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씨의 김정일 비판은 후루시초프의 사민주의적 스탈린비판의 아류?
-이미, 뒷 문 열고 들어온 ‘사민주의’의 유령-
조갑제기자와 황장엽씨가 쓰는 김정일 비판은 서로 물과 기름처럼 안 맞는 두 논거를 짜깁기 해서 쓰고 있다. 궁극적으로 반성하는 것보다는 화장으로 덮어내려는 모습이 지독하게 반복되어 왔다.
(1) 자유민주주의 사회 기준으로 반대논거를 철저하게 차단하여 논거를 획일화하여, 권력자 개인의 필요를 전체의 필요인양 확장하는 모양새가 조선왕조 임금의 모양새 같더라는 비판은 철저하게 ‘자유민주주의’ 가 유일한 발전의 방향임을 전제한다.
(2) 레닌이 잘한 사민주의적 집단지도 정치를 스탈린이 개인 숭배로 망쳤다는 바탕과, 김일성이 잘한 정치 김정일이 수령주의 개인 숭배로 망쳤다는 것은 정확하게 붕어빵이다. 신일철 교수는 ‘유일무이한’ 북한의 철학자를 소련철학교정의 번안자로써 파악한다. 맑스주의적 역사변혁의 주체는 민중임에도 불구하고, 개인 숭배를 하고 있다는 발상이다.
황장엽씨가 자유민주주의 옹호는 김대중의 과거의 반공주의적 발언에 다름 아니다. 철학자는 논거틀을 뭘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말하며 법관은 법조문과 몇 년 판례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말한다. 김정일의 개인 숭배 비판 모습은 영락없이 ‘레닌’을 띄우고 ‘스탈린’을 격하하는 후루시초프의 사민주의적 가치관의 그것이다.
뉴라이트(우익영토를 무단점거중?) 세력들에 ‘수령주의’만을 부정하는 것에 박수 쳐줄 수 없다며, ‘사회적 생명론’까지 모두를 부정하라고 지적했었다. 열린당 신기남씨가 ‘사회민주주의’가 미래의 정치 체제인 듯이 서울대 사회학과 임현진 교수가 김대중의 3단계 통일안의 ‘과도기체제’ 설계를 사회민주주의(그 책은 ‘민주 사회주의’로 앞뒤 바꿔 말함)라 말한 차원의 연장선상에서 말했지만, 이미 황장엽씨에 의해서 다른 출구에서 다른 방식으로 같은 결론을 내는 주장이 퍼져왔다.
사회적 생명론이란 공산주의 인간형의 ‘유적 본질론’의 북한식 번안물로써, 분업 같은 자본주의 기본 업무를 철폐하여 고대적 인간해방을 이루자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자기 정체성을 고수하는 데에 있어서 중대한 것이다.
조갑제기자는 장기간 노무현 정부 시기조차도 유럽의 좌익이 괜찮다고 그랬다. 김정일 김대중 노무현이 정치를 잘못했고 386이 정치를 잘못했다고 그런다. 그러면서, 유럽의 좌익은 괜찮다고 그랬다. 그 잣대가 97년 이후에 뉴레프트 이론을 수입하는 계기였다. 조갑제기자는 이미 정권적 차원으로 김영삼에 의해서 해체 당한 5공(共) 6공(共) 을 표면적으로만 띄워주고 속으로는 계속 무시하는 것 뿐만 아니라, 50 60 세대들도 표면적으로만 띄워주고 속으로는 진지하게 무시했다.
열린당 지지자끼리 하는 농담으로 여자 패션이 옛날 것이 반복되듯이, 국민 세뇌공작의 공식을 바꿔 돌리면 계속 먹힌다고 그러하는 말을 한다. 유럽의 좌익이 괜찮다고 그러한다면 반드시 <유럽 좌익의 있는 그 자체---알 수 없고 검증 못하는 외국의 사실>과 <한국의 수입품>이 같았다고 했다가 권력후반부에는 달랐네 하는 식의 정치사기극의 재탕일 수 밖에 없다.
한국의 ‘사민주의’의 유령은 4.19 이후에 ‘친북 연공운동’했던 각종 정치 이념을 통털어서 말해진다. 박정희대통령의 5.16의 적은 공식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이념 정당’이었다.
수령주의 있는 주체사상 보다도, 김대중의 3단계 통일안의 지속 상태로서의 ‘사회민주주의 이념’에 대하여 우익 운동의 무오류적 장악권을 가진 쪽에서조차도 남몰래 살짜쿵 흠모하는 모습이 끊기질 않는 상황이 더 무섭다. 김영삼-조갑제-황장엽의 통일방안이든, 김대중-노무현의 통일방안이든, 과도기는 ‘사회민주주의’로 그린 것이 사실상 확정적이다.
김영삼계는 어슷하게 서로 다른 담론을 겹쳐놓고 양쪽 다 인척하고, 김대중계는 차라리 솔직하게 고백하며 말하면서 너무 그러지 말라는 식으로 나아가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일반 사인(私人)과 남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어피니언 리더 지위의 분명한 차이는 모두가 인정한다. 우익 내부조차도 ‘사민주의’ 흠모자들이 너무나 너무나 많다.
‘6.15세력’이 김정일 없는 좌파담론을 내세웠다가 최종 순간에 그거 다 김정일을 중심으로 짠 거야 하고 밝혔듯이, 김정일 없는 사민주의를 내세웠다가 최종 순간에 이미 했던 바와 동일한 반복을 할 가능성이 높다.
김영삼 정권은 중국공산당을 개혁 개방이란 이름으로 칭송했다. 그러나, 천안문 사태등 각종 반민주 사건을 야기하고 중산층을 고갈시킨 반민주 경제 논리의 근원이 ‘사민주의’였음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다. 즉, 황장엽씨같은 ‘사민주의자’를 치켜올려왔기 때문이다.
김정일과 북한 동포 사이에 경계선을 나누고 우리의 제도 자체를 느슨하게 하여 북한 동포가 살기좋도록 하자는 차원의 과도기 처리법으로서 사민주의이든, 전라도 특유의 직설어법으로서의 김대중지지자의 사민주의 방향성이든 나쁜 것은 똑같이 나쁜 것이다. 김영삼쪽에 발을 발담근쪽과 김대중쪽에 발을 담근쪽은 팔이 각각 그들 쪽으로 굽음은 이해한다. 그러나, 어느 쪽에도 발을 안 담그면 팔이 중립적인 상황임도 이해해줬으면 한다.
원래 ‘전향’이란 개념어는 일제이다. 컨벌전 이란 영어 단어와 전혀 다른 의미를 포함한다. 맑스주의 국제 공산당사 패밀리에서 천황주의 자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맑시스트 일본 쪽바리가 한국 맑시스트에게, 일본 쪽바리 맑시스트는 안되면 천황 만세라도 하면 되지 한국 맑시스트는 뭘할래 하는 글은 오래 전 좌파 문학 비평사에서 본 바 있다.
뉴라이트 계보의 사람들은 ‘김정일-김대중-한민통-노무현’ 패밀리에서 밖으로 나왔다는 측면으로 쓴다. 그러나, 컨벌젼 차원의 전향의 의미는 물어보기 하지를 말라고 한다. 한국 내부에 ‘사민주의 권력’이 가득차고 ‘자유민주주의 권력’이 소수가 되었을 때, 심리적으로 ‘적화면 어떠랴’는 식의 생각에 젖을 수 밖에 없다. ‘전향’에는 일제 개념의 전향 의미 뿐만 아니라 영미권 사전적 용법의 전향 의미 충족도 되어야 한다고 본다.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고민해야 될 부분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