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아래 첫 이랑 드넓은 초록 바다 땀으로 일군 풍경
광활한 밭… 깊은 숲… 인간이 만들어낸 장엄한 자연
강원 강릉시 왕산면 대기4리. 고루포기산과 옥녀봉을 잇는 해발 1100m 능선쯤에 산이 배추밭이고, 배추밭이 곧 산이 된 ‘안반데기’가 있다. 언젠가 사석에서 안반데기 이야기를 꺼냈다가 “그곳에 가면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광활한 배추밭’이라고 답했더니 웃음이 터졌다. 아마도 ‘광활한 배추밭’이 구경거리가 될 수 있다는 데 선뜻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배추밭도 풍경이 된다. 늦여름에서 가을로 넘어서는 딱 이즈음 안반데기에 가 보면 알게 된다. 구름이 수시로 넘나드는 산자락을 끼고 가장 높은 능선 60만평을 가득 메운 배추밭이 얼마나 장관의 풍경이 되는지를….
안반데기를 가자면 먼저 ‘가는 길’의 정취부터 설명하는 것이 순서겠다. 평창과 강릉의 딱 경계쯤에 있는 안반데기에 가려면 평창에서는 피덕령을, 강릉 쪽에서는 닭목령을 넘어야 한다. 안반데기는 해발 1100m에 달하지만 가는 길은 높이만큼 가파르거나 험하지 않다. 대개 출발지로 삼는 평창 땅이 이미 해발 700m의 높이를 갖고 있고, 강릉 쪽에서 든다 해도 한껏 해발고도를 높인 닭목령의 정상쯤에서 안반데기로 가는 길을 만나기 때문이다. 여기에 안반데기로 이어지는 길은 철 따라 감자며 배추를 실어 내는 4.5t 트럭이 오갈 수 있도록 닦아 놓아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제법 번듯하다. 평창에서 안반데기로 향하는 길은 원시림의 한복판을 차고 오르는 길이다. 양옆으로 우람한 적송이 굴참나무며 신갈나무 같은 활엽수들과 어우러져 있다. 청신한 숲의 한가운데로 들어선 느낌이다. 우리 땅에서 이렇게 편안한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깊은 숲에 들 수 있는 곳이 몇이나 될까. 강릉 쪽에서 닿는 길도 못지않다. 마주 오는 차량을 한두 대밖에 만나지 못하는 한적한 닭목령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운치도 좋고, 닭목령 정상쯤에서 안반데기로 접어들어 저 아래로 콸콸 넘치는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달리는 맛도 좋다. 이렇게 청신한 숲을 지나서 안반데기에 당도하면 누구나 탄성을 토할 수밖에 없다. 안반데기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갈 때마다 다른 풍경을 펼쳐 보여 준다는 것이다. 해발고도가 높은 안반데기에는 수시로 구름이 걸린다. 구름이 능선을 타 넘으면서 온통 운무로 뒤덮여 한 치 앞도 보여 주지 않는 때도 있고, 구름 사이로 햇살이 들면서 20여호 남짓의 마을과 옥녀봉에 들어선 풍력발전기가 붉게 물드는 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삽시간에 운무가 걷히면서 주변의 산자락들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은 풍경을 보여 주기도 하고,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 아래 진초록의 배추밭이 반짝이는 모습이 펼쳐질 때도 있다. 그중 압권이라면 아침 햇살이 퍼질 때 온통 붉게 물드는 배추밭의 구릉과 그 뒤로 겹겹이 펼쳐진 산자락에 고인 구름이 출렁이는 모습이다. 맑은 가을날이라면 배추밭의 능선 멀리 강릉의 푸른 바다까지 펼쳐진다. 이런 풍경 앞에서 ‘장엄하다’는 표현은 전혀 손색없다. 한낮의 안반데기 배추밭은 첫눈엔 어쩌면 대수롭지 않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줄 맞춰 끝 간 데 없이 심어진 배추밭의 이랑 한가운데 사람이 서고, 그 사람이 개미보다 더 작게 보일 때, 198만㎡(59만9000여평)에 달한다는 안반데기 배추밭의 엄청난 규모가 비로소 실감된다. 안반데기의 풍성한 배추밭이 이즈음 유독 풍요로워 보이는 것은 아마도 고공 행진하는 배추값 때문이기도 하겠다. 안반데기의 고랭지 배추는 6월 초에 심어져 8월 말쯤 절정을 이룬다. 한 아름이나 될 정도로 포기가 튼실하게 자라난 배추는 추석을 앞두고 모두 수확된다. 그러니 이즈음이야말로 안반데기를 찾아가는 딱 정확한 시기다. 안반데기 마을은 지금이야 한 아름은 됨 직한 탐스러운 배추들이 산자락을 가득 메우고 있지만, 40여년 전까지만 해도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험한 산자락을 찾아들었던 화전민이 떠나고 난 자리는 황폐하기 이를 데 없었다. 1965년 정부가 국유지 개간을 허가했지만 돌 투성이의 거친 밭은 곡식을 갈아먹기는커녕 호미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겨울이면 영하 30도 부근까지 기온이 내려갔다. 