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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기 피격사건: 왜 소련은 민항기를 격추했나?
레이건과 전두환의 뜻밖의 이익
[출처] http://blog.naver.com/alsn76/220558914064
고대사부터 현대사는 왠만한건 만쭈리 블로그에 다 있습니다.
2015년 네이버 100대 블로그 안에 든 유일한 역사 블로그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
● 1978년 대한항공 902편 격추사건
1983년 대한항공(KAL) 격추 사건을
살펴보기 전에
5년 전에 있었던
유사한 사건을 알아봐야 한다.
"5년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1978년 4월
파리를 출발해서,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를 경유하고
서울로 도착할
예정이었던 대한항공 902기가
그린란드 부근을 지날 무렵,
항공기에 위치를 알려주던 기지국이 갑자기 고장이 났다.
"GPS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비행기나 선박에 관성항법장치를 장착하여,"
"방향을 어림 계산해서
운행을 하거나.."
▲ 관성항법장치
"나침반을 보며 항행을 하면서
중간중간 기지국에서 방향을 조정해줬는데,"
"기지국이 고장이 나서
비행기의 방향을 조정해주지 못했던 것임."
때문에 조종사는
순전히 나침반에 의존해서 운행해야만 했다.
조종사
"괜찮아. 장사 하루이틀 하나."
하지만 비행기의 위치가
하필 자북극에서 가까운 극지방이라
제대로
작동이 안 된게 문제였다.
그러나 조종사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고,
나침반이 가르키는대로
항행을 계속하다보니,
여객기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
▲ 예정된 항로 (파란색), 실제항로 (붉은색)
소련의 영공을 침범하고 말아
'콜라반도' 상공에 이르자
"콜라?"
▲ 콜라반도
소련의 전투기가
출격했다.
"비상 사태! 적의 정찰기가 떴다!"
당시 미국의 정찰기(RC-135)는
여객기와 비슷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얼핏 보면
정찰기로 오인될만했다.
▲ 미국의 정찰기 RC-135기
이때 여객기에 근접한
소련 전투기는
KAL기에
항행을 멈추고
유도 착륙에 따르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KAL기는
꿈쩍도 안 했기 때문에
소련 전투기(수호이)는
곧 미사일 두 발을 날렸다.
이때 한 발은 빗나갔지만
한 발은 왼쪽 날개를 강타했다.
그러데 불행 중 다행이라고
미사일이 공중에서 일찍 폭발하며
직격을
피할 수 있었고,
미사일 파편에
2명이 사망했을 뿐이었다.
"한국인 1명, 일본인 1명이 사망했었다능."
그리고 미사일을 맞은 여객기는
무르만스크 인근에 불시착했는데,
이때 지면 충돌을 피하기위해
얼어붙은 호수 위로 비상착륙을 하기 위한
기장의 혼신의 힘을 다한
조종술 덕분에
107명의 승객이
모두 무사히 구조될 수 있었다.
▲ 미사일을 맞은 왼쪽 날개 끝이 떨어져 나가 있다
"휴~~"
이후 승객들은
소련 KGB에게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군사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인정되어
"앵? 정찰기가 아니었네?"
승객 전원은
핀란드를 통해 귀국할 수 있었다.
▲ 사건과 귀환 과정
하지만 비행기 기체는
반환받지 못했고,
이후 소련에서는 대한항공 기체(보잉 707)를
자신들의 여객기를 개량하는데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에
10만 달러의 배상금을 청구하기까지 했다.
소련
"남의 영공을 침범했으면, 배상을 해야지!"
또 한국으로 돌아온 승객 전원은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왜 쏘련에 갔어?"
"혹시 귀순하려는 거 아니야?"
▲ 당시 국내 언론들은 소련 전투기에 의해 끌려가, 강제로 착륙한 것으로 보도했다 ☞ 참고
그렇게 현재가치로 1000억 원대의
비싼 항공기를 날려먹었지만,
미사일을 맞고도
대부분의 승객을 건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항공사에서도 보기 드문
엄청난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사건 이후
소련은 대공 방어력을 대폭 강화하게 된다.
● 5년 뒤에 다시 발생한 항공 사고
그리고 5년 후,
데자뷰처럼 똑같은 사건이 발생한다.
