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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해 제 17장 선지자 엘리야의 출현
본장은 왕하 2장까지 무려 8장에 이르도록 계속되는 대선지자 엘리야 이야기의 첫 부분이다. 이는 엘리야가 차지하는 비중을 알려 주면서 동시에 단순한 역사의 나열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조명하는 기록으로서 열왕기의 성격을 증명해 준다. 엘리야가 받는 대단한 주목은 그의 시대가 열왕기의 주제와 갈등이 전형적으로, 극적으로 표출되었던 데서 기인한다. 즉 두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된 시기였던 것이다. 이는 암흑시대에 한 신실한 신앙의 인물을 통해 구속 역사를 관철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동성을 조명해 주는 것이다.
1. 엘리야의 가뭄 예언 (17:1-7절)
여호와 신앙의 전사 엘리야가 예고도 없이 아합 앞에 홀연히 나타나서 가뭄을 예언한 후 그릿 시냇가로 피신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까마귀가 날아다 주는 음식과 시냇물을 마시며 생명을 유지하는 장면이다. 본문은 엘리야의 출생과 성장에 대해서 일절 침묵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엘리야의 덕성과 미덕에 관심하는 위인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세출의 신앙 영웅 엘리야지만 일체의 배경 설명도 없이 사건의 초입에 등장시키는 것이다.
길르앗은 ‘증거의 돌무더기’라는 뜻으로 야곱과 라반이 쌓은 돌무더기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암흑기인 아합 시대에 여호와 신앙의 증거자 엘리야가 이 지방에서 배출된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디셉’은 엘리야의 고향으로 나타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길르앗 북방 산악지대 어느 곳일 기능성이 높다. ‘엘리야’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으로 실제로 엘리야의 생애는 그의 이름과 같이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증거하는 데 바친다. 그는 아합 왕 때부터 아하시야 왕 때까지 북왕국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모세와 버금가는 인물로서 유대인들의 추앙을 받았는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의 정체를 궁금해 하면서 그에게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던 것이다.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나타나서 한 말은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첫째, 내가 섬기는 신이 여호와라는 것이다. 즉 아합이 섬기는 신 바알이 여호와가 아니라 엘리야가 섬기는 신이 여호와라는 것으로 바알을 섬기는 무리가 다수인 형편을 지적했던 것이다.
둘째, 그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진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바알 숭배가 만연한 당시의 상황에 대해 강한 거부의 뜻을 비치는 말이다. 즉 이는 이스라엘의 참 신은 여호와이지 바알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이다.
셋째, 엘리야는 자신의 현주소와 입장을 밝히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신앙고백을 드린 후에 자신이 여호와로부터 보냄을 받은 대사의 자격을 밝히는 것이다.
엘리야는 여호와는 죽은 우상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참으로 살아 있는 신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한 분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말 속에는 아합이 섬기는 바알은 죽은 신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로 엘리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때를 따라 적절히 내리는 단비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결과로 언급된다. 반면에 백성이 우상 숭배에 빠지면 하늘은 더 이상 비를 내리지 않아 생명을 쇠약하게 하며 땅을 메마르게 하리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 년 동안 비나 이슬이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아합과 그의 백성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의 말씀이 없는 한 가뭄이 계속된다는 엘리야의 선언은 바알 숭배에 대한 정면 도전장이나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아합은 바알이 풍요의 신으로서 땅에 비를 내리는 등 생산력을 주관하는 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며 이 예언은 바알이 생명이 없는 무능력한 거짓 신임을 폭로하는 것이다.
