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Howard. L. Blackmore 가 쓴 「Arms and Armour」의 전문을 번역한 내용입니다.
2002년 8월에 1차 번역을 하였으며 2003년 6월에 1차로 수정하였고 이번 11월에 2차 수정
번역판을 내었습니다(이번에는 의역을 위주로 하여 보다 매끄러운 문장이 되도록 노력하였
습니다). 원본 서적은 현재 국내에 정식 번역판이 없으며 국내에 수입되지도 않은 것으로
알고 있으며, 사실 본국에서도 이미 절판된 책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고 자유롭게 퍼
가시되, 다른 통신망이나 사이트에 올리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와 역자를 밝혀 주시기 바랍
니다. 그리고 역자의 사전 허락 없이 글의 내용을 무단 변경하지 마시고, 이 글을 상업적
으로 무단 이용하는 것은 엄금합니다.
<6∼7페이지>
①6페이지 - 코 보호대(nasal)가 붙어 있는 11∼13세기의 노르만 식 투구. 쇠 한 판을 벼
려서 만들어졌으며, 모라비아(Moravia - 체코 동부 지역[역자 註])에서 발견되었음.
②7페이지 -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 - 프랑스 노르망디의 옛 도시 바이외에
서 발견된 11세기 후반의 마제[麻製] 벽걸이. 길이 약 70m에 너비 50cm로 노르만의 잉글랜
드 정복에 관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음. 태피스트리란 마[麻], 양모 등으로 된 색실로 그림
을 짜 넣은 직물[역자 註])에 있는 헤이스팅스(Hastings) 전투의 한 장면. 연(kite) 모양
의 방패를 가진 노르만 기병이, 둥근 방패를 가진 잉글랜드 보병에게 돌격하고 있다.
사슬 갑옷(mail)의 시대(mail은 사슬 갑옷[chain mail], 고리 갑옷[ring mail], 미늘 갑
옷[scale mail]의 의미를 포괄하므로 번역에 있어서 문맥에 따라 해석을 달리 하겠음[역자
註])
비록 몇몇 종류의 판금 갑옷들이 이미 고대 세계에 알려져 있었고 또한 로마 군단에 의
해 널리 쓰여지기는 하였으나, 그것들은 600∼1250년대의 기간 동안 대부분 폐기되고 사슬
갑옷으로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으로 이루어진 이 개설서(즉 바이외 태피스트리[역자
註])에서 처음 시작되고 있는 시기인 헤이스팅스 전투(1066)에서는, 양 측 모두가 팔꿈치까
지 내려오는 넓은 소매가 달린 무릎 길이의 사슬 갑옷(허버크[hauberks])을 착용하였다.
몇몇 경우 사슬로 된 각반(hosen) 역시 착용하였다. 머리는 사슬로 된 꼭 들어맞는 두건
(coif), 혹은 코 위를 덮는 막대 모양의 돌출부(nasal)가 달려 있는 원뿔 모양의 투구로써
보호받았다. 대부분의 투구는 쇠나 청동으로 된 뼈대를 세우고 쇠, 청동, 뿔로 된 판으로
뼈대의 안감을 댄 뒤, 따로 떨어져 있는 코 보호대를 투구 가장자리에 대갈못으로 고정하
여 만들어졌다. 그러나 몇몇 투구에 있어서는 금속으로 된 부품들을 단순히 대갈못으로 고
정하여 조립한 것도 있었다. 모든 투구들 중 가장 튼튼한 것은 쇠 한 판을 벼려서 만든 것
이었다. 그 당시에 사용되고 있었던 공격 무기는 창, 기창(騎槍), 도끼, 철퇴, 그리고 칼
몸이 평평한 무거운 양날 검이었다.
<8페이지>
①8페이지 - 13세기의 채색된 필사본에 실린, 유니콘(unicorn)을 사냥하는 장면
전설에 따르면 유니콘을 사냥하는 방법은, 순결한 처녀로써 유니콘을 유혹하는 것이었
다. 창과 작고 둥근 방패(buckler)를 지닌 사냥꾼은, 허버크와 두건을 착용하고 있다. 사
슬 갑옷의 소매가 이제 손목까지 내려온 것에 주목하라. 몇몇 경우 이들 갑옷은 보다 길이
가 늘어나서 손을 덮을 정도가 되었으며, 손 부분에서 벙어리 장갑 즉 머플러(muffler) 모
양을 하고 있었다.
<9페이지>
①9페이지 - 1400년대의 독일 사슬 갑옷의, 대갈못으로 연결된 고리들
유럽의 사슬 갑옷은 거의 변함없이 둥근 고리들로 이루어졌으며, 각각의 고리는 다른 4
개의 고리와 연결되도록 배열되었다. 고리들은 그 끝 부분을 대갈못으로 결합하여 만들어
졌거나, 혹은 벼려서 하나의 덩어리가 되도록 만들어졌다. 고리 끝 부분을 단순히 서로 맞
닿게 해 둔 갑옷의 경우는, 동양식 혹은 근대식 구조의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위에 묘사
되어 있는 사슬 갑옷은 특별히 흥미로운데, 그것은 갑옷의 연대와 기원을 알려 주는 3개의
황동제 고리가 갑옷 안에 엮어져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것에는 제작자의 이름인 '베르톨
트 파르테(bertolt parte)(버톨트 포 더 포르텐[Berthold vor der porten])'가 찍혀 있으
며, 두 번째 것에는 그의 출신 마을 이름인 '토 이스렌로엔(to isrenloen)(독일 베스트팔
렌[Westphalia]의 이제르론[Iserlohn])'이 찍혀 있다. 세 번째 황동제 고리(위에 묘사되어
있지 않음)는 주술적인 의미를 띄고 있는데, 마리아 혹은 아베마리아(Ave Maria)를 가리키
는 글자 M 혹은 모노그램(짜 맞춘 글자·기호[역자 註]) AM을 상징하는 일련의 기호들이
찍혀 있다. 버톨트는 철사를 만드는 집안 출신으로, 1390∼1450년 사이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버젼(haubergeon)으로 알려진 이 시기의 사슬 갑옷은 초기의 노르만 식의
갑옷보다 길이가 짧았다. 베스트팔렌 지역의 갑옷 제작자들의 생산품이 널리 명성을 얻었
다는 것은, 헨리(Henry) 6세 치하의 런던 탑(Tower of London - 노르만의 정복왕 윌리엄 1
세에 의해 착공되어 17세기 초반까지 영국의 왕궁으로 쓰인 곳[역자 註])의 재산 목록에
기입되어 있는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 그 곳에는 '사슬 갑옷... 베스트팔렌 지역의 것'
이라고 기입되어 있다.
<10∼11페이비>
①10페이지 - 링컨(Lincoln) 부근의 위섬(Witham) 강에서 발견된 13세기의 검의 양면 모
습
②11페이지 - 헌팅던샤이어(Huntingdonshire)의 위틀시(Whittlesea) 호수에서 발견된, 13
세기의 검에 새겨진 문구의 일부
일반적으로 13세기의 검에는 그 선조인 바이킹 검(Viking sword)의 것보다 긴 십자형 보
호대(cross-guard, 날밑[quillon])가 달려 있었다. 이러한 폭이 넓고 곧은 칼몸(길이가 거
의 3피트에 달함 - 91.44cm[역자 註])의 무게는, 원반 모양 혹은 브라질 너트(Brazil nut
- 남아메리카에서 자라는 식용할 수 있는 구형의 열매[역자 註]) 모양의 묵직한 자루끝
(pommel)에 의해 균형이 맞춰졌다. 알맞은 방법으로 휘둘러졌을 경우, 이러한 검은 사슬
갑옷과 얇은 판금 모두를 벨 수 있었다. 1361년 고틀랜드(Gotland)의 비스비(Visby) 전투
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무덤이 열렸을 때, 이러한 검으로 가격당했을 때의 무시무시한 효과
가 명확히 드러났다. 여전히 갑옷을 입고 있는 유골은 여러 곳에 걸쳐서 상처를 입고 있었
다. 한 유골은 일격에 두 다리가 모두 잘려 나갔다. 검으로 투구를 뚫고 두개골을 베는 것
역시 불가능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절단된 절반의 두개골들이 각각의 어깨 위에 걸려 있었
다.
그러나 전사들이 싸울 때의 이러한 격렬함에도 불구하고, 기사도 정신의 이상(理想)이
이제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교회의 영향력 아래에서, 검은 종교의 상징이 되었다.
기사 지망자들은 엄숙한 정화(淨化) 의식을 받아야 했으며, 제단 앞에서 홀로 철야 기도를
하며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미사에 참석하였으며, 그가 기사 작위를
수여받기 전에 그의 검이 사제의 의해 축성(祝聖)받았다. 그의 목숨과 재산은 그의 검의
위력에 달려 있었으며, 인겔리(Ingelrii)나 울프버트(Ulfbehrt)와 같은 제작자가 만든 검
은 많은 이들이 얻고자 하였다. 몇몇 칼몸에는 명백히 무의미하게 뒤섞여 있는 글자들이
상감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종교적 혹은 유대 신비 철학적 기원(祈願)의 의미를 숨기고 있
었다. 예를 들어 위에 묘사되어 있는 칼몸 표면에 새겨진 글자 NED는, 노미네 에테르니 데
이(Nomine Eterni Dei -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역자 註])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14∼15페이지(제 제본에는 12∼13페이지가 누락되어 있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
니다[역자 註])>
①14페이지 - 말 탄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는 1250년대의 잉글랜드의 황동제 물주전자
(aquamanile)
②15페이지 - 1290년대의 페라라(Ferrara -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남서쪽 도시[역자 註])
의 성(聖) 조지(St. George) 길드의 도장
13세기와 14세기 동안 기사를 위한 주된 투구는 호움(heaume) 혹은 헬므(helm)라고 하는
대형 투구였다. 이것은 대단히 무거운 투구였으며, 또한 매우 커서 사슬로 된 두건 혹은
바스치네트(bascinet - 14-15세기에 쓰인 가벼운 투구. 머리 부분은 뾰족하거나 달걀 모양
이며, 보통 뾰족한 면갑과 사슬로 만든 목 보호대가 부착되어 있음[역자 註]) 위에 들어맞
을 정도였다. 초기형에서는 이 투구의 정수리 부분이 평면이었거나 완만한 곡면이었지만,
후기형에서는 점점 더 원뿔 모양이 되었다. 그리고 측면은 보다 길어져서, 어깨에 닿은 뒤
아래로 뻗어서 가슴의 위 부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대형 투구는 보통 고정용 사슬로
써 몸에 묶어 둘 수 있었으며, 투구를 쓰지 않아도 될 때에는 어깨 너머로 그것을 걸쳐 둘
수 있었다. 아래에 묘사된 말 탄 기사는 단지 사슬 갑옷 위에 직물로 된 서코트(surcoat -
갑옷 위에 입는 헐렁한 코트[역자 註])를 입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성(聖) 조지(반대편)
는 판금으로 보강된 코트(coat of plates)를 입고 있으며, 그의 다리 부분은 사슬 갑옷 위
에 판금을 가죽끈으로 묶어서 보호하고 있다. 정강이 보호대는 스킨발즈(schynbalds)로 알
려져 있으며, 무릎 보호대는 폴레인(poleyn)으로, 허벅지 보호대는 퀴스(cuisses)로 알려
져 있다.
