 기운을 전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발꿈치 쪽에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
리고 잔뜩 긴장이 되어 돌아 보았다.
뱀이었다. 굽이 도는 길 모퉁이에 똬리를 튼 뱀이 고개를 빼들고 있었다. 진흙빛과 희뿌연
잿빛이 대비를 이룬 것이 흡사 빛 바랜 색동무늬인 양 현란하다. 살 끝으로 저려오는 전율
을 느끼며 한동안 숨을 죽이고 마주보고 있었다. 10여 초 지났을까, 뱀은 연기처럼 사라졌
다. 거짓말 같은 일이었다. 이마의 식은땀이 이제 막 눈썹 위를 스칠 판이었으니까 분명히
눈 깜짝할 사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후 똬리를 튼 뱀은 나의 망막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언제라도 내 앞에 다시 나타날 것
같았다. 며칠 뒤 여왕릉을 찾으러 나선 날, 정말 우연히 거의 같은 자세를 한, 같은 몸빛의
뱀을 평지에서 만나게 되었다.
"뱀은 일본 최초의 고대왕국을 이룩한 여왕의 이름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며칠 뒤 만난 미노다 씨다. 그렇다면 마루야마 산모롱이에
서 만난 뱀을 헛것이라고만 단정지을 수 있을까?
노향토사가 미노다씨는 노안경을 낀 채 돋보기를 쓸 만큼 연로한 분이었다. 깡마른 체구
라서 그런지 곧추세운 허리가 유난히 꼿꼿해 보이는 미노다와의 첫 만남은 그리 길지 않았
다. 그는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먼저 알려드리고 싶은 점은 야쓰시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역사적 배경에 비해서는 연구가 전무한 실정이에요."
한탄하듯 지역 사료의 빈곤함을 자책했다.
"졸저이긴 합니다만, 이 지역에서만 쭉 교편을 잡다보니 저도 모르는 애정이 생겨서..."
그는 내가 야쓰시로에 온 내력을 듣더니 작업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며 자신이 쓴
"야쓰시로시의 역사"라는 책자 두 권을 선물로 주었다. 국판 4백62쪽의 책으로 책장을 넘기
니 삽화가 많이 들어 있어 무엇보다 반가웠다.
우선 눈길을 끈 것은 '최초의 야쓰시로 성'이라는 설명이 붙은 그림이었다. 해발 3백76m
의 '핫초야마' 북쪽 비탈의 작은 봉우리마다 옛 성터가 표시되어 있는데, 마루야마조를 에워
싸듯이 7개의 성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삥 둘러 있었다. 그랬구나, 야쓰시로는 '여덟 개의
성'이었구나!
'야쓰시로'야말로 외국인을 곤란하게 하는 일본식 한자읽기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본인의 한자읽기는 훈과 음을 뒤섞기 때문에 팔대라는 지명을 적고는 야쓰시
로로 읽어버린다. 한자의 팔은 그들 음으로는 하치다. 그러나 그 다음에 자음이 오면 하쓰로
읽는다. 그리고 훈은 야쓰인데 야로만 읽는 경우도 있다.
까다로운 것은 대자이다. 음은 다이로, 훈은 요로 읽다가 난데없이 시로로 읽기도 한다.
그리고 성의 훈도 마찬가지로 시로인데, 이 말을 그들의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성의 일본어
로 나올 뿐 대의 뜻은 없다.
결국 현지명 '야쓰시로'는 어느 때까지는 '여덟 개의 성이 있는 곳'이라 부르던 것을, 소
리는 그대로 전승하면서 뜻은 성을 연상하지 못하게끔 글자를 바꾼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이곳의 역사적 특성인 '여덟 개의 성이 있는 곳'을 감추기 위해서 글자를
바꾼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한 것이었다.
여기서 제기하는 가설이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는 점은 차차 설명해 나가겠지만, 구마가와
가 바다를 만나는 어귀의 산 줄기에 있는 여덟 개의 봉우리 위에 쌓은 성이 야쓰시로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엉뚱하게도 낙동강 어귀, 가락국 왕도의 풍수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
다.
그 가락국 왕도에 인접한 서남쪽에 칠산이라는 이름의 산이 있고, 지금 김해국제공항이
된 곳에는 칠점산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지명만이 아니라 "삼국유사"는 수로
왕이 왕도를 정할 때 '1'이라는 숫자와 '7'이라는 숫자의 연결이 길조라고 강조했다는 증언
을 담고 있다. 셈해볼 것도 없이 1과 7이 모이면 8아닌가?
일본 최초의 신사
거대한 빙산이 바다 위에 뜰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몇배 더 큰 빙산이 수면 밑에 잠
겨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바다는 '대자연의 역사'를 껴안고 도도히 흘러가고 있다. 그 바다
의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또 하나의 힘과 마주치게 된다. '인간의 역사'라는 이름의
바다가 그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경험과 생명들이 녹아 이룬 역사의 바다에서 그나마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표면 위 물결일 뿐이다. 물결을 본 것으로 바다를 다 보았다고 할 수 있는가?
빙산의 일각을 보았다고 빙산을 다 보았다고 할 수 있는가? 풍랑을 무릅쓰고 바다 저편 빙
산으로 다가가고자 함은 빙산 일각을 형성케 한 수면 밑 고대 역사의 실체를 믿기 때문이
다.
빙산은 시시각각 변하고 사라지는 시간의 바다 위에 제각각 위용을 갖추고 전설처럼 떠
있다. 대이변 속에 살아남은 피라미드일 수 있고, 고문서를 소각케 한 진시황일 수 있다. 또
신화의 바다 깊이 감춰온 수로왕일 수도 있고, 그가 먼 바다 저편에서 모셔온 아유타국 공
주일 수도 있다. 그들은 모두 권좌를 둘러싸고 겹겹이 쌓이는 역사의 물결 위에 제 부피만
큼의 명성을 띄워왔다.
고대 이야기 - 세월이 흘러 때로는 눈부시게 근사한 빙산의 일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예도 있지만, 영광과 상처의 거대한 뿌리를 수면 아래 감춘 채 묵묵히 흐르는 경
우가 더 많다. 지금부터 우리가 함께 찾고자 하는 수로왕의 '1'과 7'이라는 숫자도 바다 밑
에 숨겨진 빙산의 일부일 수 있다.
왕(수로왕)이 이르시되 "짐이 경도를 정하려 하는도다". 이내 가마를 가궁 남쪽 신답평으
로 옮겨 사방의 산악들을 둘러보고 이르기를 "이 당이 협소하기로 여뀌잎 같으나, 뛰어나게
특이함이 있어서 가위 16나한의 삶의 터전일지니가. 항차 1에서 3을 이루어, 3으로부터 7이
이루어짐이니, 칠성이 머물 곳으로는 본시부터 이곳이 합당함이니라".
"삼국유사"는 이렇게 옮길 수 있는 증언을 "가락국기"에 담고 있다. 그 가운데 '1에서 3을
이루고, 3으로부터 7이 이루어짐이니'라고 한 것은 후대의 기록자들이 옮겨 적은 한문일 뿐,
당시 수로왕의 말을 수식으로 옮기면 해석이 또 달라진다.
"1" - "3=3" - "7" : "1" - "7"
우리는 이 도식에서 결국 1은 3이라는 수를 디딤돌로 해서 7을 만드는 기수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1과 7의 불가분의 관계를 오늘 우리들의 편의대로 설정하자면 '수로왕의
풍수설'이라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수로왕 스스로의 생각으로 이룬 풍수적 기반이
라기보다 그 이전의 선조들이 쌓아왔던 경험이 그를 통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1과 7의 필연적인 연결에 대해서는 차차 야쓰시로(일본말로 8이라는 숫자를 가리킴) 지역
이 지켜낸 유산들이 입증해줄 것이다. 이쯤에서 일본 최초의 왕도가 자리잡았던 야쓰시로로
돌아가자.
야쓰시로에서 맞은 닷새째, 귤 운송용 케이블카를 타고 마루야마 동쪽 신조 터 위로 올랐
다. 환하게 갠 하늘 아래 야쓰시로 일대가 파노라마처럼 훤히 펼쳐져 있었다. 나침반과 지도
로 위치를 확인한 다음, 그 곳에서 서북쪽을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가락국의 왕도 김해가
같은 방위에 있고, 내 가족이 있는 서울도 그 끝에 있다.
인간이란 참으로 묘해서 그토록 절박한 삶을 살다가도 마음 한구석에 고향이 실리는 순간
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유유하고 오붓한 심사가 되어 절로 시인이 되는 것이다. 어머니
의 어머니, 나의 머나먼 할머니가 묻힌 곳일지도 모르는 야쓰시로 외곽에서 30년 전에 쓴
시 한 편을 떠올렸다.
꾸불꾸불한 밭이랑을 타고
김매고 있으려면
바람이 살금 와 속삭이고 간다.
"얘, 그만 쉬어라.
나하고 같이서 나비나 쫓자꾸나."
꾸불꾸불 밭이랑 위
해는 아직 높은데,
이 산에서 뻐꾹
뻐꾹새는 진종일
뻐꾹뻐꾹 놀아먹구...
김을 맬 밭이랑은 꾸불꾸불 남았고
땀 밴 목덜미엔 흙덩이가 말라가고,
이젠 그만 놀까보다 호미자루 놓고보면
앞서서 김을 매는 어머니 뒷모습
조그만 모습.
바람아, 너나 실컷 놀아먹어라
뻐꾹새야, 너나 실컷 노래 불러라.
꾸불꾸불 밭이랑은 아직 아직 멀고
어머니 조그만 뒷모습 따라
호미를 잡았다. 다시 불끈 쥐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마침내 정상에 올랐을 때는 중천의 해가 한풀 꺾여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만의 오붓한 시간을 막 즐길 참이었다. 그때 일흔 살 쯤 돼 보이는 노신사가 말
을 건네왔다. 험한 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나이에 산행을 거뜬히 해낼 수 있다는 사실
이 부러웠다. 그는 정년퇴직한 지방공무원으로 이 일대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나의
탐사에 좋은 안내자가 되어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 신성에 옛날 성벽의 흔적 같은 것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오, 여긴 토성이라 일러온 걸요."
성벽이 남아 있을 리 없다는 어투였다. 나는 그날도 여왕의 궁터로 추정한 마루야마의 정
상을 밟지는 못했다. 지형도상으로 보면 겨우 1백44m 높이의 성터건만 그야말로 난공불략
의 요새처럼 발길을 막고 있었다.
궁터 '마루야마조'가 세상을 꺼리는 것일까. 세상이 궁터를 꺼리는 것일까? 몇 번의 산행
을 통해 나는 답을 내리게 됐다. 마루야마조를 꺼리는 것은 이곳 주민들이라고, 그리하여 정
상으로 이어진 길이 수풀로 뒤덮이면서 길을 사라지게 한 것이라고.
하지만 설령 산길이 아주 끊어져 있을지라도 어떻게 해서든 궁터를 찾아내야 했다. '일본
의 고대황도 탐색작전' 기점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다음날은 신조보다 더 마루야마조
에 인접한 성터인 구라가케조 쪽으로 오르기로 하고 야쓰시로 신사의 서쪽 모퉁이를 따라
산길을 올랐다.
확신을 갖고 내디딘 걸음이니 딱히 서두를 것도 없었다. 나름대로 코스를 정하고 별생각
없이 얼마간 산을 올랐을 때였다. 작은 사당 하나가 보였다. 경내에 들어서자 걸맞지 않게
큰 석비가 시선을 붙들었다. 잘 다듬어진 화강석에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
었다.
황국최초백목산령부사
'천황의 나라' 황국은 패전 전까지 일본인이 자국을 일컬어온 말이다. 그런 까닭에 비문을
그대로 풀이하면 '백목산 영부사는 일본 최초의 신사'가 된다. 화강석 뒷면에는 '대정 9년 5
월'이라는 햇수가 새겨져 있었다. 저들의 대정 9년은 서기로는 1920년에 해당된다. '고코쿠
'라는 명사 또한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 최초의 신사'임을 알리는 10자의 한자를 화강석 깊이 새겨넣은 연유는 무엇일까?
어느 구석진 마을보다 더 규모가 작고 낡은 사당 앞에 걸맞지 않게 우뚝한 석비를 세운 사
람은 근거를 어디서 얻었을까? 그리고 이 고장 사람들은 어떤 확신으로 그의 주장을 받아들
이게 됐을까? 의문은 꼬리를 물었지만 나는 1천7백 연도 더 전인 과거의 한 모퉁이에 겨우
서 있을 뿐이었다.
1과 7의 필연적 결합
돌비석을 대하는 순간 흥분된 마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이글을 함께 읽어가는 독자라면 공
감했을 줄 안다. 흥분이 큰 만큼 여왕의 궁성 터를 찾는 일이 급해졌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곳이 생겼다.
