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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투쟁 제물이 된 비운의 청춘남녀
시아버지의 겁박에 자명고 찢은 공주, 아버지 손에 죽임 당해
후계자 되려 아내 희생시킨 왕자, 누명쓰고 칼에 엎어져 자결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의 비극적 사랑을 소재로 한 SBS 드라마 [자명고]의 한 장면. 낙랑 공주(박민영 분)가 군사들에게 끌려가고 있다.
고구려 왕자 호동이 옥저에서 놀고 있는데 낙랑왕 최리가 지나다가 그를 보고 말을 건넸다. “그대의 얼굴빛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 혹시 북국(北國)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닌가?” 최리는 호동을 낙랑으로 데려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아줬다.
그 뒤 호동은 본국에 돌아갔는데 어느 날 최리의 딸에게 사람을 보내 은밀히 일렀다. “그대가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순다면 내가 예를 갖춰 맞이하리다. 안 그러면 맞이하지 않을 것이오.” 이전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적병이 오면 저절로 울렸다. 호동 왕자는 그걸 못 쓰게 만들라고 시킨 것이다.
낙랑 공주는 고심 끝에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몰래 무기고에 들어갔다. 북의 가죽과 나팔의 입을 베어버리고 이를 왕자에게 알렸다. 호동은 아버지 대무신왕에게 권해 낙랑을 급습했다. 북과 나팔이 울리지 않았으므로 낙랑왕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채 성 아래까지 이른 고구려군을 맞았다. 뒤늦게 진상을 파악한 최리는 원통한 나머지 자기 딸을 죽이고 성에서 나와 항복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는 한국사에서 가장 비정하고 서글픈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이 청춘남녀의 비극은 정사(正史)에 기록됐지만 설화(說話)에 가깝다. 안개처럼 자욱한 은유와 상징 속에 어떤 역사적 진실이 감춰져 있을까? 당사자인 호동과 최씨녀, 그리고 배후 조종한 대무신왕의 입장이 되어 3인 3색으로 비극을 재구성해 본다.
먼저 고구려 3대 임금 대무신왕(大武神王) 무휼! 동명성왕이 조그맣게 건국하고 유리명왕이 근근이 이어간 신생국 고구려는 그가 아니었다면 주변국들에 시달리다가 진즉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대무신왕은 안으로는 귀족과 백성을 단합시키고, 밖으로는 부여와 후한에 당당하게 맞서 고구려가 강국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는 기틀을 다졌다.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의 비극은 그가 인근 소국들을 정벌하고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대무신왕의 사람됨과 포부, 그리고 지략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사건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무휼은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로 원래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었다. 태자였던 형들이 예기치 않게 요절했기에 그는 역사 무대에 위풍당당하게 등장할 수 있었다. 무휼 왕자가 후계자감으로 두각을 나타낸 건 유리명왕 32년(서기 13년)의 일이었다.
그해 북방의 강국 부여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침범했다. 왕자는 고구려군을 지휘해 산골짜기에 매복했다. 적이 학반령 아래를 지날 때 복병이 불시에 쳐서 무찔렀다. 그 공으로 무휼 왕자는 이듬해 태자 자리를 차지했다([삼국사기]는 당시 그의 나이가 11세였다고 기록했으나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이다).
유리명왕 사후 무휼이 왕위에 오르니 곧 대무신왕이다(서기 18년). 새 왕은 호기롭게 부여 정벌에 착수했다. 부여왕 대소는 고구려의 숙적이었다. 주몽이 부여에 머물 때 제거하려 했던 것도 이 자였고, 유리명왕 시절 시도 때도 없이 핍박했던 것도 그이였다. 대무신왕 4년(서기 21년) 12월 고구려는 마침내 국운을 걸고 군사를 일으켰다.