<16∼17페이지>
①16페이지 - 13세기의 필사본에 실린, 전투용 코끼리의 모습
②17페이지 - 13세기의 필사본에 실린, 석궁수(石弓手)의 모습
코끼리가 성(城)의 축소판과 같아 보이는 초기형의 하우다(howdah - 코끼리 등에 얹는
가마[역자 註])를 등에 지고 있다 - 그 때문에 이름이 '코끼리와 성'이다. 수비군은 모두
사슬 갑옷을 입고 있으며, 대형 투구(helm) 혹은 이 시기의 또 다른 형태의 투구인 샤펠
드 페르(chapel-de-fer) 즉 케틀 햇(kettle-hat)(둘 다 '강철 모자'라는 의미[역자 註)이
라고 알려져 있는 것을 쓰고 있다. 후자의 투구는 처음에는 1∼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 군
인들이 착용했던 철모와 형태 면에서 유사하였다. 하지만 몇몇 후기형에서는 투구 챙의 폭
이 대단히 넓어지고 또한 깊어지면서, 제대로 앞을 보기 위해서는 하나의 일(一)자형 혹은
한 쌍의 V자형 눈구멍(87페이지를 보라)이 필요하게 되었다. 비록 케틀 햇이 주로 일반 병
졸들의 투구이기는 했지만, 몇몇 기사들 역시 이것을 선호하였다. 그리고 주엥빌르
(Joinville)는 그의 '성 루이의 일생(Vie de St Louis)'에서, 한번은 그가 예루살렘
(Jerusalem)에서 루이(Louis) 왕을 어떻게 설득하여 대형 투구를 벗고 그의 케틀 햇을 빌
리도록 하여, 왕으로 하여금 '달아날 수 있도록(avoir le vent)' 하였는지에 대해 서술하
고 있다.
반대쪽의 삽화에는 검, 도끼, 돌팔매끈, 활, 그리고 석궁을 포함하는 수많은 무기들을
보여 주고 있다. 일반적인 활은 잉글랜드 궁수들의 손에서 그 자신의 최대한의 잠재력에
도달하였는데, 잉글랜드 궁수들은 긴 활을 사용하였으며 왼팔을 쭉 뻗은 채 시위를 오른쪽
귀까지 당겨서 활을 쏘았다. 이런 식으로 발사된 화살은 사정거리가 200∼300야드(약 18
3∼274m[역자 註])에 달했으며, 그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대단한 관통력을 지녔다. 하지만
단지 힘세고 잘 훈련된 사람만이 이러한 것들을 이룰 수 있었다. 로마 시대의 발리스타
(balista - 대형 화살, 돌멩이 등을 발사하는 대형 석궁. 노포[弩砲][역자 註])의 휴대형
인 석궁은, 그보다 뒤떨어진 이들도 사용할 수 있었다. 처음 등장했을 당시에 이 무기의
활은 길고 가는 뼛조각들을 아교로 붙여서 만들어졌으며, 그 시위는 여러 가닥의 실을 하
나로 꼬거나 땋아서 만들어졌다. 이 활은 나무로 된 자루에 대해 수직을 이룬 채 그 위에
고정되어져 있었으며, 자루 안에는 시위를 붙잡아 두기 위한 원통형의 쐐기 혹은 암나사
(동양에서는 이것과 방아쇠가 결합된 장치를 노아[弩牙]라고 부른다[역자 註])가 숨겨져
있었다. 화살을 장전하기 위해 시위를 뒤로 당겼을 때, 이 장치에 V자로 낸 홈(notch cut)
이 시위를 붙잡아 두었다. 레버 모양의 간단한 방아쇠에 의해 시위가 풀리게 되었다. 힘이
센 석궁수는 석궁의 활 위에 서서 손으로 시위를 당길 수 있었다. 아래에 묘사된 다른 방
법은, 시위를 혁대에 걸어 둔 뒤 발을 사용하여 활을 아래로 밀어 내리는 것이었다. 뿔로
만든 활이 강철로 된 것으로 교체되었을 때, 다른 장전 방법이 채택되어야 했다(39페이지
를 보라).
<18∼19페이지>
①18페이지 - 독일 바인하우젠(Weinhausen)에서 발견된 13세기의 유골함의 '잠자는 보초'
②19페이지 - 1400년대의 북부 이탈리아 갑옷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잉글랜드 궁수들의 효율성이 높아져서 화살을 발사하여 사슬 갑옷을
관통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어떠한 형태의 판금 갑옷이 꼭 필요하게 되었다. 왼쪽의
인물이 입고 있는 판금 코트(coat-of-plate)는 근대의 방탄 조끼와 같은 것으로, 고속으로
날아오는 화살이나 석궁의 굵은 화살(bolt)에 맞서기 위한 초기의 시도였다. 그 후 보다 큰
판금이 도입되었지만, 상반신에는 보다 철저한 방어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곧 인식되었다.
14세기 중반 무렵까지는 발사 무기의 충격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두꺼운 한 장의
판금으로 된, 그리고 상대의 가격을 퉁겨 낼 수 있도록 표면이 곡면으로 된 가슴받이
(breastplate)가 일반화되고 있었다. 반대쪽에 묘사된 이탈리아 갑옷에는 가슴받이를, 앞쪽
으로 열리는 붉은 색 벨벳으로 감싸 두고 있다. 추가적인 판금이 사슬 갑옷의 소매 위에 가
죽끈으로 고정되어 있다. 이러한 팔 가리개는 뱀브레이스(vambrace)로 알려져 있고 팔꿈치
부분에서 관절로 이어져 있으며, 팔꿈치는 특별하게 모양을 낸 판금(couter)으로 보호받고
있다. 손은 1350년대에 이미 도입된, 소위 '모래 시계'형의 장갑(gauntlet) 안에 밀어 넣어
진다. 그리고 다리는 한 쪽 면을 따라 경첩을 달아 둔 원통형의 판금 갑옷 안으로 완전히
둘러싸여져 있다. 무릎 보호대(poleyns)의 측면에는 날개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어서, 장식
적이면서 또한 실용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20∼21페이지>
①20페이지 - 14세기의 필사본에 실린, 기념 석판을 조각하는 장면
②21페이지 -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사원에 있는, 1457년의 죤 하피돈 경(Sir John
Harpedon)의 기념 황동판
초기의 판금 갑옷
확실한 실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초기 판금 갑옷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대부분은, 기념
황동판에 대한 연구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황동 혹은 양철로 되어 있고 갑옷을 입고 있는
고인(故人)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 이들 판은 대단히 귀중한데, 그것은 단지 갑옷의 형태를
대단히 상세하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연대 역시 대단히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쪽의 기념 황동판에서, 죤 하피돈 경은 판금으로 된 전신 갑옷을 착용
하고 있다. 이 갑옷은 관절로 대단히 잘 이어져 있으며, 매끈하며 반짝거리는 표면이 대단
히 꼼꼼하게 배열되어 있어서, 이제 더 이상 관절 부위를 보호하기 위해 사슬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다. 폴드(fauld)라고 알려져 있는, 여러 개의 판금을 층층이 배열하여 치마 모
양과 같이 한 것에 주목하라 - 이것은 엉덩이와 복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또 다른 혁
신은 목 주위를 두르는 오목한 깃, 즉 골짓(gorget)인데, 이것은 사슬로 된 애번테일
(aventail - 투구의 좌·우·뒤로 늘어뜨려 목덜미를 보호하는 부분. 우리말로 '드림'이라
고 함[역자 註])을 대체하는 것이다. 분리되어 있는 판금(besagew)이 각각의 어깨 앞을 가
리며 매달려 있는데, 이것의 기능은 팔을 들어 올렸을 때 겨드랑이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바스치네트(bascinet)로 둘러싸인 기사의 머리는 그의 대형 투구 위에 얹혀져 있으며, 그
투구 꼭대기에는 그의 문장(紋章)을 뜻하는 볏 장식이 달려 있다.