구마가와의 급류가 쉴새없이 퇴적하여 금싸리가 야쓰시로 평야를 이루고는 시라누이의 바
다를 만나는 어귀에 우뚝 솟은 산 하나가 있다. 산줄기에 8개의 옛 성터가 모여 있다는 '핫
초야마'가 그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 중 일곱 성은 흡사 마루야마를 에워싼 듯한 형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무라야마 정상에 있을 성을 1이라 한다면 에워싼 일곱 성은 7이라는 숫자가
되고, 이것은 수로왕의 정도 풍수설에 걸맞은 지세가 된다. 수로왕의 왕성에는 일곱 봉우리
를 가진 칠산이 서남쪽을 두르고 있다.
어째서 우리는 수로왕의 '1과 7'의 풍수설을 일본 옛 왕도에 적용하려 드는가?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수로왕이 한반도 남부 낙동강 어귀에 강력한 고대왕국을 건국한 것
은 단순히 토착 세력의 규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를 천강케 하고 군림할 수 있도록 해준
어떤 불가사의한 힘을 업고서였으리라는 추측에서 실마리를 푸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
다.
말하자면 가락국 건국이라는 역사는 현상적으로는 수면 위에 떠오른 빙산의 일각일 뿐 그
밑에 더 큰 힘이 잠겨 있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더욱이 배경을 이루고 있는 힘의 발상
지는 드넓은 바다다. 힘의 교류는 바다에서 바다로 이어졌고, 그를 통해 유입된 새로운 문명
은 곧바로 강력한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는 수로왕 역시 막강한 바다의 힘을 의식하고 활용한 군주라 할 수
있다. 그런 수로왕임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는 여전히 황금알 신화 속의 주인공 정도로 막연히 뇌리를 스칠 뿐이다.
사람들은 수로왕 이야기를 접하면 이렇게 묻느다. 어찌하여 왕은 선주민의 딸을 왕후로
삼지 않고, 굳이 머나먼 이역 땅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신부를 고르려 했던 것일까? 아유타
국의 공주는 무슨 사연으로 두 달이나 걸리는 꽃가마 항해를 감행하게 되었을까? 나 역시
초기에 이 문제를 놓고 같은 질문을 반복해야 했다. 그리고 나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꽃가마 뱃길은 바로 군주의 저력을 입증하는 해상 퍼레이드였다!
가락국 건국은 이 무렵 한반도에서 패권을 잡고 있던 신나라 백제, 고구려 등 고대 왕국
의 건국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육지에서 바다로 이어진 힘
의 결집이며, 해상을 제패한 집단의 힘이 드러난 것이었다. 따라서 가락국을 출현케 한 힘의
흔적을 만나려면 어쩔 수 없이 바닷길을 나서야 했고, 또한 1과 7의 필연적 결합에 대한 현
장탐사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두 개의 숫자가 일본 최초의 고대 왕국 야마이의 왕도에도 적용됐는가를 묻는 일은,
곧 이 지역이 가락국 건국주의 배필이 타고 간 뱃길에 해당되는가 아닌가를 묻는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난공불락의 마루야마 정상을 내 발로 밟는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일본어의 '마루'는 둥글다는 뜻인데 이름대로라면 둥근 산이어야 한다. 그러나 먼
발치에서 바라본 산의 정수리는 이름에서 밝히는 둥근 산과는 영 다른 모습이었다. 대패로
밀어낸 듯 편편했다. 이를 확인하는 순간 한 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뭔가 함정이 있으리라는
예감이 강렬하게 솟구쳤다. 이미 마루야마 중턱에 이르러 정상에서 옮겨왔다는 이나리 신사
를 만나지 않았던가.
이때 이나리가 '나으리'로 들렸던 내 귀에 마루야마의 마루도 '마루 종'의 뜻으로 들리는
것이었다.
'종'을 한자 사전에서 찾아보면 '마루 종'이라는 해석과 함께 '신이 있는 집, 종묘, 사당의
뜻', '일의 근원', '우두머리'등등의 풀이가 나온다. 즉 '근본'이라는 뜻의 마루인 것이다.
그러므로 핫초야마에 있는 여덟 개의 봉우리 가운데 우뚝 솟은 이 산의 이름이 '마루'라
는 것은 산 위에 궁성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루
종'을 '둥근 환'으로 바꾼 것일 게다. 야쓰시로의 시로를 같은 발음인 대로 교묘히 바꾼
것처럼...
그날 오후 해가 산그늘을 붉게 물들일 즈음, 마침내 마루야마 정상을 밟았다. 마치 '황국
최초신사'라는 글귀를 새긴 돌비석의 영험한 기운에 이끌려 닿은 곳이기라도 한 것처럼 두
손을 모았다.
산정에서 바라본 마루야마의 원망은 과연 뛰어났다. 야쓰시로 일대의 해안선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산정은 동서 약 80m. 남북 40m쯤의 펀펀한 대지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서쪽
으로 치우친 곳에 5m와 3m 방형의 대지가 흙으로 잘 돋우어져 있고, 한가운데에는 원추형
으로 쌓아올린 돌무더기가 솟아 있었다.
아하, 이것이 바로 여왕 비미호의 궁궐 터인가! 법열은 아니어도 역사의 크나큰 범주를
돌다보니 이런 기쁨을 만날 수 있는 건가! 그날의 감회를 떠올리며 새삼 상기되는 기분을
여러분은 충분히 이해해줄 것으로 믿는다.
대진 분명히 황토흙을 다진 것이었다. 토박이들이 증언하 대로 토성이던 것이다. 토성이
라는 말이 나오면 다시 무대는 가락국의 왕도 김해로 옮겨질 수밖에 없다.
서기 42년에 비로서 나라를 세우고 가락이라 하였으며, 찐 흙으로 왕도의 성을 만드니 지
금도 옛터가 그대로 남았느니라.
수로왕릉의 역사적인 "숭선전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또한 수로왕의 풍수설에 이어 "삼국
유사"에 초록된 "가락국기"에도 왕성 축조과정에 대해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즉 둘레가 1천
5백보 되는 외곽성은 비가 적은 늦가을에서 겨울철에 쌓았다는 것, 그리고 오늘날의 흙벽돌
로 여겨지는 증토를 사용했다는 내용이다. 증토란 흙의 물기를 증발시켜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가락국의 왕성은 흙벽돌로 이루어진 토성임이 분명해진다. 그러고 보면 "삼국지"
가 여왕의 궁실을 일컬어 '성책을 엄하게 설하여'라고 언급한 것도 맞는 말이다. 즉 방어시
설은 흙으로 터를 다진 후 둘레에 나무로 울타리를 쳐 빈틈없도록 했다. 사람들은 이것을
축성의 종류로 분류하여 '토성'이라 불렀다.
어쨌거나 야쓰시로 상륙 닷새 만에 탐색작업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 셈이었다.
여왕릉을 찾아
연대를 밝히지 않은 채 "삼국지"는 여왕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무덤 크기의 순장한 노비들
의 수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비미호가 죽으매 지름이 백여 보나 되는 큰 무덤을 만들었으니, 노비 백여 명을 순장하였
노라.
이 증언에서 수로왕릉의 크기와 유사한 수치를 발견하고, 일본 최초의 고대 왕국 야마이
가 야쓰시로임이 분명하다면 그곳에서 대작이라는 여왕의 무덤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
했다. 지름이 1백 여 걸음되는 원형무덤을 언급하기 전에 수로왕의 무덤에 관한 "삼국유사"
의 증언부터 들어보자.
마침내 궁궐 동북쪽 평지에 왕릉을 만들었으니 1장 높이에 둘레가 3백보 되는 곳에 이를
장사하였노라.
길이의 단위로 쓴 보가 두 기록에서 같은 측정 단위라면 수로왕의 무덤이나 비미호 여왕
의 무덤은 둘레가 같은 원분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설명할 것도 없이 "삼국지"는 여왕릉의
크기를 지름으로 나타낸 것이었고 "삼국유사"가 초록한 "가락국기"는 원주로 표현한 차이가
있을 뿐 같은 크기의 원일 수밖에 없다.
현존하는 수로왕릉은 임진왜란 때 화를 입고 복구한 것이어서 원래 크기라고 볼 수는 없
지만, 그 정도 규모의 무덤이면 야쓰시로 평야 어디에선가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고 이틀을 돌아다녀도 그럴 만한 곳은 눈에 띄지 않았다. 결국 향토
사학자 미노다를 찾아 묻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선생님, 야쓰시로 지역의 고분들을 좀 살펴보고 싶습니다."
일본에 온 지 이레째 되는 날 밤, 선생 댁을 방문하여 이런 부탁을 드렸다.
"글쎄요... 최근들어 많이 파괴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젊었을 때만 해도 무척이나 많은
고분들이 지금 묘켄구 북쪽 강변을 따라 이어져 있었지요."
이렇게 말하면서 미노다 선생은 지도를 한 장 꺼냈다. 1946년 그가 손수 그려 등사한 지
도였다. 굳이 제작연도를 확인하지 않더라도 누렇게 탈색되고 나달나달한 종이 모서리가 지
나간 세월을 대충 말해주는 듯했다.
다음날 빛바랜 지도를 고이 접어 품에 넣고는 묘켄구 고분 지대를 향해 신바람나게 페달
을 밟았다.
하지만 이를 어쩌랴! 국도 3호선이 이 지역을 관통하면서 집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수로
와 농작지를 개량하는 불도저가 낮이나 밤이나 강변 쪽 땅을 가로질러 갔다. 게다가 이곳
지리에 익숙지 못한 내 눈도 한몫 거들어 지도는 휴지조각에 불과하였다.
이런 상황에는 상세한 지도가 있더라도, 또 여왕릉이 지름이 1백 보나 될 만큼 거대한 것
이라도 그것을 찾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페달을 계속 밟았다. 여왕릉은 어딘
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국도 3호선을 따라 좀더 멀리까지 가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귀신의 돌집'이라는 이름의
고분 석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날이 어두원진 데다 몸도 피로하였기에 아쉬움을 남긴 채
일단 돌아섰다. 다음날은 정말 운 좋게도 '일본청'(구름 한점 없는 날을 그들은 이렇게 부른
다)을 만끽할 수 있는 기후였다. '귀신의 돌집'을 주의깊게 살펴본 다음 방향을 북쪽으로 잡
았다.
세 갈래 길 모퉁이에 수령이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녹나무가 서 있고, 그 뿌리에 석판
이 엎어져 있다. 들여다보니 사당인데 두장의 석판으로 문을 삼은 것이었다.
석판은 '귀신의 돌집'과 같은 석질이었다. 사당 입구 오른쪽에 흐릿하나마 조각한 흔적이
보였다. 보살상 같은 얼굴에 보석으로 꾸민 왕관을 쓰고 있었고, 주석 장식을 달았는데 고리
는 암만 보아도 두 마리의 뱀이었다.
"누굴 모시는 사당인가요?"
사당 건너편에 사는 한 할머니에게 인사드리며 우선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아, 고미도상 말인가요? 묘켄 님과 함께 온 신이지요, 내가 듣기로는 여기서 방향을 보고
묘켄구 터를 정했다고 해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묘켄 님과 함께 온 신! 그때 나는 여왕릉의 어귀에 서 있었던 것이
다. 노인의 말투로 보아 묘켄 님도 이고장 사람이 아닌 딴 곳 출신이라는 뉘앙스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덤에 손대지 마라
여왕의 궁터를 찾는 일은 또 하나의 가설로부터 출발했다. '야쓰시로 어디엔가 지름이 1
백 보 되는 거대한 여왕릉이 있다. 그리고 그 능은 여왕의 궁터인 마루야마성 동북 15도선
위에 있을 것이다.'
'동북 15도'라는 방위를 궁터 찾기의 주요 단서로 설정할 수 있었는 데는 며칠 전 사당
건너편 집에서 만난 할머니 덕이 컸다.
"아, 고미도상 말인가요? 묘켄 님과 함께 온 신이지요, 내가 듣기로는 여기서 방향을 보고
묘켄 궁의 자리를 정했다고 해요."
말하자면 '고미도상'은 여왕릉의 소재를 밝혀준 스승이었다. 방위 담당신이 모셔온 묘켄에
대한 얘기는 뒤로 미루기로 하고, 어째든 탐사를 거듭하는 가운데 실감한 사실은 여왕의 유
흔을 찾으려면 정확한 방위를 파악해내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여왕의 조상이 바닷길로 항진해온 집단이므로 방위에 관한 한 오늘날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지식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감지하게 됐다.
실마리를 풀어갈 힌트는 또 있었다. 궁성을 쌓아올린 소재가 수로왕의 토성과 같은 흙벽
돌이었고, 능의 크기도 수로왕릉과 비견할 만한 것이라면 가락국의 왕성과 왕릉의 방위관계
를 여기에서도 적용해볼 만했다. 이미 나는 몇 해에 걸쳐 답사한 김해 땅에서 수로왕릉은
"가락국기"가 기록한 대로 왕성의 동북 쪽일 뿐 아니라 정확히 15도 선상에 있다는 것을 이
미 확인한 바 있다.