1983년 8월 31일
뉴욕을 떠난 대한항공(KAL) 007편은
▲ 사고 2년 전 대한항공 007편 모습
240명의 승객과 29명의 승무원 등,
모두 269명을 태우고
"한국인 105명, 미국인 62명, 일본인 28명,
대만인 23명, 필리핀인 16명, 홍콩인 12명, 기타 23명"
중간 귀착지인 알래스카의 '앵커리지 공항'에
연로 보급을 위해 착륙했다.
그런데 이때 관성항법장치가
고장이 나버렸다.
▲ 관성항법장치
조종사
"아놔, 또 이게 말썽이네."
하지만 기계를 고치려면
비행 출발 시간이 30 분 정도 늦어지니까
조종사는 급한 마음에
그냥 비행기를 띄우기로 작정하고,
조종사
"괜찮아. 나침반 보면서 가면 되지 뭘."
밤 10시경
그대로 여객기를 띄우고 말았다.
"쉽게 말해 1920년대의 비행 방법으로
비행을 하기 시작한 것."
하지만 비행기는 조금씩
우측으로 항로를 이탈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항간에는 연료값을 아끼기 위해
고의로 직선주행을 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하기도 하지만.."
"에이, 설마 누가 목숨을 걸면서
그런 짓을?"
소련 영공으로 들어갈 무렵
이미 정상 항로에서 300km나 이탈하고 있었다.
"서울~부산 직석 거리만큼
이탈해버렸던 것임."
▲ 소련 상공을 지나가면 항행 거리가 단축되긴 한다 : 격추 지점은 정상 경로보다 600km나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항공 관제사들의 경고는 전혀 없었고
소련 공군만이
KAL기의 항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비상대기"
"미군 정찰기다!"
● 소련 전투기의 출동
여객기가 '캄차카 반도'를 지나고
오호츠크해를 지나려던 때인,
9월 1일 새벽 1시 30분경,
소련의 전투기가 발진했다.
임무는 미군 정찰기로 보이는
KAL기를 유도 착륙시키던지,
여의치 않으면
격추시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련의 전투기는
그대로 귀환하고 말았다.
KAL기가 마침
공해상으로 벗어났기 때문이다.
"아놔.."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KAL기는
항로를 이탈한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소련 공군은
KAL기가 사할린 섬에 접근하자,
다시 새벽 3시경,
전투기에 명령을 내린다.
"미군 정찰기가 접근한다."
"이번에는 실수 없도록!"
블랙박스를 통해
밝혀진 사실은
이때까지도 KAL기 조종사들은
태평하게 잡담을 나누고 있었고,
얼마 후 007편보다
뒤처져서 뒤따라 오는
대한항공 015편과의
교신을 통해
자신들의 위치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고 말았다.
"015기에서는
바람이 ○○쪽으로 불고 있다는데?"
"괜찮아,
그 정도면 오차 범위네 뭘."
하지만 이때 소련의 전투기는
KAL기에 300m까지 초근접,
KAL기와
같은 고도로 날아가면서
전투기 날개 쪽에 달린 경고등을 깜박거리며
수차례 유도 착륙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KAL기 조종사들은
이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고,
그러자 소련 전투기는
허공에 실탄(철갑탄)을 4차례나 발사했다.
원래는 조명탄을 쏴야 하지만
전투기는 조명탄을 미쳐 가져오지 못한 탓이다.
때문에 KAL기 조종사들은
여전히 이를 인식하지 못했고,
하필 이때
비행 고도를 상승시켜버렸으니,
"읭?"
소련 공군은 이를
공격적인 행동으로 간주하여
상부에서는
격추 명령을 내리고 만다.
"고도 상승이 공격적 행동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도를 상승시키면 속도가 떨어지는데.."
"전투기가 이 속도에 맞춰서
같은 거리를 두고 추적하려고 하면,"
"속도를 잃어버려,
추락하는 사고가 왕왕 나타나기 때문임."
당시 KAL기를 격추시켰던
소련군 조종사의 얘기다.
(뉴욕 타임즈, 1996년 9월 9일)
오시포비치
"자세히 보니 미군 정찰기가 아니더군요.
민간 여객기인 보잉기였습니다."
오시포비치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의미 없었습니다.
민간 여객기를 군사용으로 바꾸기는 쉬운 일이니까요."
오시포비치
"우연이었지만 경고 사격을 한 이후에
하필 비행기가 고도를 높여서,"
오시포비치
"나는 그걸 지능적인 행동으로 판단했고
여객기일 리가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오시포비치
"또 여객기는 곧 사할린 영공을 지나
공해상으로 빠져나갈 찰나여서,"
오시포비치
"지금 쏘지 못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급하게 두 발을 쐈습니다."
