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퍼즐을 맞추다
낙산사를 나오니 바로 해수욕장이다. 하얀 모래사장에는 이른 계절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수십년 만에 와 보는 낙산해수욕장인데 옛날과는 전혀 다르다. 해변가에는 식당이며 상점들이 즐비하다. 나는 아침 겸 점심으로 동해안 명물인 섭국을 먹었다. 지금껏 나는 섭과 홍합이 같은 것인줄 알았다. 내가 섭을 맛본 것은 1995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였다. 아직 개방되지 않았던 금강산을 관광하는 날 점심을 해금강 삼일포 식당에서 먹었는데 섭죽이라는 음식이 나왔다. 전복죽같이 생겼는데 색갈이 붉고 고소하다. 내가 그곳 지배인에게 음식 이름을 묻자 그는 금방 설명할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지 머뭇거리다 남조선에서는 홍합이라고 한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는데 식당 주인이 홍합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다른 조개라며 실물을 보여준다. 듣고 보니 생김새가 약간 다르다. 홍합은 껍대기가 매끈매끈한데 섭은 더 크고 표면이 까칠까칠하다. 주인 말로는 맛도 다르다고 한다. 삶으면 홍합보다 훨씬 더 고소하고 쫄깃쫄깃하다고 했다. 내가 북한에서 먹었던 섭죽은 전복죽과 같은 형태로 제공되었는데 이날 먹은 섭국은 계란을 풀고 부추, 미나리, 대파 등을 넣고 끓여 죽보다는 국에 가까웠다. 나는 이날 대한민국 최북단 통일전망대에 갈 계획인데 19년 만에 섭국을 먹으니 당시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시내버스로 속초에 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대진으로 향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강릉에서 통일전망대까지 해변도로를 따라 다닌 셈인데 해수욕장 구간을 제외한 해변에 설치된 철조망이 분단의 아픔으로 다가왔다. 북한은 더 심했다. 내가 북한에 간 것은 1995년 5월로 김일성 주석이 죽은지 1년도 안되던 때였다. 당시 북한은 그들이 말하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시기로 굶주림으로 주민 백만이 죽었느니 2백만이 죽었느니 하는 흉흉한 소식들이 전해지던 때다. 우리는 그 실상을 눈으로 확인하고 도움을 줄 방법을 찾기위해 미국 내 가톨릭 신자 12명과 열흘 일정으로 방문한 것이다. 당시 평화신문 미주지사장이던 안상인 신부가 단장으로 내가 총무격으로 북측과 일정을 조율했다. 그때 북한측은 일정에 원산, 금강산, 묘향산, 남포, 개성 등지의 관광을 넣었다. 금강산 도착 전날 우리는 밤에 원산에 도착했는데 시가지에는 불빛 하나없이 유령의 도시 같아 섬뜻했다. 송도해수욕장 여관에서 1박한 일행은 원산에서 금강산까지 해안도로를 버스로 달렸는데 높은 철조망 장벽이 겹으로 둘러쌓여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특히 북한쪽은 원산 송도해수욕장 외는 해변이 개방되지 않아 철조망이 남쪽보다 훨씬 길고 높게 세워져 있었다. 나는 이번 여행길에서도 동해안에 처진 철조망을 보면서 남북한 모두 이같은 흉물이 속히 없어지도록 기도했다. 짧은 시간에 본 속초는 내가 미국에 사는 동안 엄청난 규모로 발전했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속초가 더 이상 변방의 작은 도시가 아니다. 도심에는 고층아파트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고층 빌딩도 즐비했다. 대진행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에게 속초 인구를 물어보니 겨우 8만 명이 약간 넘는다고 한다. 왜 이렇게 대도시처럼 보이는지 알 수 없다. 도시가 넓게 퍼져있지 않고 도심에 몰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버스는 거진과 화진포를 거쳐 대진에 도착했다. 남한의 최북단 민간인 마을 명파리가 있는 곳이다. 속초에서 함께 버스를 탄 이 마을 노인은 몇년 전에는 금강산 관광객들이 드나들면서 돈을 뿌려 살림살이가 괜찮았는데 요즘은 남북관계가 얼어붙어 힘들어졌다고 푸념했다. 정류장에서 1킬로 떨어진 곳에 통일전망대 관람 신청장소가 있었다. 이곳에도 쇼핑센터가 있어 기념품들과 건어물 등을 팔고 있다. 이곳에서 인적사항을 기입한 신청서를 제출하고 입장료도 지불했는데 막판에 문제가 생겼다. 전망대까지 10킬로인데 민간인 통제구역이라 도보로는 갈 수 없다고 한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다. 다른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으니 다른 사람 차에 편승하거나 택시를 대절하는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 옆에서 지켜보던 중년부부가 자기들과 함께 가자고 한다. 수호천사를 만난 기분이다. 그들 부부와 일행이 되어 통행증을 받았다. 우리가 탄 차는 민통선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고 10분 만에 통일전망대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들 부부들이 재미있다. 이들은 49세 동갑내기라고 하는데 남자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부인은 지독한 전라도 사투리로 차에 오르자마자 티격태격 싸움을 시작한다. 여자는 연신 남자를 공격하는데 성질이 보통아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대들다가 가끔 나를 쳐다보면서 "오메, 저가 어르신 앞에서 요로콤하믄 안되는디 버릇없지라" 나는 이들의 하는 양이 귀여워 웃고만 있었다. 운전하는 남편은 별 대꾸도 없이 덤덤하다. 이들의 부부싸움은 이날 나와 헤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별난 사랑놀이다.
