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12】
최승희는 미국과 유럽, 남미에 걸친 세계 순회공연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 최초의 한류스타였다.
1937년 12월에 시작한 미국 공연이 재미 조선인들의 반대 시위로 중단되기는 했지만, 그 이후 최승희는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약 3년간 미국와 유럽 및 남미의 약 20개 국가에서 150여 회의 공연을 이어갔다.
일본 공사관은 최승희의 공연을 면밀히 감시하는 한편 공연 흥행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도 했다.
유럽 주재 일본 공관은 日佛협회와 같은 일본 교민단체들을 동원하거나 다른 국가의 대사들을 따로 초대하는 등 일본 공사관이 직접 최승희의 공연 흥행에 협력했던 동시에 그 공연이 가져올 영향, 특히 조선인 교민들의 반응과 동태에 대해서도 면밀히 조사하여 본국에 보고했다.
최승희는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조선적 정체성을 선명히 하면서 조선민족을 대변하는 예술가로서의 독립적 위상을 자주 피력하곤 했다.
하지만 당시 최승희가 무용 활동을 지속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제국 일본의 프로파간다 전략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탓에 조선 대중의 시선은 최승희의 민족 무용 그 자체를 조선민족 고유의 전유물로 볼 수만은 없었다.
상황이 이럴 때 최승희의 전략은 ‘인터내셔널 예술가’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 최승일은 이렇게 조언했다.
또 한 가지 거리끼는 일은 요사이 “최승희는 조선을 팔아먹는다”
이런 ‘데마’가 돈다.
이것은 가장 중대하다면 중대한 문제이니 왜 그런 ‘데마’가 나느냐 하면 동경에서 조선춤을 추어서 그것이 평판이 좋다는 말이 나서 어찌 어찌 해서 그런 말이 나게 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자기 민족적 유산을 정당하게 계승하고 이해하야 그것을 예술화하는 것이 예술가의 할 일이며 큰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예술이 되는 동시에 또한 ‘인터내셔널 예술’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가로서 자기 민족적 유산을 정당하게 계승하고 이해해서 그것을 예술화한다는 것에 내포된 자긍심, 그리고 그것의 주체가 제국 일본의 식민지 조선 여성이라는 사실에는 내셔널리즘에 기빈을 둔 일국사관 national history의 프레임에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다.
어쩌면 필연적으로 배제와 연대가 작동하는 일국사관의 관점은 이 사태를 직시하는 데 오히려 한계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것은 최승희의 활약이 제국 일본의 신민 또는 식민지 조선인이라는 주체성을 한정하는 것과 동시에 ‘조선적인 것’ 혹은 ‘동양적인 것’을 피력한 예술이라는 프레임의 외부를 처음부터 거세해버리기 때문이다.
가령 조선의 예술가들이 최승희의 무용이 표방한 ‘조선적인 것’의 허구성을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예술가들이 일제히 최승희 무용의 ‘조선 정서’를 상찬했던 것은 문자 그대로 수용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시 서구 중심의 일원론적 세계사에 대항하는 ‘동양 세계’라는 ‘일본적 세계사의 구상’, 즉 근대의 초극론으로 이어지는 일본 ‘세계사의 철학’이 주조해낸 세계사의 재편이라는 이념적 독해가 필요한 대목이다.
글의 출처
제국의 아이돌
이혜진 지음, 책과 함께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