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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묵상글 ( 부활 제5주간 수요일, - 엄포가 아니고 진실인.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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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부활 제5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5.01 05:34
- 엄포가 아니고 진실인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오늘 주님께서는 주님 안에 머무는 사람,
자기 안에 주님을 모시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결론처럼 얘기하면 아무리 주님 안에 머물러도
주님을 자기 안에 모시지 않는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은
아무리 주님 안에 있어도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 인간은 싫건 좋건 주님 안에 머뭅니다.
그러나 무신론자가 주님을 자기 안에 모시지는 않지요.
그것은 공기 안에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공기 안에 있으면서도 공기를 들이켜지는 않는.
그런데 왜 주님을 자기 안에 모셔 들이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주님이 싫거나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다른 것을 더 좋아하고 사랑하여
그것이 내 안방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심지어 죽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주님 안에 있다는 것부터.
세상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사실은 세상도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좋다고 하셨다는 것도.
이것들을 깨달았어도 그다음 모셔 들이는 것이 뒤따라야 합니다.
아무리 이런 사실을 깨달았어도 주님을 모셔 들이기 싫다면,
앞서 봤듯이 그것은 공기 속에 있어도 공기가 싫은 것과 같고
바닷속을 휘젓고 다녀도 그 물을 들이켜기 싫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에 ‘죽어도 하기 싫어’라는 말이 있는데
주님을 모셔 들이는 것이 진정 죽어도 싫습니까?
그렇지 않겠지요.
죽어도 하기 싫다는 말은 과장법이고,
주님을 모셔 들이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셔 들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을 모셔 들이지 않아도 당장 죽지 않기에
주님이 내 안에 아니 계셔도 살 수 있고
젊었을 때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을 얘기하면 생명 연장이고 시간 유예입니다.
잘린 가지나 수액 공급이 끊긴 가지도
가지 안에 아직 남은 수액으로 생명 유지를 얼마간 하지요.
그런데 이것이 실은 주님의 시간 유예에 의한 생명 연장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드신 적이 있지요.
어떤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자 주인이 농부에게 그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농부가 한해만 시간을 더 주면 자기가 열매 맺게 해보겠노라고 청한다는
비유 말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시고 농부는 주님 당신 자신이시지요.
이 비유 말씀처럼 농부이신 주님은 우리를 깨우치려고 애쓰십니다.
온갖 비유와 말씀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 번째로 깨달아야 할 것은
당신을 모셔 들이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주님 말씀을,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주님 말씀을,
그저 엄포라고 무시하지 않고 정말 그런 것임을 깨달아야 하고,
깨달았다면 주님과 함께 주님 말씀도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주님 말씀은 엄포가 아니라 진실이고 진리임을
다시 한번 묵상하고 모시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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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옛날 사냥을 너무 좋아하는 어느 임금이 있었습니다. 이 임금이 어느 날 사냥 갔다가 손가락을 크게 다치게 되어, 곧바로 동행했던 주치의를 불렀습니다. 임금이 “어떤가?”라고 묻자, 주치의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지 나쁠지 누가 알겠습니까?”
얼마 후, 임금의 상처가 덧나서 다시 주치의를 불러서 괜찮겠는지를 물었습니다. 주치의는 정성껏 치료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을지 나쁠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임금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결국 손가락을 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금은 화가 나서, 이 돌팔이 주치의를 감옥에 가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치의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좋을지 나쁠지 누가 알겠습니까?”
몇 주 후, 임금은 다시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그곳에 사는 미개한 원주민에게 붙잡힌 것입니다. 원주민들은 임금을 자기들 신에게 바치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제사장이 임금의 손가락을 보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가만, 저 사람은 손가락이 하나 없다. 신께 바칠 제물이 불경하구나. 그냥 풀어줘라.”