출발점을 일단 레이후샤로 잡았다. 그곳을 통해 오르면 마루야마성 마루턱까지 보다 수월
하게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후샤를 끼고 귤밭 울타리를 돌아 동북쪽으로 한참을 오르
는데,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다. 히가시가타초와 가미가타초의 경계선쯤이었다.
서둘러 쌍안경을 꺼냈다. 동북 15도를 겨냥하여 쌍안경의 시야를 좌우로 옮겨보았다. 대상
을 9배로 근접시키니 나무 숲이 눈에 들어왔다. 초점을 조금씩 이동시켜보았다. 얼마가 지났
을까? 하나의 윤곽이 렌즈에 뚜렷이 잡혔다. 순간 고동치는 흥분감에 휩싸였다.
"아니, 저건..."
울창한 노목들이 짙은 그늘을 만들었지만 그 윤곽은 분명 작은 구릉을 이루고 있었다. 능
선이 무성한 잎에 가려 이따금 끊어지긴 했지만 그런대로 부드러운 활 모양의 곡선을 드러
내고 있었다. 지형도로 확인해본 결과 마루야마성과는 거의 동북 15도 방향이었다. 지도의
쌍안경을 가방에 집어넣고 뛰다시피 언덕을 내려왔다.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도로로 뛰어 내
려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히가시가타초와 가미가타초의 경계쯤에 큰 나무들이 서 있는 곳으로..."
"아하, 자우스야마 말이군요?"
기사는 목적지를 다 말하기도 전에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렇다. 그곳은 우선 산으로 불릴
만했다. 들판을 달려 단숨에 닿은 자우스산. 거기엔 야쓰시로 사적위원회 이름으로 세워진
표지판 하나가 있었다.
사적 자우스야마 고분, 야쓰시로 지역 최대의 원분. 분구는 2단으로 구축되어 남쪽에만 민
가가 몇 호 있고, 봉토 일부가 벗겨진 것을 제외하고는 드물게 완전한 원형을 지탱해온 아
름다운 자우스형을 하고 있어서 '자우스야마'라 부르게 되었다. 분상에는 아리마 소토다 양
가의 묘지, 하단 서남부에는 아리마 가의 시조 겐반토우와 그 종자의 무덤이 있다. 하단은
귤밭과 남쪽 고목 숲에 덮인 웅대한 소산이다. 야쓰시로 사적 위원회
눈이 번쩍 뜨였다. 적어도 이 산은 무덤과 관계가 있는 곳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와 닿았
다. 마음이 다시 조급해지면서 우선 동네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산이든 큰
산이든 오르는 길은 민가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그러니 표지판에 나타난 '남쪽
의
민가'를 택하는 것이 도움이 될 성싶었다.
"저기... 이제 막 신축할 집 보이지요? 그쪽으로 가보세요."
동네사람이 가리키는 곳은 예상했던 대로 정남 방향을 한 민가 옆길이었다. 나는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이 되어 노래를 흥얼거리며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중턱쯤 올랐을까, 오래된
표찰과 함께 정방형으로 돌을 쌓아올린 무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글을 읽어보니 대략 이
런 내용이었다.
6백 년 전 일본의 천황가가 남조와 북조로 갈려 싸우던 무렵, 규슈 지역을 평정하러 온
왕자 출신의 군 우두머리가 있었는데 이를 위해 전사한 아리마 가 시조의 무덤이다.
다시 길을 따라 오르자 또 하나의 묘지가 나타났다. 두 집의 가족묘지라고 되어 있는, 지
름 10m쯤 돼 보이는 원분의 봉우리다(일본에선 묘지를 쓸 때 뼈만 묻기 때문에 비석 하나
의 넓이로도 족하다). 내 걸음으로 직접 측량한 결과 원분의 기단이 65m쯤 된다는 것을 알
아냈다. 아울러 "삼국지"가 증언한 대로 '경백적'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탐사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으로 잠을 설쳤다. 그리고 비미호 여왕의 왕릉
이 겪은, 1천7백 년이 넘는 세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추리를 하게 되었다.(비미호
여왕의 서거 연대는 서기 247년 무렵으로 추정하는 것이 관련 학계의 정설이다)
첫째, 비미호 여왕은 그녀의 후손이 혼슈로 진출한 후에도 계속 추앙받았는데, 어느 시기
에 이르러 어찌된 영문인지 갑자기 금지대상이 됐다.
둘째, 고장 사람들은 이 능을 지키기 위해서 주변에 나무를 심어 산처럼 보이게 했다. 그
모양이 일본의 차 도구인 자우스를 닮았다 하여 산 이름이 됐다.
셋째, 그후 벼농사가 발달함에 따라 보다 많은 농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 능을 침범하려
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넷째, 그래서 일왕가를 위해서 전사한 아리마의 무덤을 산 속에 마련하여 그의 공적 덕으
로 비미호 여왕의 능을 수호할 수 있다. 즉 그녀가 아리마 가의 시조였기 때문에 그의 후손
과 인척의 가족묘지를 왕릉 위에 마련, 왕릉을 지켜왔고 덕분에 지금까지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묘켄님의 신통력
비미호의 궁터로 추정되는 자리에서는 무성한 나무와 풀덩굴이 방어진을 칠 뿐, 구마가와
를 내려다보는 전망 이외에 별다른 '징조'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찰흙같이 굳게 다겨진 대지만이 그 옛날 이곳에 성책을 둘렀을 가능성을 점치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옛날 어떤 신앙의 대상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돌무더기 하나를 발견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으리 신사로 보는 이나리 신사의 옛터가 바로 여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궁터를 찾아내는 일에 더 이상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쉽게 자리를 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 신통력 있다는 묘켄님의 방위를 믿어보자.
그리하여 동북 15도의 방위를 더듬어 찾아낸 것이 이제부터 언급하려고 하는 자우스야마 고
분이다.
알고 보니 자우스야마 고분은 이 지역 최대의 원형무덤이었다. 고분을 좀 더 세밀히 살피
기 위해 다음날 자전거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입구에 다다르자 수확기에 접어든 벼이삭
들이 황금물결을 이뤘는데, 마침 둔덕이 있어 올라서 보니 무덤이 원형 2단으로 구축된 것
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감회를 채 풀기도 전에 일단 사진부터 찍어야 했다. 그렇게 황급히 촬영을 끝내고 자전거
를 둔 아래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였다. 나는 기겁했다. 중년쯤 되어 보이는 건장한 농부가
시퍼런 낫을 거머쥐고 이쪽을 노려보는 게 아닌가. 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한발 한발 내게
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때 내가 올라섰던 둔덕은 고분 동쪽에 있었고, 등 뒤로 논들이 이어
져 있었다.
'일단 비키자!'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를 피해 뒷걸음치자니 사방에 논이 덫으로 펼쳐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만약 그가 시퍼런 낫을 휘두르며 덤벼든다면... 한데 이상한 일은 다리
가 후들후들 떨리는 와중에도 나는 카메라를 케이스 속에 감추는데 급급해 있었다. 드디어
자전거를 사이에 두고 다가서는 농부와 등거리를 이룰 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날 찾는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당신이었군요. 어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마침 집을 비웠을 때 오셔서요."
카랑카랑하면서도 힘 있어 보이는 음성이 들리더니, 땅에서 솟아난 듯 자그마한 체구의
노인이 내 팔을 서슴없이 이끄는 것이었다.
"누추하지만 저희 집으로 갑시다. 차라도 한 잔 나누어야지요."
죽음의 문전에서 거짓말같이 나를 구해준 노인의 이름은 아리마 겐조라 했다. 여든이 넘
었다는데 아무리 보아도 환갑 노인이었다.
"손님은 이 산의 내력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게로구먼. 내가 이 곳에 집을 지은 지는 20
년이 좀 넘었어요. 당시 이 마을엔 내집 한 채 뿐이었다오. 묘지 때문에 문제가 생겼거든..."
이어지는 노인의 말은 심해지는 사투리 억양으로 점점 알아듣기가 어려워졌다. 뜨문뜨문
이어지는이야기 중에 겨우 알아들은 다음 대목에 귀가 솔깃했다.
"...그런데 옛날에는 이 자리에 배전이 있었다고 해요."
"배전이라뇨? 어떤 모양이었나요?"
"아냐, 나는 보지 못했지. 공터가 되어 있었던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무릎을 쳤다. 아차, 바로 이 지혜였다. 물론 이들에게는 배전이 아리마
가의 시조를 위한 것으로만 통할 뿐이었다. 공터가 되어버린 배전! 하지만 고분의 한쪽 모
서리를 빌린 무덤을 위해서 그토록 넓은 규모의 배전이 과연 필요했을까? 게다가 그의 집은
무덤의 정남쪽에 있고, 그의 조묘는 서쪽에 치우쳐 있다고 했다. 결국 나는 이렇게 추정했
다.
'이 공터는 여왕 비미호를 이곳에 묻었을 때 참배하는 사람, 시묘하는 사람들이 예배드리
는 장소로 쓰였을 것이다.'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노인이 나타난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내게
필요한, 아주 중요한 '단서'까지 제공해주었다. 2천 년 동안 매몰된 채 오직 침묵으로 일관
해온 여왕 터를 탐사하며 받은 인상은,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한국에서 온 방문객을 안내하
고 수호해주고 있다는 강렬한 예감이었다. 다음날에도 대화는 계속됐다.
"어제 어르신 댁으로 오는 길에 본 것인데 궁금해서요. 원분 가장자리에 두세 발짝 간격
으로 통대나무가 세워져 있더군요."
원래 통대나무는 무연묘를 표시하는 것이다. 연고지가 없는 시신일 경우 무덤 위쪽에 창
모양으로 뾰족하게 굵은 대나무를 세워놓는다.
"아, 그 묘는 우리 시조님과 함께 전사한 종자들의 무덤이라오."
그가 막힘없이 대답했지만 나의 생각은 달랐다.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대나무의 배치는
'순장한 노비가 1백여 구였다'고 증언한 "삼국지"의 기록대로, 여왕을 이곳에 묻었을 때 생
매장한 1백여 명의 시신을 알리기 위해 세운 표지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세 걸음마다 한 사람씩 묻으면 지름 1백보의 무덤 둘레에 1백여 명을 묻을 수 있지 않겠
는가?
결국 이러한 추정이 확실한 것이라면 '비미호 죽으매, 크게 무덤을 만들었으니'에 이어진
"삼국지"의 증언은 그로부터 1천7백 년이 지난 오늘 바로 그 땅에서 어김없이 확인된 셈이
었다.
여왕은 무녀였다.
옛 기록은 일본 최최의 왕인 비미호 여왕에 관해 다음과 같은 정보를 남겼다. 기록과 함
께 여왕의 등극 경위에 대해 36자의 한자로 증언한 "삼국지" "위지"의 내용을 간략히 설명
하면 이렇다.
왜국은 본시 남자로 왕을 삼았는데, 여왕이 왜국 땅에 머문 지 칠팔십 년쯤에 난리를 일
으켜 몇 해에 걸쳐 서로 싸우다가, 마침내 모두가 함께 한 여자를 내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이름을 비미호라 하였더라.
당시 일본 땅에는 본시 남자를 왕으로 삼는 부족국가가 있었다. 그런 시기에 여왕 비미호
가 왜지에 와서 살기 시작한 것이다. 여왕이 온 지 70-80년 뒤 왜지의 여러 부족국간에 서
로를 치려는 난리가 여러 해에 걸쳐 계속됐다.
그러다가 그들은 한 분의 왕을 함께 받들어 탁월한 그의 통치력하에 안정과 평화를 누리
자는 의견들을 모으게 됐고, 여기에 뽑힌 왕이 '비미호'라는 이름의 여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왕 비미호가 일본에 온 지 70-80년 뒤라는 것은 오늘 우리의 연대로 따
지면 언제인가?
'이와나미신쇼'라는 일본의 권위있는 문고판 가운데 이노우에가 쓴 "일본국가의 기원"이
라는 책이 있다. 당시 동경대 국사학과 교수였던 저자가 일본국의 형성 과정에 대해 쓴 이
책은 매년 판을 거듭하면서 독자의 꾸준한 지지를 받아왔다.
이 책에는 '야마다이국 연표'라는 게 실려 있는데, 거기에는 왜국의 대란 시기를 서기 176
년에서 183년으로 잡고 있다. 관계 문헌들을 대조해서 밝힌 이 연대에 따른다면, 비미호가
일본에서 형성된 고대 왕국의 첫왕으로 추대된 것은 서기 183년 즈음의 일로 짐작된다. 한
편 여왕 비미호에 대해서는 '귀도'라는 말로 시작했다.
귀신스러운 도를 섬기며 능히 무리들을 미혹하게 하였다. 나이가 과년하도록 남편이 없었
으며 남자 동생이 있어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보좌하였더라.
결국 여왕 비미호가 서로 싸우기를 계속하던 남자 우두머리들의 맹주가 된 것은 여왕이
귀도를 섬겼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귀도란 무엇인가? 글자의 뜻만 새긴다면 '귀신 도깨
비를 섬기는 신앙'으로 해석되지만 과연 그 뜻일까?
