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유방 편: 제1회 건국 축하연에서 과거를 돌아보다
(사진설명: 그림으로 보는 유방)
최초의 서민황제 유방
한(漢) 나라 개국황제 유방(劉邦)은 농부의 아들로 성품이 활달하고 대범하다. 그는 진(秦)나라의 폭정에 반기를 들고 수하에 많은 인재를 두어 역전승으로 강적을 이기고 중국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한 왕조를 세웠다.
유방은 군사적 재능에서 한신(韓信)에 미치지 못하고 전략제정에서는 장량(張良)보다 못하며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는 소하(蕭何)를 따르지 못했다. 하지만 유방은 사람의 능력을 잘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잘 임용하는 능력을 가졌으며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실패를 딛고 성공에 이르는 굳은 의지도 갖추었다.
유방은 중국 역사상 많은 제일을 창조했다. 그는 중국 최초의 서민 황제이고 중국 최초로 부담의 경감, 생활의 안정, 원기의 회복을 국책으로 정해 경제발전에 주력했으며 중국 최초로 전국적 범위에서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를 임용하는 황명을 내렸다.
최초의 서민황제 유방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건국 축하연에서 과거를 돌아보다
소하(蕭何)가 주관한 미앙궁(未央宮)이 완공되었다. 한나라 황제 유방이 국도 장안(長安)에 이르러 바라보니 동쪽에 창룡궐(蒼龍闕)이 있고 북쪽에 현무궐(玄武闕)이 있으며 앞쪽에 대전(大殿), 왼쪽에 무고(武庫), 오른쪽에 태창(太倉)을 둔 미앙궁은 그토록 찬란하고 화려하며 규모도 웅장했다.
유방이 화를 내며 소하를 꾸짖었다.
“천하가 아직도 어지럽고 몇 년째 전란이 이어지며 승패가 정해지지 않았는데 이렇게 대 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황궁을 신축하다니 과하지 않소?”
소하가 대답했다.
“바로 천하가 아직 평안하지 않기에 대대적으로 황궁 공사를 해야 합니다. 하물며 천자(天子)는 사해(四海)를 집으로 삼는 법이니 황궁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황제의 권위를 보여줄 수 없습니다. 또 이렇게 한 번에 완벽하게 축조하면 우리의 자손들이 확장하는 수고를 덜어줄 수 있습니다.”
유방은 소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불쾌감을 거두고 얼굴에 흐뭇한 기색을 드러냈다.
장안에 도읍을 정한 후 한고조(漢高祖) 유방은 미앙궁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군주와 신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술잔을 나누며 즐기는 중에 유방이 입을 열었다.
“모두들 짐을 속이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시오. 짐이 하나 물읍시다. 짐은 어떻게 되어 천하를 얻을 수 있었고 항우(項羽)는 무엇 때문에 천하를 잃게 되었소? ”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먼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성격이 산만하시고 욕을 즐기시는데 항우는 자애롭고 사람을 동정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사람을 파견해 성을 공격하고 땅을 빼앗은 다음 그 땅을 공신에게 주어 세상 사람들과 이익을 함께 나누십니다. 항우는 현명한 사람을 시기하고 능력자를 의심하며 싸움에서 타인의 공을 기억하지 않고 땅을 얻어도 공신들과 나누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항우가 천하를 잃은 원인입니다.”
“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오. 장막 안에서 전략을 제정하고 천리 밖에서 승부를 결정하는 데서 짐은 장량(張良)보다 못하오. 또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위로하며 식량을 공급하는 데서는 소하(蕭何)에 미치지 못하오. 그리고 백 만의 군대를 지휘해 싸움마다 이기고 공격하기만 하면 탈취하는 데서는 한신(韓信)을 따르지 못하오. 하지만 짐은 이 세 명의 영웅호걸을 잘 임용하고 그들의 특기를 잘 발휘하게 했기 때문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소. 항우는 범증(范曾)마저도 제대로 임용하지 못했으니 이는 바로 그가 짐에게 패한 이유요.”
유방은 옥으로 만든 술잔을 들고 태상황(太上皇)의 복을 기원하고 나서 농담조로 말했다.
“애초에 부친께서는 늘 제가 가문에 도움이 안 된다고, 둘째 형이나 큰 형처럼 가산을 모을 줄도 모른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나의 가산을 둘째 형이나 큰 형과 비하면 누구의 가산이 더 많습니까?”
신하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폐하십니다. 천하의 가산이 모두 폐하의 것입니다! 하늘 아래 폐하의 땅이 아닌 것이 없고 이 세상에서 폐하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폐하의 가산은 비할 사람이 없습니다!”
태상황도 크게 웃어 모두들 즐거움에 휩싸였다.
이날 저녁 유방은 용상(龍床)에서 총애하는 척희(戚姬)를 품에 안고 말했다.