인근 마을에는 안반데기와 함께 괴비데기, 장두데기, 황정데기, 황철데기라는 지역이 있어 예부터 이곳을 ‘오덕(五德)’이라며 ‘만 명의 피난할 수 있는 사람이 잘 살아갈 수 있는 곳(五德之下 生活之地)’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지만, 그건 그냥 말뿐이었다. 급기야 정부는 가구당 4500평의 땅을 갈아먹을 권리를 내주겠다며 정착주민을 모았다. 그렇게 1967년에 74가구가 이곳 안반데기로 들어왔다. 주민들은 호미와 곡괭이만으로 너른 산자락에 계단식 밭을 일궈 냈다. 어찌나 일이 고됐던지 곡괭이를 잡은 손에 물집이 터져 피가 흘렀다. 목숨을 던져 개간한 땅에 옥수수수를 심었지만 내다 팔 것은 고사하고 자급자족도 불가능했다. 냉해를 입어 옥수수가 다 죽는 것쯤은 다반사였다. 주민들은 정부에서 제공해 주는 밀가루와 보리쌀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안반데기의 겨울은 더 혹독했다. 큰 눈이라도 한번 내릴라치면 마을은 한 달이 넘게 고립됐다. 헬기로 내려 주는 밀가루 포대를 가져다 수제비를 끓여 먹으며 그 추웠던 겨울을 났다. 그렇게 40여년이 흘렀고 남은 주민들이 눈물과 땀으로 개간한 땅은 지금 온통 탐스러운 배추가 자라는 풍요로운 밭으로 변모했다. 이 척박한 땅을 떠나지 않고 대를 이어 밭을 갈아 낸 스무가구 남짓의 안반데기 주민들이 이룬 역사다. 지금이야 산 정상까지 밀고 올라간 배추밭을 두고 생태 파괴라는 지적도 나오지만, 어려웠던 시절 괭이 하나만 잡고 생계를 장엄한 풍경으로 이뤄 낸 주민들의 노고는 울컥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안반데기 말고도 40여년 전쯤 평창과 강릉의 경계쯤에는 또 한 곳의 척박한 땅이 있었다.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 부근이다. 이곳 역시 화전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는데, 1968년 화전민 집단 이주 후에는 한동안 황폐화된 산림으로 방치됐던 곳이다. 국립산림과학원의 한 직원이 꺼내 보여 준 옛 대관령휴게소 인근의 사진 한 장은 당시의 참혹한 풍경을 그대로 드러낸다. 아름드리 나무들은 일찌감치 베어져 일제의 수탈로 죄다 실려 나갔고, 남은 어린 나무들도 화전민들이 개간을 위해 불을 질러 아예 잿더미가 된 모습이었다. 그런 땅의 한복판으로 1975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됐다. 그리고 이듬해 고속도로 주변 녹화 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에 나무를 심는 조림이 이뤄졌다. 그러나 나무는 심는 족족 죽어 나갔다. 대관령 일대는 겨울이면 온도계의 수은주가 영하 32도까지 내려가고 순간 최대 풍속이 초속 45m에 달하는 곳. 거센 바람과 혹독한 겨울 추위로 나무 한 그루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개발 시대의 구호는 단호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최악의 자연 환경에 도전하는 조림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묘목마다 통발을 두르고 방풍막과 목책이 세워졌다. 죽어 나간 나무를 뽑고 다시 다른 나무를 심었다. 1976년부터 1986년까지 11년 동안 84만3000여그루의 전나무와 잣나무, 독일가문비나무와 낙엽송이 심어졌다. 그리고 척박했던 땅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숲이 됐다. 그 숲에는 지금 아침마다 운무가 피어나고, 청명한 새소리가 깃든다. 그 숲을 가장 쉽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대관령휴게소 뒤편의 산책로다. 850m 남짓의 오솔길 산책로에는 지금 벌개미취가 한창 피어났다. 오솔길에서 몇 걸음만 들어가면 우람한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숲이다. 건너편 산자락의 선자령의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펼쳐진 숲도 어찌 보면 평범하지만, 그 수많은 나무들을 한 그루 한 그루 심고 길러 낸 노고를 생각해 보면 가슴이 다 뭉클해진다. 도암댐 못 미쳐 고갯길 정상이 ‘안반데기’ #가는 길 = 안반데기는 평창 쪽에서도 강릉 쪽에서도 가닿을 수 있지만, 수도권에서 출발하면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쪽에서 접근하는 것이 훨씬 더 가깝다. 