왠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은 "삼국지"는 왜인들의 역법에 대해 '그들의 풍속에 옳
은 역을 모른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른 역을 가리키는 '정세'라는 말은 한족의
역법으로 일컫는 태음력이며, 이에 비해 일본인은 태양력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귀도는 말하자면 한족의 것이 아니었고 저들로서는 또한 이해도 할 수 없는 신앙이었다.
그래서 후대의 사학자들은 급기야 귀도를 섬긴 여왕이라 하여 무당이었다고 잘라 말한 것이
다. 가령 이노우에는 그의 저서 127쪽에 다음과 같이 실언하고 있다.
비미호는 무녀였다. 황후도 또한 탁선의 경우를 보면 무녀로 나타난다. 비미호는 조선과
관계를 가진 여성이었다.
'귀도'라면 아프리카 원주민이 환호하는 미개 신앙보다 더 그로테스크한 형태가 먼저 연
상된다. 그렇다면 이노우에 같이 공인된 석학이 무녀라고 단정할 때 대개의 사람들은 당연
히 무당을 연상하고 미신스러운 여자 점쟁이쯤으로 비켜가고 말 것이다.
"삼국지"는 유나 불이 아닌 풍류도 등 한국의 고유신앙에 대해서도 ;귀도'라 칭하였다. 이
노우에 주장에 대한 유감은 이뿐이 아니다. 그는 같은 말투로 '비미호는 주장에 대한 유감
은 이뿐이 아니다. 그는 같은 말투로 '비미호는 조선과 관계를 가진 여성이었다'로 옮길 수
밖에 없는 말을 서슴없이 활자화하고 있었다. '관계를 가지다'라는 구절은 일본어의 관습상
남녀가 아주 진한 인간관계를 가질 때 쓰는 말이다. 단적으로 말해 '관계한다'는 '성 행위
를 한다'는 의미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그의 발언은 '여왕 비미호는 한반도와 아주 짙은 관계, 즉 혈연
관계를 가졌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크게 지나침이 없다.
무릇 세상의 이치는 자기가 던진 창에 자기가 맞는 법이다. 이런 유감스러운 내용들이 결
국엔 나의 한일 고대사에 대한 확신을 더욱 다지게 한 요인이 되고 말았다.
물론 일본 사학계를 대표하는 이노우에의 말을 따지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고대사 문헌과 그 역사현장을 일일이 두 발로 디디며 분명하게 얻은 확신
이 있다.
'일본 최초 고대왕국의 왕은 한반도 공주였다!"
이같은 확신을 갖게 된 데는 오늘의 일본 사학계도 본의 아니게 일조한 셈이다. 이런 까
닭으로 그들의 우월주의 때문에 무심코 내놓았을 '관계설'은 자못 의미가 크다.
사라진 왕녀와 왕자
꽤나 끈질기다 하겠지만 '조선과 관계를 가졌다'는 대목을 저술로 남긴 일본 사학계의
발언을 좀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1975년 9월30일 밤 나는 가락국의 옛 수도인 김해
를 완전히 벗어나고 있었다. '부산 - 규슈'행 페리에 실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갈라놓은
남쪽 바다를 달려 불과 몇 시간 후에는 일본 고대문화의 시발지인 규슈 야쓰시로 역에 발을
디뎠다.
나를 여기까지 안내한 "삼국지"의 표현대로라면 '비로소 한 바다를 건너다'의 주인공인
위나라 사신의 행적을 따른셈일 테고, 앞서 이노우에의 "일본의 기원"의 구절을 빌린다면
다분히 '조선과 관계를 가진 행위'로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일본 최초의 왕으로 한족의 사서에 거듭거듭 그 이름을 남긴 여왕 비미
호는 한반도의 고대와 어떤 혈연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예상된다.
이노우에의 '야마다이국 연표'에 의하면 여왕 비미호의 등극은 서기 183년의 일이다. 이
해는 가락국 수로왕의 즉위142년이며, 2대왕이 된 거등 왕자가 '군사와 나라 일을 맡아서
다스렸다'라고 증언하는 김해 김씨 보첩(족보) "편년 가락국기"에 따른다면 거등왕 섭정 20
년의 일이 된다.
어쨌거나 여왕 비미호의 등극은 수로왕과 허 와후가 생존해 있던 시기인데, 이들 사이에
는 무려 10남 2녀가 있었다고 보첩은 증언하고 있다.
왕후는 열 아들과 두 딸을 낳았으니 일곱 아들은 모두 처자를 떠나 칠불암에서 불도를 닦
게 되고 한 이들은 거칠군이 되었으며 한 딸은 석탈해 맏아들의 비가 되었더라.
수로왕 슬하의 열두 명 혈육에 대해 언급한 이 기록은 다음의 두 가지 의문을 갖게 한다
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수로왕의 왕자들이 세속을 버린 일은 왕권 분규와 연관된 것이 아닐까 추정하더라
도 기록에 등장하는 왕자의 숫자가 모두 아홉 명이라는 점이다. 거등왕과 거칠군, 그리고 출
가한 일곱 왕자를 더해 아홉 명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둘째, 두 명의 왕녀 중 한 사람은 탈해왕의 태자, 즉 신라 9대 벌휴왕의 아내가 됐다. 그
런데 나머지 한 명의 왕녀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다. 딸 역시 한 명의 행방이 묘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녀 열 명 중 두 명은 과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이어진 기록에서 두 가지 의구심을 풀 어떤 단서를 잡을 수 있
었다는 점이다. 다음 글을 살펴보자.
서기 199년에 즉위한 거등왕은 선견이라는 이름의 왕자가 이 세상이 허무하여 신녀와 더
불어 구름을 타고 떠나매, (거등)왕이 왕도의 강 중에 있는 돌섬에 올라 선견왕자를 부르려
하였으니, 바위에 그 모습을 새겨 '왕초선대'라 속전되는지라.
어쨌든 이 증언은 지금은 전설이 되어 '초선대'(김해시 동쪽 돌무더기산. 옛날에는 강이
흘렀다)의 정취를 한껏 풍요롭게 한다. 전설에서 볼 수 있듯이 초선대에서 불렀을 이름은
다름 아닌 '선견'이었다. 이로써 우리는 수로왕의 나머지 한 왕자의 이름이 선견 왕자였을
것이라는 추리에 근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역사적 근거로 삼기에는 다분히 환상적인 면이 있다. '선견왕자가 신녀와 더불어
구름을 타고 속세를 떠났다'는 내용을 읽은 사람들은 다 같이 '아하, 선견왕자는 환상 속의
주인공이구나!" 하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가락국 초기의 왕계에는 '신녀'라는 신분을 가진
여성이 나타난다.
한 보첩에 의하면 왕의 모후는 본시 신녀로 유면이라 이름하였느니라.
이 기록에서 만나게 되는 신녀는 알고 보면 수로왕의 자리를 승계한 거등왕의 왕후이다.
여기서 말하는 왕이 거등왕의 아들로서 3대 왕위에 오른 '마품왕'이고 보면 그의 모후는
거등왕의 왕후인 셈인데, 이 왕후는 아유타국 공주를 모시고 온 잉신(공주의 혼례에 배행하
는 신하)조광의 딸이다. 그 딸이 본시 신녀였다는 것이 증언의 요지다.
여기서 신녀란 신앙상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혈통과 수행에 의해서 신앙
행위의 주역이 되는 여성을 일컫는다. 이는 오늘날에도 쓰이는 '신내림'이란 단어에서도 쉽
게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일본의 사가들이 서습없이 무녀라고 말한 것은, 즉 신녀를 낮춰
서 말한 것이다. 따라서 "삼국지"가 '귀도'라고 한것도 같은 오해일 것으로 믿는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구름을 타고 떠났더라'라는 마지막 문구는 '선견왕자가 가락국에
남기보다는 신녀인 누님을 따라 함께 가기로 작심하고 배를 탔다'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주목할 숫자가 있다. 서기 183년, 그러니까 선견왕자의 누님인 신녀가 왜지의
왕으로 추대된 해다. 말하자면 선견왕자가 왜지로 들어간 것은 누님이 왕으로 추대된 지 16
년 만의 일이다. 이상의 고대사 증언을 토대로 하여 잃어버린 왕자와 왕녀에 대한 이야기를
종합해보자.
수로왕의 왕녀 비미호는 신녀였다. 그녀는 신녀로 교육받았고 일찍이 왜지로 건너가 그
심령적인 능력이 여러 부족 우두머리들에게 차츰 알려지면서, 마침내 끝없는 상쟁을 조정하
고 그들을 연합해서 다스릴 왕으로 추대되었다.
비미호는 선녀였기에 미혼이었고, 세력이 커질수록 그녀를 가까이 보좌할 역량있는 남성
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드디더 그의 오빠 거등왕이 즉위하던 해에 가락국으로 가서
남동생 선견왕자를 데리고, 구름처럼 바람을 타는 범선에 실려 왜국으로 돌아왔다.
미혼으로 종신한 여왕 비미호가 한 남동생의 보좌를 받아 나라를 다스렸다는 증언은 이미
"삼국지" "왜인전"에서 읽은 대목이다. 이제 남은 일은 수로왕의 딸이며 신녀인 여왕 비미호
가 남동생 선견왕자의 보좌 속에 그의 왕도 야쓰시로 일대를 중심으로 어떻게 왜국을 다스
려갔는가, 이에 대한 역사의 흔적을 바로 그 현장에서 찾아내는 일이다.
5부 불기둥을 가진 나라
'가랏파'는 누구인가
마루야마가 왜국의 왕도 '야마이'의 터였다고 안내한 "삼국지"는 허구가 아니였다. 그 산
은 마치 북두칠성과 같은 일곱 개의 산성을 거느리는 위치에 있었다. 무엇보다 큰 소득은
여왕의 궁실터로 추정되는 흙벽돌 토대를 마루야마에서 찾아냈다는 것이었다.
여왕릉이 비록 자우스산으로 둔갑해 있긴 했지만 다행히 그곳은 대대로 가족묘를 쓰는 일
까지 거듭하면서 크고 온전한 사적 형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세월은 비록 지나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근본 법도는 기울지 않음이로다
왕성이며 왕릉만 보아도 법도의 위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가락국의 건국주가 그러했
듯이 왜국 건국주의 경우에도 같은 법도(규범)에서 이루어진 유흔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됐
다.
그렇다면 야쓰시로와 가락국, 즉 옛 왜국과 한반도는 어떤 관계를 가졌기에 2천 년이 흐
른 지금에도 이렇듯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 지금부터 야쓰시로에서 만난 네 번째 인
물을 소개함으로써 탐사의 실마리를 풀어갈까 한다.
"대를 이어온 토박이예요. 쌀가게 주인이죠. 그리고..."
처음 인사를 나눈 자리에서 오쿠노는 자신을 이렇게 밝히며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
엔 '야쓰시로 문화재 심의원'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대화는 자연 야쓰시로의 문화재에 관
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야쓰시로에는 갓파가 상륙했다는 비석이 다 있더군요."
이 말에 오쿠노는 선뜻 알아 듣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고개를 끄
덕이며 말했다.
"아, 가랏파 말씀이시군요. 여기 토박이들은 야쓰시로를 얏치로라고 말하는 것처럼, 갓파
를 가랏파라고 발음한답니다."
갓파, 한자로는 하동이라고 쓰는데, 그들의 사전을 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달고 있다.
갓파 - 상상의 동물. 수륙 양편에 살며 3-4세 난 어린아이 정도의 크기로 입부리가 뾰족
하며 비늘이 있다. 머리에는 털이 적고 접시처럼 팬 요부가 있는데, 거기에 물이 있는 동안
에는 힘이 세어서 다른 동물을 수중으로 끌어넣어 그 피를 빤다. 오이를 즐겨 먹는다고 한
다.
해설 끝에는 '아이들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은 갓파 때문'이라는 내용까지 곁들이고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내려오는 상상의 동물인 이무기와 유사한 것이었다. 이무기
가 용이 되려다 못되고 물 속에 산다는 전설 속 뱀인 데 비해, 갓파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
긴 데다 입이 뾰족하고 머리가 접시 모양으로 움푹한 것이 다르다. 해설로 미루어보아 갓파
는 '헤엄치기의 명수'로 전승되어옴을 알 수 있었다.
헤엄치기의 명수라! 그렇다면 '갓파'는 바다를 건너온 외래자들 아닐까? 갑작스럽게 출현
한 그들의 용모와 풍습이 자신(왜인)들과 달랐기 때문에 그들의 특징이 과장되면서 긴 세월
을 두고 상상의 동물로 자리잡은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에 골몰하고 있을 때였다. 젊은 오
쿠노씨는 갑자기 생각났는지 무릎을 치며 말했다.
"맞아요. 당신이 봤다는 그 비는 일본에 처음 상륙했다는 가랏파를 기념해서 세운 것이죠.
어디 그 뿐입니까? 어려서부터 들어온 얘긴데 당시 상륙한 가랏파는 무려 3천명이나 되었다
고 하더군요."
