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끈 / 정태헌
툭 또르르, 자정 넘어선 적막한 밤인데 이 무슨 소리인가. 까닭 모르게 이마가 서늘해지더니 목덜미에 침이라도 맞은 듯 신경이 곤두선다. 그저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일 뿐인데, 이상도 하여라. 둔탁한 소리로 보아 말랑한 게 아니라 제법 딱딱한 물체일 것 같다.
간밤 늦게까지 더위가 가시질 않아 거실에 잠자리를 폈다. 가까스로 잠 속으로 들어서는가 싶었는데 툭 하는 소리가 귀청으로 뛰어들었다. 마루가 깔린 머리맡 난간에서 들린 소리였다. 난간 창가엔 꽃나무 몇 그루뿐, 떨어질 것이라곤 없는데 무슨 소리일까. 산기슭이 가까워 풍뎅이라도 날다 벽에 부딪쳐 떨어졌으려니 하고 다시 잠을 불러들였다.
어젠 툭 한 번이었는데 오늘 밤은 또 물체가 떨어져 두어 번 구른 모양이다. 등을 켜고 구석구석 설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눈에 띄질 않는다. 간밤처럼 소리를 밀어내며 잠을 청하려는데 졸음 대신 또 다른 소리가 찾아든다. 아무래도 의식의 갈피에 스며있는 기억이라도 불러들여 되작거리는 모양이다.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시(박목월의 ‘하관’) 한 구절 달려든다.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이라니, 그럼 풍뎅이가 아니라 혹시 다른 것일 수도 있겠다. 밖에선 밤바람이 부는지 창틀이 간간 흔들린다. 덩달아 소리가 귓전에 맴돌더니 상념은 꼬리를 물고 어릴 적 고향집으로 내닫는다.
그래 바람 부는 봄밤이었지. 윙윙 울어대는 밤바람 소리에 잠을 설치곤 했어. 그 바람에 노란 감꽃이 톡톡 떨어지는 소리가 뒤란에서 들려오곤 했으니까. 늦봄에 감꽃이 지고 나면 여름 초입엔 장독대 항아리 위로 무화과만 한 풋감이 또 툭툭 떨어지곤 하였지. 꽃과 풋감을 번갈아 바람에 실어 떠나보내는 의식이었을 게야. 밤새내 잠 못 이루며 그 소리를 듣다가 까무룩 잠이 들던, 아슴아슴한 기억이 안개처럼 부유하는구나.
시집올 때 친정아버지가 건네준 묘목 한 그루, 어머니는 어린 감나무를 장독대 옆에 심어 놓고 평생 그 근처를 서성대며 살았다. 그 감나무가 목숨을 다해 더는 열매를 맺지 않게 된 후, 어머니도 앓기 시작하더니 그예 몸져 눕고 말았다. 늦봄 저문 그날, 어머니의 왼손은 가슴에서 방바닥으로 스르르 흘러내리더니 툭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말았다. 그건 평생을 끼고 있던 닳은 은반지가 방바닥에 부딪는 소리였다. 뜻밖에 소리 속엔 딱딱한 죽음보다는 말랑한 삶이 실눈을 뜨고 있었다.
어둠이 짙을수록 소리의 기억은 밝아온다. 하나 어느 기억이 현실이고 어떤 장면이 꿈결인지 켯속이 아리송하다. 비몽사몽 뒤척거리다가 희번하게 밝아오는 창밖을 바라본다. 난간을 훑어보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눈에 보이질 않는다. 종일 귓속은 그 툭 하는 소리로 가득하다. 밖에서 종일 바장이다가 저물녘 다시 집에 들어와 소리를 탐색한다.
무의식의 안내였을까. 마침내 그 정체가 눈에 잡힌다. 하나는 꽃나무 받침대 밑에 또 하나는 마루 구석 틈새에 오도카니 엎디어 있다. 창가의 벤저민 고무나무가 떨어뜨린 동그란 열매다. 열매가 동그란 것은 충격을 완화하여 구르기 위함일까. 아니지, 때를 가려 갈무리하는 일이기에 모가 나지 않을 뿐이겠지. 열매가 겨우 두 개뿐이라니, 그 동안 퍽 애면글면했던 모양이다. 왜 그토록 늦은 밤에 엷푸른 열매를 떨군 것일까.
연전, 잎이 풍성하게 늘어진 가지 모양새가 훤칠하고 시원해 보여 사들였던 나무다. 꽃가게 주인은 똑똑한 나무를 사 가는 거라면서 덧붙인 말이 새삼 되살아난다. 생장기에 충분한 햇빛과 양분을 섭취하지 못하면 부양한 잎을 떨어뜨려 양분을 비축하는 생존 방식을 택하는데, 주의할 점은 열매를 맺었다고 손뼉 칠 일은 아니란다. 살기 버거우면 죽기 전에 자손을 남기려고 열매를 맺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까, 아직은 생육 상태가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싶다.
무화과처럼 열매 속에 꽃을 담고 있다니 그 비의秘義가 참 오묘하다. 편하게 누운 나무가 어찌 열매를 맺으랴만, 그 속에 또 꽃을 오롯이 담고 있다니 생각이 깊어간다. 열매 안에서 꽃과 동거, 이는 끝도 없이 따라붙는 생의 근원적 길항, 소멸로부터 삶의 확인이 아니겠는가. 벤저민 고무나무는 공기를 정화한다더니 이렇게 삶도 맑히는구나.
툭, 외마디 지르며 떨어진 열매. 그 둔탁한 소리가 차츰 투명한 음향으로 다가온다. 다시 다가온 시편(90-12) 한 구절,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 꿀벌은 꿀을 모으지만 밀랍도 만드는 것처럼 우리도 눈앞에선 삶을 엮어가지만 등 뒤에선 죽음을 빚어간다. 툭, 하며 떨어진 머리맡의 소리가 기억의 징검다리를 건너 생의 앞길을 벼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