아합에게 일침을 가한 엘리야는 일단 피신을 해야 했다. 그때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였는데 이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대단히 역동적인 상태로서 신앙의 용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즉시 임했던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소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은혜 가운데 주셨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다시 동쪽으로 가서 요단을 건너 길르앗 땅에 있는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고 하셨다. 엘리야는 사마리아를 떠나 다시 요단 강 동쪽으로 갔는데 ‘그릿 시내’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길르앗 지대에 있는 한 시내였을 것이다. 엘리야의 심판의 예언이 있은 후 아합과 이세벨은 즉각적인 위협을 받았을 것이며, 그가 선포한 말은 민심을 교란하는 유언비어요, 반정부적인 도전으로 비쳤을 것이기 때문에 체포 명령이 긴급히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가 급히 피신한 이유는 그보다도 여호와 신봉자와 바알 신봉자 간의 정면 대결의 시기가 아직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몸을 숨기라고 명하신 것이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땅에 가뭄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엘리야는 그동안 기다리면서 그릿 시내의 물을 마시며 지내야 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까마귀들을 명하여 음식을 제공하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엘리야는 피신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했던 것이다.
까마귀들은 원래 썩은 것을 좋아하는 날짐승이기 때문에 아무 것이나 마구 먹어치우는 습성이 있다. 그런 까마귀들이 엘리야에게 음식을 고스란히 날아다 준 것은 기적인 것이다.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있는 동안에는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다주었으므로 시내가 마를 동안까지 엘리야는 평안히 그곳에서 지낼 수 있었다.
2. 사르밧 과부와 엘리야의 첫 이적 (17:8-16절)
그릿 시냇가에서 엘리야를 보살펴 주셨던 하나님께서 그릿 시내가 마르자 이번에는 시돈 땅 사르밧의 한 과부를 통해 엘리야를 보살피셨다. 처음 엘리야에게 음식물을 공급한 것이 까마귀였듯이 이번에는 이방인 과부라는 점이 독특하다. 그러나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선민이 사는 이스라엘 땅에서는 거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이방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엘리야는 이스라엘 땅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이방으로 향했는데 이는 이방인 선교의 전거로 언급되기도 한다.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을 때에 이방인의 한 과부가 구원을 받은 사실에 대하여 예수께서도 이 사실을 인정하셨다.
‘사르밧’은 ‘염색하다’라는 뜻에서 나온 명칭이다. 이곳은 두로와 시돈 가운데 있는 지방으로 염료 생산지였다. 헬라어로는 ‘사렙다’이며 지중해 연안 도시이다. 이세벨의 부친 시돈 왕 엣바알이 다스리는 지역으로서 결국 이세벨이 여호와의 신앙인들을 탄압하고 있을 때 정작 엘리야는 이세벨의 고향 깊숙한 곳에 숨어버린 것이다. 이는 바로의 궁전에서 온전히 양육 받은 모세를 방불하게 한다. 즉 대적자의 심장부가 도리어 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피난처와 은신처가 된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종들의 은신처가 이방인, 그것도 무력한 과부였다는 사실은 선민 이스라엘의 크나큰 수치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크게 배교의 늪에 빠져있는 가를 단적으로 증거해 주는 것이다. 특히 ‘과부’는 남편이 없는 여인이기 때문에 경제적 지위가 형편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부유한 자는 부끄럽게 하시는 것이다.
엘리야가 사르밧 지방에 도착했을 때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는 거리에 흩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주어 땔감으로 사용하려는 것으로 극빈의 상태를 나타낸다. 엘리야는 그 과부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무리한 청을 하였다. 즉 나무를 줍기 전에 물 한 그릇을 가져와서 엘리야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는 것이었다. 팔레스틴 지방의 가뭄은 이미 시작되었고 물이 귀한 상황에서 낯선 나그네의 요구는 여간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는 사르밧 과부가 넘어야할 첫 번째 시험이었다. 엘리야는 물을 달라는 요구를 통해 자신을 대접할 과부를 식별하려 했던 것인데 이는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이삭의 신부감을 찾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청을 수락하고 집으로 물을 가지러 갔다. 엘리야는 과부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자 좀 더 당돌한 부탁을 한다. 즉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식량이 부족한 형편인 과부에게 떡 한 조각을 부탁했던 것이다. 이렇게 무리한 부탁을 한 이유는 자신을 공궤할 과부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아보려는 목적에 있었다. 사르밧 과부는 이 두 번째 시험도 무난히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어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엘리야를 위하여 만들 떡이 없다는 정중한 거절이었다.
