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에서 희년을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며
지금이야 OTT(Over-the-top) 서비스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할 수 있지만 제가 학교 다니던 그 시절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TV에서 방영해 주지 않는 최신 영화나 만화를 보기 위해서는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야 했었죠. 그래서 당시엔 동네마다 꽤 많은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영화는 늘 ‘대여 중’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죠. 오색찬란한 옷을 입고 외계에서 온 악당들을 무찌르는 영웅들의 이야기였는데, 제 또래 사이에선 굉장히 인기가 많았거든요. 영웅들이 우여곡절 끝에 서로 힘을 모아 무지개 광선으로 괴물들을 물리치는 그 통쾌한 장면을 볼 때마다 저의 심장은 늘 두근거렸었죠. 소년들에게 그것은 ‘정의(正義)’,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착한 영웅들이 나쁜 괴물들을 무찌르는 것. 바로 그것이 정의였죠.
그런데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알게 되더군요. 착하게만 산다고 세상이 정의로워지는 것은 아니구나. 물론 착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아름다울 것입니다. 하지만 정이 넘치는 아름다운 사회와 정의로운 사회가 동의어는 아니더군요. 20세기 초, 독일에는 과연 ‘나쁜’ 사람들만 득실거려서 그렇게 유대인들을 괴롭혔을까요? 그보다 앞선 18세기 말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과연 ‘착한’ 평민들이 ‘나쁜’ 귀족들을 물리친 정의로운 사건이었을까요? 착한 사람이 많은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개개인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복잡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정의로운 사회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 고민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정의는 윤리적인 덕으로서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807항)
우리 교회가 바라보는 정의로운 사회란 과연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는 것이 ‘당연한’ 사회입니다. 착한 일을 한 사람이 바보 취급당하는 것이 아니라 상을 받고, 나쁜 일을 한 사람이 이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벌을 받는 사회, 바로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입니다. 이러한 당연한 것들을 위해 사람들이 싸우지 않아도 되는 사회, 바로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올해 희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희년의 중심에는 ‘해방’이 있죠. 이 해방은 바로 악습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잘못된 사회 구조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리고 이는 바로 ‘정의’로의 귀환을 의미합니다. 희년을 살아가는 오늘,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받아야 할 몫을 당연히 받는 그러한 정의로운 사회를 꿈꿔봅니다.
[2025년 3월 16일(다해) 사순 제2주일 수원주보 4면, 심재관 사무엘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