그는 가랏파가 최초로 상륙한 곳이 자신의 선조가 대대로 살아 온 야쓰시로라고 힘주어
말했다. 가랏파 3천 명의 일본 상륙! 그렇다면 가랏파는 누구인가? 어째서 그들의 상륙지점
을 기억하려는 석비가 이곳 야쓰시로에 세워져 있는가?
해안가 축제
갓파가 첫발을 디딘 곳이라고 전해지는 도쿠노후치 나루터. 거기엔 두 개의 돌이 잊혀진
옛날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갓파 도래비
이 돌을 가리켜 마을 사람들은 '갓파 돌'이라 불렀다. 기념비엔 다음의 내용이 적혀 있었
다.
어느날 물가에서 놀던 갓파 여럿이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돌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장난을 치지 않겠으니 대신 1년에 한 번은 잔치를 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애
원했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여긴 주민들이 소원을 받아들여 바로 그날(5월18일) 잔치를 벌
이게 됐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오래오래-데라이다'축제이다.
비문의 마지막 줄에는 '소화 29년 6월... 오래오래데라이다 제단'이라고 적혀 있었다. 소
화
29년은 서기로 1954년에 해당된다. 그때까지 두 개의 '갓파 돌'은 그 곁으로 흐르는 마에가
와(전천:구마가와 하구로 들어가는 강줄기) 강물 속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엄청나게 크고 펀펀한 모양의 대리석으로 3백50년 전에는 이 나루와 나카시마(중도:구마
가와의 삼각주)를 잇는 나무다리의 받침돌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 들어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면서 강가에 끌어올려 한 장은 대리석으로 쓰고, 남은 한 장은 기념비로 하여
자세한 사연을 새겨 넣은 것이다.
어쨌든 돌에 얽힌 사연을 묻기 전에 우선 축제 이름에 마음이 쏠렸다. '오래오래 데라
이
다!' 일본 축제의 이름치고는 상당히 이색적인 이름이었다. 비문을 찬찬히 읽어내려가던 중
또 한 가지 궁금증에 빠져들었다. 그 명칭을 표기하면서 하필이면 가다카나로 썼을까? 야쓰
시로시 문화재 심의원이라 밝힌 오쿠노는 이에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야 '오래오래 데라이다'가 가랏파 말이기 때문이겠지요."
일본사람들은 외국어를 표기할 때 히라카나가 아닌 가다카나를 쓰는 것이 상례다. 따라서
히라카나로 쓰인 긴 일본어 문장 안에서도 외국어 표현은 이내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아, 그렇겠군요."
나도 맞장구치면서 입가의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갓파가 말한 '오래오래 데라이다'는 당
신들에겐 외국어가 되겠지만 한국인인 나에겐 모국어처럼 느껴지거든요)
"한국어로 '오래'라는 말은 긴 시간을 뜻한답니다. 말을 반복하여 '오래오래'라고 쓰면 더
욱 긴 시간이 되지요. 뒤에 붙은 '데라이다'는 '되어지이다'와 같은 말로, 특히 한국의 남쪽
지방에선 '데라이'라고 흘려 말하는 경우가 많지요. 또 말 끝에 '다'를 붙여 축원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뻔하지 않습니까? '오래오래 데라이다'를 좀더 사려깊게 해석한다면 '길이길이 영원히
이어주소서!'라고 풀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가랏파가 '이 돌이 닳아서 없어질 때까지...'라고
주문을 한 것도 나름대로 속뜻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나는 직감했다. '가랏파'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야말로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비미
호 여왕과 그의 왕국 야마이의 실체를 밝혀줄 결정적 단서가 되리라는 믿음이었다.
우선 갓파(가랏파)라는 용어의 근원을 캐는 일에서부터 실마리를 풀어나가기로 했다.
일본어는 관습상 낱말 끝이 모음으로 끝나는 경우에는 접미어를 붙여 말의 매듭을 분명하
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벌판을 가리키는 하라의 끝에 파라는 음을 붙여 하랏파
라고 표기한다. 쉽게 말해서 하랏파에서 'ㅅ파'는 말끝을 죄는 역할을 할 뿐 별의미가 없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만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가랏파에서 'ㅅ파'를 빼면 어떻게
될까? 말할 것도 없이 가라라는 원어만 남게 된다. 그것은 곧 가라일 수밖에 없다.
가라는 글자는 가야를 뜻하고, 그것을 후손들이 높여서 부른 말이 가락 아니던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성과였다. 결국 이 고장 사람들은 최초로 자기 고장에 온 외래 집단을 맞은
원주민의 후예일 수 있다. 탐사로 보면 적어도 그들은 가락국에서 온 외래인들을 기억하는
몇 가지 흔적들을 그대로 전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의문들이 남아 있다. 그들은 어째서 '갓파는 중국 방면에서 왔다'
는 기억을 전승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또 하동이라는 표현을 남기게 됐을까?
여왕의 또다른 이름
비문의 기록 가운데 '갓파가 중국 방면에서 일본으로 와서...'라는 대목에 시선을 돌려보
자. 이 문구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방면'이라는 단어다. 일본어나 한국어나 다같이 '
방면'이라는 한자로 표기되는 이 말은 막상 해석에 있어서는 아주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
다. 두 나라의 국어사전을 비교해보면 이렇게 달라진다.
이희승 국어사전: 방면 (1)네모 반듯한 얼굴 (2)어떤 방향의 지방 (3)전문적으로 뜻을 두
거나 생각하는 분야
일본어 국어사전: 방향 (1)향 방각 경향 (2)분야 편
우리는 '방면'이라 하면 어떤 방향의 지방, 즉 지역을 가리키는 뉘앙스가 강한 데 비해 일
본어의 경우는 '향'으로만 쓰일 뿐 애초에 지역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러므로 3천 명의 가랏
파들의 '가라'가 고대의 한반도 남부 지역을 가리키는 '가락'이었다고 해석해도 '중국 방면'
이라는 표현과 어긋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중국 방면은 중국이 있는 쪽, 즉 야쓰시로에서 바라볼 때 서북향 쪽에서 왔다
는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같은 서북쪽 방위에 위치한 가락국으로 이해해도 어색할
것이 못된다.
다음은 '이타즈라 갓파'로 표기되는 '장난꾼 가랏파'로 관심을 돌릴 차례다. 찬찬히 생각
해보면 여기서도 '단서'를 짚어낼 수 있다.
장난꾼으로 해석되는 하동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강의 아이'다. 더욱이 일본인이 전승
해오고 있는 하동은 결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불러일으키는 침입자가 아니다. 전설이나
옛날 이야기에 곧잘 등장하는 그들은 술을 매우 좋아하고, 오이를 즐겨 먹으며, 엉뚱한 장난
으로 악의없이 골탕을 먹이는 이웃집 오빠와 비슷한 이미지로 나타난다(요즘에도 신문의 술
광고에 갓파 한 쌍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갓파가 주민들에게 붙잡혔다'는 사실과 '이 돌이 마르고 닳도록 장난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의 대목에 이르러선, 잠시나마 다음과 같이 스토리를 바꿔 그 옛날을 회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즉, (외지인 가랏파의 힘 앞에 굴복한) 야쓰시로 사람들이 훗날 자신들의 체면을 세어
'(가랏파가)붙잡혔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지난날이 덜 억울할 테니까. 또
한 '마르고 닳도록 (영원히 이어주소서)'라는 가랏파의 맹세 중에서 앞 부분만 재생하여 '이
돌이 마르고 닳도록 장난하지 않겠다'로 바꾸어 전승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가랏파 무리가 이곳에 처음으로 상륙한 어느 해 5월 18일, 그 큰 배에 싣고 온 대
리석(야쓰시로 인근에서는 대리석이 나오지 않는다)을 포개놓고 '오래오래 되어지이다'라는
축원 속에 만세 축제를 벌이는 것을 눈이 휘둥그래진 채 바라볼 뿐이었다.
'오래오래 되어지이다'라고 외친 그들의 축원은 오늘날 마쓰리로 이어지고 있다. 다행히도
가랏파는 왜지에 정착한 이후 새로운 문화, 새로운 나라 만들기에 성공한 집단이었기에 이
들의 축제는 2천 년의 세월을 두고 매년 5월 18일이 되면 강가에 모여 그들이 좋아하는 축
제를 벌이는 것이다(근자에 만난 구마모토 방송국의 한 PD는 "오래" "오래" "데라이다"라고
구분해 말하면서 그가 본 축제 장면을 재연해 보였다).
그러나 축제나 기념비에 얽힌 사연은 말하자면 무형의 문화재일 뿐 역사의 기록으로는 완
전치 못한 민간전설로 돌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지역 사료 중에 기념비에 대해 언급한
기록은 없을까?
야쓰시로에 닿은 지 열흘째 되던 날, 저녁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향토 사학자인 미노다 선
생을 찾아갔다. 그날밤 선생은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지만 묘켄상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묘켄상이 처음으로 상륙한 곳은 '우와야나기'라는 나루였다고 해요. 그리고 지금의 다이
요 소학교 자리쯤에 '아사이' 나루라는 곳이 있어서, 거기에 '야쓰오샤'를 두고 후나다마를
모셔왔지요. 내가 어릴 적에는 부근 땅에서 맑은 물이 퐁퐁 솟아나왔거든. 그분은 '다케하라
' 나루에서 3년간 진좌하시곤 '시모마시키의 지요가미네'에서 70여년 계시다가 묘켄궁으로
옮겼다고 해요."
우와야나기, 아사이, 다케하라, 지요가미네 등으로 자리를 옮긴 햇수가 칠팔십 년쯤 되었
다는 미노다 선생의 말을 듣는 순간 '머무신 지 칠팔십 년 만에 왜국이 서로 난리를 일으켜
'라는 "삼국지"의 증언이 떠올랐다. 전승(미노다 선생의 말)과 기록(삼국지 증언)이 일치하
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난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두 번째 불가사의!
내가 앉은 방석과 선생의 교자상 아래에서 하얀 연기가 김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나의 손은 반사적으로 호주머니 쪽으로 갔다. 왜냐하면 선생 댁 현관문을 두드리기 전 한
동안 못 피울 것에 대비해 문 앞에서 연거푸 담배를 피웠고, 그리고 마지막 한 개비는 입에
대자마자 이내 불을 끄고는 호주머니 속에 넣었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혹시나 담뱃불이 꺼지지 않아서일까? 하지만 담배를 더듬는 손끝에는 아무런 온기도 느껴
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금 전 방안에서 본 백색 연기는 뭐란 말인가? 밤 늦게 대문을 나
서면서 노선생의 부인에게 물었다.
'혹시... 조금 전에 향불을 피운 일이 있었나요?"
"아뇨...??"
부인은 아닌 밤중에 웬 홍두깨 같은 질문이냐는 듯 휘둥그래진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보살로 감춰온 지혜
어느 새 야쓰시로에서 한 달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손길의 부축을
받으며 지낸 나날이었다. 다케하라 신관이 얻어준 자전거 한 대와 지형도 한 장, 그리고 일
제치하에서 8세 때부터 강제로 배워야 했던 일본말이 그나마 잃어버린 고대를 캐내려는 탐
사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길을 묻거나 지방의 내력 등에 대해 알고 싶을 대면 되도록 나이가 많고 인텔 리가 아닌
층을 골랐다(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우월주의와 편견의 눈꺼풀이 두꺼운 법이다). 게다
가 유사시엔 묘켄궁 신관의 보증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큰 힘이 되었다. 날씨마저 청명해
어느 날은 하루 50km 이상 페달을 밟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오기 시작했다. 모처럼 휴식하기에 좋은 날이었
다. 하지만 생각은 여전히 야쓰시로 들판에 가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따라 마시며 그간의 자
료들을 정리하다가 불현듯 정체불명의 흰 연기를 목격했던 날 밤 미노다가 당부하던 말이
떠올랐다.
"어쨌든 지난번에 드린 "야쓰시로시사"가 도움이 될 겁니다. 제2권에는 도판과 함께 문헌
인용이 자세히 실려있으니, 돌아가서 잘 살펴보세요."
그 책에는 다음 두 가지를 뒷받침하는 증언들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그것은 '(여왕이
이곳에서) 칠, 팔십 년 살았다'는 내용과 '가랏파 3천 명의 상륙'에 대한 언급이었다.
묘켄은 대일여래니라. 묘켄은 칠체로 나타나니 '칠체 묘견'이라 호하느니라. 또한 여러 가
지 변신이 있으니 천에서는 북두칠성, 한토에서는 진무상제, 일본에서는 시라키야마카미로
나타나리라. 메부카, 데나가, 아시바야의 모습을 나타내며 명주의 나루에서 귀사를 타고 히
고야쓰시로군 다케하라의 나루에 닿다.
이것은 "히고코쿠시"라는 향토지가 수록한 '신궁사연기'의 한 부분인데 신궁사는 묘견궁
이라고도 부르는 야쓰시로 신사의 전신이다. 또 "묘견궁실기"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
다.
천식천황백봉여진의 가을. 비로소 '팔대부호북지향, 죽원'에 진좌하시다. 3년 동안 진좌하
신 후에...