<22∼23페이지>
①22페이지 - 15세기의 플랑드르 지방(네덜란드 남부에서 프랑스 북동부의 북해 연안 지역
[역자 註])의 퍼레이드용 방패. 채색되고 도금되었음
②23페이지 - 1420년대의 지기스문트(Sigismund) 황제의 검. 현재는 요크(York) 시의 시민
의 검으로 쓰임
베는 무기로서의 검의 효력의 대부분은 판금 갑옷의 도입으로 인해 상쇄되었다. 그것은
대부분의 신체 부위에 대해서 검이 판금 갑옷을 착용한 자에게 거의 피해를 주지 못한 채
퉁겨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찌르는 무기로서의 능력이 보다 많이 강조되었다. 비록
여전히 베는 날이 달린 칼몸이 제작되었지만, 그 끝이 날카로워졌으며 칼몸의 단면이 납작
한 다이아몬드 모양이 되도록 만들어짐으로써 보다 단단해졌다 - 이것은 찌르기에서 요구되
어지는 바이다. 검의 전체 길이는 약 45∼55인치(약 114∼140cm[역자 註])까지 늘어나게 되
었다. 이와 같은 보다 대형의 검은 15세기 기사들의 전형적인 검이었으며, 보통 현대의 수
집가들에 의해 핸드 앤 어 해프 소드(hand-and-a-half sword)라고 언급되곤 하는데, 그것은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칼자루를 한 손으로도 두 손으로도 잡고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
이다. 반대쪽의 방패 위에 보이는 기사는 또 다른 무기를 가지고 있다 - 바로 폴액스
(pole-axe)이다. 이것은 자루가 긴 도끼이며, 도끼의 한 쪽에는 날카로운 날이, 그리고 반
대쪽에는 납작하고 울퉁불퉁한 망치 머리가 달려 있었다. 꼭대기에 뾰족한 돌기를 달면서
가격할 수 있는 범위가 보다 늘어났다. 다른 모든 것이 다 통하지 않을 때, 기사들은 부득
이하게 이 못생긴 무기라도 사용하여 서로를 두들기고 찌르면서 상대방의 갑옷에서 약점을
찾고자 하였다.
<24∼25페이지>
①24페이지 - 알바니아의 군주 게오르그 카스트리오타(Georg Castriota)(1412∼68)의 투
구. 스칸더박(Skanderbag)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음
②25페이지 - 1460년경의 이탈리아 투구. 구리로 도금된 사자의 머리로 둘러싸여져 있음
인간의 신체를 갑옷으로 거의 완벽하게 감쌀 수 있게 되자, 이제는 그들의 신분을 드러낼
수 있는 어떠한 수단이 필요하게 되었다. 12세기 후반부터 기사들이 그들의 대형 투구에 장
식을 다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그것은 보통 어떤 새나 동물 모양의 것이었다. 이런 투구
장식은 가끔씩 아주 공을 들여서 볼만하게 설계된 것이었다. 귈로메 르 브레통(Guillaume
le Breton)의 필립피데(Philippide)에서는, 부르고뉴(Boulogne)의 백작인 르노(Renaud)가
1214년의 부비네(Bouvines) 전투에서 고래뼈로 만든 한 쌍의 사슴뿔 모양의 투구 장식을 착
용함으로써 화제 거리를 일으킨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투구 장식뿐만 아니라 왕관
혹은 작은 보석 관(coronet - 왕족, 귀족이 씀[역자 註]) 역시 그에 합당한 신분의 사람들
에 의해 착용되었다. 문장(紋章)을 드러내는 근대의 볏 장식이 생겨난 것이 바로 이런 풍습
에서부터였다. 갑옷 장식으로서 사자의 머리가 자주 쓰인 것은, 아마도 헤라클레스와 네메
아(Nemea -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북동부에 있는 유적지[역자 註])의 사자의 신화
(헤라클레스가 이룬 열 두 가지 공적 중의 첫 번째. 네메아의 골짜기에 살고 있던 불사의
사자를 헤라클레스가 퇴치하였음. 헤라클레스는 이 사자의 머리를 투구로 쓰고 가죽을 옷으
로 걸치고 다녔음[역자 註])에 의해 영감을 받은 것일 것이다.
<p26∼27>
①p26 - 워윅(Warwick)의 성 메리(Mary) 성당 안의 부챔프(Beauchamp) 예배당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투구와 장식
②p27 - 마상 창 시합(joust) 장면을 담은 14세기의 그림의 세부 묘사
15세기가 시작되던 시기에, 소위 '개구리 입 모양의(frog-mouthed)' 투구가 특별히 모의
전투 시합(tournament)를 위해 개발되고 있었다. 이 투구는 가슴받이와 등받이(backplate)
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또한 눈구멍이 특이한 곳에 위치하였기에, 이 투구를 쓴 사람은 몸
을 앞으로 기대어 기창을 아래로 겨누기에 적합한 자세를 취했을 때에만 앞을 볼 수 있었
다. 그가 충격으로 인해 몸이 곧게 펴졌을 때에 그의 눈은 완벽하게 보호받았으며, 그의 상
대의 기창은 어느 한쪽으로 비껴 나가게 되었다. 초기의 마상 경기는 전쟁에 대비하여 훈련
하는 운동으로 간주되었다.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끝이 무딘 기창과 나무로 된 방패를 들
고 하는 마상 결투였는데, 이 때 기사들의 다리는 안장에 붙어 있는 나무로 된 방패에 의해
보호받았다. 마상 경기는 항상 두 명의 선수들로 제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몇몇 기사들이
동시에 참가할 수도 있었으며, 난전(melee)에서는 두 무리의 기병들이 싸웠다. 이런 경우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 주는 투구 장식을 착용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위의 묘사 장면에서
는 한 명의 기사가 창에 찔렸고(그의 특수한 안장이 그가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아 주고
있다), 그 다음 기사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으며, 세 번째 기사는 그의 볏 장식이 달린 투구
를 착용하고 있다.
<28∼29페이지>
①28페이지 - 1485년경에 인스부르크(Innsbruck)의 클라우스 바그너(Klaus Wagner)가 제작
한, 독일의 마상 창 시합용 갑옷
②29페이지 - 청동으로 주조된, 1520년경의 마상 창 경기자 모양의 장난감
15세기에 모의 전투 시합의 역할이, 전쟁에 대비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기 있는 하나의 스
포츠로 변하게 되었다. 틸트(tilt)라고 알려져 있는 장벽이 시합 코스의 가운데를 따라 세
워져서, 두 경기자가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떠한 심각한 부상도 입지 않
도록 대단히 강화된 갑옷들이 고안되었다. 말을 탄 이들이 참가하는 마상 창 시합에서, 경
기자들은 자신의 왼쪽에 방패를 들고 기병용 창을 말의 목 너머로 가로질러 둔 채, 서로 장
벽의 반대편을 따라 달려갔다. 그 중 특별히 무거운 기창이 쓰이게 될 때엔 큐(queue)라고
알려져 있는, 끝에 갈고리가 달려 있는 긴 자루가 갑옷의 오른손 측면 부분에 나사로 고정
되어 오른팔 아래에서 뒤쪽으로 튀어나와 있어서, 기창의 자루를 고정하는 것을 도와주었
다. 이것은 반대쪽에 제시된 그림에서 볼 수 있다. 기창은 커다랗고 둥근 반사판을 통해 튀
어나오게 되는데, 이 반사판은 오른손과 팔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뱀플레이트(vamplate)
라고 알려져 있었다.
<30∼31페이지>
①30페이지 - 쿤츠 슈오트 폰 헬링겐(Kunz Schott von Hellingen)이 착용했던 1500년경의
야전용 갑옷
②31페이지 - 1500년경의 독일의 채색된 투구
쿤츠 슈오트 폰 헬링겐이 착용한 갑옷(반대쪽)은, 팔다리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최대한의 방어력을 제공하도록 고안된 일반적인 전투용 갑옷의 훌륭한 예이다. 타
격으로 인한 충격을 비껴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구형(球形)의 가슴받이에는 그 주인의 문장
(紋章)과 투구 장식이 새겨져 있는데, 그는 프랑코니아(Franconia) 지역에서 가장 오래 된
기사 가문 중 하나의 일원이었다. 젊은 시절인 1497년에 쿤츠는 로텐부르크(Rothenburg)의
부르크그라프(Burggraf - 중세 독일에서 백작의 지위와 함께 성곽 도시[burg]를 지배하도록
선출된 자[역자 註])로 선출되었는데, 로텐부르크는 뉘렘베르크(Nuremberg) 시(市)로 향하
는 무역로를 관할하는 거의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여기서 그는 일찍이 뉘렘베르크 시의회의
적대감을 샀던 프란코니아 출신의 수많은 기사들을 그의 휘하로 끌어들였다. 약 500명의 잔
인한 이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그는 그 도시와 도시 거주민들을 상대로 지독하고 무
자비한 전쟁을 치렀다. 결국 시민들은 그의 목에 2000 굴덴(gilder - 과거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쓰였던 금·은화[역자 註])의 현상금을 걸었으며, 막시밀리안(Maximilian)
1세 황제를 설득하여 1499년에 그를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로 선언하게 하였다. 1525
년에 와서야 이러한 싸움은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 도시의 역사에 있어서 20년이 넘도록 거
의 그칠 새 없이 싸움이 일어난 가장 잔인한 시기가 끝난 뒤, 참으로 이상하게도 쿤츠는 하
일스브론너 호프(Heilsbronner Hof)의 의사에게서 치료를 받기 위해 이 도시를 통과하는 데
에 있어서 안전 통행권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그의 기념비에서는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
'이 곳에 그가 평화로이 잠들다. 그의 영혼이 신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32∼33페이지>
①32페이지 - 왼쪽 - 자루가 십자형인 15세기의 검
오른쪽 - 16세기의 독일의 핸드 앤 어 해프 검(hand-and-a-half sword)