고구려군은 비류수·이물림 등을 지나며 여러 세력을 규합하고 이듬해 2월 부여 남쪽 평원에 이르렀다. 대무신왕과 대소왕의 숙명적인 대결은 그러나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원정군이 미처 정비하기 전에 기습하려던 부여군은 오히려 진흙 수렁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게 됐다. 이 틈을 노려 북명 사람 괴유가 고함을 지르며 대소에게 달려들었다. 얼굴색이 희고 눈에서 광채가 나오는 거인이 무시무시한 칼춤을 추자 부여왕의 목이 달아났다.
하지만 이 원정에서 대무신왕도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부여군은 왕을 잃었지만 수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저들의 포위 섬멸전에 고구려군은 도망갈 곳도 없는 평원에서 굶주리고 지쳐갔다. 왕과 병사들은 거의 궤멸 직전에야 짙게 낀 안개를 이용해 사지에서 벗어났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신기한 책략
구사일생으로 귀환한 대무신왕은 겸허하게 반성했다. 그는 위로 잔치를 베풀면서 신하와 백성들에게 고했다. “내가 경솔하게 부여를 치다가 우리 군사와 물자를 많이 잃었으니 이 모두가 나의 허물이다.” 대무신왕은 전사한 이를 문상하고 상한 자를 위문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왕이 자세를 낮추고 민심을 챙기자 귀족 세력도 힘을 모아줬다. 나라 사람들이 똘똘 뭉쳐 국력 회복에 나선 것이다.
반면 부여는 왕위를 둘러싸고 내분이 벌어져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대무신왕 5년(서기 22년) 4월에 대소왕의 막내 아우가 모국을 버리고 나와 압록강 부근에 갈사국을 세웠다. 7월에는 부여의 유력한 왕족이 백성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했다.
인구가 곧 국력인 시대에 귀순자 1만여 명은 하늘의 축복이었다. 대무신왕은 그를 왕으로 봉해 연나부에 안치하고 낙씨(絡氏) 성을 내려줬다. 전통의 강자 부여가 지리멸렬해진 가운데 동북의 대세는 새로 떠오르는 고구려로 기울었다.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대무신왕은 개마국·구다국 등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며 고구려를 신흥 강국으로 키워나갔다.
이때 후한 요동 태수가 이끄는 중국 군대가 고구려를 침략했다(서기 28년). 광무제 유수가 왕망의 신나라를 멸하고 후한을 건국한 직후였다. 고조선 땅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이래 한나라는 줄곧 동이(東夷)를 복속시키려 했다. 한나라가 잠시 단절기(서기 8~23년)를 가졌지만 후한이 계승한 이상 영향력을 되찾으려는 건 당연했다.
후한 군대에 맞서 대무신왕은 좌보 을두지의 책략을 받아들여 위나암성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막강한 적과 정면승부 하기보다 천혜의 요새에서 버티며 원정군이 지쳐서 물러가게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십 일이 지나도 적들이 물러날 기미가 없자 고구려 왕은 요동 태수에게 선물과 편지를 보냈다. 연못에서 잡은 잉어를 수초에 감싸서 술과 함께 전해주며 좋은 말로 타이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요동 태수는 곧 포위를 풀고 군대를 되돌렸다. 그들은 성안에 물이 떨어지면 고구려군이 항복하리라 보고 물러가지 않았는데 잉어와 수초 선물에 수자원이 풍부함을 안 것이다([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 11년’). 아군과 적군의 실정을 잘 살펴 교묘하게 회군할 명분을 제공한 대무신왕의 심리전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고구려 왕은 신중하게 한반도로 눈을 돌렸다. 후한이 요동태수를 내세워 고구려를 견제하고 무력시위를 벌이는 마당에 만주에서 새로운 사업을 도모하기는 어려워졌다. 고구려의 남쪽(평양 일대)에는 낙랑군이 버티고 있었고, 동남쪽(옥저 땅)에는 낙랑군의 영향권에 속한 소국들이 분포했다. 한나라의 변경이지만 전한이 멸망하면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에 빠진 지역이었다. 대무신왕은 후한이 손쓰기 전에 선수를 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덤벼들 수는 없었다. 저들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비정한’ 신랑, 계략 성공한 듯 했으나
▎국립발레단이 무대에 올린 [왕자 호동]의 한 장면.
