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꿈꾸는 아이
2화 - 레리어스 메이안 폰 케리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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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이거 완전히 공터가 되어 버렸네?”
[그러게 말이에요. 라이나르님이 이걸 아시면 어쩌시려나?]
“됐네요. 알려질 이유도 없고, 설사 알려진다고 해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녀 (가 될 예정인…….), 이베리노, 아니 로아네스는 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을 자못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의 파워라니……. 비록 나무가 불에 타서 번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암살자들이 서 있는 곳은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곳이 없었다. 암살자의 시체조차도 뼈까지 모두 타버려 재로 변해 있었으니까…….
하지만 곧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시선을 기절한 레리어스의 인영으로 옮겨 버리는 로아네스였다.
“그나저나…, 그 애물단지가 맡기고 간 저 레리어스라는 레이디는 어쩌지?”
[어쩌긴 어째요? 계약이니 만큼 지켜야 할 거 아니에요? 그나저나 도대체 언제 인간과 계약을 했담? 주신께서 아시는 날에는 즉각 근신이라는 것을 모르실리는 없을 텐데 말이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 버렸어. 그나저나 정말 맡아야만 하는 건가? 난 애 돌보는 건 싫은데…….”
뭐, 나이로만 보면 할 말이 없지만 겉모습으로만 본다면 저 붉은 머리 레리어스보다도 약간 더 어려보이는 로아네스였기에 샤르니아는 웃음을 지었다.
[풋, 겉모습으로만 보면 이…, 아니 로아네스님이 더 어려보이는 걸요?]
“이익! 사람은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지 말라는 옛말도 몰라?”
[어머? 그럼 저 소녀가 로아네스님보다 나이가 더 많을지 누가 알아요? 로아네스님이야 말로 사람 겉만 보고 판단하시지 마시라고요.]
“…….”
역시 샤르니아에게는 말발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낀 로아네스는 곧 한숨을 내쉬며 기절해 쓰러져 있는 레리어스를 업고는 빠르게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샤르니아도 곧 그 뒤를 따라 날아가기 시작했다.
‘여긴… 도대체 어디지?’
붉은 머리칼의 소녀, 레리어스는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숲에 와 있었다. 기억이 날 듯 하면서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곳. 와본 듯 하면서도 전혀 생소한 그런 곳. 그녀는 지금 그런 곳에 서 있었다.
‘분명히… 난 알란이 죽고 난 후에 기절했지…….’
하지만 그녀는 알란이 죽었다는 사실에 이상하게도 담담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후부터는 항상 자신을 지켜주고 돌보아 준 사람인데도 말이다.
‘자, 잠깐… 아버지? 서, 설마….’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앞에 보이는 숲은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 여긴…아버지께서…….’
그렇게 바뀐 풍경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저기 검에 의해 몸이 뚫린 사람들이 즐비했고 그런 사람들이 흘린 죽음의 기운들이 숲 속을 시내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자신과 알란, 그리고 저 멀리에서는 자신을 끈질기게 죽이려고 하는 암살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여긴 공작 령에서 얼마 안 떨어진 숲 속,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곳이란 것을 차마 입으로 말할 수가 없었다. 자기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그때의 악몽이 다시 시작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악몽은 벌써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크윽…, 네놈들이 감히 기습을……?”
“후훗! 내 비록 공작과는 아무런 원한이 없기는 하지만 암살자라는 직업이 다 그렇지 않은가? 웬만하면 한은 품지 말고 편안히 죽게나, 케리어스 공작!”
“무, 무슨 헛소리냐! 내 이놈들을 당장…….”
푸욱!
하지만 그 중년인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의 앞에서 그의 말을 능글맞게 되받아치던 그 암살자가 자신의 복부에 단검을 쑤셔 박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단검 위로는 선홍색 피와 내장 조각들이 조금씩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후훗! 되도록이면 이런 짓은 안 하려고 했지만, 이 쪽도 사정이 꽤나 급해서 말이야. 이제 곧 방해꾼들도 도착할 테니 우린 이만 가보도록 하지. 훗! 되도록이면 염라대왕에게 좋게 말하라고! 가자!”