풀려나면서 임금은 생각했습니다. 잘려진 손가락을 하나의 불행이고 시련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행복을 가져다주는 고마운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치의를 풀어주면서 말했습니다. “좋을지 나쁠지 누가 알겠느냐는 너의 말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대가 옳았다. 미안하다.”
의사는 “무슨 말씀입니까? 감옥에 가두신 것이 오히려 제게 좋은 일이었습니다. 만약 사냥에 따라갔다면 제가 제물이 되었을 테니까요.”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좋을지 나쁠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그 결과를 알고 계시겠지요. 그래서 주님께 더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만이 주님의 뜻을 새기면서 기다리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고 하시지요. 포도나무에 달린 가지처럼 참포도나무인 예수님과 하나 된 사람만이 하느님의 계획에 함께하면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주님 곁을 떠납니다. 섣부르게 판단하면서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삶을 섣부르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대신 주님 안에서 기다리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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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한 방향으로 깊이 사랑하면, 다른 모든 방향으로의 사랑도 깊어진다(안네 소피 스웨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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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오늘 <복음>은 “참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참”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서, 예수님의 진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참된 진리는 “참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 곧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관계’를 “붙어있다, 머물다, 열매 맺다”라는 세 가지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여덟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머물다”라는 단어입니다.
“머물다”라는 말의 의미는 오늘 <복음>에서 우선 “붙어있음”을 말합니다. 곧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서, 다른 데서가 아닌 바로 그 포도나무로부터 수액을 받아먹는 것, 그리하여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제자는 예수님께 ‘붙어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 맺으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비워드림이요, 그분의 말씀의 권능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허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참 생명’을 공유하고, 그분과 결합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오로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 분과 한 영이 된다.”(1코린 6,17)
그러기에, “머물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상호 불가분의 긴밀한 관계”로 ‘붙어있음’ 말합니다. 곧 “상호내주 혹은 상호공유의 관계”로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벌리는 역동적인 활동이 벌어지는 ‘상호 친교’요, ‘상호교제’요, ‘상호 교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가 그의 둘째 편지>에서 밝히듯,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 참으로 우리는 참 포도나무이신 그분과 이토록 신비롭게 결합되어 있고, 참으로 신비로운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며 활동하십니다. 바로 이 ‘공동본성’이 우리에게 신적 진리, 참된 진리를 가능케 하는 자리요, 사랑이 피어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공동본성”(Connaturality) 결합을 두고, 천사적 박사라 불렸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경탄하여 이렇게 탄성을 질렀습니다. “아, 우리가 하나라는 걸 그토록 모르는가?” 그리고 그는 공동본성에서 오는 사랑의 지혜를, ‘하느님 사랑으로 주어지는 신적 지혜’ 혹은 ‘관상’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신적 진리, 참된 진리에 참으로 머물러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을 오늘 <복음>에서 찾아본다면,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곧 가지는 나무에 속해 있을 뿐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곧 가지가 나무를 지탱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지를 존속시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그분께 승복하여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여 참된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
주님!
오늘도 십자나무에 붙어, 당신 사랑을 수혈 받게 하소서.
제 삶에 사랑의 피가 흐르게 하고, 그 사랑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처럼 십자나무에 붙어, 자신을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은 골고타 언덕에 심어진 참 포도나무.