"쾅쾅!"
하지만 여객기는 미사일을 맞고도
엔진이 손상 당하지 않아
수평 착륙을 위해
최후까지 노력한 모양이다.
요격을 당하고도
12분 뒤에야 레이더망에서 사라진 데다
홋카이도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일본의 오징어잡이 어선이
비행기 폭음과
폭발 장면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아! 거의 일본 영해 부근이었는데,
안타깝다."
KAL 격추사고의 여파
● 미국의 강력한 비난, 궁지에 몰린 소련
KAL 007기가 격추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낸 곳은
일본에 있던
미국의 첩보기관이었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p.220)
CIA
"긴급 소식이다! 일본 북부에서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으로 들어간 뒤,"
CIA
"행방이 묘연했던 KAL 007기가
소련 공군에 의해 격추되었다!"
CIA
"소련 전투기 조종사가
'목표물 격추'라고 보고한 것을 방금 감청했다."
하지만 이날 아침,
일본 정부는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어서
모호한 뉴스를
내보냈는가 하면,
"대한항공기가 행방불명됐다."
나중에는 이런 오보까지
터뜨렸으니,
"소련 공군에 의해 KAL 007편이
사할린 섬에 강제 착륙했다."
소식을 들은 한국 유가족들의 안도의 미소가
TV 중계에 잡히기도 했다.
"그래도 살았으니 다행이네."
게다가 소련도
전면 부인하고 나왔다.
소련
"우리는 KAL기에 대해 전혀 모른다.
영공 침범기는 동해상으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럴 때
미국이 입을 열었다.
미국
"소련 전투기가 007편을 격추했다!"
미국
"소련 전투기는 민간항공기임을
뻔히 알고도 격추시킨 것이다."
미국
"이는 명백한 학살행위이요,
야만적 행위다!"
미국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전 세계에 대한 공격이 아닐 수 없다!"
순간 아수라장이 됐다.
유족들은 혼절하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 측은
소련을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언론들도
적극 가담했다.
(Lloyd Demouse, 레이건의 미국)
올랜도 센티널
"KAL기 격추는 소련의 집광적 행위다!"
뉴욕 포스트
"모스크바의 피 묻은 손"
시카고 트리뷴
"KAL기 격추는 미리 계획된 살인행위다!"
뉴욕 타임스
"KAL기 격추는 냉혈한적 학살행위!"
그러자 국제적인 비난 여론을
의식한 소련은
사건 발생 8일 만에야
KAL기 격추를 인정했다.
소련
"영공을 침범한 비행기는
점멸등을 끄고 있어서,"
소련
"그게 여객기라는 것은
전혀 몰랐다."
소련
"또 불법으로 영공을 침범한 여객기를
유도 착륙하려고 신호를 보냈지만,"
소련
"여객기는
아무런 답신도 없었다."
소련
"KAL기는 미국과 남한의 사주를 받아
첩보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소련의 변명은
통할 리 없었고,
각국은 소련 여객기의 운항 금지, 취항 거부 등
강력한 제제 조치를 취하고 만다.
"KAL기 격추사건 이후로, 군수용으로만 쓰이던 GPS가
민수용으로 사용되게 된다능."
● 레이건 정부에게 엄청난 선물이 되다
KAL기 격추사건은
레이건에게 엄청난 행운으로 작용했다.
레이건은
떨어진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소련과의 '냉전 경쟁'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었지만,
그때마다 민주당에서 태클을 걸고 나와서
한창 깝깝해 하던 시기였는데,
소련의
KAL기 격추사건으로
국가안보상의 '위기'가
현실로 입증된 듯 보이지 않았는가!
때문에 레이건 정부는
온갖 방송매체를 다 동원해 언론플레이를 했고,
"우주에 떠 있는 우주조종사의 '비난 성명'까지
TV를 통해 방송했다능."
덕분에 반소감정이
전 미국에 걸쳐 불길처럼 타올라
뉴욕의 UN 본부에서는
소련기가 불에 타는가 하면,
▲ 사진은 1978년 LA에서 있었던 유태인들의 시위
소련제 보드카의 불매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소련의 안드로포프 서기장을 사살하는
전자오락마저 등장하고 있었다.
