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 학자
이 위대한 주교는 토랑에 있는 가족 성(城)인 샤토 드 살에서 태어나 파리의 아네시와 클레르몽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하였고,파두아 대학교에서는 법률과 신학을 전공하여, 불과 24세의 약관에 법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가족들의 반대는 물론 이사직의 제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도생활을 위하여 화려한 세속의 일과 전망을 모두 포기하고, 1593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카블레 지방의 선교사로서 5년 동안 활동하였는데, 이곳 사람들은 군사력으로 가톨릭을 억누르는 사보이 공작의 노력에 피나는 항쟁을 하고 있었다.
암살자와 칼빈교도들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곳 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1599년, 그는 제네바 주교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다가, 1602년에 완전히 계승하여 주교가 되었다.
그는 곧 반개혁자의 지도자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의 지혜와 지식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뛰어난 고해신부이자 설교가이며, 해박한 신학지식과 이해심은 만인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았다.
그는 학교를 세우고, 예비자들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교구를 훌륭하게 다스렸다.
1604년, 그는 프란치스까 드 상탈을 만나 그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으며, 그녀와 함께 방문회를 세웠다(1610년)
그는 프랑스 리용에서 운명하였는데, 그의 저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1. 신심생활 입문(1609년), 2. 신애론(1616년)이다.
그는 사망한 해에 시복되었는데, 성 베드로 성당에서 거행한 첫번째 공식 시복식으로 기록되었고, 1665년에 시성되었다.
또 1877년에는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으며, 1923년에는 가톨릭 언론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성바오로수도회에서)
프란치스코 드 살은 부친의 뜻을 받들어 변호사가 되고, 나중에는 프랑스 사부아 지역의 상원 의원이었던 부친의 후계자가 되어야 했다.
그 때문에 그는 법률을 공부하러 파도바로 갔다.
그곳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집으로 돌아온 그는 적당한 시기에 부모에게 사제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부친은 완강하게 반대를 했지만, 착한 프란치스코의 꾸준하고 열심한 설득에 결국은 허락하고 말았다.
프란치스코는 사제로 서품되어 얼마 뒤에는 칼뱅교의 중심지였던 스위스 제네바 교구의 사무관으로 선출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칼뱅과 이단자들을 회개시키기로 결심하고, 특히 샤빌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는 진정한 가톨릭 교리를 설명하는 자그마한 팜플렛을 만들어 배부하고 설교도 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35세에 제네바의 주교가 된 프란치스코는 교구의 사목 행정을 담당하면서도 설교를 하고 고해성사를 주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그의 부드러운 성격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한 숟가락의 꿀은 한 통의 식초보다 더 많은 파리를 끌어들인다."는 자신의 좌우명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널리 알려진 [신심 생활의 입문]과 [신애론] 외에도 수많은 소책자를 쓰고 광범한 분야에 걸쳐서 편지 왕래를 했다. 그의 이러한 문필 생활로 인해 그는 가톨릭 신문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그는 비교적 짧고도 바쁜 일생을 보냈지만 ’방문 수녀회’를 창설하는 일에서 또 다른 성녀인 잔 프랑스아 드 샹탈과 협력할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 이 수녀원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데서 모범을 보인 덕행, 즉 겸손과 신심 그리고 상호 애덕을 실천하고자 하는 여인들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프란치스코 드 살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리스도교적 온화함을 지닌 사람은 누구에게나 부드럽고 사랑스럽다.
그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변호해 줄 자세가 되어 있고 그의 착한 마음은 그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태도에서 나타나며,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큰 애덕과 기쁨의 빛을 비추는 관점을 제공한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