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오염되는 영혼이지만
날마다 주님의 보혈을 의지합니다.
생명의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22. 엘리아십과 요야다와 요하난과 얏두아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이 모두 책에 기록되었고 바사 왕 다리오 때에 제사장도 책에 기록되었고
23. 레위 자손의 족장들은 엘리아십의 아들 요하난 때까지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며
24. 레위 족속의 지도자들은 하사뱌와 세레뱌와 갓미엘의 아들 예수아라 그들은 그들의 형제의 맞은편에 있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령대로 순서를 따라 주를 찬양하며 감사하고
25. 맛다냐와 박부갸와 오바댜와 므술람과 달몬과 악굽은 다 문지기로서 순서대로 문안의 곳간을 파수하였나니
26. 이상의 모든 사람들은 요사닥의 손자 예수아의 아들 요야김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 때에 있었느니라
27.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28.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마을에서 모여들고
29. 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웻(아스마웨ㅅ) 들에서 모여들었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마을들을 이루었음이라
3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본문 주해)
22~26절 : 이 단락은 앞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명단에 이어져야 할 부분이다.
요야김 시대 이후 레위인들의 역할이 나온다.
요야김 이후 대제사장은 엘리아십, 요야다, 요하난, 앗두아이다. 이때의 레위인들의 지도자는 모두 책에 기록되었고, 페르시아 왕 다리오 때에 제사장도 책에 기록되었다. (요하난 때의 페르시아 왕은 다리오 2세이며, 앗두아 때의 페르시아 왕은 알렉산더에게 패배한 다리오 3세이다.)
그런데 역대기에는 요하난 때의 레위인 지도자들까지만 기록되어 있다. (23절)
이들 레위인 지도자들은 하사뱌와 세레뱌와 갓미엘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동료들이다.
동료들은 그들의 맞은편에 섰고, 한 무리가 다윗 왕의 명령대로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를 드렸다.
“레위 사람의 우두머리는 하사뱌와 세레뱌와 갓미엘의 아들 예수아이다. 예배를 드릴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 왕이 지시한 대로, 동료 레위 사람들과 함께 둘로 나뉘어 서로 마주 보고 서서 화답하면서,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다.”(24절, 새번역)
성문 곁 창고를 지킨 문지기는 맛다냐아 박부갸와 오바댜와 므술람과 달몬과 악굽이다.
그들은 대제사장 예수아의 아들 요야김의 시대에 일하였다. 그리고 예수아는 요사닥의 아들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요사닥의 손자이자 예수아의 아들인 요야김과, 총독 느헤미야와, 학자인 에스라 제사장 시대에 활동한 사람들이다.”(26절, 새번역)
이렇게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이름의 기록과 출처를 밝히는 이유는, 과거 여로보암 시대처럼 아무렇게나 일반 사람을 세움으로 하나님 앞에 악행을 저지르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정한 대로, 그가 명령한 대로 찬양한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기 위함이다.
27~30절 : 이제 성벽 봉헌식이 이루어지는데, 먼저 도처에 흩어진 레위인들을 소집한다.
이들은 성벽 봉헌식에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할 자들이다.
레위인들은 예루살렘의 주변과 느도바 사람의 마을에서 소환되었다. 특히 느도바 사람의 마을은 레위인들의 거주지로 잘 알려져 있다.(대상9:16)
예루살렘으로 소환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의식을 집행하기 전 몸을 정결하게 해야 했다.
정결의 내용은 언급되지 않으나, 부부관계를 삼가며, 옷을 빨고, 목욕하였을 것이다.
또한 성문들과 성벽들도 정결하게 하였는데(30절), 그것은 건축 도중에 생긴 오염으로 인해 생긴 부정함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나의 묵상)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을 완성하고, 그 이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율법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지도자들이 더 깊이 말씀을 알고자 모이고, 초막절을 지키고, 자원하여 규례를 세워 하나님 앞에 살기로 작정하는 등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성벽 봉헌식을 하게 된다.
27~30절은 성벽 봉헌식을 준비하는 모습이다.
먼저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던 레위인들을 모은다.
레위인들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로서, 이들을 모은 이유는 그들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27~29절)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인뿐만 아니라 백성들과 성문과 성벽까지 정결하게 함으로 성벽 봉헌식 준비를 한다.(30절)
24절, 다윗의 명령대로 레위 족속들이 마주 보며 화답하며 찬양이 올려질 때의 그 광경을 상상해 본다.
10여 년도 더 전에 성지순례를 하면서 몇몇 웅장한 성당을 방문했을 때 마침 울려퍼지는 찬양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울림이 너무도 감동적이었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그 큰 공간에 퍼져나가니 마이크가 필요 없는 소리, 이것이 천상의 소리인가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복음을 알고 난 뒤 찬양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나의 찬양도 달라졌다.
아름다운 곡조와 목소리도 좋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이 더 중요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찬양을 올려드린다는 것은, 주님을 찬양하는 내 마음을 올려드리는 것이다.
그러니 찬송가를 부를 때 가사에 집중하게 되어, 모든 가사가 구구절절이 나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
전에 아무 생각 없이 앵무새처럼 형식적으로 불렀던 찬송가가 이제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것은 그 가사가 복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CCM에 대한 구별도 생긴다.
아무리 감미로운 곡조라도 그 가사가 주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에 초점이 가 있는 것이 많고, 복음에 역행하는 가사도 수두룩하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런 곡조에 끌리기도 하고, 자기 마음을 만져준다고 좋아한다.
때때로 찬양 인도를 하게 될 때, 회중들이 좋아하여 많이 불려지는 찬양을 하고픈 유혹도 있다. 그러나 가사가 복음을 담지 않고, 그저 회중들의 감정만을 터치하는 것이라면 단호히 사절한다.
찬양은 내가 위로받기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정결예식을 행한 제사장과 레위인과 백성들이 내일 부를 찬양을 기대한다.
그것은 십자가에 연합된 내가 매일 부르는 찬양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구제불능인 죄인임을 고백하고, 그런 나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기뻐하고, 살아가면서 시시때때로 올라오는 탐심과 이기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주님 다시 오실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의 찬양이다.
이것이 주님 기뻐하시는 찬양이리라.
십자가로 정결케 된 자, 주님만을 찬양한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새번역)
(묵상 기도)
주님,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 곳곳에서 모여오는 레위인들입니다.
저도 하나님께 바쳐진 레위인이 되어 늘 주님만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제 감정에 따라 말씀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 좌우되지 않듯이
제 감정에 따라 찬양하다 말다 하는 자 되지 않게 하옵소서.
말씀을 통해 더 깊이 주님을 알아가게 하시고
주님을 알면 알수록 저의 찬양도 더욱 풍성하게 될 줄 믿습니다.
저를 지으신 주님의 뜻을 이루시옵소서.
성령님, 저를 주장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