레이건
"하하하"
그러면서 레이건과 공화당은
막대한 정치적 이득을 얻게 된다.
"핵탄두 미사일의 유럽 배치에 대한
반대 여론 무마!"
"대륙간탄도 미사일과 독가스 무기 생산의
반대 여론 무마!"
"미 해병대의 레바논 파견에 대한
반대 여론 무마!"
"1875억 달러의 막대한 국방예산을 통과!"
(당시 대한민국 GDP의 2배)
"니카라과의 좌파 정권을 물리치기 위한
반군 게릴라를 지원하는 일에도 반대 여론 무마!"
"대 소련 선전 방송에 대한
예산 대폭 증액!"
하지만 레이건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불리한 정보는
애써 은폐하기도 했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p.221)
레이건
"뭐? 소련이 격추시키기 전
경고를 했지만.."
레이건
"KAL기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어
격추시킨 거라고?"
레이건
"이봐! 그런 건 우리한테 불리한 정보야.
그런 걸 알려서 뭐 해?"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
레이건의 이러한 태도가
나중에 '음모론'을 양성하는데,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p.221)
"KAL기 사건이
사실은 미국이 고의로 일으킨 짓이라며?"
"헐!"
그래서였나? 사건 한 달이 지난 뒤,
언론들은 이렇게 레이건을 꼬집기도 했다.
시카고 트리뷴
"KAL기 격추 사건은 레이건에게
커다란 정치적 보너스가 되었다."
뉴욕타임스
"레이건의 한 보좌관은
KAL기 격추가 자신을 도와줬다고 시인했다."
월스트리트저널
"레이건은 KAL 격추 사건으로
막대한 정치적 이득을 보았다."
워싱턴포스트
"KAL기 격추 사건에 대해 양심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레이건 행정부 안에서는 아무도 없다."
어쨌거나 레이건의
'선전술'은 주효했고
소련 서기장 안드로포프는
세계 여론의 빗발치는 공격을 받으며
국제적으로
크게 고립되어야만 했고,
안드로포프
"속지말아요!
이건 미국의 선전술이에요!"
이를 빌미로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들어서고
이후 소련은
개혁개방 정책으로 가야만 했고,
고르바초프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려면
개혁개방으로 가야하고.."
결국 소련의 붕괴까지
치닫고 말았다.
"그렇게 따지면 KAL기 격추 사건은
소련의 붕괴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었음."
● 전두환의 뜻밖의 이익
KAL 추락사고가
보도된 이후,
사고 주변 해역으로
미국, 일본의 항공기와 선박까지 총동원되어
실종기의 수색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시신은 커녕
옷 한가지 조차 건지지 못했다.
▲ 사고 지점에서 가까운 모네론 섬 주변에서 건진 승객들의 신발
"에겅.."
첨예한 냉전의 시대였던 지라
소련의 KAL기 격추는
그 자체로
온 나라의 충격이었다.
▲ 20대 초반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승무원들
"헐! 어떻게 이런 일이.."
9월 2일부터 3일 동안
관공서와 가정집에서는 추모조기가 게양되었고
9월 5일에는 유가족을 태운 페리호가
사고 지역에 도착,
유가족들은 가지고온 국화를 뿌리며
망자의 슬픔을 달랬는가 하면
9월 7일에는
피격 희생자 합동 위령제가 거행되어
전국적으로
묵념 사이렌 소리가 울려
온 국민이 1분간
묵념을 올리기도 했다.
특히 10만여 명이 운집한
서울운동장에서의 합동 위령제에서는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여중생이
비통한 고별사를 낭독했는데, ☞ 참고
"소련 놈들아 우리 아버지를 돌려달라.
아니면 시신이라도 돌려달라."
"이 죽일 놈들의 소련 놈들아."
"가슴에 한을 품고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
그 목소리가
어찌나 애절한지,
생방송으로 방송된 이 장면에
많은 사람들이 전율을 느끼고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그런데 사실, KAL기 사건은
레이건만 도왔던 것이 아니다.
전두환
"..."
당시 5공 정권은, 82년부터 시작된
잇단 대형 금융비리 사건과
친인척 비리 사건으로
여론의 반응이 매우 좋지 못한 때였다.
▲ 이순자의 삼촌, 이규광 구속
그럴 때 KBS의 '이산가족 찾기' 열풍이
국민의 관심을
뜬금없이 다른 곳으로
전환시켜 주더니,
KAL 격추 사건까지
발생하여,
"한 달 후에는
아웅산 테러 사건까지 발생함."