②33페이지 - 1525년경의 독일의 벙어리 장갑 모양의 오른손용 건틀릿(gauntlet - 갑옷에
딸린 목이 긴 장갑으로서 손과 손목을 가릴 수 있게 한 것[역자 註])
갑옷을 착용하였을 때의 결과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터무니없는 글들이 수없이 많이 적혀
지고 있으며, 그리하여 이제는 완전히 갑옷을 입은 사람은 안장까지 기중기로 들어올려져야
했으며 그가 한 번 말에 끌어 내려지면 적에게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고 일반적으로 믿
어지고 있다. 사실은 17세기 이전의 갑옷은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병사들이 착용하였던
완전 군장보다도 종종 더 가벼웠다. 예를 들어 34페이지에 묘사되어 있는 갑옷은 무게가 대
략 60파운드(약 27.2kg[역자 註])이다. 잘 훈련된 사람은 알맞게 맞춰진 갑옷을 입고서 말
에 올랐다 내렸다 할 수 있었으며, 또한 말을 탔을 때나 땅에 서 있을 때나 똑같이 잘 싸울
수 있었다. 위에 묘사된 건틀릿은 갑옷 제작가들이 그것을 착용할 이들의 자유로운 움직임
을 보장했던 방식의 한 가지 예라고 할 수 있다. 손을 쉽게 움츠릴 수 있게 하면서도 동시
에 손에 꼭 들어맞도록 하기 위해, 뾰족한 모양의 접단(cuff)에는 경첩이 달려 있고 가죽끈
으로 동여매도록 되어 있으며, 척골(尺骨 - 손목에서 팔꿈치까지의 두 개의 뼈 중 안 쪽 뼈
[역자 註])에 꼭 들어맞도록 볼록하게 되어 있다. 서로 겹쳐 있는 세 장의 손바닥 부분 판
금들은,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길쭉한 구멍을 통해 대갈못으로 결합되어 있다. 손가락 모양
을 본 딴 네 장의 갑옷 미늘은, 밋밋한 돌기 모양으로 볼록하게 되어 있는 손마디 보호대
(gadlings)와 함께, 손가락을 쉽게 쥐었다 폈다 할 수 있게 한다. 엄지손가락 부분은 세 장
의 금속제 갑옷 미늘을 한 장의 가죽에 대갈못으로 고정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가죽과 건
틀릿 끝 부분 밑에 고정된 또 다른 길쭉한 가죽 조각에, 부드러운 가죽 장갑이 꿰매어져 있
다. 손에 이것을 낀 상태로도 이 시기의 무거운 검을 어려움 없이 다룰 수 있었다. 갑옷을
착용한 사람이 겪었던 유일한 실제적인 불편은 환기의 부족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셰익스피
어(Shakespeare)가 '헨리(Henry) 4세' 2장에서 언급한 것이 바로 이것에 대한 것이었는데,
거기서 그는 왕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한낮의 더위 속에 착용된 값비싼 갑옷과 같이
그것은 안전하게 살을 데게 한다」
(해석이 확실치 않음. 원문의 내용은 That scalds with safety임[역자 註])
<34∼35페이지>
①34페이지 - 처버그(Churburg) 성(城)의 1450년대의 밀라노의 갑옷
②35페이지 - 피사넬로(Pisanello) 작(作) '성 조지(St George)와 함께 있는 성 처녀와 아
기 예수'의 한 장면
15세기의 몇몇 이탈리아 갑옷의 특징은, 갑옷의 구성 요소로서 커다란 판금을 사용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들 각각의 판금들의 모양은 신체의 움직임에 알맞도록 만들어졌다. 위에 보
이는 갑옷에서 투구는 일체형으로 만들어졌으며, 뒷부분과 옆부분에서 아래로 연장되어 어
깨에 닿고 있다. 얼굴 부분이 T자 형으로 열려 있는 이러한 독특한 형식의 투구는 고대 그
리스의 코린토스(Corinth -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지역에 위치한 도시
국가로서, 고대 그리스의 상업·예술의 중심지[역자 註])식 투구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으
며, 바븃(barbut)이라고 알려져 있다. 어깨는 폴드론(pauldrons)이라고 알려진 판금 방어구
로 덮여 있다. 이것들은 어깨 주변을 감싸면서 연장되어 마치 한 쌍의 날개처럼 등을 덮고
있다. 이 갑옷과 반대쪽의 성 조지가 착용한 갑옷 모두 부가적인 강화 판금을 꺾쇠와 못으
로 고정시켜 두고 있는데, 왼쪽 폴드론의 앞의 것을 가드브레이스(gardbrace), 왼쪽 팔꿈치
의 것을 가드 오브 더 뱀브레이스(guard of the vambrace)라고 한다. 가슴받이는 두 장의
판금을 겹쳐서 만들어져 있다.
<36∼37페이지>
①36페이지 - 조각되어 있는, 15세기의 석궁의 상아로 된 자루
②37페이지 - 다양한 유형의 석궁용 화살과 석궁 제작자
석궁
전쟁의 역사 전반에 있어서, 방어구에 있어서의 어떠한 진보가 있을 경우 그것은 조만간
새로운 공격 무기에 의해 추월되어져 왔다. 그렇기에 14세기에는, 갑옷에 있어서의 진보에
맞서기 위해 보다 강력한 강철제 활이 석궁에 도입되었다. 이것은 장궁의 화살보다 길이가
짧고 튼튼한, 석궁용 화살(bolt)이나 쿼럴(quarrel - 촉이 마름모 모양인 화살[역자 註])을
발사하였다. 종종 너도밤나무로 된 목제 화살대에는 나무나 가죽, 혹은 양피지로 된 두 개
의 커다란 깃이 달려 있었다. 표준적인 화살촉은 작고 무거우면서 단단한 다이아몬드, 잎사
귀 혹은 마름모 모양이었으며, 갑옷의 가장 견고한 곳을 제외한 모든 곳을 꿰뚫고자 한 것
이었다. 또한 석궁은 사냥용으로도 대단히 선호되었기에, 그 고기나 모피에 너무 큰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서 작은 사냥감과 새를 기절시키거나 죽이기에 적합한 각종 석궁용 화살이 존
재하였다. 갈고리가 달린 앤겔-헤드(angell-hede)와 갈래가 달린 포커(forker)는, 화살이
스칠 경우에조차 효과를 낼 수 있도록 그러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또 다른 형태의 석궁은
매우 가벼운 것으로서, 작은 사냥감에 대해 진흙을 둥글게 뭉친 것, 납 탄환 혹은 돌멩이를
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돌멩이를 쏘는 석궁에는 일반적인 하나의 시위 대신 시위가 이중
으로 되어 있어서, 뼈로 된 것을 끼워 넣어 두 시위 사이가 벌어져 있게 하였으며, 그 가운
데에 작은 공을 담기 위한 가죽 주머니를 달아 두었다. 16세기 영어 용어인 로드(rodd) -
프로드(prodd)로 와전됨 - 가 오늘날 이런 종류의 석궁을 언급하는 데에 (아마도 부정확하
게) 적용되고 있다.
<38∼39페이지>
①38페이지 - 17세기의 독일의 석궁. 크레인퀸(cranequin)의 연도는 1545년으로 추정됨.
②39페이지 - 1660년대의 프랑스의 완전 강철제 석궁. 강철제 '염소 다리(goat's-foot) 지
렛대'가 딸려 있음.
최초의 석궁은 손으로 당겨지거나 장전되었다. 그 뒤 석궁의 힘이 늘어남에 따라, 석궁을
장전하는 데에 있어서 손을 돕기 위해 다리가 사용되었는데, 발은 활의 어느 한 쪽 혹은 석
궁 자루 끝에 달린 철제 등자(말에 오를 때 두 발로 디디는 도구[역자 註]) 안에 두어졌다.
종종 혁대에 붙이는 갈고리 달린 가죽끈이 사용되었으며(17페이지를 보라), 몸을 쭉 폄으로
써 활이 당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강력한 강철제 활이 도입되자, 활을 당기기 위한 다양한
기계 장치가 등장하게 되었다. 한 가지는 윈드러스(windlass - 윈치[winch]보다 간단하고
흔히 수동식인 권양기[捲揚機]를 가리킴[역자 註])로서, '도르래와 끈 체계'에 따라 금속
갈고리에 연결되어 있었다. 갈고리가 석궁의 시위 위에 걸리면, 시위가 시위걸개(nut - 동
양에서는 이것을 노아[弩牙]라고 부른다[역자 註]) 뒤에 걸릴 때까지 커다란 손잡이를 돌려
서 시위를 감아 올렸다. 시위를 감아 올리는 또 다른 장치는 랙(rack - 톱니받침. 톱니바퀴
가 구르는 톱니가 달린 받침대[역자 註]) 혹은 크레인퀸(반대쪽을 보라)이라고 하는 것이었
다. 이 장치는 '톱니 받침과 톱니바퀴 구조'로서, 톱니바퀴는 납작하고 둥근 상자 안에 들
어 있었고 손잡이를 돌리면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한쪽 끝에 있는 굵은 노끈 고리가 석궁
자루에 끼워졌고, 반대쪽 끝에 있는 갈고리가 시위에 걸리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톱니 달
린 막대가 뒤로 감아 당겨지면서 함께 시위를 끌고 왔다. 보다 간단하고도 빠른 수단은 개
플(gaffle) 혹은 벤더(bender)라고 하는 것으로, 이제는 보통 '염소 다리 지렛대'라고 불리
는 것이었다. 이것은 끝 부분이 두 개의 휘어진 갈래로 되어 있는 지렛대로서, 이 지렛대의
받침점 위에 두 개의 갈고리가 있었다. 훗날의 석궁 중 다수가 자루 윗면 안에 금속제 개플
이 결합되어져 있었다.
<40∼41페이지>
①40∼41페이지 - 1480년경의 남부 독일의, 말 탄 사람과 말을 위한 전투용 고딕 갑옷
고딕(Gothic) 갑옷
15세기에는 갑옷에 있어서 두 가지 주요한 양식이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은 단순한 선과
크고 둥근 표면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독일인 경쟁자들은 1460년대에, 날씬하고 길쭉하며
또한 잔물결 모양의 주름 무늬로 강조된 형태의 갑옷 형식을 개발하였다. 모든 관절 부위는
얇은 판을 겹쳐 이은 박층 구조로 되어 있어서 유연성을 늘렸으며, 판금의 가장자리 부분에
는 붓꽃 문양(fleur-de-lis - 프랑스 왕실의 문장[역자 註])에 기초한 무늬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가끔씩 테두리를 황동으로 도금함으로써 그 장식 효과가 보다 높아졌다. 이런 형식
의 갑옷은 끝이 가늘고 뾰족하며 격자 무늬로 장식된 고딕 레퍼토리와 길고 뾰족하다는 점
에서 일반적으로 유사하였기에, 그로 인해 19세기의 작가들은 고딕이라는 용어를 이런 종류
의 갑옷에 적용하게 되었다. 독일의 고딕 갑옷은 1480년대에 그 최고점에 도달하였는데, 반
대쪽에 보이는 훌륭한 갑옷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당시였다. 말 탄 사람의 갑옷은 그 무
게가 60파운드(약 27.2Kg[역자 註])이며, 말의 갑옷은 그 무게가 66파운드(약 30Kg[역자
註])가 넘는다. 여기에 안에 껴입은 사슬 갑옷의 무게가 더해져야 할 것인데, 그 무게는
22.5파운드(약 10.2Kg[역자 註])에 달한다.