물론 이 기록은 "삼국지"처럼 여왕 비미호와 같은 시대에 이뤄진 사료는 아니다. 어떤 형
태로든 이 고장에 전승되어온 역사적 사실들을 추려서 기록한 것이다. 몇 줄 안되는 글에
'진좌'라는 단어가 세 번씩이나 나온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문구마다 상당히 극진한 예의
가 갖추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1) 신령이 그 자리에 임함. 사당에서 진좌하시는 신
(2) 자리잡아 앉음
진구지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불교가 일본 열도에 정착하던 무렵, 여왕을 신주로 모신 사
당은 불우로 바뀌었고, 본종은 야쓰시로의 주민들이 묘켄상이라 부르는 묘견보살로 바뀌어
한결같은 추앙 속에 맥을 이어온 셈이 된다. 그러다가 다시 이 절은 신사로 바뀌어 오늘의
야쓰시로 신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내력을 자세히 추적하자고 바다 건너 일본 땅에 온 것은 아니다. 단지 여기에
저들의 옛 기록을 옮긴 것은 노교장의 입에서 나온 '3년 더하기 70여년'이 이 기록에서는
'3년 더하기 77년'으로 80년을 채우고 있도, 그것은 한편으로는 "삼국지"에 기록된 '머무른
지 칠, 팔십 년 만에'라는 말을 그 옛터가 밝히는 증언으로 봐도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인용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앞서 인용한 글에서 묘켄상이 출발했다는 '명주의 나루'는 어디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제 지명을 덮기 위한 일종의 가명이라는 것이다. 그런 지명은 일본 열도는 물론
한반도와 중국 지도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외지에서 배를 타고 온 묘켄상에 대한 기억을 전승, 기록하면서 '명주의
나루에서 귀사를 타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거북이와 뱀의 합체' 정도로밖에 상상할 길
없는 이 배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은 묘켄상이 여왕 비미호라고 가정한다면, 왜국 최초의 고대왕국 야
마이의 왕으로 추대될 즈음 몇 살이나 됐을까 하는 점이다. 야쓰시로에 온 지 70-80년이면
갓난아기 때 왔다고 해도 칠팔십 노령이 아닌가?
게다가 여왕의 서거 해에 대한 관계학자들의 정설이 '서기 247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여기에 60년을 다시 가산하면 그의 천수는 1백40세를 넘어선다. 인간으로 태어나 과연 1백
40세라는 천수를 누릴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할 것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이라 해도 이같은 인간의 수명에 대해선 누구나 회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왕의 출신지인 고대 가락국으로 되돌아가면 이같은 의구심이 한낱 기우임을 깨
닫게 된다. 즉 아득한 옛날 사람의 수명을 오늘의 자로 재어 '그렇게 오래 산다는 것은 불
가능한 일이다. 고로 허위다'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가락국기"는 허 왕후의 천수를 언급하며 '왕후는 나이 1백57세에 돌아가셨다'고 했고, 수
로왕에 대해서는 '수명 1백58세'라는 기록을 남겼다.
여왕 비미호에 대한 궁금증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왜지에서
어떤 일을 했기에 토착 세력인 뭇 부족장이 만장일치로 받들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해답의 근거를 앞서 제시한 "묘견궁실기"... 77년간을 쌓아 다시 팔대의 상궁에
진좌하시다...'라는 대목에서부터 찾기로 했다.
숨겨진 보물
"젊었을 때 일입니다. '지요마쓰가미네'라는 곳을 찾으려고 얼마나 헤맸는지 몰라요. 하지
만 아쉽게도 끝내 찾아내지 못했지요."
하얀 연기를 보던 날 밤, 미노다 선생은 젊은 날의 추억을 아쉬워하는 듯 이렇게 말했다.
그가 '지요마쓰가미네'라는 봉우리에 끌렸던 까닭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향토지
"히고코쿠시"의 증언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현장을 직접 밟아보고픈 충동을
느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여왕의 궁실터를 찾아 마루야마를 밟아야 했듯이, 이제부터 제 2의 봉우리 '지요마쓰가미
네'를 찾는 일에 손신을 쏟을 차례다.
이는 단순히 신이나 보살의 이름으로 변신해버린 묘켄상의 유허를 찾는 작업에 머물 일은
아니었다. 70-80년의 긴 세월 동안 여왕은 그곳에서 무엇을 준비했기에 마침내 일본 고대왕
국의 기저가 된 '야마이'를 이룩하게 됐을까, 또 무슨 힘으로 왜지의 여러 부족사회를 묶는
영도자의 위치에까지 오르게 됐을까를 알아내는 작업이기도 했다.
우선 첫 번째 작업으로 야쓰시로 이북 지역에 그와 같은 이름의 지명이 또 있는가를 살펴
봤다. 야쓰시로는 구마가와를 등에 업고, 남쪽으로는 산으로 격리되어 있는 지세이다. 그 해
안선에는 뾰족하게 튀어나온 우도라는 돌기 때문에 생겨난 삼태기 모양의 큰 내해가 있다.
이 해역을 가리켜 한자로는 '부지화해'라 적는데, 그곳 사람들은 이를 '시라누이'라 읽는다.
시라누이 해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동북쪽 내륙으로 가다보면 구마노쇼라는 옛 지명이
나온다. '구마'는 한자로는 구마, 웅, 우 등 여러 음으로 표기할 수 있는 까닭에 여기에선 한
자의 뜻을 따르는 지명이 아니라 '구마'라는 음에 본래 뜻을 두고 있는 지명으로 보는 쪽이
타당할 것으로 본다.
탐색의 1차 목표를 조난초(구마노쇼, 미야지가 있는 마을)로 정한 다음 자전거를 타고 미
야지라는 지명이 있는 야스시로의 북쪽 첫 고을 조난초를 향해 북상하기 시작했다. 길은 국
도 3호선으로 따라 쭉 이어져 있었다. 지형도를 살펴가며 단숨에 북상하던 중, 미야바루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미야바루! 미야지처럼 궁자를 앞에 쓰고 있었다. 순간 눈여겨볼 만
한 곳이라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요마쓰가미네는 다음에 찾기로 하고 일단 미야바루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자전거 핸들
을 꺾어 마을 어귀에 들어서는데 옛 신사 하나가 손님을 반겼다. 도리이(신사의 정문)를 받
드는 주춧돌 둘레에는 별자리를 나타낸 듯한 불규칙한 홈들이 패어 있었고 좀 떨어진 네거
리에 위치한 옛 석조물에도 같은 형상으로 깎은 흔적이 역력했다.
석조물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히가와라는 하천을 끼고 동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
다가 건너편에 또 다른 산문이 보이기에 다리를 건너 신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한
노인이 다가왔다.
"이 지역에 관심이 많으신 분인가보우. 그래도 아난도상은 아직 못 보았겠구려."
"아난도상이요?"
"이 산을 똑바로 올라서 반대펴느로 나서면 동굴 하나가 있는데, 그 속에 가미상이 계시
거든."
신상이라니! 결코 예사로울 수 없는 단어였다. 나는 당장에 노인이 지시한 대로 산을 오
르기 시작했다. 산길은 외줄기로 능선을 따라 뻗어 있었고, 내왕이 거의 없어서인지 나뭇가
지는 거미줄마냥 얼굴을 휘감았다.
얼마를 걸었을까. 산길은 오른쪽으로 꺾어더니 다시 왼편으로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때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무언가 번쩍 빛 같은 것이 새어나왔다. 조심스럽게 내려가 살펴보니,
앗! 히가와 상류가 가을 햇살을 받아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솟았다. 절벽
위를 한 발이라도 더 나아갔더라면 어찌됐을까...
놀란 가슴을 간신히 추스르고 내리막길을 걷는데, 갑자기 길이 끊어지면서 웬 종유동 하
나가 검은 입을 떡 벌린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다. 아까 노인이 일러준 '아난도상' 동굴이라
는 것을 깨달았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리고는 정말 겁도 없이 컴컴한 어둠속으로 발을 옮
겼다.
한데 그 안에는 놀랍게도 사람의 앉은키만한 석회석 돌기둥이 서 있었다. '멘히르'일지,
아니면 이 협곡의 이름에서 연상되는 '다테카미'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돌기둥은 호
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남근 모양을 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면 그저 겁만 낼 일은 아니었다. 손전등만이 유일한 벗이 되어 어둠을 밝
혀주는 가운데 계속해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너 발짝 옮겼을까, 이상하게도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아 겨우겨우 발을 떼는데, 아! 저건 사람의 모습 아닌가? 단정한 모습
으로 앉아 있는 건 분명한 인물상이었다.
적막한 산 속에 버티고 있는 인물은 대체 누굴까 하고 이리저리 살피던 중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종유동과 돌기둥은 석회석인 데 비해 좌상은 화강암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당장에라도 일어설 듯한 실감이 드는 인물상으로, 기법은 그리스 석고상과 비교해도 좋을
만큼 정교했다.
균형잡힌 형태뿐 아니라 머리에 쓴 관은 오갈 데 없는 변관(고깔모자)이다. 그리고 두 손
은 각각 좁은 옷소매 속에 깍지를 낀 듯 모으고 있는데 이런 자태는 이제까지 보아온 일본
의 인물상과는 전혀 달랐다. 희한한 것은 이 뿐이 아니었다. 우물처럼 움푹 팬 뒷벽에는 붉
게 녹슨 쇠똬리가 신주단지처럼 안치돼 있었다.
우연히 마주친 돌기둥과 인물상, 그리고 쇠뭉치를 보며 강렬한 호기심이 일었다. 이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혹시 그 옛날 비미호 여왕이 우렸던 쇠 문명의 내력을 암시하는
증거물일까?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은 인물상이 과연 누구일까 하는 점이었다.
동굴 속의 비밀
인물상의 위 아래를 뜯어보았다. 우선 고깔모자에 관심이 쏠렸다. 변관의 일종으로 보이는
이 고깔모자는 원추형에 가까워 끝이 뒤로 길게 뻗는 에보시와는 모양이 달랐다. 한자 그대
로 변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한반도 남부 지역에 정착한 집단들이 변관을 썼기 때문에 한족들은 이들을 가리켜 '변진'
이라 칭했다.
이상은 "김해 김씨 보첩"에 언급된 내용으로, 변관을 우리말로는 '가나'라고 말한다면서
나라명이 된 '가라' '가락'도 모두 여기서 비롯된 것임을 아울러 밝혔다. 변관 다음에 시선
을 끄는 것은 인물상이 입고 있는 옷이었다. 단아한 이미지가 강하게 와닿는 의상은 무엇보
다 타원형으로 깊게 팬 윗도리와, 토시를 낀 것처럼 좁은 옷소매가 특이했다.
그 옷은 옆이 넓으며, 다만 서로 결속시켜 거의 바느질을 하지 않느니라.
이상은 그 무렵 왜인의 남자 복식에 관한 "삼국지"의 기록이다. 옆이 넓은 옷이라면 인도
의상에 더 가깝다. 따라서 앞가슴이 드러나고 소매 끝이 좁은 동굴 속 인물상과는 닮은 데
를 찾기가 어렵다. 결국 복식의 외관으로 볼 때 왜지보다는 변관을 쓰던 한반도 남부 지역
(가락)의 주민 모습에 더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눈길을 끈 것은 의상만이 아니었다. 인물상 뒤편에 모셔진 쇠똬리는 확실히 별난 것이었
다. 붉게 녹슨 쇠똬리의 듬직함은 마치 둥글게 빛나는 불상의 광배인 양 인물상이 지닌 막
강한 힘을 상징해주는 듯했다. 똬리를 튼 모양의 쇳덩이는 불에 녹인 쇳물을 땅에 부어 만
든 것으로 보였는데 형태는 매우 단순했다.
어쨌든 인물상과는 필연코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외줄기 길이 막다
른 곳, 벼랑 끝에 있는 동굴과 쇠. 그렇다! 어쩌면 그것은 경주 서북쪽, 화랑들의 수련장으
로 알려진 단석산 석굴과 같은 용도로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몇 년 전 화랑터를 찾
으며 부지런히 오르내리던 단석산 석굴을 떠올리며, 문득 이곳의 종유동을 연계해서 생각하
게 되었다.
나이 열여덟이던 임신년에 칼을 다스리는 기술을 익혀 화랑이 되었다.
"삼국유사" "김유신"조에 나오는 이 구절을 "삼국사기" "열전"은 다음과 같은 사연으로 자
세히 보충하고 있다.
혼자서 중악 석굴에 들어가...
이렇게 시작하는 긴 문장을 요약하면, 단석산 석굴에 혼자 들어간 17-18세의 김유신이 홀
연히 나타난 '난승'이라는 노인에게서 검을 벼르는 비법을 전수받아 마침내 단칼에 큰 바윗
덩이를 자른 보검을 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주 지역 향토지인 "동경잡기" 역시 이런 사연을 낱낱이 기록하면서, 그때 자른 바위 아
래 단석사라는 절이 세워졌다고 했다.