국민들 사이에
고조된 위기의식이
다시 한번 '반공독재'를
묵인해 주었기 때문이다.
"앗!"
한편 KAL기 격추 사건이 있었던 날조차
TV 뉴스는,
'땡전뉴스'를
강행하고 말았다.
(조선일보, 1998년 12월 6일자)
"뚜뚜뚜 땡!"
하고 나왔던 톱뉴스는?
KAL기 격추 사건이 아니었다!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
으로 시작하더니
TV 화면에는 전두환이 빗자루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조기청소를 하는 모습을 비춰주는 게 아닌가!
첫댓글 잘 봤습니다..!
민항기는 나침반을 보고 운행하는게 아니라
ins말고도 vor/dme 항법장비를 이용합니다
한 기지국이 고장나도 다른 기지국 신호를 수신하면 됩니다
오토파일럿에 잘못 입력된 목적지(icao조사 결과)는 뭔가요 ?
민항기는 전투기처럼 위치등을 켜고 끄지 않습니다
왜 식별부호( 비컨코드/트랜스폰더 )는 안 켰을까요?
왜 항로이탈 경고를 안 했을까요?
경고방송 121.5mhz 방송을 못듣거나 대답못한건 어떻게 설명하실까요?
왜 미국은 그 순간 감청하고 있었을까요?
말은 많은데 "쓸만한" 말이 없습니다
싸구려,똑똑한 사람들 때문에 의문사고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해하시죠^^
싸구려 똑똑이들 ....의외로 많더군요.
무슨 관성항법장치가 고장나요? 의도적으로 껐을 것.1978년 소련 무스만스크에 소련 전투기 기관포에 맞고 2명이 사망하고 강제착륙 당했지요.그 사건도 1983년 칼 007처럼 의혹이 있는 사건입니다.
개인적으로 칼기 사건은 의혹이 있는 부분까진 모르겠습니다. 회원분님들이 자료를 정리해주셔서 올리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모르겠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많이 쓰는 용어인데
칼기가 연속되는 사고에도 그냥 취항한 그 자태가 매우 좋지 않은 구실을 주고 있음에도 계속 운항을 한 것은 마 땅히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행상황을 보면 이익을 보는 쪽이 그걸 꾸몄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앞잡이라고 단정해도 말을 못하는 겁니다.
@세리랑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지...
미국과 전두환정권이 꾸민일이라면 누구나 납득할 만한 자료를 모아 글을 쓰면 되는 것이지요.
이사람 글만 보면 짜증나네...
도대체 이런 논리의 글들만 골라 연구하여 많은 자료가 축적돼 있는 모양이구려..,.
내가 kal007기 격추건에 대해 당시 대한항공 조중훈회장의 분노 썩인 말을 직접 들었소..
언젠가는 밝히겠지만 지금은 말할수 없다고 합디다...
그냥 쓰레기라 생각하세요. 그게 편해요.
83.9.1일 격추된 날 소련이 토폴 icbm 첫 발사 시험이 예정됐는데 그 탄착점이 캄차카 크류치 시험장이었죠.
icbm 전략적 능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재돌입후 정확성이서 대신 감청 공작에 동원되었다가 격추된 것으로 봐야죠.
토폴에 대한 영문위키에 중요한 단서가 올라와 있죠.
Marshal Nikolai Ogarkov, Soviet Chief of General Staff cancelled the September 1, 1983 test flight of the RT-2PM Topol which was to be launched from Plesetsk (the launch site in northwest Russia used for test firing of solid fuel propellant ICBMs)- 24 minutes later to land in the Klyuchi target area on the Kamchatka Peninsula. The night of the scheduled launch was the night that Korean Air Lines Flight 007 intruded Soviet airspace over Kamchatka.
칼기 격추된 날 토폴의 첫 발사시험이 예정되어 있었고 그 재돌입 타격위치가 캄차카 연습장이었는데 참모총장 오르가프가 취소해버립니다. 미-소간의 ICBM 경쟁은 재돌입이후 정확성이 가장 큰 전략적 의미를 갖습니다.
지상 타격 정확성이 2배 늘어나면 핵탄두 위력을 8배로 늘리는 것과 동일합니다.
읽을 가치도없는 소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아프면 어디론가 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