과부의 말에 대해 해석은 분분하다.
첫째, 그녀가 이미 이스라엘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다는 것이다.
둘째, 그녀는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을 보아 엘리야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신을 호칭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주장은 일리가 있으나 과부가 한 말 중에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식의 표현으로서 그녀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알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변하지 못할 사실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여호와 신앙은 아닐지라도 여호와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여호와가 진실하신 신이라는 개념은 충분히 납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기생 라합과 같이 여호와 신앙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엘리야의 요청에 과부가 당황한 것은 그나마 남은 밀가루가 자신들의 최후의 만찬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떡 한 조각을 요구한 엘리야의 말은 자신들의 전부를 요구하는 엄청난 요청이었던 것이다. 훗날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이 과부가 신앙의 표본으로 등장하게 된 이유도 이처럼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녀가 순종의 길을 따랐기 때문이다.
*눅4;24-26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이스라엘 전체가 바알 숭배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바알 숭배의 본 고장에서 한 과부가 바알 신앙을 포기하고 여호와 신앙으로 전환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엘리야는 그녀의 말 속에 여호와를 인정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내 말대로 하라’고 했던 것이다. ‘두려워하다’는 말은 엘리야는 불확실한 장래에 대한 불안에 떨고 있는 과부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극복하라.’는 취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했던 것이다. 불안한 정서의 극복이란 이성이나 논리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즉 장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 현실적 두려움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바뀔 때 비로소 온전히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가는 과정은 논리적인 순차성을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는 지적 선택에 의한 결단의 단계가 요구된다. 엘리야는 그녀가 결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그것은 떡을 만들어 먼저 한 조각을 엘리야에게 가져오고 차후에 그의 아들을 위해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비를 지면에 다시 내리시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이미 말씀하셨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공궤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도록 예비해 두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의 일에 대하여 두려워하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이적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적이 나타나는 것이다.
엘리야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과부는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였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은 반면에 이방인 과부는 그 말씀에 하나의 이의도 달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고 순종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과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그 과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가뭄이 계속되는 동안에 이적의 떡을 먹으며 이적의 물을 마시며 살았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지 못한 언약의 축복, 언약의 은총을 이방인 과부가 받아 누렸던 것이다. 사르밧 과부에게는 가족이라고는 아들 하나 밖에 없는데 그런데 15절에서는 ‘그의 식구’라고 하므로 ‘권속’이라는 이 말은 여러 가족과 친지를 의미하기 때문에 아마도 과부에게 임한 축복의 소식을 듣고 그녀의 친척들이 달려와 함께 먹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여러 날 먹었다는 말은 다시 비가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를 의미하기 때문에 엘리야가 와서 함께 했던 모든 날들을 말하는 것이다. 사르밧 과부는 선지자 엘리야를 영접함으로써 선지자의 보상을 받음은 물론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 가족에게까지 구원의 은총을 끼친 것이다. 이러한 기적은 엘리사가 과부에게 기름을 가득 채워 주었던 일과,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
3.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린 엘리야 (17:17-24절)
과부의 집에서 비교적 평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엘리야에게 한 가지 당혹스러운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과부의 아들이 병을 앓다가 그만 죽어버린 것이다. 이 일에 대해서 과부는 곡해를 하고 엘리야에게 엄중한 항변을 한다. 즉 그녀는 엘리야의 존재가 나타남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죄를 상기하게 되었고 그 죄 값에 맞게 아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부에게 있어서 엘리야는 축복을 주는 사람이 아닌 재앙을 불러오는 저주의 사람인 것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과부의 신관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신은 징벌과 재앙을 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신의 심판을 전달하기 위해 파송된 사자라는 것이다.