높이 8백27m의 단석산, 석굴은 5백m의 등고선을 따라 산허리를 돌아가면 서쪽 끝에 있었
다. 거대한 암석을 파서 만든 인공 석굴이었다. 진입도는 외길이며, 바위 주위는 절벽처럼
가파른 산비탈을 이루고 있는데, 굴 속에는 능히 쇠를 단련할 만한 공간과 거처하는 방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출입로만 막으면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바위 속의 굴이었다. 예리하고 강한
쇠를 단련해내는 노하우, 다시 말해 당시로선 극비의 기술을 전수하고 익히는 데는 더할 나
위 없이 적합한 장소였다.
그런데 '아난도상' 종유동 역시 단석산 석굴처럼 절벽 끝에 있는 데다, 굴 내부 깊숙이 쇠
뭉치를 모셔놓고 있다. 나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다른 두 개의 석굴, 즉 단석산과 아난
도상의 동굴이 갖고 있는 문화적 동질성과 그 원류를 생각하며, 김유신에게 비법을 전수한
노인의 이름을 새삼 떠올렸다. 노인이 스스로 밝힌 이름은 '난승'이었다. 난승이라... 그 이름
은 인도의 아요디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수로왕과의 결혼 첫날밤, 공주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이 몸은 아유타국 공주이옵니다."
아유타국은 인도의 아요디아에 본거지를 둔 해상 교역국으로, 아요디아라는 명칭은 원래
'전쟁으로는 이길 수 없는 곳'이라는 뜻에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이를 한문으로는 '나승성'
이라 의역한다. 이같은 한자풀이는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그 노인이
자칭했다는 '난승'은 사람 이름이라기보다는 그의 출신지를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모든 존재는 침묵에서 태어난다'라는 말이 내게 위력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지금도 여전
히 침묵하는 두 개 동굴 내면으로부터 마침내 분출하는 역사의 진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굴과 쇠, 이 둘의 관계는 맞물려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처럼 거대한 힘으로 우리 앞에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홀연히 나타난 왕자
이야기가 건너뛰긴 하지만 그로부터 4년 세월이 흐른 한겨울로 무대를 옮겨야겠다. 1979
년 아나도상에 대한 2차 탐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탐사에 앞서 나를 '에비야' 계곡으로
안내한 이와나가를 찾아갔다.
"한 가지 청이 있어서요. 아난도상까지 같이 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뤄진 동행이었다. 우리는 휴대용 대형 전등을 지니고 새로 개통된 고속도
로를 달려 어렵지 않게 등반로 어귀인 신사 앞까지 왔다.
"세상에, 이런 길을 겁도 없이 혼자서..."
내 뒤를 따라오던 이와나가는 연신 혀를 찼다.
"이즘 되면 누가 보아도 주객이 전도됐다 할 겁니다."
흡사 외국에서 온 사람이 그 나라에 사는 주민을 현지로 안내하는 꼴이었다. 그러나 나의
입장은 좀 달랐다. 여기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이 있었다.(이와나가는 현재의 시각에서 산
으로 가고 있고, 나는 조상의 한 분으로 굳게 믿게 된 여왕 비미호의 시대로 돌아가 이 산
길을 오르고 있다!)
막상 종유동에 도착해보니 5년 남짓 흐른 세월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어귀에
마련한 배전의 목조 시설은 새로 지은 듯 깨끗했지만 인물상은 엄청나게 더럽혀지고 손상돼
보였다. 이럴 수가 있나! 뒷벽에 있던 쇠똬리는 온데간데없이 자리만 움푹 패어 있었다. 어
떤 변화가 종유동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초행길에선 느끼지 못했던 이
상한 공포감을 등 뒤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작업을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려 움푹 팬 굴바닥을 살펴봤다. 의외로 깊었다. 이번에는 굴 속 왼편에
굴뚝처럼 위로 뻗은 홈을 발견했다.
"저건...!"
그것은 굴뚝이었따. 홈통을 이룬 석회암 표면에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은 철매(그을음)가
껍질처럼 벗겨졌다. 이곳에는 분명히 쇠를 녹이고 합금하던 풀무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굴뚝은 어디로 난 것일까? 어쨌든 굴뚝이라면 땅 위로 통해야 하지 않는가? 더
욱이 이렇듯 두꺼운 철매층을 남길 만큼 불을 땠다면, 어딘가 땅 위로 굴뚝 끝이 닿아 있었
을 것이다. 그렇다면...! 종유동이란 게 원래 흐르는 지하수의 용해 작용으로 생겨난 굴이고
보면, 산 위 어딘가에 빗물이 스며든 통로가 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굴에서 나와 종유동 꼭대기로 추정되는 봉우리 위를 살피기 시작했
다. 풀숲을 뒤지다가 마침내 굴뚝 끝으로 보이는 구멍을 발견했다. 지름 50cm쯤의 둥근 구
멍은 굵은 쇠창살이 막고 있었는데, 전등빛을 비추니 끝없이 아래로 뻗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아난도상'이 자리한 곳은 그 옛날 철을 제련하던 비밀 작업실이었던 것이
다.
아난도상. 우리말로 '구멍님'이라 표현할 수 있는 그는 대체 누구인가? 그들이 '아난도상
'이라는 이름으로 모시는 종유동의 신주가 혹시 김해 김씨 보첩에서 사라진 선견왕자는 아
닐까? 선견은 수로왕과 아유타국의 공주 사이에 난 왕자였고, 훗날 김유신(그도 수로왕의
12세손이다)이 만난 제련의 비법 전수자 '난승'의 선배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잠시 방향을 돌려 당시 신소재로 쓰던 쇠의 정체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금이 지닌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뜻밖에도 '쇠 금'이란 풀이가 먼저 나온다. 다시 말해
금은 쇠붙이를 대표하는 말로 풀이돼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당연히 귀금속인 황금을
먼저 생각하고, 흔하디 흔한 쇠는 연상하지 않는다. 내가 어릴 적에도 금은 언제나 귀했고
철은 흔했다. 이쯤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어째서 사전은 '황금 금'하지 않
고 '쇠금'이라 하였을까?
요컨대 인간은 금보다 철이 귀하고 값나가던 시대를 거쳐왔던 것이다. 청동에 비해 강도
가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에 무기 제조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 신소재 금속이었다.
신소재를 얼마나 지니고 있고, 또 얼마나 다를 줄 아느냐에 따라 부와 권력의 판도가 달
라졌다. 그러므로 철을 만들고 제련하는 기술은 극도로 비밀리에 전수되었고, 이러한 마법의
무기를 입수하기 위해 부족들은 자신의 재산을 몽당 털어넣어야 했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경우 쇠는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흘러들어 왔을까? 이 물음을 떠올리
며 재차 한자사전을 뒤적이는 이유는 쇠의 또다른 한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쇠 금 변을
찾아보면 6획에 철이란 낯선 한자가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철) : (1)쇠 철 (철의 옛글자) (2) 땅이름. 이
금은 쇠붙이의 총칭이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인가? 잘 알려진 대로 한족이 그들의 동쪽
지역에 사는 민족을 낮춰 부른 이름이 '이'(이=오랑캐)다. 한자사전 역시 '중국의 동쪽에 있
는 미개종족'으로 풀이했다. 그리고 '동이란 동쪽에 있는 군자의 나라 사람이라는 원뜻에서
동쪽 오랑캐로 변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상황이 이쯤 되면 우리는 두 번째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어째서 그 귀한 신소재 쇠를
나타내는데 '동방 미개인의 쇠붙이'라 했을까 하는 점이다. 여기에 "삼국지"는 다음과 같은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 나라가 쇠를 내는데, 삼한과 예와 왜가 모두 이로부터 쇠를 얻는다. 모든 시장의 매매
도 쇠로써 함이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 낙랑과 대방의 2군이 또한 이를 공급받는다.
이 증언은 희한하게도 "삼국지"가 편찬된 3세기 말엽에서부터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은 채
내려오고 있다. '그 나라'라고 한 것은 '개 같은 나라'라고도 한 가락국의 전신 변진 구야국
을 말함인데, 그곳에서 생산되는 철을 한반도의 여러 부족국들은 물론 왜인의 집단까지 얻
어다 썼고 당시 한족의 한반도 진출 거점이던 낙랑군과 대방군도 그곳에서 나는 쇠를 공급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내친 김에 더 언급하자면, 2세기까지만 해도 중원의 한족들이 왜지를 내왕할 땐 가락국이
운항하는 외양 범선을 얻어타야 했다. 또한 최첨단 소재인 철을 그곳에서 구할 수밖에 없었
다.
상대가 자기 신분보다 나은 사람이라 해도 심사가 불편할 터인데 미개한 오랑캐라고 부르
는 동이족에게 손을 내밀어 구한 문명의 이기이고 보면, 그들 심사가 오죽이나 불편했으랴
싶다. 결국 우리는 한족이 자신들의 무기라 할 수 있는 한자를 휘둘러 가라, 가야, 또는 가
나라는 명칭 대신 구야라는 몹쓸 글자를 골라 쓴 심술을 이해하게 된다.
천년 소나무
아난도상을 만나는 바람에 지요마쓰가미네를 찾으려던 앞서의 일정이 다소 지체되었다.
지금은 조난초라 불리는 곳까지 북상하는 중이다. 부지런히 페달을 밟은 까닭에 정오를 조
금 넘은 시각에 조난초에 닿을 수 있었다. '궁터'로 풀이되는 미야지가 있는 마을로, 강가
우뚝한 대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먼저 지역의 문화회관 건물을 찾아 향토자료실을 둘러봤다.
"야요이 시대의 유물과 유품들을 모아 진열한 것입니다. 대부분 야쓰시로 일대의 절이나
민간인들이 기증한 것들이지요."
안내원의 설명은 계속됐다.
"저기, 연표를 보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
벽면에는 연표가 붙어 있었다. 연대는 모두 일왕의 즉위 연도에 맞추고 있었는데 거기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글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이 무렵 '히노기미(불의 신)', 거성을 야쓰시로로 옮기다.
연표는 뜻밖에도 불의 신 '히노기미'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연표의 내용대로라면 이곳
이 여왕 히미코가 77년 간 머물면서 고대 왕국을 구상하고 준비한 터전일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곳에 머물던 불의 신이 야쓰시로로 옮겨갔다는 증언이었다. 이 말
은 곧 '지요마쓰가미네에서 77년간 치적을 쌓아 다시 야쓰시로로 되돌아왔다'는 "묘견궁실
기"의 증언과 맞물리는 것이었다. 준비기간에 이곳에 머문 '히노기미'나 여왕 시절에 부른
'묘켄'은 같은 사람의 서로 다른 이름일 수 있다.
'불의 임' '불의 신'으로 옮길 수 있는 이 호칭이 어떻게 해서 히미코나 묘켄상과 같을
수 있는가? 먼 데서 구할 것 없이 우선 '히노기미'에 대한 글자 해석에서 실마리를 풀어나
가기로 하자.
일본어 '히'음의 대표적인 뜻을 꼽자면 우선 해(일 = 태양, 일륜)가 있고, 다음으로 낮을
상징하는 단어로 쓰인다. 그런데 일본어 사전을 자세히 읽다보면 열한 번째 항에 우리의 관
심을 끄는 대목이 나온다.
일신, 아마데라스오미카미 자손이므로 황실의 일에 붙여서 씀.
히는 불덩어리다. 태양과 불은 근원적으로 동질이다. '히'에 얽힌 이런 해석은 우리말과
연관지어 볼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왕 비미호는 어머니 허씨의 딸이기도 하다. 즉 허는
태양왕조 아요디아의 혈통을 이은 허 황옥 공주의 성씨로, 그렇다면 허나 해나 히는 태양이
라는 거대한 불덩어리에 연유된 같은 호칭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성씨의 유사성과 더불어 우리가 관심가져야 할 것이 또 있었다. 그것은 지명의 유사성을
캐내어, 숨겨졌을지도 모를 고대의 진실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우선 옛 지명을 파악하는 일
이 급했다.
"묘견궁실기"는 여왕이 77년간 머문 곳을 '오쿠마노무라' '지요마쓰가미네'라고 발음했다.
조난초의 옛 지명이 구마노쇼였듯이 지요마쓰도 어떤 형태로든지 그 터에 옛 글자의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길을 재촉하는데 눈 앞에 큰 소나무 하나가 들어왔다. 지름
이 1m정도 돼 보이는 소나무 그루터기에는 '가랑 소나무'의 유래를 담은 팻말 하나가 세워
져 있었다.
소화 초기에 폭풍에 쓰러진 이 소나무는 억울한 누명을 쓴 한 무사가 이 노송 아래서 할
복 자살을 하면서 창자를... 훗날 이 고장 사람들은 이 노송을 가리켜 '가랑 소나무'라 불렀
다.
'가랑'으로 발음되는 일본어는 한자의 '가람(절)'밖에 없다. 더구나 가랑은 '가랑'이라는
가다카나로 표기함으로써 외래어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노송은 '칠소궁'이 있었다는 하
마가와 주변 땅과 인접한 곳에 있다. 그렇다면 소나무의 원래 이름은 '거랑 소나무'가 아니
었을까? '거랑'은 하천이나 개울을 뜻하는 옛 우리말로, 특히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주로 쓰
였으며 지금도 간혹 사용되고 있다.