당신만이 저의 혈관, 저의 숨통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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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뜻대로
우리는 흔히 기도한다고 하면 무엇을 청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무엇을 달라고 합니다. 나의 바람을 정해 놓고 그것을 꼭 이루어 달라고 하소연하고 내 것이 관철되었을 때 비로소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한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 하면서 내가 만든 ‘신념’이나 ‘가치체계’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안에 머물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실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성숙한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을 보면서 한 차원 더 높은 기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서문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제 영혼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어 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성모님의 사랑과 뜻에 일치하게 해 주소서…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도 자라시게 해 주소서…이 세상과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드리게 해 주시고……복되신 성 삼위의 영광 안에 살게 해 주소서….당신께서 저를 받아 주시고 저를 써 주시며 저의 나약함을 굳센 힘으로 만들어 주시리라 확실히 믿으며 다짐 하나이다.” 하고, 이어서 충실한 봉사와 규율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선서합니다.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봉헌의 기도요, 성령께 각별한 사랑을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주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효과적인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라고 매달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먼저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신 그분과 하나가 되려면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 성녀 마더데레사 수녀님은“나의 할 일은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심을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타인 지향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바람이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사랑으로 철저히 하나가 되셨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 스스로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열려있고 그분과 하나 되어 살아간다면 우리의 모든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그분과 일치의 상태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는 붙어있을 때 생명력을 지닙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몸통이 튼튼해야 가지의 열매도 튼실합니다. 포도나무는 전체고 가지는 부분입니다. 부분과 전체는 나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사랑’과 ‘순명’입니다. 우리의 관계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의 명을 좇지 않는다면 그는 참 제자가 아닙니다.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좇아 살다 보면 우리 인생에 알찬 열매가 맺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원하는 바를 다 이루시길 바랍니다.
“아버지, 제가 기도할 때 더 많은 것을 바라고 구하기보다 문간에 있는 것들, 곧 먹을 것과 마실 것, 부드러운 비, 드맑은 하늘, 가정과 친구, 평화와 기쁨, 무엇보다 사랑에 감사하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모든것은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하고 기도하며 오늘을 봉헌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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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96년 스페인 성지순례를 갔을 때입니다. 자유시간이 주어졌고, 모임 장소로 말 동상이 있는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자유시간을 보내고, 말 동상이 있는 광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일행이 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확인하니, 그곳에는 말 동상이 있는 광장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성격이 급한 저는 말 동상이라는 말만 들었고, 그 다음 말은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성당 옆의 말 동상이 있는 광장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비슷한 실수가 있었습니다. 성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있는 ‘샌디에고 꼼뽀스텔라’엘 갔습니다. 자유시간이 주어졌고, 모임 장소로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저는 자유시간을 보내고 광장에서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되어도 사람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성격이 급한 저는 광장이라는 말만 들었고, 그 다음 말은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성당 앞의 광장이 아니라, 성당 아래에 있는 광장이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광장이 서로 가까이 있었던 것입니다.
과학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인류는 ‘천동설’을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였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온 우주가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찌 보면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생각입니다.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이면 해가 지니 당연히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도 ‘천동설’이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온 우주에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지구에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오 갈릴래이와 같은 과학자는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과학자는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우주는 훨씬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구는 우주에 떠 있는 아주 작은 먼지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을 단죄하였습니다. 천동설이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동설’이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주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을 만큼 크고, 장대했습니다.
초대교회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할례’에 대한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할례’를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할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에서 개종했던 사람들은 ‘할례’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초대교회는 할례가 신앙인이 되는 필수조건인지 고민했습니다. 다른 민족에서 개종했던 사람들은 할례의 의미도 몰랐고, 할례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문제로 ‘음식’에 대한 것도 있었습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했던 사람들은 ‘음식’에 대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부정한 음식에 대한 규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민족에서 개종했던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몰랐고, 음식에 대한 규정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초대교회는 고민을 하였고, 예루살렘에 모여서 회의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공의회입니다.
교회는 ‘할례’와 ‘음식’에 대한 모세의 율법을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제가 찾았던 광장이 모임 장소가 아니었듯이,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었듯이, 할례와 음식은 구원을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유대교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방인들에게 유대교의 율법과 계명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이었습니다. 제도와 관습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제도와 관습을 뛰어 넘는 사랑과 믿음 그리고 희망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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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내 안에 머물러라.’라는 말씀은 참으로 멋진 말인 것 같습니다. 이런 표현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로맨틱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랑은 내 마음 안에 누군가를 받아들였을 때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누군가의 마음에 내가 들어가 머무르기 시작하면서 사랑은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시작은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머무를 때 시작됩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머무르게 되면 서로를 생각하게 됩니다. 서로를 걱정하게 되고 한 사람이 아프면 다른 사람의 마음도 아프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으로 부모와 자녀는 이어져 있습니다. 이런 사랑으로 주님과 우리가 이어져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내 안에 머무르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한쪽이 머무르기를 포기하면 그 사랑의 끊은 끊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그런 주님을 모르는 체하거나 지나쳐 버립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도 이어가지 못하고 말라 버리는 분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이는 분명 처음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니 이내 그 끈이 끊어져 말라 버린 것일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세례로 이어진 주님과의 끈을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늘 주님 안에 머무르려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늘 주님은 우리에게 삶의 양분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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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림자는 있다.
