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김선주목사님의 글
< 그는 왜 바지를 거꾸로 입었나? >
‘어설픈 아이 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말이나 행동이 어설퍼서
감정 표현과 소통에 문제가 있는 아이를 말한다.
어릴 적 신발 신기를 배울 때 왼발과 오른발의 신발을
구분하지 못해서
좌우를 바꾸어 신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런 증후군은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정상화된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위해 부모들은
아이들의 이 어설픈 아이 시절에
많은 공을 들인다.
부모는 대소변 가리기,
신발 똑바로 신기,
숟가락질하기와 젓가락질하기 등의 기초 훈련을 강화한다.
특히 스스로 옷을 입는 법을
배울 때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단추가 있는 옷은
단추를 구멍에 끼우는 법과
단추의 배열 순서를 맞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퍼가 있는 옷을 입을 때
지퍼의 첫 마디를 맞추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는 스스로 살아갈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기 손으로 밥을 먹고,
자기 스스로 단정하게
옷을 입을 줄 알며,
자기 스스로 밥상을 차릴 줄 아는 능력,
자기 스스로 사람을 대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야생동물의 새끼가
부모에게 사냥하는 법을 배우듯이 인간은 스스로
이 세상을 살아갈 지혜와 능력을 교육받는다.
나아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배우는 게 인간화의 과정이다.
요 며칠
윤석열 대통령의 바지 사진이 화제다.
양복바지를 거꾸로 입은 것 같은 사진이
한 언론사에 의해 보도되면서
그를 두고
희극적인 코멘트가 줄을 잇는다. 사진을 확대해 보니
확실히 앞뒤가 바뀐 게 맞다. 엉덩이에 해당되는 바지의 볼륨이 앞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그리고 남자의 바지 앞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지퍼가
보이지 않는다.
바지를 거꾸로 입은 것이다.
상식을 비웃는
기이한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 사람인지라
일순간 엉뚱한 생각부터 들었다. 저것도 무속적 행위의 하나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환갑이 넘은 성인이
바지의 앞뒤 구분도 못할까?
그는 어설픈 아이 증후군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나이 먹고 성인이 되어서도
옷 하나 제대로 입을 수 없는 저능한 상태 말이다.
평소 그의 말과 행동에서
소통이 어려운
‘어설픈 아이 증후군’을
봐 왔기 때문이다.
만약 바지를 거꾸로 입은 것이 실수라면
대통령실의 비서진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실수라고 보기엔
그의 주변엔 너무 많은 비서진들이 있다.
비서진들의 문제 제기가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문제를 제기하지 못할 만큼 숨막히는 불통의 상황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비서진들의 사소한 옷
입기 시정 권고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제라면 이것은 신념의 영역에 해당된다. 무속인의 지시일 가능성 말이다. 대선 과정에서
그러한 일들을
우린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만약 그가 바지를 거꾸로 입고도 감각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그의 신체 감각과 두뇌는
국정을 수행할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아무리 알콜성 치매가 있다 하더라도
이건 그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정신적 지주로 여기는
무속인의 무속적 지침일 가능성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공식적인 대선 TV 토론에서조차 손바닥에 임금 왕 자까지 쓴 사람이
바지 하나 거꾸로 입는 것쯤은 쉽게 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한 나라의 검찰총장을 지내고 대통령이 된 사람의 정신 상태가 이 정도라면 심각하다.
그 심각성은
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문제다.
이런 정신 상태에 놓인 사람들은 세계와 인간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극단적인 말과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
심지어 적개심으로 누군가를 처단하거나
국가 간의 대립 의지를 불태우기도 한다.
대립과 종속이라는 극단적인 태도로
자기 감정을 표출한다.
이런 사람들의 행동은
‘충동’에 기반한다.
이에 대해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트 러셀은
<사람은 왜 싸우는가?>라는 책에서
일찍이 인간 안에 있는 충동이 인류에 얼마나 끔찍한 문제를 야기하는지를 피력하고
그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러셀은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당시
세계의 운명을 목도하며
이런 야만적인 전쟁이 왜 일어나며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는가를 그의 탁월한 논리로
조목조목 짚어나간다.
그는 인간 안에 통제되지 않는 충동이
인간의 역사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고 말한다.
특히 소유의 충동이 강할수록 인간은 사고하지 않고 단순해지며 폭력성을 드러낸다고 한다.
인간의 심리 기저에 있는
이러한 충동을 제어하기 위해 정치와 종교, 교육, 결혼 같은 제도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특히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그의 책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명백히 밝혔지만
인간의 풍성한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
그리고 한 사회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
영적인 감각과 영적인 삶의 태도를 주문한다.
그것은 기성종교에서 말하는 상투적인 ‘영적’ 개념이 아니라 세계와 사물을 대하는 심미적인 감각을 말한다.
그 영적인 감각은
예술의 영역에도 해당된다.
지성의 능력과 영적인 감각 없이 소유에 집착하는 인간은
충동적일 수밖에 없고,
그런 인간이 만들어가는 세계는 매우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자리에서까지
손바닥에 임금 왕 자를 쓰고 바지를 거꾸로 입는 사람의 정신 상태는
매우 단순하다.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누군가에게 정신이 종속되어 비상식적인 말과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매우 단순하고 충동적인 사람이다.
20세기 들어 두 차례에 걸쳐 동류 인간을 끔찍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인간들은
바로 이러한 충동을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쟁에 거대한 명분,
즉 애국심으로 서로를 죽이는 데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
역시 그러한 충동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이런 자들은 무당의 지시에
바지를 거꾸로 입는 것처럼
올바른 사유를 하지 못하고
집단의 논리와 광기에 쉽게 사로잡힌다.
윤석열 대통령이 바지를 거꾸로 입은 것은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라
인류를 폭력과 야만으로 이끌고 갈 욕구와 충동의 메타포다.
나는 그의 바지를 보면서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러다 진짜 큰일 나겠다 싶다. 타자에 대한 공감 능력이 없는 자는
외부 세계와 타자를 적으로 규정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낮은 인간은
적대감으로 인해
충동적으로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발작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낸다. 이런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공포와 두려움이다.
세계와 자신을 살필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없는, 이런 사람들은 무당, 혹은 자기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에게 굴종적인 태도를 취한다.
다루기 쉬운 인간형이다.
이런 인간들은
자기 주변에 말 잘 듣는 아첨쟁이들을 모으고
그들을 통해 적대자들을
처단하려 칼춤을 춘다.
윤석열이
국가의 중요 요직에
자신과 친한 검사들을 포진시킨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두려움에 가득한 사람이며
충동적으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인가를 보여준다.
거꾸로 입은 바지에서
나는 그의 두려움과 연약함을 본다.
그는 영적 감각이 마비되어
세계와 인간을 보는 눈이 닫혀 버렸다.
그의 영역에서 무속의 영향을 제거하면
그는 끈 떨어진 망석중이 될 것이다.
그가 거꾸로 입은 바지에서
나는 인간의 내부에 숨어 있는 두려움과 공포를 본다.
그리고 그것이 가진 야수의 얼굴을 본다.
늦기 전에 바지를 돌려 입혀야 한다.
아니면 바지를 벗겨버리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