부여와 후한 등 강적들과 맞붙으며 지략을 쌓은 그는 손실을 줄이면서 뜻을 이루는 길을 찾아 나섰다. 남쪽의 낙랑군은 아직 고구려에는 버거운 상대였다. 대무신왕은 동남쪽 소국들 가운데 최리가 다스리는 낙랑국을 주목했다. 이곳을 차지하면 옥저 땅을 아우르는 데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었다.
왕은 군대를 동원하기 전에 정치·외교적으로 접근했다. 일찍이 손자가 말하기를,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이라고 했다([손자병법] 모공편). 낙랑국을 병합할 포석으로 고구려 왕이 둔 수는 정략결혼이었다. 임금은 이 결혼에 총애하는 아들 호동을 신랑감으로 내걸었다. 호동 왕자는 대무신왕의 둘째 왕비인 갈사왕 손녀 소생이었다. 얼굴이 아름답고 임금이 매우 사랑해 이름을 ‘호동(好童)’이라 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
그럼 낙랑국과 정략결혼을 추진할 때(서기 32년) 왕자의 나이는 몇 살이었을까? 부여 대소왕의 막내아우가 갈사국을 세운 게 대무신왕 5년(서기 22년)인데 이 무렵 고구려와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손녀를 시집보내 바로 호동을 낳았다면 10세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나이는 뒤에 거론될 첫째 왕비의 참소, 곧 “음란한 행동을 하려 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감안하면 너무 어리다.
그렇다면 대무신왕 무휼이 부여군을 물리치고 고구려 태자가 됐을 때(서기 14년) 부여에서 앞으로는 잘 지내자며 왕제의 손녀를 보냈을 수도 있다. 이 관행적인 외교의 결실로 태어났다면, 최대 19세까지 늘려 잡을 수 있다. 다만 호동이라는 이름에 미성년자의 흔적이 있으므로 십대 중반의 야심만만한 소년이라고 보는 게 무난하지 않을까.
그는 임금의 사랑을 받기는 했지만 어머니가 둘째 왕비라 적통(嫡統)이 아니었다. 후계자가 되기에는 결격 사유가 있었던 것이다. 첫째 왕비는 해우라는 왕자를 두고 있었는데 나이가 훨씬 어렸다. 하지만 적자이므로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왕비를 배출한 정치 세력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첫째 왕비는 가장 힘센 부족 출신이었을 것이다. 고구려 초기의 5부 가운데 원류를 이룬 비류나부(沸流那部)가 유력하다. [삼국사기]의 같은 해 기사에 비류부장 3인이 횡포를 부려 추발소로 하여금 바로잡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비류나부 세력이 커서 왕이라 해도 통제하기 힘들었다는 뜻이다.
반면 둘째 왕비는 부여와 갈사국 출신으로 고구려 내에 지지기반이 취약했다. 연나부(椽那部)에 친척뻘인 낙씨 세력이 있었지만 부여에서 귀순한 지 얼마 안 돼 큰 힘이 되진 못했을 터. 왕자들의 나이로 보면 호동의 어머니가 먼저 부인이 되었을 텐데 둘째 왕비로 밀린 데는 이런 속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호동 왕자는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고 싶었으나 정치적 한계에 부딛혔다. 힘이 없어서 서러움을 삼켜야 했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자 그는 야심 차게 대권 도전에 나섰다.
태자 자리를 꿰차려면 나라에 큰 공을 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낙랑 공주와의 정략결혼은 호동에게 크나큰 기회였다. 해우가 더 크기 전에 낙랑국 공략에 일조해서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무휼이 그랬듯이 왕의 재목임을 널리 인정, 그해 여름 호동이 옥저 땅에 유람을 나간 것은 여러모로 계산된 행동이었다. 우선 낙랑국 사정을 염탐하고 지형도 익혀둘 필요가 있었다. 왕자가 첩자 노릇을 하는 것은 그 시절에는 낯선 일이 아니었다. 물론 이 유람의 가장 큰 목적은 낙랑왕 최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었다.