빛나는 사람 뒤에는 어둠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빛나는 사람이 어둠을 감추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빛나는 사람의 과거에는 시련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 시련과 고통이 지금의 이 사람을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듭니다.
시련과 고통은 사람을 발전하게 만듭니다.
시련과 고통은 사람의 내적 성장을 이룹니다.
텔레비전에 화려하게 등장하는 모든 스타는 모두 시련과 훈련의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빛나고 있는 사람들 또한 그들이 지나온 삶 안에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거 아세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빛나고 있다는 것을요. 우리가 지나온 길들이 우리를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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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안에 머물러라”
-관상기도의 훈련과 습관-
어제 4월의 끝은 오늘 5월 성모성월의 시작입니다. 신록으로 빛나는 파스카 축제가 계속되는 5월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11월 배밭 농사가 끝나면서 시작된 전지와 거름 구덩이를 보면서 끝은 새로운 시작임을 깨달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1998년 26년전 당시는 거름을 구덩이에 넣었으며 그때 이를 보며 써놨던 시입니다.
“살수록 힘들구나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루하루 산다
다시 시작된 배농사
가지런히 파진 구덩이
든든하다
끝은 시작이다
삶은 엄숙하다
삶은 반복이다
새로운 반복, 거룩한 반복이다
묵묵히 생명의 품되어
흙으로 산다.”-1998.11.1
흙처럼 겸손히 살라고 사람입니다. 사람(homo)과 겸손(humilitas)의 어원이 흙(humas)에서 기원합니다. 하루하루 산다는 생각은 이미 수도원 초창기부터 였습니다. 이때는 잘살고 못살고가 아닌, 하루하루의 생존(生存)이,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더불어 제가 늘 되뇌이는 지론도 생각납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절망의 자포자기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다. 넘어지면 곧장 다시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끝이 새로운 시작이듯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파스카의 삶이다.”
바로 파스카의 축제시기이자 신록의 계절 성모성월인 5월의 삶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5월 교황님의 기도지향은 “남녀 수도자의 양성에 대해서”인데 수도자뿐 아니라 평생,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교회의 사람, 신자가 되어가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싶어 일부 나눕니다.
“양성은 특별한 한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생 지적으로, 인간적으로,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계속 통합시켜 가는 과정이다. 준비는 공동체 안에서의 삶을 통해 계속된다. 공동체내에서의 삶은 비록 때로 힘들지라도, 매우 풍요롭다. 더불어 삶은 공동체내에서의 삶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 획일성의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의 일치이다. 성소의 여정중에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기도하자.”