사르밧 과부를 ‘그 집 주인이 되는 여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건의 중대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이다. 즉 엘리야가 몸을 의탁하고 있는 집의 주인의 아들이 병이 들어 죽고 그 재앙이 엘리야와 결부되면서 발생한 위기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다. 그녀의 아들은 병의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마침내 숨이 끊어져 죽고 말았다. 그동안 과부는 엘리야가 베푼 이적을 보고 그가 진정 하나님의 선지자였다는 것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여’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나 독자가 죽자 그만 이성을 잃고 엘리야와의 관계를 부정하면서 원망과 불평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내가 당신을 선대한 것이 결과가 이것이냐’고 항의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녀가 엘리야를 공궤함으로써 자신들도 선지자의 보상을 받았고 진작 죽었어야 했던 목숨이 지금까지 살아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데도 도리어 불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엘리야는 과부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죄’ 에 대하여 강론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전한 복음과 아들의 죽음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나타내시려는 것뿐이다. 즉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을 통해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보다 밝은 계시를 깨닫게 됨으로써 더욱 성숙된 신앙으로 진일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망과 생명의 주체이신 동시에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주님이신 것을 과부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진실한 주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진심으로 받들며 공궤했던 과부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미숙한 과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아들의 생명이요, 그 외에는 하나의 지식에 불과했던 것이다.
사르밧 과부가 품에 안을 정도로 아들은 어렸던 것 같다. 따라서 과부에게 어린 자식의 죽음은 큰 아픔이요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린 아들의 죽음이 자신의 죄의 값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엘리야는 여인이 안고 있는 그녀의 아들을 달라 하여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다락은 그 집에서 가장 좋은 처소이다. 통풍이 잘 되고 쾌적한 방이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다락에 기거했다는 것은 사르밧 과부로부터 큰 환대를 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환대에도 불구하고 큰 불행을 당했으니 엘리야가 민망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부르짖는 기도는 도움을 호소하여 급히 부르는 절박함과 안타까움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당시에는 엘리야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당혹한 일을 당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엘리야의 기도는 다소 해석이 까다롭게 보인다. ‘또’라는 말은 ‘기어코’ ‘결국’의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한데 이는 아이의 죽음을 최종 결론으로 삼으시겠느냐는 항변이기 때문이다. 이를 번역해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기어코 내가 우거하는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을 죽게 하셨나이까.’라는 말이다.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섬겼다고 하지만 그녀 역시 이방인이며 바알을 섬기는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셨다. 그래서 엘리야는 그 아이의 혼이 돌아오게 하려고 자신의 방법으로 행했는데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렸던 것이다. 이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굳이 설명하자면 환자의 아픈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과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치유하는 자가 자기 투신의 극단적 행동을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의 몸을 통해 죽은 아이에게 전달되어 그 아이가 소생하도록 염원한 신앙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엘리야가 세 번 엎드린 것은 ‘3’이라는 숫자가 완전수이기 때문이며, 엘리사와 바울도 이와 같은 행위를 한 적이 있다.
*행20: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엘리야는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홈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여기 ‘혼’으로 번역된 말 ‘네페쉬’는 ‘생명’ ‘목숨’이다. 그러므로 혼이 돌아오게 해 달라는 말은 목숨을 살려달라는 말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은 기도의 응답을 의미한다. ‘들으시고’라는 말 ‘솨마아’는 ‘이해하며 경청하는 세심한 동작’을 의미한다. 즉 이는 항변하듯이 하는 기도 속에 담긴 처지의 곤경, 다급한 마음을 이해하시며 경청하셨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아이가 살아났던 것이다. 엘리야는 살아난 아이를 안고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고 했다. 이는 죽었던 아이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다. 아이를 받은 과부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이제야’라는 말 ‘앗타제’는 ‘이제 이것으로’라는 말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더욱 확실히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엘리야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침묵과 비밀로 자신을 감추시지 않으시고 도리어 계시의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주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전달되고 선포되었다. 따라서 이때 선지자의 입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궁국성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말할 것이 요구된다. 즉 선지자의 입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다고 시인하고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하게 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거부하며 배척했던 것이다. 그래서 엘리야의 예언대로 가뭄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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