<42∼43페이지>
①42페이지 - 1480년경에 대공(Archduke - 오스트리아 황실의 황자[역자 註])이었던 막시
밀리안(Maximilian) 1세의 갑옷을 뒤에서 본 모습
②43페이지 - '자존심의 추락', 링컨(Lincoln) 대성당의 목조 성가대석에 새겨진 그림
기사들이 가지고 있었던 커다란 두려움이란, 석궁 혹은 장궁에서 발사된 치명적인 화살이
그의 갑옷에서 좁은 틈새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래에 보여지는 목판 조각 작품
은, 14세기의 기사가 등에 화살이 박혀서 말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딕 갑
옷은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심지어 장식용의 주름 무늬조
차 그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기능이란 발사물이나 다른 무기가 몸을 찌르는 것을
급소로부터 비껴 내기 위한 것이었다. 막시밀리안의 갑옷(반대쪽)에서는, 등과 어깨 전체가
서로 겹쳐 있는 판금들로 덮여 있으며, 투구(샐릿[sallet] - 15세기의 바스치네트를 계승
한, 가벼운 반 개방형 투구[역자 註])의 뒷부분은 아래쪽으로 경사져서 목을 보호하게 되어
있었다. 물론 엉덩이 부분은 말을 탔을 때에 장갑을 댄 높은 안장으로 가려지게 되었다. 이
갑옷은 아우구스부르크(Augsburg)의 로렌츠 헬므슈미트(Lorenz Helmschmied)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황동으로 도금된 테두리로 장식되어져 있다. 뉘렘베르크(Nuremberg)를 상징하는 문
양이 있는 샐릿이 이 갑옷에 딸려 있다. 이 갑옷에 딸리는 원래의 샐릿은 아마도 다음 페이
지에서 보여지는 것일 것이다.
<44∼45페이지>
①44페이지 - 1480년에 막시밀리안 황제가 룩셈부르크에 입국하였을 때 착용했던 것으로
믿어지는, 독일의 샐릿
②45페이지 - 41페이지에서 보여진, 1480년대의 고딕 갑옷의 또 다른 모습
고딕 갑옷에 딸려 있는 투구의 형태에 있어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샐릿이라는 우아한 형
태의 투구였다. 이 투구는 강철 한 판을 교묘하게 벼려서, 금속의 가장 두꺼운 부분이 앞으
로 와서 이마를 가리도록 하였다. 가운데를 따라 볼록 튀어나온 부분으로 인해 내구도가 추
가되었는데, 그것은 샐릿의 위 부분을 따라 나 있어서 조금은 그것이 뒤집힌 보트와 같은
모양을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투구의 대다수에는 따로 떨어진 면갑(面甲)이 달려 있고, 거
기에는 눈구멍이 가로로 나 있다. 위에서 보여지는 샐릿에는 꼬리 부분이 관절로 연결되어
있어서, 머리 뒷부분 역시 가려질 수 있었다. 이 투구는 42페이지에서 보여진 갑옷에 속하
는 원래의 투구일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반대쪽에서 보여지는 갑옷은 41페이지에서 말을
탄 모습으로 보여진 그 갑옷이다. 주목할만한 두 가지 특징은 비버(bevor)라고 알려져 있는
턱과 목 가리개, 그리고 길게 잡아 늘린 퀴스(cuisses)의 위 부분을 가리며 매달려 있는,
태싯(tasset)이라고 불리는 뾰족한 허벅지 가리개이다(퀴스는 허벅지를 직접 감싸는 원통형
방어구이나, 태싯은 허리와 엉덩이를 가리는 치마 모양의 폴드(fauld)의 아래쪽 가장자리에
경첩으로 달아 두어 아래로 늘어뜨려 허벅지의 위 부분을 가리는 보호구이다[역자 註]).
<46∼47페이지>
①46페이지 - 1480년경의 카스파 리이더(kaspar Rieder)가 제작한 고딕 건틀릿
②47페이지 - 토마스 파이튼(Thomas Peyton)과 그의 두 아내 마거릿(Margaret)과 마거릿
(Margaret)을 기념하는 1484년의 황동판
반대쪽에서 보여지는 뮐라우(Muhlau)(인스부르크[Innsbruck])의 카스파 리이더(Kaspar
Rieder)가 제작한 건틀릿보다도, 기묘하게도 길고 뾰족하면서도 또한 우아한 고딕 갑옷의
모습을 더 잘 보여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손가락 부분의 판금들은 따로 떨어져 있으며,
또한 건틀릿 아래에서 끼는 장갑의 손등 부분에 꿰매어져 있다. 고딕 갑옷을 입는 것이 단
지 독일에서 만으로 국한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기념 황동판들은 보여 주고 있다. 위에서 보
여지는 영국의 기념 황동판은, 이러한 유형의 갑옷에 있어서 전신을 따라 발끝까지 내려오
는 뾰족한 선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발 부분은 사바통(sabatons)이라고 불리는 판금 방
어구로 감싸져 있다.
<48∼49페이지>
①48페이지 - 1380년경의 독일의 검
②49페이지 - 1490년경의 독일의 가슴받이
이 페이지에서 보여지고 있는 검과 가슴받이는, 전리품의 흥미로운 실례들이다. 이 검에
는 제작자의 문양인, '달리는 늑대(독일 바이에른 주의 파사우[Passau] 시의 검 제작자들이
사용했던 문양[역자 註])'와 이중 동심원 안에 들어 있는 끝 부분이 갈라진 십자가 문양이
칼몸의 양면에 새겨져 있다. 이 검은 마물루크 왕조(Mamuluke - 중세 이슬람 왕조가 채용한
투르크 계통의 군인 노예들이 해방된 뒤 이집트에 세운 왕조[1250∼1517][역자 註])에 의해
노획되어 전승 기념물로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었던 검의 일
군(一群)에 속한다. 칼몸에 새겨진 아랍어 문구에 따르면, 이러한 일이 1415년에 행해졌다
고 한다. 구형(球形)의 가슴받이에는 경첩이 달려 있는 기창 받침대가 달려 있으며, 인스부
르크(Innsbrusk)의 한스 프룬너(Hans Prunner)의 문양이 찍혀 있다. 오른쪽 가슴에는 마물
루크 왕실 무기고의 문양이 있어서, 이것이 투르크인들에 의해 노획되어서 나중에 이스탄불
(Istanbul)의 성 일레네(St. Irene) 성당에 보관되었던 것들의 하나임을 보여 주고 있다.
19세기 중반에 당시의 술탄인 압둘 멧지드(Abdul Medjid)가 유럽에 기원을 두고 있는 많은
무기들을 무기고로부터 팔아 넘겼으며, 이 가슴받이 역시 그 때에 해링워스의 주시(Zouche
of Haryngworth) 남작이었던 로버트 커즌(Robert Curzon)에 의해 획득되었다.
<52∼53페이지(50∼51페이지 역시 누락되어 있습니다[역자 註])>
①52페이지 - 1520년경의 남부 독일의, 왼쪽 허벅지용 퀴스(Cuisse)
②53페이지 - 꼭 들어맞는 투구와 벙어리 장갑형 건틀릿이 딸려 있는, 1520년경의 막시밀
리안 갑옷. 콘라드 트레이츠(Konrad Treytz) 2세가 제작하였음.
<54∼55페이지>
①54페이지 -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작(作) '파리스(Paris - 그리스 신화의 트
로이의 왕자. 스파르타의 왕비 헬렌[Helen]을 납치하여 트로이 전쟁을 야기하였음[역자
註])의 판결'의 세부 장면
②55페이지 - 막시밀리안 1세 황제가 1514년에 헨리(Henry) 7세에게 준 갑옷에 딸린 투구
17세기 초에, 가면이 딸린 이 투구(위) - 커다란 매부리코에 합스부르크의 입술(Hapsburg
lip -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음. 합스부르크 가문은 11세기 무렵부터 유럽에서 권세를
떨친 독일·오스트리아의 왕가[역자 註])이 달린 가면의 얼굴은, 우연히도 막시밀리안 황제
와 대단히 닮아 있다 - 는 그 갑옷의 나머지 부분과 따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이
것에 황동으로 만든 안경이 갖춰진 뒤, 헨리 8세의 궁중 어릿광대인 윌 서머스(Will
Sommers)의 투구로서 전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랜 세월 동안 런던 탑의 안내인이 말해
왔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 의심이 없는 어릿광대에게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는데, 그녀는
아무에게나 정교를 허락하였다. 하지만 다른 많은 오쟁이진 남편과 같이,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는 자신의 뿔을 볼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의 뿔을 볼 수 있도록 그에
게 안경이 선물되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중요한 사항을 놓쳐 왔었다. 투
구에 달린 숫양의 뿔은 오쟁이진 남편의 뿔이기는커녕, 헨리 8세에 대해 정중하게 경의를
표하려는 것이거나, 혹은 황금양털 훈작사(Golden Fleece - 1430년에 부르고뉴[Bourgogne]
공국에서 처음 정착되고 나중에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트리아와 스페인과 결합된 기사 작
위의 하나[역자 註])의 지위를 보증하려는 것일 것이다.