비단 성직자,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자기 성소의 여정에, 참 신자가, 참 사람이 되는 가는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해야 함을 배웁니다. 평생 성소의 여정, 교육의 여정, 양성의 여정에 매일미사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더불어 성소의 여정에 오늘 복음은 참 적절한 도움이 됩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무수한 가지들이 하나로 붙어있는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이 상징하는바 교회의 한몸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참 포도나무 공동체입니다. 흡사 배밭 전지가 연상됩니다. 공동체이든 개인이든 주님과 함께 끊임없이 내외적 ‘삶의 가지치기(전지;剪枝)’를 통해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고 삶을 단순화해야 함을 배웁니다. 중심을 잃고 무질서한 삶중에 내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습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 대목을 묵상하면서 저는 제가 오랫동안 해왔고 때로 지도해왔던 명상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는, 더 구체적으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집중적 관상의 훈련이 바로 명상기도요 명상기도의 습관화가 우리를 내외적으로 단순하고 순수하게 해주고 주님과의 일치, 공동체와의 일치, 나와의 일치를 견고히 해준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 사랑안에 머무르는 관상기도와 더불어 위로와 치유, 정화(淨化)와 성화(聖化), 일치와 성장이요, 주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의 일치와 더불어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힐링에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관상 수행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어지는 대목이 주님 안에 머무름은 그대로 기도임을 깨닫게 됩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이다.”
주님 사랑안에 깨어 머무르는 관상기도중 강조하는 것이 하느님 말씀인 성구를 호흡에 맞춰 반복하라는 것입니다. 많이 강조하는 성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비송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네 단락의 성구를 호흡에 맞춰 소원을 담아 기도로 바친다면 그 사랑의 기도는 다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관상기도의 집중적 훈련과 습관화가 요즘 물질주의, 활동주의에 빠져, 삶의 중심을 잃고, 자기를 잃고 뿌리없이 표류하는 불행한 현대인의 치유에 참으로 필요한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참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이나 희망이자 길이자 생명이자 진리이자 빛이신 주님을 잊었기,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혼이 “살기위해” 이런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관상기도는 절박할 수 뿐이 없습니다.
넓이보다도 깊이를, 모으기 보다는 비움을, 행함의 기쁨보다는 존재의 기쁨을 , 주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참으로 우리에게 초연한 자유를 선사하는 관상기도훈련입니다. “세상 안”에 머물러 표류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 중심에 날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관상기도입니다. 우리의 정주생활에 참 좋은 도움이 되는 관상기도입니다.
율법이 아닌 사랑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참으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수련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뿐 아니라 지혜로운 분별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가며 오늘 사도행전에서 제기되는 할례의 문제도 말끔히 해결될 수 있습니다.
결론하여 율법을 지켜서, 할례를 받아서 구원이 아니라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올바른 분별의 지혜를 발휘해야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예루살렘 모교회의 파견했고 사도들과 원로들은 사랑의 분별, 분별의 지혜로 답을 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봉헌하는 미사은총이 주님 안에서 공동체의 일치를 견고히 해주고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며 살게 합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랑의 관상기도 시간이 바로 우리가 평생 날마다 바치는 이 거룩한 미사와 더불어 시편공동전례기도요, 관상의 일상화, 관상의 생활화를 이뤄주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요한15,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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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일하는 사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55)
일하는 사람이
거룩한 까닭은
일하시는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아름다운 까닭은
창조질서를 아름답게
가꾸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진실한 까닭은
땀 흘려 일한만큼
거두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놀라운 까닭은
나날이 스스로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소중한 까닭은
몸과 맘으로 벗들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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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부활 제5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2)
영적 열매는 실천으로 완전해진다
사랑에서 나오는 선행으로 우리 결합의 끈을 단단히 묶지 못하고 단지 말로만 믿음을 고백할 때 도달하는 결합의 모습을 보인다면, 우리는 실로 가지이기는 하지만 열매가 달리지 않은 죽은 가지일 것입니다. 성인의 말대로, 실천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20 참조). 따라서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한 채 포도나무 몸통에 달려 있다면, 그런 사람은 농부의 낫에 잘릴 것입니다. 농부는 죽은 가지들을 모두 잘라 내어 쓸모없는 쓰레기처럼 태워 버릴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만물은 하느님이 품은 상에 따라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리고 지혜와 선은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을 본떠서 특별한 방식으로 지어졌다. 반면에 영혼은 그 이상으로 지어졌고 더 하느님을 닮아 있다.