영동고속도로 횡계나들목으로 나와 용평리조트 방면으로 향하다 리조트 입구 삼거리에서 도암댐 방면으로 직진한다. 도암댐 못 미쳐 왼쪽 편으로 가파른 고갯길이 나타난다. ‘안반데기’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어 쉽게 찾아 들어갈 수 있다. 이 고갯길의 정상이 바로 안반데기다. 안반데기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풍력발전기 부근. 옥녀봉 쪽으로 이어진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가면 두 기의 풍력발전기를 만나는데, 두 곳 모두 훌륭한 전망대다. 대관령 특수조림지는 옛 대관령휴게소(신재생에너지전시관)를 찾아가면 된다. 휴게소는 양떼목장 부근에 있어 찾기 쉽다. 용평리조트, 양떼목장 주변 펜션보다 저렴 #묵을 곳 · 먹을 것 = 안반데기와 대관령 일대에서 가장 추천할 만한 숙소는 단연 용평리조트다. 여름휴가 시즌이 끝나고 비수기로 들어선 만큼 콘도나 호텔 모두 1박 기준 8만~10만원에 묵을 수 있다. 대관령 양떼목장 인근에 즐비한 펜션보다 오히려 요금이 저렴한 편이다. 횡계 일대는 워낙 펜션들이 발달돼 있는 탓인지 여관이나 모텔은 추천할 만한 곳이 없다. 횡계의 먹을거리로는 오징어와 삼겹살에 고추장 양념을 해서 구워 내는 오삼불고기와 황태구이·황태국이 유명하다. 오삼불고기는 ‘도암식당’(033-336-5814)이 이름났고, 제철이 아니긴 하지만 황태구이나 황태국을 맛보려면 ‘황태회관’(033-335-5795)이 좋다. 정육점에서 한우를 사다가 구워 먹을 수 있는 이른바 셀프구이집 ‘대관령 한우타운’(033-332-0001)은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고기를 맛볼 수 있어 인기가 높은 곳이다.
“밭이 가팔라 일하던 소도 엄청 굴렀어”
안반데기 마을에는 개간 이후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주민들이 꽤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옛이야기를 물을라치면 떠올리기 싫은 지긋지긋했던 고생의 기억 때문인지 너나없이 다 손사래부터 쳤다. 젊은 시절 아버지를 따라 경북 영양의 산골 마을에서 이곳 안반데기까지 들어왔다던 김정남(67)씨도 그랬다. 배추밭 고랑에서 마주친 그는 “그 고생스러웠던 시절 얘기를 다시 하면 무엇하느냐”며 입을 닫았다가 한참 만에 사연을 풀어 놓았다. “군에서 제대한 뒤 아버지를 따라 강릉에서 삽당령과 화실재를 넘어 이곳 안반데기까지 들어왔지. 나도 산골 마을에서 살았지만 이곳에 와 보니 세상에 이런 산골짜기도 있나 싶었어.” 안반데기에 정착하면서 김씨 가족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끝없는 노동을 시작했다. 배추밭 구릉이 펼쳐진 마을 건너편 옥녀봉 산자락은 애초에 계단밭으로 개간됐던 땅이다. 가파른 땅을 올려다보면 한숨만 나왔지만, 곡괭이과 삽자루로 나무뿌리와 돌을 하나하나 캐내며 밭을 일궜다. 그는 “도대체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한 뙈기씩 밭을 일궜다. 일궈 낸 밭에는 옥수와 감자를 심었다. 그러나 감자는 잘았고, 옥수수는 이른 추위로 해마다 냉해를 입었다. 내다 팔 것은 고사하고 제 입에 풀칠할 것도 거두기 힘들었다. “정부에서 배급하듯 나눠 주는 밀가루나 보리로 버텼지만, 겨울은 참 견디기 어려웠지. 눈이 쏟아지면 여지없이 고립됐어. 폭설로 고립된 데다 식량마저 떨어져 헬기에서 던져 주는 밀가루며 보리쌀 포대를 받아 겨울을 난 적도 있지. 가을에 주운 도토리로 겨울 동안 연명한 적도 있었어.” 수십년에 걸친 주민들의 노고로 개간은 어느 정도 이뤘지만 농사는 여전히 힘들었다. 비탈진 밭에는 농기계를 들일 수 없었다. 지금이야 포클레인을 동원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쟁기질은 소가 맡았다. 그러나 밭이 워낙 가팔라 소도 한눈을 팔다가 굴러떨어지는 일이 예사였다. 그렇게 안반데기 주민들은 수십년에 걸쳐 고된 노동을 하며 튼실한 배추가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배추밭으로 바꿔 나갔다. 이즈음 안반데기에는 주말이면 관광객들이 찾아든다. 그러나 그저 풍경만 보면서 감탄하고 가는 관광객들이 그는 마뜩지 않다. 주민들을 붙잡고는 “이렇게 공기 좋고 아름다운 데서 사니 좋겠다”는 말을 건네는 이들도 있다. 그는 “요즘 배추값이 좋긴 하지만 올해 배추 농사가 잘 안 된 데다 여기 주민들은 죄다 계약 재배를 하거나 밭뙈기로 넘기니 ‘재미’를 볼 일은 없다”며 “그저 정직하게 농사를 지을 뿐”이라고 말했다.
<출처> 2010. 9. 1 / 문화일보 |
출처: 시솔길을 함께 걸어보실까요? 원문보기 글쓴이: ho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