<56∼57페이지>
전쟁과 평화
이 페이지의 삽화는, 사브르(sabre) 혹은 사냥용 검의 칼몸의 양면에 공들여 새긴 에칭
(etching - 동판 등의 금속판을 질산으로 부식시켜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요판[凹版] 제작
기술. 혹은 그렇게 만들어진 금속 판화[역자 註]) 조각을 보여 주고 있으며, 여기에 머릿글
자 A.G가 기명되어 있다. 이것은 암브로시우스 겜리히(Ambrosius Gemlich)를 뜻하는데, 그
는 1530∼1545년경에 뮌헨(Munich)에서 활동하였으며 칼몸을 에칭으로 조각한 장식, 특히
칼몸 전체의 길이 방향을 따라 영원히 계속되는 일정표가 에칭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을 전
문으로 하였다. 이 검의 장식의 주제는 전쟁과 평화의 영원한 일정표이다 - 서로 적대시하
는 유럽의 강대국들이 이전에는 평화로웠던 시골 지방을 앞뒤로 휩쓸고 갔던 이 당시만큼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절실하게 와 닿았던 적은 없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당시의 위
대한 예술가들 중 대단히 많은 이들이 또한 전쟁 기술에 있어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는 점
이다. 그가 살던 시대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조각가 중 한 명인 울스 그라프(Urs Graf)는,
정기적으로 그의 작업 도구를 버리고 강간과 약탈이 행해진 군사 작전에 참여하러 떠났다.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사원의 헨리 8세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영국으로 갔던 조각가
토리지아노(Torrigiano)는, 그의 인생의 대부분의 기간에 있어서 직업 군인이었다. 그리고
몸소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군사 작전을 지휘하였던 교황에 의해, 다시 그가 시스티
나(Sistine) 성당(바티칸 궁전에 있는 교황의 성당[역자 註])에 벽화를 그리도록 고용되었
다는 것은 중요하다.
<58∼59페이지>
①58페이지 - 1530년경의 독일의 꼭 들어맞는 투구
②59페이지 - 1515년경의 독일의 '기괴한(grotesque)' 갑옷
삶에의 욕망과 죽음에의 공포에 대한 인간의 몰두는, 단지 그 시대의 조각과 회화에만이
아니라, 갑옷의 형태와 장식에도 반영되어 있다. 면갑이 달려 있는 투구의 앞부분은 종종
동물의 머리 혹은 새의 얼굴 부분과 비슷하게 되어 있었다. 작고 뾰족한 옆얼굴의 윤곽은
참새의 부리에 비유될 수 있다. 53페이지에서 보여진 막시밀리안 갑옷의 꼭 들어맞는 투구
형식은 종종 '원숭이 얼굴' 투구라고 언급되어진다. 만약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이처
럼 자연스러운 유사함을 갑옷 제작자들이 이용하여, 기괴하고 위협적으로 생긴 투구 군(群)
을 1510년경에 처음으로 내놓게 되었다. 위에서 보여지는 투구에는 면갑이 앞으로 길게 늘
어나 있어서 독수리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으며, 또한 그 주변에는 깃털들이 섬세하게 에칭
조각되어 있다. 잔주름 무늬들에는 매 세 번째 것마다 한 무리의 케루빔(cherub - 구약 성
서에서 에덴 동산의 수위·신의 옥좌를 지키는 이·성궤의 수호자 등으로 되어 있는 신적
존재. 손발과 날개를 가진 것으로 표현되어 있음[역자 註])의 머리와 날개 달린 괴물, 그리
고 소용돌이 무늬들이 에칭 조각되어 있다. 이 투구는 현재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Metropolitan) 박물관에 보관 중인, 귀즈 공작(Duc de Guise)의 닭의 얼굴 모양의 투구와
비교될 수 있다. 반대쪽의 갑옷에 딸린 사나운 매 모양의 투구는 너무나 이상하게도, 허리
아래 부분에서 주름 치마 모양의 갑옷 - 이것은 이 당시의 평복이나 군복과 함께 입었던 직
물로 된 바세스(bases)를 본떠서 만들어진 것이다 - 과 결합되어 있다.
<60∼61페이지>
①60페이지 - 1530년경에 아우구스부르크(Augsburg)의 콜만 헬므슈미트(Kolman
Helmschmied)가 제작한, 부풀려지고 갈라서 벌려진(의복의 안이 보이도록 일부분을 갈라서
벌어지게 한 것을 말함[역자 註]) 형태의 갑옷
②61페이지 - 위와 동일한 갑옷에 있어서 바꿔 끼울 수 있는 한 쌍의 팔 부분 중 팔꿈치
부분
기괴한 갑옷이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어떤 이는 실용적인 물건으로서의 갑옷의 쇠퇴가 시
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갑옷들의 대다수가 실제 전투에서의 방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퍼레이드에서 쓰일 목적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몇몇 갑옷은 당시 유
행하였던, 정교하게 갈라서 벌려지고 부풀려진 의상(62페이지를 보라)을 모방하여 만들어졌
다. 여기서 보여지는 갑옷은 이러한 종류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것들 중의 하나로서, 이것
에는 엉덩이의 모양에 맞추어 관절로 연결한 강철제 반바지가 있으며, 따로 떼어둘 수 있는
코드피스(codpiece - 15∼16세기에 유행한, 남성용 반바지의 가랑이 앞에 달아 두는 불룩한
주머니[역자 註])가 장착되어 있다. 관절로 연결한 무릎 보호구도 주목하라. 이 갑옷은 빌
헬름 폰 로겐도르프(Wilhelm von Rogendorf)(1481∼1541)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그는 신
성 로마 제국의 군인이면서 추밀 고문관이었으며, 또한 대사로서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
파견되었다. 그는 투르크에 맞서 제국 군대를 지휘하던 도중, 부상으로 인해 부다페스트
(Budapest) 앞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성(城)인 슐로스 로겐도르프(Schloss Rogendorf)는 여
전히 오스트리아 저지(Lower Austria - 오스트리아 빈[Wien] 북동부의 낮은 구릉지[역자
註])의 푁그스탈(Poggstall) 근처에 있다.
<62∼63페이지>
①62페이지 - '막시밀리안의 승리'에 나오는, 양손 검을 들고 있는 군인들
②63페이지 - 1540년경의 독일의 양손 검
1512년에 막시밀리안 1세 황제는 그의 이름과 왕조, 그리고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공을 들인 계획을 진행하였다. 이것은 수많은 축소 그림과 목판화에 드러난 승리의 행렬이
었는데, 그 중 목판화들은 그 시대의 일류 예술가들 - 한스 부르크마이어(Hans Burgkmair)
(그에게 중요한 몫이 맡겨졌다), 알브레흐트 되러(Albrecht Durer), 알브레흐트 알트도르퍼
(Albrecht Altdorfer) 등 - 에 의해 제작되었다. 전투에서의 그의 승리를 묘사하는 장면들
도 포함되었지만, 대부분의 그림들은 그의 궁정 대신과 하인, 군인, 사냥꾼, 어릿광대 등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모든 종류의 갑옷들이 선보여졌으며, 의복은 매우 과장되게 갈라서 벌
려지고 부풀려진 종류였다. 여기에서 보여지는 두 명의 군인들은 다른 군인들의 집단의 일
부로서, 이들은 모두 게페흐트(Gefecht), 즉 도보 전투(foot-combat)를 의미하는 양손 검을
들고 있다. 이런 유형의 무기의 실례로서 여기서 보여지고 있는 이 검에는 칼몸의 기단 부
분이 가죽으로 감싸져 있어서, 한 손을 폭이 넓은 날밑(quillon)의 앞으로 옮겨서 검을 보
다 짧게 휘두를 수 있었다.
<64∼65페이지>
①64페이지 - 1500년경의 이탈리아의, 가죽 칼집 위의 장식
②65페이지 - 1550년경의 이탈리아의, 진리를 찾는 인내하는 이의 모습이 있는 가죽 방패
무기와 갑옷에 있어서 가죽의 쓰임새는 보통 검과 단검의 칼집을 만드는 것에 국한되었
다. 하지만 후대의 일부 비늘 갑옷에서와 같이, 초기의 판금 갑옷의 몇몇 부품은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가죽으로 된 방패의 일군(一郡)도 존재하였는데, 여기서 가죽은 나무로
된 튼튼한 기초 위에, 무늬가 찍히거나 양각으로 조각된 덮개로서 사용된 것이었다. 퀴르-
뷰이(cuir-bouilli)(삶은 가죽)라는 용어가 이러한 성격의 작품들에 적용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장식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채용된 정확한 제작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처음에
는 끓는 물, 혹은 기름이나 밀랍을 녹인 뜨거운 용액으로써 가죽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되도
록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서 가죽은 양각으로 설계된 뒤 뜨겁게 달군 도구로 도안의 윤곽
이 그어지며, 물기가 마르면서 단단하게 굳게 된다. 반대쪽에서 보여지는 칼집은 체자레 보
르지아(Cesare Borgia) 가문의 검을 넣기 만들어진 것으로, 칼집에는 그 가문의 모노그램과
문양이 들어 있다.
<66∼67페이지>
①66페이지 - 1500년경의 이탈리아의, 칼자루가 상아로 된 칭퀘데아(cinquedea). 칼몸은
금송아지 우상(출애굽기에 나오는, 아론이 세운 금송아지 우상[역자 註])을 숭배하는 장면
으로 장식되어 있음
②67페이지 - 만투아(Mantua)의 말베찌(Malvezzi)의 것과 합문(合紋 - 방패 중앙에 세로
줄을 긋고 양쪽에 각각 문장을 합쳐 그리는 것[역자 註])되어 있는 콜론나(Colonna)의 문양
이 있는 칭퀘데아
칭퀘데아(cinquedea)라는 이름이 주어진,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이탈리아에서 민간
용으로 쓰였던 검의 일군(一群)이 존재한다. 이 검의 뚜렷한 특징은 납작하고 양날이 달린
정삼각형 모양의 칼몸인데, 바로 이것의 모양으로부터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말해진다.
