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시집 제2권 / 시류(詩類)
讀原州興法寺碑[독원주흥법사비]
[高麗太祖所製。集唐太宗所書字]
원주(原州)의 흥법사비(興法寺碑)를 읽다.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지은 것인데,
당 태종(唐太宗)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였다.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唐宗宸翰動龍螭。당종신한동룡리
麗祖奎章幼婦辭。려조규장유부사
今日誰敎傳墨本。금일수교전묵본
摩挲不覺鬢成絲。마사불각빈성사
당 태종의 글씨는 용이 꿈틀거린 듯하고
여 태조의 문장은 유부의 말과 흡사하네
오늘날엔 누가 그 탁본을 세상에 전해서
만지는 순간 귀밑털이 흰 걸 느끼게 할꼬
唐宗당종=당태종. 宸집 신.대궐 신.
宸翰신한=임금이 직접 쓴 문서나 편지.
螭=교룡 리, 교룡 치.
麗祖려조=고려태조.
奎章규장=임금이 쓴 글씨나 시문.
幼婦辭유부사=삼국지에 양수가 한 말로 전해오는 말.
황견유부(黃絹幼婦)외손제구(外孫濟臼)
‘황견유부’의 ‘황견(黃絹)’ 은 얼굴빛이 나는 실입니다.
실에는 색이 있으니 두 글자를 붙이면 ‘끊을 절(絶)’ 자가 됩니다.
또 ‘ 유부(幼婦)’는 나이 어린 여자아이이니 둘을 합치면
‘묘할 묘(妙)’가 됩니다. 즉 황견유부에는 ‘절묘’하다는 뜻이
감춰져 있습니다. 또 ‘외손제구’의 ‘외손(外孫)’ 은 딸이
낳은 아들이니 합치면 ‘좋을 호(好)’가 되고, ‘제구(濟臼)’ 는
다섯 가지 짜고, 맵고, 신 음식을 담는 그릇이니
‘담을 수(受)’에 ‘ 매울신(辛)’ 자를 쓰면 ‘말씀 사(辭)’가 됩니다.
곧 외손제구는 좋은 말이란 뜻의 ‘호사(好辭)’ 가 됩니다.
‘절묘호사(絶妙好辭)’, 즉 절묘하게 잘 지은 글이라는 뜻으로
한 단순의 글을 칭찬한 말입니다.
摩挲마사=.쓰다듬다.어루만지다.손으로 매만져서 구김을 펴다
摩=문지를 마. 속자(俗字)擵. 挲=주무를 사. 만질 사. 挱와 同字.
鬢빈=살쩍. 귀밑 털.
[주-D001] 유부(幼婦)의 말 :
후한(後漢) 때 채옹(蔡邕)이 조아비문(曹娥碑文)을 보고는 그 비석(碑石) 배면(背面)에다
은어(隱語)로 황견유부외손자구(黃絹幼婦外孫齍臼) 여덟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뒤에 양수(楊脩)가 이것을 해석하기를,
“황견은 색사(色絲)이니 글자로는 절(絶) 자가 되고,
유부는 소녀(少女)이니 글자로는 묘(妙) 자가 되고,
외손은 여자(女子)이니 글자로는 호(好) 자가 되고,
자구는 매운 맛을 받는 것이니 글자로는 사(辭) 자가 되므로,
이른바 절묘호사(絶妙好辭)라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뛰어난 문장(文章)을 의미한다.
[주-D002] 오늘날엔 …… 할꼬 :
황정견(黃庭堅)이 오계(浯溪)의 마애비(磨崖碑)에 제(題)한 시에,
“평생에 반생 동안을 탁본만 보아오다가,
석각을 어루만지는 지금은 귀밑털이 희었네.
〔平生半世看墨本 摩挲石刻鬢如絲〕”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4
흥법사興法寺-흥법선원(興法禪院)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516-2,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흥법시지길 128 .
흥법사는 통일신라의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 태조 왕건의 명으로
924년경에 크게 중창한 바 있다. 그 후 왕사였던 진공대사(眞空大師) 충담(忠湛, 869~940)이
입적 시까지 머물렀는데 태조 왕건이 직접 찬술한 진공대사의 탑비가 남아 있다.
탑비에 기록된 당시의 사찰 명칭은 흥법선원(興法禪院)이었다.