영혼만이 하느님 자신의 형상대로 지어졌고, 그분의 본성, 그분의 존재, 그분의 흘러나옴과 동시에 안에 머무름, 그분이 거주하는 터전을 본떠서 그분의 형상대로 지어졌다. 우리는 하느님이 품은 상을 본떠서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지기도 했다. 엑카르트는 이 사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들에 거의 넋을 잃는다. 왜 영혼은 하느님을 닮았는가? 실로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영혼은 그분의 존재, 그분의 일, 그분이 거주하는 터전, 그분이 아들을 낳고, 성령이 꽃피어나는 터전을 본떠 신적 본성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162)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4절: 서구의 새 정신
재속 성직자의 개혁:
재속 성직지들도 개혁에서 제외되어 있지는 않았다. 최근의 연구는 11∼12세기 참사회원들의 개혁운동이 얼마나 강하였고, 그것이 얼마나 모든 재속 성직자들에게 사제 정신의 참된 그리스도교적 쇄신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가를 명백하게 해주었다.
우선 주교좌 성당과 공주 성직자단 성당의 참사회원들이 이 운동으로부터 감동을 받았다. 독립된 외부 본당이 아직 적었고 성직자의 대다수가 공동기도를 위하여 주교좌 성당이나 최초의 본당인 교구의 중앙성당에 집중되어 살던 시기에, 이 공주 성직자단의 참사회원들을 위한 좋은 생활 규정을 발견하는 것이 그만큼 더 중요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히포의 주교로서 자신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성직자들에게 일정한 규칙을 만들어 주었다. 그후 이러한 생활방식은 “수도자 신분”에 상응하여, “참사회원 신분”으로 불렸다. 여기에서 사도들을 본받는 “공동생활”이라는 원시 그리스도교적 이상이 보였다. 참사회원들에게는 수도자들처럼 사유재산이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수도선서를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공동생활은 지도자에 대한 광범위한 위계와 순명을 요구하였다. 그렇게 해야만 주교좌 성당이나 교구 중앙성당에서의 특별히 장엄한 전례의 접전이 보증될 수 있었다.
더 자유로운 성직자 공동체는 쉽게 해체될 수 있었으므로, 새로운 개혁의 노력이 끊임없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보니파시오와 카를 대제는 개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메츠의 주교 크로데강은 768년에 새 참사회 규칙을 작성하였다. 805년의 법령은 프랑크 왕국의 모든 성직자들이 수도자적으로, 즉 수도생활올 하든지 아니면 “참사회적”으로, 즉 공주 성직자단에서 생활해야 할 것을 요구하였다. 루드비히 경건왕은 816년에 아헨에서 고유한 법규를 공포하였다. 불행히도 이 개혁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고, 곧 카롤링거 왕조 해체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멸되고 말았다. 9세기와 10세기에 주교좌 성당과 공주 성직자단 성당의 공동재산은 개별 교회록으로 분할되었고, 따라서 공동생활도 중지되었다.(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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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부활 제5주간 수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 담화’(요한 13-17장)의 한 부분입니다.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써, 당신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본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연이어 나오는 ‘깨끗하게’ 또는 ‘깨끗이 하다’라는 낱말입니다.
2절의 “깨끗이 손질하시어”로 옮긴 그리스 말 동사 ‘카타이로’는 3절의 “깨끗하게”(‘카타로이’)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가지를 쳐 내어 깨끗이 손질할 필요가 있듯이, 구원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내면의 가지치기로 깨끗해져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작업이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이 선언은 유다인들의 통념과는 다른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을 제시하는 중대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가 깨끗해지고 구원됨을 알리기 때문입니다.
독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 ……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초대 교회가 정리하여야 하였던 ‘구원관 논쟁’이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사실 독서가 보여 주듯 유다인들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선언하십니다.
외적인 표식(할례)이나 율법의 준수가 한 인간의 삶과 생명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이신 “참포도나무”이시기에, 우리는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간직하며 실행함으로써 깨끗해지고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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