현대의 작가들은 일반적으로 폭이 약 5 핑거(cinque diti - 핑거[finger]는 손가락의 폭에
서 나온 단위로, 1 핑거는 약 3/4인치, 즉 1.9cm이다. 그러므로 5 핑거는 약 9.5cm이다[역
자 註])인 칼몸의 기단 부분을 참고로 하고 있다. 하지만 플로리오(Florio)는 1611년에 그
의 「말의 신세계」에서, 이 검을 '베니스(Venice)에서 쓰이는 길이가 5 핑거('핑거'는 손
가락의 폭과 함께, 중지의 길이에서 나온 단위이기도 한데, 어느 쪽 단위를 썼는지는 확실
하지 않지만 아마도 후자의 경우인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1 핑거는 약 4.5인치, 즉
11.4cm이며, 5 핑거는 57cm이다[역자 註])인 무기'라고 정의하고 있다. 칼몸은 길이에 있어
서 작은 단검에서부터 완전한 크기의 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자루는 상아와 같은 적합
한 재료로 된 2장의 판으로 되어 있으며, 슴베(tang - 칼몸, 끌, 낫 등이 자루에 박히는 뿌
리 부분[역자 註])에 대갈못으로 고정되어 있다. 보통 3개의 작은 원반이 자루에 박혀 있
다. 반대쪽에 보여지는 검에는 이것이 로마 시대의 동전으로 대체되어 있다. 이들 검의 또
다른 특징은 칼몸에 에칭으로 조각되고 도금된 장식인데, 이것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
하면서 에콜르 데이 피델리(Ercole dei Fideli)라는 이름을 얻은, 페라라(Ferrara)의 금 세
공사의 작품으로 간주된다. 이 페이지에서 보여지는 검에는 이런 유형의 검에 있어서 예외
적인 형태의 자루가 달려 있으며, 또한 짙고 어두운 푸른색의 배경 위에 도금된 장식은 피
델리의 조각 작품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이것은 골드슈멜츠(Goldschmelz)라고 알려져 있
는 담금질 도금(fire-gilding) 공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인데, 이 과정을 통해 금의 표면이
강철의 표면과 높이가 같은 상태로 남게 된다.
<68∼69페이지>
①68페이지 - 1610년경의 보석이 박힌 팔라슈(pallasch). 바이에른(Bavaria - 전에는 왕국
이었으며 현재 독일의 한 주로서 수도는 뮌헨인 지역[역자 註])의 막시밀리안 1세 대공의
헝가리 퍼레이드에서의 장식물에 속함.
②69페이지 - 1620년경의 영국의 펄션(falchion)
여기에서 두 개의 특이한 검이 보여지고 있다. 왼쪽에 있는 것은 팔라슈로서, 칼몸이 곧
고 폭이 넓은 검이었으며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기병대에 의해 휴대되었다. 이것은 오스트리
아가 투르크에 의해 위협받았던, 그리고 동유럽 사람들이 그들의 무자비한 적들을 두려워할
줄만 아니라 그들의 용기 - 그리고 또한 그들이 휴대한 보석이 박힌 무기 - 에 경의를 표할
줄도 알게 되었던 시대의 유물이다. 프라하(Prague), 빈, 드레스덴(Dresden), 그리고 뮌헨
의 왕실에서는 헝가리-투르크 양식으로 만들어진 의상과 무기가 선보여지는 모의 전투 시합
을 조직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이 팔라슈의 자루는 은으로 되어 있으며, 보헤미
아(Bohemian) 지방의 석류석과 자수정이 박혀 있다. 펄션(falchion)은 칼몸이 휘어지고 폭
이 넓은 검이며, 그 중 위에서 보여지는 것은 칼몸에 '에드와르두스 프린스 앙글리에
(EDWARDUS PRINS ANGLIE)'라고 새겨져 있는 검들의 일군(一群) 중의 하나이다. 이것들은 17
세기 동안 잉글랜드에서의 강했던 골동품 수집열의 소산인데, 이러한 열기로 인해 가짜 골
동품 이름과 연도가 남겨진 검을 생산하도록 부추겨졌던 것이다.
<70∼71페이지>
①70페이지 - 1450년경의 플랑드르(Flemish) 지방의, 칼집과 연장들과 함께 있는 불알
(ballock) 단검
②71페이지 - 왼쪽 - 1550년경의 독일의 란츠크네흐트(Landsknecht - 16세기 신성 로마 제
국의 막시밀리안 황제가 고용한 스위스 용병[역자 註]) 단검
오른쪽 - 1490년경의 스페인의 귀 단검(ear-dagger)
15∼16세기의 단검은 현대의 수집가들에 의해 그 자루의 모양에 따라 크게 분류되어져 왔
다. 불알 단검(반대쪽)은 19세기의 고상한 체하는 골동품 수집가들에 의해 '콩팥(kidney)
단검'으로 명명되었으며, 1300년경에서부터 17세기 초까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저지(低地) 국가들(북해 연안의 저지대에 위치한 국가들.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
르크[역자 註])에서 민간용으로 널리 쓰인 단검이었다. 16세기에 프랑스에서 푸와냐르 타
오레유(poignart a oreilles - 프랑스어로 '귀 단검'이라는 뜻임[역자 註])라고 불렸던 귀
단검에는, 두 개의 원반 모양의 것이 손잡이의 꼭대기로부터 바깥쪽으로 벌어진 채로 달려
있다. 16세기 동안에 스위스 인과 독일의 란츠크네흐트들에 의해 많이 사용되었던 단검(위)
에는 종종 완전히 강철로 만들어진, 길게 잡아 늘린 원뿔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
홀바인 단검이란 그 단검들 대다수의 칼집에 나타나 있는 장면 - 죽음의 춤 - 이, 현재
바젤(Basle)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530년경의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2세가 그린 단
검 집을 위한 도안에 직접적으로 기초하고 있기에 그렇게 불리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수많
은 단검들이 현존하고 있는데, 스위스와 남부 독일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1560년경 혹은
1570년경의 연도가 기입되어 있다. 초기형에서는 묘사되어 있는 장면들이 우화적인 것들이
었지만, 점차 보다 애국적인 사상이 채용되었다. 윌리엄 텔(William Tell)의 전설이 특히
인기가 있었으며, 쮜리히(Zurich)에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단검에는 사과를 쪼개는 잘 알려
진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칼집은 청동이나 은을 주조하여 만들어졌으며, 나선형으로 홈이
파여지고 도금되었으며, 안감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칼집의 꼭대기 부분에는 2개의 칸막이
가 갖추어져 있어서, 작은 식사용 나이프와 꼬챙이를 담을 수 있도록 하였다. 칼집의 화려
함과 비교한다면, 실제 단검은 꽤나 평범하다. 자루는 어두운 색깔의 나무로 되어 있고 테
두리는 칼집과 같은 종류의 금속으로 되어 있으며, 로마자 I 모양을 하고 있다. 칼몸은 폭
이 넓고 양날로 되어 있다. 동시대의 삽화에 보여지는 바에 따르면, 이 스위스 단검은 종종
등 뒤에서 혁대 위에 수평으로 착용되어 있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의 나치의 어떤 단검은
이 단검을 모방한 것이었다.
<74∼75페이지>
①74페이지 - 15세기의 필사본에 실린, 장벽 안에서 서서 결투하는 장면
②75페이지 - 1515∼1520년경의 헨리 8세의 도보 전투(foot-combat)용 갑옷
그리니치(Greenwich) 갑옷
비록 이미 14세기에 런던에 갑옷 제작자들의 동업 조합이 존재하였지만, 갑옷을 살 수 있
는 여유가 있었던 영국인들은, 밀라노(Milan), 아우구스부르크(Augsburg) 그리고 뉘렘베르
크(Nuremberg)와 같은 거대한 무기 중심지에서 제작된 우수한 품질의 갑옷을 구입하였다.
1511년에 헨리 8세는 밀라노와 브뤼셀(Brussels)에서 몇몇 이름난 갑옷 제작자들을 데려와,
유럽 대륙에서 만들어진 최상의 생산품과 필적하는 갑옷을 만들 수 있는 작업장을 런던에
세우도록 하였다. 1514년에 그는 막시밀리안 1세 황제에게서 훌륭한 갑옷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어서 그가 몇몇 독일인 혹은 알메인(Almain - 의미를 잘 모
르겠습니다[역자 註]) 갑옷 제작자들을 설득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의 작업장에 동참하도록
하였다 - 작업장은 현재의 그리니치에 설치되었다. 곧 왕실 병기 공장에서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영향력이 비록 눈에 띄기는 하지만 그것이 영국 특유의 단순함과 견고함으로 억제되
어 있는, 그들만의 독자적인 형식을 개발하였다. 반대쪽에서 보여지는 갑옷은 그리니치 갑
옷의 최초의 작품들 중의 하나였다. 이것은 서서 결투하는 시합용으로 만들어졌으며, 엉덩
이를 포함하여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신을 감쌌다. 왕의 불룩한 코드피스를 주목하라 - 이것
은 한때 '왕이 여자들을 지배하여 그들이 드러누워서 충성을 맹세하게 하는 가장 위엄 있는
홀(笏 - 왕권의 상징으로 임금이 쥐는, 혹은 신하들이 임금을 알현할 때 관복에 맞추어 쥐
는 작은 막대기[역자 註])'이라고 묘사된 것을 감싸고 있다.