현재 흥법사지 동남쪽 250m 지점에는 섬강이 흐르고 있다.
사지 진입부에는 축대를 쌓아 단을 만들었으며 이 축대 뒤편으로 넓은 평탄지가 펼쳐져 있다.
평탄지 중심부에는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고 석탑 뒤편으로 진공대사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있다.
탑비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 왕건은 흥법선원을 중건한 뒤 충담을 주지로 임명하였다.
충담은 경명왕 때 신라의 국사에 책봉된 심희(審希, 835~923)의 제자인데 890년대에 입당 유학하였고 918년 귀국한 후 태조 왕건으로부터 왕사에 봉해진 고승이다. 충담이 흥법사의 주지로 임명되어 부임한 시점은 대략 922~924년경이다. 그는 부임 후 흥법사에 머물면서 친궁예 세력의 영향력이 여전히 잔존해 있었던 원주지역을 교화하는 데 노력하다가 940년 7월 입적하였다. 충담이 입적 직후 승탑이 바로 건립되었으며 탑비는 그다음 해인 941년에 조성되었다. 탑비는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지었으며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하여 비석에 새겼다. 태조의 재위 기간에 작성되거나 건립된 승려들의 비문과 탑비는 총 11건인데 이 중 유독 진공대사탑비만 태조가 직접 찬술하였다. 태조가 충담의 비문을 직접 찬술한 이유는 충담이 봉림사의 법맥을 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등장을 알리고자 하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는 동시대의 다른 탑비와 다르게 역동적이며 강건하게 조성되었는데 이러한 미적 감각은 괴량감 넘치는 힘을 보여주는 논산 개태사 석조삼존불상의 상징성과 통한다. 두 작품 모두 새로운 왕조 출범의 충만한 기상과 활력 넘치는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다.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은 후백제 유민들에게, 그리고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는 신라의 유민들에게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출범을 알리고자 하는 상징적 의미가 각각 내포되어 있다. 흥법사는 강원도와 경상도 일대의 사람들이 개경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충주를 거쳐 가지 않는 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 자리 잡은 사찰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특성으로 인해 흥법사는 고려 초기 국가적 관심 하에서 중창되었으며 태조 왕건이 직접 찬술한 탑비가 건립되었던 것이다.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
서익진(徐益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서의(徐義)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이다.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자형(姉兄)이 최항(崔恒)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조수(趙須)·유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으며,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에까지 관통하였다.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박사·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고, 1447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지제교 겸 세자우정자(知製敎兼世子右正字)로 승진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부교리(副校理)에 올랐다.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從事官)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이 되고,
1456년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일찍이 조맹부(趙孟頫)의 「적벽부(赤壁賦)」 글자를 모아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해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57년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
우사간·지제교에 초수(招授)되었다. 1458년 정시(庭試)에서
우등해 공조참의·지제교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옮겼다.
세조의 명으로 『오행총괄(五行摠括)』을 저술하였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과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서거정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65년 예문관제학·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쳐,
다음 해 발영시(拔英試)에 을과로 급제,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급제해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특가(特加)되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에도 참가하였다.
1467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성균관지사를 겸해 문형(文衡)을 관장했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서거정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 1)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474년 다시 군(君)에 봉해지고 좌참찬에 복배되었다.
1476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는데,
수창(酬唱: 시로써 서로의 마음을 문답함)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해 우찬성에 오르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공편했으며,
1477년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다음 해 대제학을 겸직했고,
곧이어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이 해 『동문선(東文選)』 130권을 신찬하였다.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 제도에 의거해 문과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
향시(鄕試)에서 일곱 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 『오자(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찬진하였다.
1481년 『신찬동국여지승람(新撰東國與地勝覽)』 50권을 찬진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으며,
이 해 『동국통감(東國通鑑)』 57권을 완성해 바쳤다.
1486년 『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 사관(史官)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논어(論語)』를 강했으며, 다음 해 죽었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 23년 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관장해 많은 인재를 뽑았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四佳集)』이 전한다. 공동 찬집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문선(東文選)』·『경국대전(經國大典)』·
『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가 있고, 개인 저술로서 『역대연표(歷代年表)』·
『동인시화(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필원잡기(筆苑雜記)』
·『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서거정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서거정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동문선(東文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했는데, 서거정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