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론, J.W.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최초 안장자, 제중원 운영
제중원 2대 원장 헤론 선교사
존 W. 헤론 선교사(John W. Heron, 惠論)는 1858년 6월 15일 영국에서 출생하여 미국으로 이민하였으며, 동테네시주 메리빌대학과 뉴욕종합대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1884년 4월, 미국에서 한국으로 파송하는 최초 선교사(장로교파)로 정식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해티 깁슨(Hattie)과 결혼했다. 헤론 부부는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이 불안하여 일본에서 1894년 4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머물다가 1885년 6월 21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는 의료 선교사로 입국하여 알렌(H. N. Allen)의 후임으로 광혜원(제중원) 원장과, 고종 임금의 시의(侍醫)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벼슬을 하여 혜참판(惠參判)이라 불렸다. 그의 업적은 우리 나라에서 병원사업과 성서번역사업을 비롯하여 기독교 문서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서 출판을 위하여 1887년에 조직된 성서번역 상림위원 4인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1890년 6월 25일 창설한 기독교서회 창설자였다. 그는 1889년 언더우드의 압록강 세례문제와 관련하여 언더우드와 헤론 간에 불화도 있었다고 한다. 헤론의 인간성에 대하여 기포드 선교사는 1897년 코리안 레포지트리에 "헤론의 성격은 오래 사귄 뒤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의지적인 사람이며 자기 책임은 철저히 지켰다. 그는 의사로서 강한 희생정신과 사랑의 정신과 인술로써 모든 어려운 의료사업을 담당해 냈다. 절대로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몸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그는 과로와 정신적 긴장 때문에 기진 맥진하여 질병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고 하였다. 헤론은 1890년 7월 26일 결국 한국에 온지 5년만에 이질에 걸려 3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으며 양화진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라고 쓰여 있다. 헤론이 별세한 뒤 그의 미망인 해티는 헤론과 가까웠던 친구 게일(Gale) 선교사와 1892년 4월 7일 재혼하였다. 이때 게일은 노총각으로 30세였고, 해티는 33세의 미망인으로 헤론의 아이가 둘(1885년에 출생한 큰딸, Sarah Anne과 1887년에 출생한 딸Jessie Elizabeth)이 있었다. 게일과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으며 해티는 1907년 8월 두 딸과 한국을 떠났다가 스위스에서 다시 돌아 왔다. 결핵으로 1908년 3월 28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의 전 남편 헤론이 묻혀있는 뒷자리에 안장하였다. 양화진이 외국인 선교사 묘지로 결정되기까지는 헤론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긴 사연이 담겨 있다. 헤론이 별세하자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와 논의 끝에 양화진을 묘지 후보지로 선정하고 한국정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묘지로 허락되지 않았다. 양화진은 본래 언더우드 선교사 등이 자기네 주거지로 삼으려고 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정동 미국공사관 안에 임시로 묘를 설치하니, 시민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외교적인 차원에서 미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 5개국 공사의 공동 명의로 양화진을 외국인 묘지로 청원하여, 1890년 10월 24일 정부의 허락을 받아 그후 헤론의 시신을 이장하게 되었다. 이때 헤론 묘지의 관리인은 최봉인(후에 서교동교회 설립교인과 초대장로로 임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