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34]어느 엿장수친구의 “잉크냄새”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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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엿장수’라는 아주 재미난 별명으로 불리는 지인친구가 있다. 인사동 사거리 근처에서 수십 년째 노점상을 하고 있다. 언젠가 졸문으로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 친구는 남원, 나는 임실이 고향이어서 친한 느낌이 더 했다. 최근 인사동에 갈 때마다 보이지 않아 궁금했는데, 장마철에는 엿이 날씨가 눅눅해 달라붙기 때문에 젬병이라는 것이다. 장마철은 그래서 아예 휴가라고 생각한다는 것.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별곡 19]대한민국 엿장시와 국보급 돌칼石刀잽이 - Daum 카페
한두 달 전, 졸문 한 권을 줬는데, 독후감이 기가 막혔다. "최형이 준 책 울면서 다 읽었어. 한마디로 하면, 어머니가 실가리(시레기)를 몽땅 넣고 된장을 풀어 청양고추도 넣고 끓여주는 국 같았어."라고 했다. 그 말이 고마워서 어제 오후 그 친구와 처음으로 간단히 술 한잔을 했다. 삭힌 홍어회에 지평막걸리. 비록 얼었지만 서비스로 준 약간의 홍어애. 우리 입맛에는 딱이었다. 좌판이야 그대로 놔두어도 누가 엿을 들고 갈 일도 아니니 20-30분이야 아무 문제가 없단다. 자기를 부를 때 ‘인사동 엿장수(우리 지역 표준어로는 엿장시가 맞다)’라 하지 말고 ‘대한민국 엿장수’라고 해달란다. 왜냐니까 15개국 정도의 인사말을 자유자재로 하는 등 자기만큼 글로벌한 엿장시가 대한민국에 없기 때문, 들으니 그럴만도 했다. 순전히 엿만 팔아 아들 딸 가르치고 집도 사주는 등 제금(결혼분가)내주고, 아파트를 네 채나 샀다는데 기가 질렸다. 그의 호도 재밌다. 가정街丁, 거리의 사나이. 그러길레, 자릿세를 요구하는 조폭들 앞에서 웃통 벗고 '배때지'를 들이대며 '차라리 찔러 죽이라'는 배포도 가졌을 것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우리 경제를 걱정한다. 자기의 감으로는, 자영업자들의 경제상황이 다달이 악화돼 가는데, IMF-코로나 때와는 비교가 안된다고 한다. 솔직히 나로서는 잘 모르거니와 피부에 와닿지 않는 얘기이나, 그렇다면 정말 큰일날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가방끈은 국민핵교(초등학교)가 전부이나(그게 무슨 대수인가), 상식과 교양이 풍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등이 마음에 들었다. 언변도 유려했다. 그 비결을 물으니 자기는 ‘신문중고교新聞中高校’에 이어 ‘신문대학新聞大學’을 졸업했기 때문이라는 것.
여기에서 등장한 생소한 신문중고교와 신문대학(김대중대통령이 교도소를 '인생대학'이라고 한 것과 맥락이 같다) 은 무엇인가? 워낙 가난하여 중학교 진학은 엄두도 못내고 14살에 무일푼으로 상경했다. 58년생이니 70년대 초였을 터. 굴레방다리 아래 작은 전기재료 공급가게에서 심부름하며 밥을 빌어먹었다. 배움에 목이 메어 늘 허덕허덕했는데, 가게 사장이 구독하는 신문(동아일보)을 보면서 그 허기虛飢를 달랬다. 문제는 새벽같이 와 신문을 먼저 보면 사장의 질책이 불같았다. 신문을 먼저 보면 잉크냄새가 달아나 자기가 맡지 못한다는 게 이유. 나도 조금 경험이 있지만, 그때는 신문의 잉크냄새로 아침을 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문은 그에게 지식의 '산실'이었던 셈.인쇄기술이 발달돼 그렇겠지만, 지금은 예전처럼 그 잉크냄새가 화악 풍기지 않는다. 70-80세의 신문독자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맨먼저 하는 일이 신문을 들고 화장실을 가는 것이었다. 신문을 펼치자마자 화악- 풍기는 잉크냄새, 흠-흠-거리기도 할 정도로 그 냄새를 기억할 것이다.
지금도 국민핵교 때를 기억하는 그는 '이야깃꾼'이었다고 한다. 요즘 말로는 스토리텔러였던가. 무슨 책이든 후딱 읽고나서 친구들에게 얘기해주는 재미가 그것이었다. 조선시대 시장에서 돈 받고 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전기수'라고 했다한다. 어찌나 이야기를 진짜처럼 얘기한던지, 청중이 전기수를 찔러 죽이는 살인사건이 정조임금 때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 그였기에 그는 신문을 읽으며 '전기수'가 되었던 것이다. 신문은 평생 그에게서 분신같은 역할을 했다. 아무리 어려운 경제용어도 찬찬히 읽어보면 다 흐름을 알 수 있고, 연관이 되더라는 게 그의 고백. 누구에게도 시사나 상식에 있어 뒤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신문은 ‘추억의 잉크냄새’인 것이다. 사장 눈치를 보다 퇴근할 때 신문을 가져가 밤새 꼼꼼히 읽는 버릇은 14살 때 생긴 버릇으로 50년도 넘게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문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 말하자면 생활-사회-정치-경제 백과사전이라고 할까. 그래서 ‘박사’가 된 것이고, 그래서 신문중고교와 신문대학을 나왔다는 것이다. 나도 잉크냄새의 추억을 잘 알기에(신문사 공무국에 하루에도 수십 번 출입한 세월이 옹근 20년이다) ‘대한민국 엿장시’의 솔직한 고백에 “당근” “당근” 백퍼 공감하며 입추렴을 했다. 어느 한 신문이라도 3년만 정독하면 세상 모든 것을 안다는 말이 있었을 때였다. 동아일보로 세상을 배웠기 때문에 지금도 ‘동조중’이라고 말한다는 대목에서 나는 한량없이 씁쓸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세상이 그러한가. 그 친구는 아니라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제는 50여년동안 습관처럼 읽던 신문을 펼쳐볼 마음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오늘날 자기의 생각을 만들어준 신문인데, 뭔가 시각이 잘못됐도 한참 잘못됐다며 야속한 생각까지 든다는데, 나로선 들려줄 말이 없었다. 단지 “조중동은 정말 나쁜 신문이다”는 말만 푸념처럼 늘어놓았다.
최근 유시민 작가가 어느 방송 토론프로그램에서 “유튜브가 진보언론의 대안”이라며 종이신문의 종말을 얘기하니, 일간지 기자가 “꼭 그렇지는 않다”며 디올백수수사건도 제보가 들어왔으면 게재했을 거라고 했다지만, 장담컨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유작가의 말처럼, 언론의 주류와 대세가 유튜브임을 최근 10여년 동안 우리가 날마다 실감하고 있지 않는가. 엿장수친구와 얘기하며 종이신문의 현주소와 미래를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한때는 소위 레거시 언론이라는 3개의 신문이 발행부수 경쟁을 했다. 200만부가 넘어갔다는 게 오늘날 상상이 되는가? 포장째 뜯어보지도 않고 쓰레기장으로 직행한 신문들은 대체 몇십만부였을까? 이제는 백만부를 넘게 찍은 신문이 있을까? 그것 하나만 봐도 알쪼가 아니던가? 이름없는 민초民草친구에게 듣는 ‘언론관’과 추억의 잉크냄새 얘기를 들으며 돌아오는 허든한 귀가길, 내내 입맛이 썼다. 허어-, 그때가 좋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