그 말을 끝으로 그 능글맞은 암살자를 필두로 검은 그림자들은 썰물처럼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 숲은 정적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정적 위로는 선홍색의 핏물이 자그마한 시내를 이루며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아, 아버지!”
레리어스가 아버지인 케리어스 공작이 암살자들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자애로운 연둣빛을 온 만물에게 내려주고 있는 길잡이의 달, 사라베사노스가 한창 자신의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그녀가 본 아버지의 모습은 왠지 평소 때보다 더 평안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비록 여기저기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러누운 듯한 상처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레, 레리어스 구나. 뭣 하러 여기까지 왔느냐?”
“아버지! 도, 도대체 이 상처들은…….”
평소 때는 대하기도 싫었던 아버지였다. 나랏일 때문에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는 더더욱 보기 싫었던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걱정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후훗…, 오랜만이구나. 우리 공주님이 이 아버지를 걱정해준 것이 말이다. 하지만…, 걱정 말거라. 별거 아닌 것들이니……. 그보다는 알란을 좀 불러주지 않겠니?”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과는 달리 고통을 참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차렸을 따름일까?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녀는 곧 아버지의 심복인 알란을 데리러 갔다.
‘아버지…, 꼭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그래야지 이때까지 하지 못했던 말들을 나눌 수 있을 테니까요.’
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알란…….”
“이런 젠장! 독에 당하셨군요. 제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후훗! 괜찮네, 괜찮아.”
살며시 미소를 짓는 공작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벌써부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아니, 죽음의 그림자는 아까부터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딸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를 이렇게 버티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뭐가…, 도대체 뭐가 괜찮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제 공작님의 목숨은…….”
하지만 알란의 그 울분 섞인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공작이 슬픈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알란, 아무 말 말게. 나도 내 목숨이 얼마 안 남은 것을 아네. 그래서 자네를 부른 것이야.”
“저, 저를? 무, 무슨……. 설마!”
“그래, 자네가 이제는 저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 주어야겠네.”
알란은 곧바로 공작이 하는 말의 뜻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은 공작가의 그 무엇도 아닌 데다가 공작에게는 동생이 한 명 있었다. 공작이 죽으면 모든 것은 그 동생에게 넘어갈 것이 뻔한 것이다. 저 가엾이 울고 있는 레리어스 아가씨조차도 말이다.
“하, 하지만…….”
“아무소리 말게! 그 망나니 같은 내 동생에게 저 아이를 내어줄 수는 없네. 부디 자네가 저 아이를 도와주게. 그게 내 마지막 부탁이네.”
“…….”
알란은 잠시 생각했다. 고작 자신의 작은 힘으로 저 아가씨를 지킬 수 있을까? 그때 갑작스레 들려오는 공작의 말.
“그럼 승낙해 주는 것으로 알겠네. 후우…, 이제야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구먼…….”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그 이후로 공작은 눈을 뜨지 않았다.
“알란. 날 도와줄 수 있지?”
공작의 죽음을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하염없이 공작의 시체만을 바라보던 알란은 갑작스럽게 옆에서 들려오는 말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네? 그게 무슨…….”
갑작스럽게 도와달라니? 물론 레리어스의 말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는 알란이었지만 ‘도와 달라’는 말의 정확한 의도를 몰랐기 때문에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으며 레리어스를 쳐다봤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무감정한 듯한 레리어스의 얼굴.
“장례식이 끝나면 삼촌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 들 거야. 당연하겠지. 그는 처음부터 아버지의 직위와 부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사실이었다. 죽은 케리어스 공작의 동생이자 레리어스의 삼촌인 카마이온 에드마이어 폰 케리어스는 예전부터 그의 형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죽은 케리어스 공작은 직위와 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가문을 생각해서 이때까지 버텼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동생인 카마이온은 달랐다. 그는 예전부터 ‘형이 빨리 죽어버렸으면…….’하는 망발을 서슴없이 할 정도였으니까…
….