태자는커녕 ‘자살 당하고’ 만 왕자
▎1916년 평안남도 대동군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낙랑 금제교구(Gold Belt Buckle, 국보 제89호).
고구려 대무신왕은 사전에 정략결혼을 제안했을 게 틀림없다. 호동 왕자의 옥저 출행은 결혼 수락에 앞서 낙랑왕에게 직접 선보이는 절차였다. 최리는 신랑감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 나라로 데리고 갔다. 왜 아니겠는가. 얼굴이 아름다워서 대무신왕이 총애하는 아들이다. 장인이 보기에도 흡족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결혼 풍속은 ‘데릴사위’였다. 쌍방의 부모가 허락해 약혼이 이뤄지면 신부의 집 뒤에 자그마한 서옥(壻屋)을 지었다. 신혼부부는 서옥에서 아이를 낳고 기른 뒤에 신랑의 집으로 돌아갔다. 노동력이 귀한 시대에 남의 집 딸을 며느리로 얻어오려면, 먼저 사위가 노동으로 처가에 봉사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요약하면 ‘장가가는’ 결혼 문화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낙랑국 지배층의 결혼은 ‘시집가는’ 문화였을 것이다. 중국식 ‘친영(親迎)’에서는 처가 사당에 예물을 올린 다음 곧장 신부를 신랑의 집에 데려갔다. 호동 왕자는 고구려식으로 낙랑국에 장가갔지만 얼마 후 혼자 돌아왔다. 그리고는 은밀히 사람을 보내 “내 요구를 들어주면 예의를 갖춰 맞이하겠지만, 안 그러면 시집올 생각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요구라는 게 기가 막힌다. 무기고에 들어가 적이 오면 저절로 울리는 북과 나팔, 곧 ‘자명고각(自鳴鼓角)’을 못 쓰게 만들라는 것이었다. 호동은 낙랑국 방위에 치명적인 행위를 그 나라 공주인 아내에게 강요했다. 처가에 보탬을 주지는 못할망정 나라 팔아먹으라고 닦달한 셈이다.
사랑이었을까? 최리의 딸은 예리한 칼을 품고 무기고에 들어갔다. 몰래 북의 가죽을 찢고 나팔의 입을 베어버린 것이다. 아내의 전갈을 받은 고구려 왕자는 쾌재를 부르며 부왕에게 알렸다. 대무신왕의 출격 명령이 떨어졌다.
낙랑왕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리지 않았기에 안심하고 있었다. 저절로 울리는 기물(奇物)들을 믿었던 것이다. 고구려군의 말발굽이 성 아래까지 들이닥쳐서야 그는 자명고각이 망가진 것을 알았다. 놀랍게도 딸의 소행이었다.
최리는 분노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낙랑왕은 성을 나와 항복했는데 그 전에 아비를 배신한 딸에게 죄를 물었다. 낙랑 공주는 죽음으로 용서를 구했다. 어쨌거나 호동 왕자는 낙랑국을 복속시켰다. 아내의 목숨값이었다. 호동은 비정한 책략을 썼지만 그 파장까진 고려하지 못했을 것이다. ‘독한 늙은이, 그렇다고 자기 딸을 죽일 줄이야.’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이제 호동의 앞길은 탄탄대로일 터였다.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니 태자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그러나 웬걸. 태자는커녕 그해 겨울 호동 왕자는 자살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살 당한’ 것이다. 발단은 첫째 왕비의 참소였다. “호동이 저를 예의로 대하지 않고 음란한 행동을 하려 했습니다.” 자기 아들 해우의 것이어야 할 태자 자리를 공을 세운 호동에게 빼앗길까 봐 추잡한 거짓말로 모함한 것이다.