나는 전망대에 오르기 전 주변부터 돌아보았다. 한쪽에 성모상이 있고 위에는 대형 불상이 세워져 있다. 나는 이 성모상을 북한땅에서 보았다. 당시 해금강에는 망원경이 있었는데 안내원이 보라고 했다. 불상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얀 성모상이 조그맣게 망원경에 잡혔다. 나는 무었인지 대번 알겠지만 북한사람들이 무엇으로 인식하는지 보기 위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안내원은 "여신상입네다. 남조선 인민들은 아직 미신에서 벗어나지 못해 저기다 대고 빌고 있단 말입네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당시의 씁쓰레한 기억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긴다. 한반도 형태로 세운 돌비석이 보인다. 2010년 국민대표 33인 이름으로 세운 '조국통일 선언문' 비석이다. 3.1 독립선언문을 모방한 것 같은데 국민대표들이라고 새겨진 이름들이 낫설다. 내가 한국 사정에 어두운 탓이리라. 그런데 선언문 내용들은 대부분 북한을 꾸짖는 것들이다. 얼마든지 북한을 비난할 수 있지만 통일선언문 취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상호 비방으로는 화해와 통일은 더욱 멀어질 뿐이다. 또하나 기념비가 있다. 1984년 5월에 세웠다는 건물 정면의 커다란 '민족웅비탑'이다. 글귀가 재미있다. "전선의 최동북단 이곳에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국민의 단결된 의지를 심기 위하여 대통령 각하의 높으신 경륜을 받들어 이 탑을 건립한다." 나는 잠시 '높으신 경륜의 대통령 각하'를 생각한다. 오호라, 전 재산 29만원이라는 단군이래 가장 청빈한 각하를 말하는구나. 나는 이곳이 군 작전지역이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전망대에 오른다.
전망대 아랫층에는 현재 북한에서 사용하는 의류, 신발, 도자기, 술, 담배, 화폐, 교과서 등 다양한 생필품과 북한의 의식주와 경제, 군사, 교육, 언어 그리고 IT 산업까지 아우르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2층 전망대에서는 금강산 구선봉(낙타봉)과 해금강이 가깝게 보인다. 나는 실로 19년 만에 남북 양쪽에서 서로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북한 해금강에서 안내원을 따라 삼일포, 해금강, 총석정을 도는 코스를 구경했다. 총석종은 제주도 서귀포 주상절리처럼 기반암이 바닷물의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절경이다. 또한 내가 섭죽을 맛본 삼일포 호수도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이름난 곳이었다. 옛날 중국시인이 금강산을 노래하면서 '원생고려국일견금강산'(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 : 고려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이라고 했다. 나는 남북 양쪽에서 금강산의 퍼즐을 맞춘 셈이니 대한민국에 태어난 보람은 얻은 셈이다. 안내판에는 금강산의 신선대, 옥녀봉, 채하봉, 일출봉, 집선봉 등이 표시되었지만 흐릿하기만 하다. 전망대에서는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관통하는 고속도로와 함께 남북한 초소들이 빤히 보인다. 10년 전 개통한 남북연결 도로는 그동안 많은 금강산 관광객들이 오갔던 곳인데 당시 복구된 동해북부선 철도와 함께 지금은 거의 무용지물이다. 비무장지대 한 가운데 해안의 작은 섬 송도가 손에 잡힐듯이 보인다. 옛날 많은 시인들이 금강산 가던 길에 들려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곳이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루속히 조국이 평화통일되어 세계 중심국가로 우뚝 서는 날이 오기를 빌었다. 전망대 옆에는 통일을 기원하는 염원을 모아 세운 범종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전망대를 나와 다시한번 주변을 살폈다. 한쪽에 351고지 전투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휴전 직전 2년 간에 걸쳐 이 부근 월비산에서는 208고지, 351고지를 뺏고 뺏기기를 반복하다 휴전협정으로 중단된 전투로 양쪽의 많은 병사들이 죽었다. 전적비는 당시 산화한 국군들의 명복을 빌고 전공을 기리기 위해 1957년 3군단에 세워졌던 것을 88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런데 2001년 공군에서도 351고지 전투에 9백여 회 출격한 것을 기념하는 '공군 351고지 전투지원작전 기념비'를 세우고 당시의 F51 무스탕기를 전시했다. 이밖에도 전망대에는 여러 전적비들과 6.25 체험관이 세워져 관광객들에 대한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는 것 같았다. 이곳이 군사작전 구역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마치 우리가 염원하는 통일이 북진통일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어차피 전망대를 민간인들에게 개방한 이상 다시는 6.25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을 일깨우는 장소로 활용되기를 바래본다. 매점에서는 북한제 술과 식품, 화폐까지 판매되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투닥거리는 부부를 기다려 차에 올랐다. 주차장 옆에는 아름답게 단장한 열차식당이 있어 눈길을 끈다. 어김없이 무슨 드라마 촬영장소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다. 여자는 차안에서도 계속 남편을 들볶는다. 매점에서 물건파는 여자와 노닥거렸다는 것이 이유다. 내가 여자를 달래자 "어르신 앞에서 추태부려 죄송하당께요"하며 물러선다. 아까부터 '어르신'이란 말이 영 낫설게 들린다. 이들은 19살 때 결혼해 큰 딸이 29살로 손자까지 있다고 한다. 내가 화진포에 갈 일정인데 혹시 그곳 구경할 생각이면 내가 식사를 대접하고 안내하겠다고 하니 여자가 좋다고 환호성을 지른다. 어린애 소꼽장난을 보는 기분이다.
(2014.8.29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