알란은 잠시 생각했다. 자신이 과연 그들로부터 이 아가씨를 지킬 수 있을까? 아무리 자신이 어쌔신 마스터라고는 하지만 이 거대한 케리어스 공작가를 상대로 레리어스 아가씨를 지켜낼 수 있을까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결심했다. 자신을 도와준 전 케리어스 공작의 유언을 헛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일단 레리어스의 의도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그저 복종할 뿐.
“알겠습니다. 아가씨.”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그리고 레리어스도 그의 굳은 의지를 알았을 따름일까? 레리어스의 표정에는 아무 감정도 없는 듯 했지만 그녀의 눈에는 곧 작은 물방울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고마워 알란.”
“으윽! 여기는 또 어디야?”
[에휴! 그러니까 마법으로 날아가자니까요!]
“그럴 수는 없다고! 기껏 레가드리안 차원에 왔는데 마법이라니! 웬만한 일이 아니면 안 쓰기로 한 거 에나도 잘 알잖아!”
[이익! 지금은 그딴 것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단 말입니다! 벌써 3일째라고요, 3일째! 3일동안 길을 헤맸으면 되었지 도대체 얼마나 더 길을 헤매셔야 정신을 차리실 겁니까!]
그렇게 열 내는 샤르니아에게 대꾸 한번 못하는 로아네스였다. 그럼 도대체 샤르니아가 왜 이렇게 열을 내는 것일까? 독자들도 모두 짐작하시겠지만 로아네스는 근 3일 동안 숲에서 헤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법을 쓰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분통이 터질 밖에…….
“하, 하지만…….”
[뭐가 하지만이에요! 3일 동안 깨어나지 못하는 중환자도 업고 다니면서도 그런 말씀이 나오세요?]
3일 동안 깨어나지 못하는 중환자는 분명 레리어스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아무 상처도 입지 않았고, 설사 입었다고 하더라도 샤르니아가 마법으로 고쳐주었을 텐데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다라?
“중환자라니? 나이트 메어(악몽 : 나이트 메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한 가지는 마법에 의한 나이트 메어로 그 경우에는 신속히 치료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생명이 위험한 반면, 다른 한 가지는 정신적인 쇼크로 가위눌린 형상과 비슷하다고 한다.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음.)에 걸린 것뿐이라니까!”
[로아네스님이 치료해 주시면 되잖아요!]
하지만 로아네스는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여전히 앞으로만 걸어가고 있었다.
“귀찮아. 그리고 이 정도도 못 견디면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보아하니 이제 가족 비스 무리한 것들은 다 죽어버린 모양인데 앞으로 이러지 말란 법이 어디 있어? 그리고 지금 내가 치료해 주면 당장은 낫겠지만, 가면 갈수록 효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기본상식일 텐데?”
[하, 하지만…….]
전세역전이란 이런 것을 두고 말함일 것이다. 어쨌든 잔머리(?)의 대가인 로아네스 양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 법.
“그리고 이번 여행은 내가 하는 것이지, 에나가 하는 것이 아니잖아?”
[그, 그거야…, 하지만 적어도 환자는 생각해 줘야죠!]
이대로 밀리는 것이 영 꺼림칙했을 따름일까? 그래도 마지막 한 자리까지는 포기하지 않는 샤르니아의 투혼(?)에 박수를 쳐주고 싶을 따름이다. 그리고 로아네스 또한 그것까지는 우기기가 그랬는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에휴. 그래. 그럼 이 골치 덩이 레이디가 깨어날 때까지만 좀 쉬다 가자. 나도 이대로 가기에는 지쳤고, 또 문제아들이 조금씩 다가오는 것 같으니까…….”
아까부터 따라오는 불쾌한 기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듯이 약간은 괴기스러운 미소를 지은 로아네스는 자신이 업고 왔던 레리어스를 미리 깔아 놓았던 침구에 눕힌 후에 자신의 가방에서 보라색의 묘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새벽의 검’ 알데히드를 꺼내들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우리의 잔소리꾼(?), 샤르니아 양 가라사대…….
[휴우…, 로아네스님도 어쩔 수 없는 무신이라니까…….]
라고 중얼거리고는 그 문제아들에게 명복을 빌어 주었다. ‘부디 극락에 가시길…….’ 이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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