이를 눈치챈 대무신왕은 다른 사람 소생이라 미워한다며 왕비를 나무랐다. 첫째 왕비는 집요했다. “그럼 대왕께서 몰래 지켜보소서. 그런 일이 없다면 제가 처벌받겠습니다.” 눈물의 호소에 왕의 마음도 흔들렸다. 변심한 아버지는 호동에게 죄를 물으려고 했다. 어찌 된 일일까?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의 5개 정치 세력이 연맹하는 형태로 건국됐다. 그들이 고구려의 5부를 형성했는데 바로 계루부·비류나부·연나부·환나부·관나부였다. 중요한 나랏일은 5부의 수장인 대가(大加)들이 회합해 결정했다.
왕은 연맹의 최고지도자로서 대가 회의를 주재했으나, 또한 대가 회의의 결정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었다. 왕비를 배출한 유력한 부가 협조하지 않으면 아무리 임금이라도 나라를 원활하게 이끌 수 없는 구조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대무신왕은 첫째 왕비의 집요한 요구를 외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들이 치명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국내 재야 사학계는 중국 허베이성 갈석산과 수암사 일대에 낙랑군이 주둔했다고 주장한다.
모함이 분명한데도 부왕에게 추궁당하자 호동 왕자는 자살을 결심했다. 주위에서는 만류하며 임금에게 해명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호동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만약 해명한다면 이는 어머니(첫째 왕비)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요, 부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어찌 효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 15년’) 이 기특한 발언은 왕자의 억울한 죽음을 미화하려고 나중에 지어낸 듯싶다. 그렇다면 진짜 속내는 어땠을까?
소년은 절망하고 후회했다. 아버지의 명에 따라 아내에게 못할 짓까지 했건만 돌아온 것은 어머니를 농락했다는 파렴치한 낙인이었다. 모든 일이 허망하고 또 허망했다. 자신의 헛된 욕심에 희생된 아내가 떠올랐다. 어떤 죽음은 처음에는 실감나지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아리고 짓누른다. 호동 왕자는 제 비정한 어리석음이 부끄러워 몸부림치다가 마침내 스스로 칼에 엎어져 목숨을 끊었다.
이 모든 비극의 정점은 낙랑 공주의 죽음이었다. 최리의 딸은 남편의 요구를 받고 자명고각을 망가뜨려 아버지 손에 죽는다. 다시 한번 묻는다. 사랑이었을까? 호동과 최씨녀의 결혼은 정략의 소산이고 함께한 시간 또한 길지 않았다. 순진하게 사랑이 깊어서 그랬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호동의 아름다운 얼굴에 현혹됐을까? 미남계(美男計)로 추정할 수도 있지만 이 또한 개연성이 떨어진다. 낙랑 공주는 왜 치명적인 선택을 했을까?
그 진실을 알고 싶다면 사건의 배경지인 낙랑국부터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 속의 낙랑은 낙랑군과 관련이 있지만 알고 보면 다른 정치체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낙랑군·현도군·임둔군·진번군의 4군과 속현들을 설치했다.
기원전 82년에는 진번군과 임둔군이 폐지돼 그 현들이 각각 낙랑군과 현도군의 관할이 됐고, 기원전 75년에는 현도군이 요동으로 쫓겨나며 옛 임둔군의 영동 7현이 낙랑군에 편입됐다. 낙랑군은 서쪽의 평양 일대를 치소(治所)로 삼은 반면 영동 7현은 한반도 북부의 동쪽에 분포했다. 지리적으로 떨어진 이 지역을 낙랑군에서는 동부도위를 두어 관장했다.
영동 7현은 대무신왕 때 낙랑군에 왕조의 반란이 일어나고(서기 25년), 후한이 동부도위를 폐지하면서(서기 30년) 각각 후국(侯國)이 됐다. 후한은 영동 땅을 포기하고(棄領東地) 토착민 우두머리들을 현후(縣侯)로 삼았다([후한서] 열전 ‘동이열전’). 이들은 때마다 조정에 하례하면서도 서로 침공해 싸웠다고 한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여전히 후한의 영향권에 남아 있었지만 자치국으로서 독립적 지위를 가진 것이다. 그 가운데 지금의 함흥에 위치한 부조현(夫租縣)이 최리의 낙랑국일 것으로 추정된다. 부조(夫租)는 곧 옥저(沃沮)를 가리킨다. 호동이 옥저로 가서 낙랑왕을 만난다는 [삼국사기] 기록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낙랑국은 작은 성읍국가였다. 지난 2005년 평양에서 출토된 목간 공문서에는 기원전 45년 낙랑군 소속 25개 현의 호구와 인구가 적혀 있다. 부조현에는 1150호 80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당시 생산력을 고려하면 약 70년 뒤에 낙랑국으로 자립했을 때도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낙랑국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후한의 통제를 막 벗어난 데다 덩치도 초기 고구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옥저 땅(함경도 일대)을 호시탐탐 노려온 고구려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공략 기회가 온 것이다.
