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사막 수도운동의 유형과 이집트 Egyptian Christianity & Egyptian Monasticism)
기독교 수도원 운동은 -박해시기에 사막으로 피신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3년에 밀란 칙령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가지는 것을 허용한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여러 해 동안 이집트는 엄격한 수도원 운동의 중심지였다.
수도원 운동은 영어로 "monasticism" 인데 이 단어는 헬라어인 모나코스(monachos)에서 유래하였다. 모나코스는 "solitary" 즉 홀로 기거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기독교 수도원운동은 엄격한 절제의 삶을 열망하고 기도 생활과 하나님을 관상하며(contemplation) 또한 예배하는 삶에 전적으로 자신을 헌신하기 원하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수도원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세상과의 단절, 그리고 자기의 욕망을 제어하며 수덕(修德)의 삶을 사는 것(asceticism : 이 단어는 금욕주의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오히려 수덕주의가 더 그 의미에 가깝다)이었다.
초기 사막수도 운동은 다음의 두가지 유형으로 전개되었다.
초기 수도사들은 홀로 은둔하거나 이집트 사막과 동굴에 은거하였다. 이것은 세상과의 분리를 실제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초기 은둔 수도자의 대표적 인물은 285년에 수덕적 삶을 실천하고 훈련하기 위해 광야로 들어간 성 안토니(St. Anthony)와 20여년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수행된 수도운동이었다. 안토니는 대략 그의 나이 105세 경인 356년에 사망했다.
초기에 그들이 사막으로 들어간 동기는 첫째, 콘스탄티누스 이후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이런 비대해진 교회는 정치-사회와 영합하여 가고 있었다. 이런 경향을 거부한 이들이 사막으로 들어갔다. 수도사들은 안이한 신앙을 거부하고 이전의 박해기에 갖고 있었던 좀더 엄격하고 긴장된 믿음생활을 원하였다. 수덕(훈련)의 삶과 사막 수도운동은 그것을 계속하기 위한 좋은 길이었다.
둘째로 그들은 순교자들의 신앙을 따라 살며 그들을 존숭하기를 원하였다. 많은 수도사들은 더 이상 그들 자신이 순교의 길을 걸을 수 없게 되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피의 순교 대신에 세상과 육체를 향하여 자신을 죽이는 삶의 순교를 열망한 것이다.
수도사들이 이집트의 사막으로 들어간 세번째 이유는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중보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수도사들은 그리스도 분량에 이르기 위한 기도를 가장 중요한 일로 삼았고 자신을 사탄을 대적하여 싸우는 최일선의 기도자로 여겼다.
안토니와 그 세대 이후, 수도사들과 수녀들은 초기의 개별적 수도생활과는 다르게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거기서 그들은 서로를 돕고 격려하며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수도생활의 이러한 두 번째 형태는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수도원의 초기형태로 수도원적 혹은 공동체적 수도운동이라 불린다. 이집트 최초의 수도원적 공동체는 개인적 금욕과 수덕생활보다는 공동체를 보좌하기 위한 육체노동(manual labor)의 중요성과 기도 사역을 더 강조한 4세기 초 파코미우스(St. Pachomius)와 수도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 수도사들의 공동체는 날로 번창했다. 파코미우스를 따르는 이들이 5000, 7000, 10000명으로 늘어났다. 수도원은 점차 유명해졌고 수도사들의 수는 마을의 사람들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많아졌다.
비록 위의 두 유형의 수도운동이 세속과 일정정도 구별된 것이었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사회는 물론 교회에도 미쳤다. 이들은 수도자들과 같은 생각을 갖고 그 자신을 수도사로 여기며 엄격한 수덕의 삶을 살았던 감독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아리우스(Arius)와 논쟁을 할 때 사막을 나와 그를 도왔다(아리우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여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였다, 아리우스는 325년 니케야 회의를 통해 정죄되었다. 니케야 회의는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homoousios)임을 확인하여 예수의 신성을 확립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360년 경에 [안토니의 생애]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초기 사막수도 수도사들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안토니의 수덕적 삶을 소개하고 있다.
고대의 이집트 특히 알렉산드리아는 주전(BC)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 발달시기, 150년 이후 플라톤철학의 번성으로 인한 형이상학과 종교학의 번성, 그리고 주후(AD) 1세기에는 필로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 학파, 150년 이후에는 클레멘트, 오리겐 등의 기독교 교부 철학의 시기, 그리고 350년 이후부터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전성기였다. 이런 오랜 철학과 역사 그리고 신학의 중심지였던 이집트는 이런 학문적 배경과 병행하여 신앙의 직접적 실천을 의미하는 수도원운동이 태동하고 또한 융성한 곳이었다.
그러나 주전 28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명에 의해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유대인학자 72명을 동원하여 72일간에 걸쳐 헬라어로 번역(Septuasinta, 칠십인역 성서)하기도 했던 오랜 학문적-신앙적 전통은 주후 4-5세기에 이르러 점차 그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주후 391년에 알렉산드리아 감독 테오필루스(Theophilus)가 이방제의를 막기 위해 세라페이온(Serpeion)이라는 일종의 공공 도서관(약 5만권의 장서 보관)에 불을 지르고 642년 이집트를 점령한 무슬림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서적들이 불태워지고 교회들이 약탈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수도사들은 급속히 퍼지는 이교적 사상에 대항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이교도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무너지고 서적들이 불태워졌다. 이집트 수도원들은 이집트에 이슬람이 번성하면서 그 수가 격감하였고 근래에는 몇몇의 콥틱 수도원만이 이집트 사막에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