나는 이런 가설을 생각해보았다. 천년 묵은 노송이 거랑(하천을 가리키는 옛 우리말) 가까
이 있었기에 누군가 '거랑 소나무'라 불렀고, 거랑을 일본어의 50음으로 옮기자니 '가랑'이
라고 한 것은 아닐까? 이를 "묘견궁실기"가 기록하면서 꽤나 촌스러워 보이는 가랑이라는
이름 대신 '해묵은 소나무'를 의미하는 천년송, 즉 '천대의 소나무'로 바꾸어 적은 것일 수
있다.
불과 한 달 남짓한 야쓰시로 지역에서의 고대 여행. 거기서 찾아낸 우리말들은 모두가 이
지역 고대와 관련된 것이었다.
결국 현장에서 찾아낸 옛날과 오늘의 언어학적 상황을 정리해 볼 때, 여왕이 야쓰시로를
터전으로 왜국을 경영하던 시기에는 거의가 우리말을 모체로 한 말을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
된다. 그러다가 비미호의 왕권이 몰락한 이후 일본의 새 왕권이 들어서면서 점차 일본어로
바뀌었을 것이다. 다만 비미호 여왕 시대를 직,간접적으로 상징하는 일부 흔적들을 제외하고
는...
불의 나라
여왕 비미호를 찾아 헤매는 길은 어느덧 북상하여 구마노쇼(지금의 조난초)까지 뻗게 되
었다. 이곳은 야쓰시로에서 직선 거리로 24km, 구마모토까지는 10km되는 지점이다.
여왕은 여기서 77년을 머문 다음 야쓰시로로 옮겨왔다고 옛 문헌은 증언했다. 더욱이 향
토문화관의 연표도 '이 무렵 불의 신 히노기미가 거성을 야쓰시로로 옮기다'라고 밝혔다.
오늘날 일본의 기틀이 된 야마이국을 건설하기까지 77년 동안 여왕은 어떤 이름을 가졌을
까? 혹시 '비미호'라는 이름 이전에 불 나리님이라 할 수 있는 '히노기미'로 불리던 시절
이 있지 않았을까? '불 님' '불 나리님'이 다스리던 나라는 당연히 '불 나라'일 수밖에 없
다. 결국 일본의 옛 사서 "고지키"도 이 일대를 가리켜 '히노쿠니'라 하지 않았던가.
히노쿠니는 말 그대로 불 나라다. 요즘도 구마모토에 가면 '히노쿠니'를 관광 구호로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왕이 야마이국을 세우기 전에 '불 나라님'이었던 것을 가
정할 때, 이 지역에는 불(히)과 인연이 각별한 것들이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당나라
때 편찬된 "수서" '왜국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불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기고
있다.
아소산이 있어 그 산의 돌이 까닭없이 불을 일으켜 하늘로 치솟는다. 그곳 사람이 이변이
라 생각하고 기도하며 제사를 지낼 때, 여의주 같은 것이 있어 파란 색의 계란 크기만한 것
이 밤이면 빛을 내니 '어안정'이라 이르니라.
예나 지금이나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아소산은 활화산으로 유명하다. 세계적 규모의 칼레
라 화산으로 1천6백m 높이의 중심부와 반경 8km의 둥근 화산군이 오늘날까지 불꽃과 연기
를 뿜어올리고 있다. 그러므로 "수서"는 이러한 정보를 접하며 '산의 돌들이 까닭없이 불을
일으키고, 때로 하늘로 치솟을 때는 마을 사람들이 큰 변고가 있을 조짐으로 생각하고 제사
를 지내며...'라고 옮겨 적고 있다. 옛 사람들 눈에는 그 불이 밤하늘에 나타나는 거대한 불
기둥으로 어렸던 것 같다.
불기둥을 가진 아소산! 그곳은 '불 나리님'이 거처했다는 칠소궁의 옛 행정지역인 구마노
쇼에서 부과 36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아소산의 불기둥과 구마노쇼의
'불 나리님'이 만나야 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라 할 수 있다. 즉 여왕 히미코는 불기둥을
동북 방향으로 업은 자리에 자신의 거성인 칠소궁을 마련하여 야마이국의 터를 마련했을 것
이다.
"수서"는 불기둥마고도 또 다른 불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의주는 무엇인가? 기록대로
라면 여의주 같은 것이 있어 밤이면 파랗게 불을 낸다고 했다. 그 불의 정체는 어안정이라
는 것이다. 크기는 계란만하다고 적었다.
야쓰시로 해안은 음력 7월 그믐 야반부터 새벽녘까지 바다 위 아득히 붉은 황색의 불을
마치 구슬을 늘어놓은 듯 등불처럼 펼쳐보이다가 점멸한다. 원인 불명의 불가사의한 현상이
다.
구마모토현의 지역 지도는 야쓰시로 해안의 시라누이에 관해 이렇듯 짧고 진솔한 해설을
곁들였다. '알 수 없는 불'로 표기되는 시라누이른 정말 정체 불명의 불인가? 그보다는 음
력 7월 그믐날 밤, 화산섬 규슈 야쓰시로 근해를 중심으로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자연현상으
로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수서"는 시라누이라는 이름 대신 '물고기 눈빛의 정수'로 해석되는 '어안정'이라는 이름
으로 소개하였으나, 이 역시 까닭 모를 불이긴 매한가지다.
시라누이 현상이 일어나는 해역은 일정하기에 인근 어촌 이름조차도 '시라누이'로 되어
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시라누이를 목격하는 행운은 누릴 수 없었지만, 지방 신문 등에 '올
해의 시라누이'라는 제목 아래, 구를 이루며 이어지는 푸른색의 빛들을 컬러 특집으로 낸
것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시할 것은 시라누이 해역과 칠소공의 거리이다. 직선으로 따지자면
10km쯤 되는 거리로, 불 나리님은 불기둥을 등에 엎고 아래로는 신비한 빛이 깜빡이는 여
의주 행렬을 두른 지세에 터를 잡았으리라는 풀이가 가능해진다. 이 즈음에 나는 또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야마이국은 칠소궁을 중심으로 이뤄진 왕도 아니었을까?"
"그렇다"라고 잘라 말하기에는 아직 제시해야 할 증언들이 남아 있다. 우선은 '불 나리님'
으로 불린 여왕이 머물던 구마노쇼 칠소궁을 무대로 이야기를 전개해보자.
6부 가락의 남쪽 끝은 왜지에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시간 여행의 가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생각에 변화가 생겼음을 고백했다.
이미 흘러간 시간으로 되돌아가 자신의 과거를 바꾸어놓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초고속으로 항성 사이를 여행할 경우 과거로 되돌아가는 현상이 생길 수 있다고 본다.
굳이 호킹과 같은 석학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타임머신'이라는 마음 속의
비행선을 타고 과거를 재생하는 여행을 즐겨왔다. 미래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천도가 아니라는 것을, 결실(=미래)은 뿌리(=과거)을 통해 얻어지는 수확물이라는 것을 명확
히 깨닫게 된 것은 '시간 여행'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타임머신을 타고 어느덧 닿은 곳은 2세기의 벽두, 서기 103년이다. 지구 동쪽 끝, 거대
한 아시아 대륙, 바다 가운데 방파제처럼 솟아난 화산이 열도를 이룬 남쪽 끝 섬, 지금은
'규슈'라는 이름이 된 섬의 해안을 향해 타임머신은 서서히 고도를 낮추며 접근하고 있다.
마침내 '구마가와'라는 강이 시야에 들어온다. 규슈의 중앙부를 동과 서로 나누는 고산 지
대, 그곳에 모인 강물이 급류가 되어 달려오면서 바다를 만나는 곳에 무성한 갈대밭이 보이
고, 석기와 초벌구이 토기에 의존해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 해 5월18일 서북쪽 바다 저편에서 몰려드는 선단이 있었다. 배는 구마가와 하구를 향
해 돌진해왔다. 3백 척 남짓한 쾌속선들은 비단 속도만 요란한 것이 아니어서, 배 끝에 앉아
노젓기를 부추기는 북소리는 조용한 섬을 뒤덮고도 남았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북 장단에
왜지의 선주민은 그만 넋을 잃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선단을 인도하는 저 거대한 형상은 무엇인가? 암만 살펴보아도 한 마리 거대한 거
북이었다. 단지 산 거북과 다른 것이 있다면 양편에 여나믄 개의 노가 달려 있다는 사실뿐...
딱 벌린 입에서는 이따금 이상한 연기를 토해냈다. 게다가 더욱 희한한 것은 거북 대가리가
달려 있어야 할 곳에 뱀의 형상이 올려져 있다는 점이었다.
거대한 물뱀 대가리를 인 거북! 등에는 찬란한 가마가 실려 있고 한 손에 여의주를 받든
소녀가 단정히 앉은 가운데, 좌우에는 장대한 사람 둘이 눈빛을 번득이며 소녀를 호위하고
있었다.
왼편에 선 이는 '천리안'(우리는 이미 '향견님'을 모시는 사당에 들른 바 있다)이라 부르
는 방위 관측의 베테랑이며, 또 한 사람은 '순풍이'라는 이름의 기상관측 전문가이다. 그렇
다면 두사람이 호위하고 있는 소녀는 과연 누구일까?
불 나리님, 여왕 '비미호'님이시다.
훗날 일본 열도 최초로 세워진 고대왕국 '야마이'의 여왕은 이렇듯 화려하고 성대한 모습
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당시 나이 열세살 남짓(그 근거는 다음 장에서 밝히기로 한다). 그
어린 나이에 대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건넌 막강한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우리의 고대 여행은 열세 살 소녀가 이끄는 행렬 속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의주를 든 소녀
마침내 뱃머리는 물에 닿았다(지금은 가랏파 기념비가 위치한 자리). 넋을 잃고 바라보던
원주민들 앞에 차례로 상륙한 외지인들. 한데 이들의 머리를 보니 한결같이 펀펀하다. 마치
머리 위에 접시 하나가 붙은 것처럼 정수리가 납작하게 생겼다.
게다가 더욱 놀랍게도 건장한 남자들은 저마다 손에 무언가 이상한 물건을 들고 서 있었
다. 기다랗게 생긴 그 물건은 햇빛을 받을 때마다 손에서 번쩍였다. 이것이 '쇠칼'이라는
것을 왜지 원주민들이 알 턱이 없었다. 이제껏 토기만 써온 그들 아닌가.
호기심에 찬 그들의 표정은 얼마 후 공포에 질린 얼굴로 바뀌었다. 먼저 상륙한 무리들이
해안가 갈대밭으로 뛰어들더니 기다란 도구를 마구 휘젓는 것이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원
주민들은 그만 등골이 오싹해졌다. 무리의 손이 갈대에 닿자마자 그토록 억센 갈대줄기가
거짓말처럼 잘려나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맨 나중에 닿은 큰 범선에서 물건들을 차례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작
업이 끝나자 두 개의 흰 바윗덩이(갓파돌)를 지렛대와 도르래 밧줄이라는 도구들을 이용해
서 잘려나간 갈대밭 터 한가운데로 거뜬히 옮겨놓았다. 그리고는 흰 돌을 가운데 두고 총 3
천 명의 이방인이 무릎을 꿇었다. '불 나리님'을 태운 신령스러운 가마가 돌 위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드디어 오색가마의 문이 열리면서 눈부신 옷차림을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올이 굵
은 백색 명주 저고리, 붉게 물들인 명주 다홍치마로 치장한 소녀는 손에 든 여의주를 신주
자리에 바친다음, 먼 곳에서 가져다 심은 상록수(지금의 사카기)에 흰종이를 감은 나뭇가지
를 받들고는 축문을 외웠다.
아버지 수로왕이 구지봉에 나타났을 때 공중어라는 복화술로 무리들을 모았듯이...
수루야의 딸,
어린 소녀는 쾌히 받아들여,
너희들의 수레에 탔노라.
힘에 넘친 쌍신이여,
너희의 아름다운 말,
하늘 달리는 붉은 새는
...
- 리그 베다 찬가 1:18 -
의식의 끝은 바로 잔치마당으로 이어졌다. 노래가 시작됐고 무리는 매김에 따라 3박자의
구호를 외치며 발춤을 맞췄다.
오 - 래
오 - 래
되라이다
오 - 래
오 - 래
되라이다
되풀이 외치는 구호에는 당당하면서도 따뜻한 기운이 넘쳐 흘렀다. 장단 맞춰 말춤을 구
르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 마을 주민의 모습도 더러 눈에 띄었다. 비록 정수리가 접시처럼
납작하고 번쩍이는 칼을 든 무리의 모습이 눈에 설기는 했지만 그 칼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할 것 같지는 않다는 안도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 느꼈던 공포감을 잊은 채 축제 분위기에 이끌려
외지에서 온 손님들과 함께 "오-래 오-래 되라이다!"를 외치며 춤을 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