대무신왕의 정략결혼 제안에 최리는 응할 수밖에 없었다. 북방의 강국 부여를 무너뜨리고 후한 요동태수의 침략을 물리친 고구려다. 신생 소국엔 두려운 상대였다. 낙랑왕은 일단 결혼과 화친으로 시간을 벌면서 방어 수단을 마련하려고 했을 것이다. 자명고각, 저절로 울리는 북과 나팔도 그 수단 중 하나였을 터. 하지만 고구려 왕은 방어를 무력화시킬 책략을 썼다. 책략의 주역은 호동 왕자가 아니라 낙랑 공주였다.
아버지 살리고, 아버지 손에 죽은 공주
혹은 “(왕이) 낙랑을 멸망시키기 위해 청혼해서 그 딸을 데려다 아들의 아내로 삼은 다음, 며느리(子婦)를 본국에 돌려보내 그 병기를 부수게 했다”고 한다([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 15년’). 이 전승은 호동과 최씨녀의 일화 뒤에 짤막하게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앞의 설화 같은 이야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좀 더 사실에 가까워 보이는 전승을 덧붙였다. 여기서는 호동 왕자가 낙랑국에 장가든 게 아니다. 낙랑 공주가 고구려로 시집온 것이다. 이 전승의 주체는 대무신왕이다.
최씨녀에게 문제의 임무를 맡긴 것도 남편이 아니라 시아버지였다. 그는 며느리를 이렇게 겁박했을 것이다. “낙랑국을 쳐서 멸망시키겠다. 왕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네 아버지와 무고한 백성들을 살리고 싶다면 친정에 가서 자명고각을 부숴라. 부질없이 맞서지 말고 고구려에 항복하도록 만들어라.”
자명고각은 비상경보 장치로 보인다. 낙랑의 지배층은 중국화된 토착민이었다. 당시 중국의 과학기술은 기계식 펌프를 발명해 농업용수를 끌어오고, 천연가스를 대나무 관으로 수송해 연료로 쓰는 수준이었다. 자명고각도 능히 만들었을 것이다. 고구려군이 지날 길목에 항아리를 묻고 말발굽의 공명을 관으로 전하면 북과 나팔을 울리게 할 수 있다. 그때 평양의 낙랑군에 구원을 청하고 성에서 며칠만 버티면 된다는 게 최리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반면 딸은 낙랑 사람들이 고구려에 맞서다가 몰살당할까 봐 걱정했다. 그녀는 친정 무기고에 들어가 자명고각을 망가뜨렸다. 호동이 아니라 아버지와 백성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런 딸을 최리는 눈물을 머금고 처단했다. 낙랑왕은 항복할 때 항복하더라도 반발하는 민심을 달래고 후일을 기약해야 했다. 낙랑 공주도, 호동 왕자도 아비들이 제 자식을 희생양으로 삼는 잔혹한 시대에 스러져갔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음 너머로, 죽음은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 대무신왕 20년(서기 37년) 고구려는 낙랑국을 습격해 멸망시켰다. 낙랑 사람 5000명은 비정한 책략을 쓴 고구려를 거부하고 신라에 투항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4년’).
한편 호동의 자살로 고구려 태자가 된 해우는 훗날 폭군이 돼 측근에게 살해당했다(서기 53년). 사후(死後) 신이라 불린 임금, 대무신왕의 혈통이 허무하게 끊기는 순간이었다.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첫댓글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