“과거에 패(沛)현에서 사수정장(泗水亭長)으로 있을 때 수중에 돈이 조금만 있으면 술을 마시거나 벗을 도와주어 나의 주머니는 늘 텅텅 비었었소. 그래서 살림할 줄 모른다고 늘 부친의 꾸중을 들었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소. 여치(呂雉)의 부친이 누구의 원한을 사서 패현 현령을 찾아 가족을 거느리고 패현으로 와서 패현의 유지들이 모두 귀한 손님이 현령을 찾아왔다는 소식을 알고 찾아가서 축하를 했소. 그 때 소하는 패현 관아의 재정을 담당하는 작은 관리였는데 이렇게 선포하더구만. ‘축하 예물이 천 전(錢)에 달하지 못하는 손님은 댓돌 아래에 자리를 잡으라’고 말이오. 나는 돈 한 푼 없었지만 ‘만 전을 내겠소’라고 말하며 댓돌 위에 올라섰소. 그런데 여공(呂公)이 나를 보더니 크게 놀라며 급히 몸을 일으켜 나를 맞이해서 상석에 앉히는 것이 아니겠소. 그 때 소하가 웃으며 ‘유방은 큰 소리만 치고 이루는 일은 없다’고 비웃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시치미를 떼고 상석에 앉아 술을 마셨소. 잔치가 파한 후 여공이 특별히 나를 따로 불러 이렇게 말하더구만. ‘나는 관상을 볼 줄 알아서 많은 사람의 관상을 보았는데 자네처럼 귀한 관상은 처음일세. 부디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게.’내가 이상해서 ‘어떻게 기이한 관상이냐’고 물으니 여공은 ‘목이 길고 콧마루가 높은 용안의 상이라 고귀함을 말할 수 없네’라고 대답했소. 그 말에 내가 웃자 그는 또 ‘나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자네의 아내로 내주지’라고 말해서 나는 여치와 혼인을 하게 되었소. 여공이 당신의 부친이었더라면 좋았을껄.”
척희가 대꾸했다.
“저의 부친께서는 관상 볼 줄 모르세요. 그리고 저의 부친은 그 때 그런 폐하를 만나셨더라도 아마 저를 허락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 때 그런 내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오늘의 내가 있겠소?”
“폐하께서 뜻을 이루신 것이 그 때의 폐하 덕행과 관계되는가요?”
유방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오. 그 때 나는 의리를 지키는 덕행을 갖추었소. 그 해 나는 관아를 대신해 인부들을 데리고 여산(驪山)으로 가는데 도중에 여러 사람이 도주했소. 그래서 여산에 이르면 태반이 도주할 거고 그러면 나는 처형당할 것임을 알았소. 그럴 바엔 아예 인부들도 놓아주고 나도 도망치자고 생각해서 풍(豊)현의 호숫가에서 인부들에게 ‘우리는 여산으로 가지 않습니다. 여기서 각자 살 길을 찾아 가시요. 나도 내 갈 길을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소. 그랬더니 많은 인부들이 ‘우리는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생사를 함께 하겠습니다’라고 말해서 우리 같이 혈주를 마시고 의형제를 맺고 망탕산(芒碭山)으로 도주했소. 우리가 호숫가의 오솔길을 따라 가는데 큰 뱀이 앞길을 막아서 나는 취기를 빌어 검을 빼서 뱀을 두 동강 내버렸소. 그리고 계속 길을 가는데 뒤에서 오던 한 사람이 나를 쫓아와서 한 할머니가 금방 내가 뱀을 죽인 그 곳에서 울면서 백제자(白帝子)라고 하는 자신의 아들이 금방 적제자(赤帝子)의 검에 의해 두 동강이 나서 죽었다고 말했다는 것이오. 또 할머니는 말을 마치자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했소. 그 말에 모두들 내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며 더 목숨을 내걸고 나를 따르게 되었소. 얼마 지나지 않아 진승(陳勝)이 대택(大澤)향에서 난을 일으켜 많은 현의 민중들이 현령을 죽이고 진승에 호응했소. 그 바람에 패현의 현령은 두려워서 스스로 진승을 따르기로 했소. 패현의 작은 관리로 있던 소하와 조참(趙參)이 진 왕조의 현령은 호소력이 없어서 대중들이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소. 그래서 현령은 나의 동서인 번쾌(樊噲)를 망탕산에 보내 나를 불러 두령으로 하게 했소. 그 때 나는 백 명에 가까운 사람을 거느리고 있었거든. 하지만 내가 패현에 도착하기도 전에 현령은 나를 부른 것을 후회해서 성문을 닫아걸고 소하와 조참을 죽이려 했소. 소하와 조참은 몰래 성을 넘어 나를 찾아왔고 나는 현령을 제거하고 의병에 호응하라고 호소하는 내용의 서신을 써서 화살에 묶어 성안으로 쏘게 했소. 나의 서신을 읽은 성안의 백성들은 과연 현령을 죽인 다음 성문을 열어 나를 맞이하면서 나보고 현령을 하라고 했소. 하지만 나는 현령을 하지 않고 사람들을 거느리고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소. 그랬더니 모두들 나를 패공(沛公)이라 부르면서 내가 바로 적제자(赤帝子)라고들 말하더군. 그래서 나는 붉은 적기(赤旗)를 군기로 만들고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나라 반대의 대업을 시작했소. 말해보오. 내가 의롭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이 나를 따랐겠소?”
유방의 말에 척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폐하의 덕행이 바로 폐하의 운명이시군요!”
말을 마친 척희가 머리를 돌려 유방을 바라보니 그는 벌써 코를 골고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