<76∼77페이지>
①76페이지 - 반대쪽에서 보여지는 갑옷에 딸린, 헨리 8세의 코드피스
②77페이지 - 1540년의 헨리 8세의 전투용 그리고 마상 창 경기용 갑옷
이 그리니치 갑옷은 왕이 뚱뚱해졌을 때인 제위 말년 동안에 왕을 위해 만들어진, 대형
갑옷의 일군(一群)에 속한다. 이 갑옷이 런던 탑에 전시된 17세기 이후로, 커다란 브레예테
(brayette), 즉 코드피스는 상당히 나쁜 평판을 얻었다. 1700년에 네드 워드(Ned Ward)는
「런던의 스파이」에서, 런던 탑을 방문했던 것과 그 때의 안내인의 말을 이렇게 기록하였
다--
「그가 다음으로 상세히 말하기 시작하였던 주제는 헨리 8세의 코드피스였다 - 이것은 붉
은 색의 천으로 안감이 되어 있었으며, 쭉 늘어난 처녀막처럼 벌어진 채 매달려 있어서, 마
치 강간당하는 것을 승낙하는 것과 같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위대한 왕의 코드피스
로서, 그는 욕정에 사로잡혔을 때 결코 여자를 용서하지 않았으며 화가 났을 때는 남자 역
시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임신하지 못하던 여성이 코드피스 안에 바늘을 붙여 둔 뒤로 임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식으로 발전하였으며, '거기에 바늘을 붙이세요'라는 이름의 상스러운 소시
(ditty - 가사로 씌어져 있는 소시[小詩], 소곡[小曲], 민요[역자 註])가 런던 전체에 퍼지
게 되었다. 순수한 고상함에 대한 이러한 모욕으로 인해 코드피스는 제거되었으며, 그것은
결국 윈저(Windsor) 성에서 조지(George) 4세의 소장품이 되고 말았다. 그 곳에서 그것은
가이 래킹(Guy Laking) 경에 의해 이렇게 묘사되었다 - '훌륭한 부품‥‥ 아마도 이 성에서
가장 보기 드문 보물일 것이다'. 1914년에 여전히 원래의 진홍색 안감이 달려 있는 채, 이
것은 런던 탑으로 되돌아 와서 이제는 그 곳에서 행복하게 원래의 갑옷에 복귀되어 있다.
<78∼79페이지>
①78페이지 - 1588년의 버크허스트(Buckhurst) 경(Lord - '경[卿)'을 의미하는 영어 표현
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기사 혹은 준남작[baronet]에 붙이는 Sir, 그리고 나
머지 하나는 후작·백작·자작·남작 혹은 공작·후작의 아들 혹은 백작의 맏아들에게 붙이
는 Lord이다[역자 註])의 그리니치 갑옷에 딸린, 면갑이 달린 버거넛(Burgonet - 면갑이 달
린 16세기의 경장[輕裝] 투구[역자 註])
②79페이지 - 제이콥 할더(Jacob Halder)가 그린, 버크허스트 경의 갑옷의 도안
그리니치 갑옷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대부분은, 펜과 수채 물감으로 그려진 갑옷의 도안
을 담고 있는 책으로부터 나왔는데, 이들 각각의 도안에는 메리(Mary) 여왕과 엘리자베스
(Elizabeth) 1세 여왕의 제위 기간의 영국 신사들의 이름이 들어 있다. 이 앨범에는 '제이
코브(Jacobe)'라고 기명되어 있는데, 그는 1576∼1605년까지 그리니치 작업장의 주인 장인
(Master Workman)이었던 제이콥 할더(Jacob Halder)로 신원이 확인되어 있다. 이 앨범에 있
는 도안에 따라 만들어진 갑옷의 대다수는 여전히 현존하고 있으며, 그 형태와 장식에 의해
신원이 확인되었다. 이것들에는 크리스토퍼 해튼(Christopher Hatton) 경(윈저 성), 워세스
터(Worcester) 백작과 죤 스미스(John Smythe) 경(런던 탑), 그리고 펨브로크(Pembroke) 2
대 백작과 컴버랜드(Cumberland) 백작(뉴욕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박물관)의 갑옷이
포함된다. 반대쪽에 보여지는, '부카르트(Bucarte) 경'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도안은 엘리자
베스 여왕이 총애하던 신하 중 한 명인, 버크허스트 남작인 토마스 색크빌(Thomas
Sackville)의 갑옷에 해당하며, 현재 월레스 컬렉션(Wallace Collection - 영국의 예술품
수집가였던 준남작 리처드 월레스[Richard Wallace][1818-90]가, 그 자신이 수집한 것과 함
께 가문으로부터 물려받은 예술품들을 그의 저택에 전시해 둔 것. 대부분 17∼18세기의 프
랑스와 영국의 회화 및 조각품임[역자 註])에 속해 있다.
<80∼81페이지>
①80페이지 - 1560년경의 밀라노의 '모닝-스타(morning-star)' 철퇴. 금과 은으로 상감되
어 있음.
②81페이지 - 자루 달린 무기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성수 뿌리개(Holy-water
sprinkler)', 멧돼지 창(boar spear), 폴액스(pole-axe), 두 개의 빌(bill), 그리고 미늘창
(halberd)
자루 달린 무기들(Staff weapons)
나무나 금속으로 된 자루에 달린 무기들은 원래는 스태브(staves)라고 불렸으나, 현대의
작가들은 일반적으로 그것들을 막대기 무기(polearms) 혹은 자루 달린 무기(staff weapons)
라고 표현한다. '모닝-스타'라는 말은, 이 무기를 가리키는 독일 고어인 모르겐스턴
(morgenstern)을 번역한 것이다. 또한 가시 달린 긴 곤봉은 '성수 뿌리개'라고 불렸는데,
그 이유는 아마 이 곤봉과 교회에서 쓰이는 에스페르게(esperge - 의미는 확실하지 않지만
교회에서 성수를 뿌릴 때에 쓰이는 작은 방망이 모양의 제기[祭器]의 하나로 보임[역자
註]) 사이의 상상에서 나온 유사점 때문일 것이다. 멧돼지 창(물론 전쟁에서도 쓰인)에는
두 개의 돌기 혹은 날개 모양의 것이 옆으로 나 있어서, 창이 너무 깊이 박혀서 동물이 지
나치게 가까이 있게 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폴액스는 다양한 형태로 발견되는데, 종종 머리
부분에는 뾰족한 돌기가 달려 있었으며, 끝이 뾰족하며 날카로운 정교한 고딕 장식이 되어
있었다. 빌은 가장 널리 쓰인 보병용 무기들 중 하나였는데, 같은 이름의 농기구로부터 발
전된 것이었다. 이 무기에는 길고 휘어진 베는 날이 달려 있는데 그 끝 부분은 갈고리로 되
어 있었으며, 꼭대기 부분과 뒷부분에는 바깥쪽으로 튀어나온 돌기가 달려 있다. 미늘창은
손잡이가 긴 도끼로서, 빌과 비슷한 방식으로 돌기가 배치되어 있다.
<82∼83페이지>
①82페이지 - 라인(Rhine)의 팔라틴 백작(Count Palatine - 자신의 영토 안에서 왕권의
일부를 행사하는 것이 허락된 백작[역자 註])이었던 오토 하인리히(Otto Heinrich)를 위해,
뉘렘베르크의 한스 링글러(Hans Ringler)가 제작한 말 탄 사람과 말을 위한 갑옷. 연도는
1532년과 1536년으로 추정됨.
②83페이지 - 쿤츠 로흐너(Kunz Lochner)가 제작한, 1530년경의 장갑을 댄 말꼬리 방어구
말과 여자를 위한 갑옷
말을 위한 갑옷(마갑[bards])은 어느 정도는 그 탑승자의 갑옷 형식을 따라가서, 사슬 갑
옷과 판금 코트(coats of plate)의 시대를 거쳐, 적합하게 모양을 낸 판금 갑옷의 도입에
이르게 되었다. 완전히 발전된 형태에서 마갑은 판금으로 된 머리 방어구(chanfron), 목 방
어구(crinet), 가슴 방어구(peytral), 옆구리 방어구(flanchards), 그리고 엉덩이(crupper)
방어구(같은 이름으로 불렸음)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장 완벽하게 전신을 감싸는 마갑 중의
하나는 50페이지에서 보여진, 막시밀리안 시대의 동전 표면에서 볼 수 있다. 말의 모든 부
위가 판금으로 완전히 감싸져 있는데, 여기에는 얇은 판을 겹쳐 이은 다리 방어구도 포함된
다. 어떤 형태의 마상 창 경기에서는 가끔씩 눈구멍이 없는 '눈먼' 말머리 방어구가 장착되
었는데, 이것은 두 마리의 말이 서로에게서 뒷걸음질치며 물러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
다. 여기서 보여지는 마갑의 무게는 총 61.5파운드(약 27.9Kg[역자 註])인데, 마갑이 16세
기 중반 무렵까지는 폐지되게 되는 원인이 바로 이 부가되는 무게 때문이었다.
<84∼85>
①84페이지 - 1640년경의 프랑스의 강철 코르셋. 이것에는 유방과 팔을 내놓기 위한 구멍
이 나 있으며 앞부분에는 경첩이 달려 있으나, 너무나 뻣뻣했기에 불편함 없이 입는다는 것
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②85페이지 - 1515년의 독일의, 귀와 눈 방어구가 달린 말머리 보호구(chanfron). 장식용
방패에는 어떤 남자가 류트(lute - 기타와 비슷한 15∼17세기의 현악기[역자 註])가 놓여
있는 손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이 보여지며, '바보가 류트를 손수레에 실어 운반하고 있다'
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86∼87페이지>
①86페이지 - 16세기의 정조대(貞操帶)
②87페이지 - 1440년경의 Master of Albrecht altars(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역자 註])작
(作), '천사들에 의해 시중 받는, 갑옷을 입은 성(聖) 처녀'의 세부 장면
비록 여자들이 그들 가정의 죽은 남자들의 갑옷 중 일부를 착용하고 그들의 복수를 위해
전투에 나서는 경우는 있어 왔으나, 실제로 처음부터 여성용으로 설계된 갑옷이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구형(球形)으로 된 몇몇 가슴받이는 여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과거에 오해받아
왔었으며, 참으로 무게 문제를 제외한다면 그들 갑옷이 그러한 용도로 쓰이지 못했을 이유
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갑옷에 대한 연구에 포함될지도 모르는, 한 가지 확실히 여성을 대
상으로 한 물건이 존재하기는 한다. 이것은 정조대이다 - 그 기원은 전쟁에 나서는 십자군
이 그의 아내에 대해 있을지 모를 강간을 방지하기 위해, 환영받든 환영받지 않았든 간에
말 그대로 그녀들을 '잠가 버렸던'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일반적으로 추정된다. 여
기에는 어느 정도 진실성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관행이 동방에서 시행되
었으며 이탈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되었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정조대에 대한 최초의
그림과 설명 중 하나는, 콘라드 키이저 폰 아이히스타트(Konrad Kyeser von Eichstadt)의
군사 백과사전인 1405년의 「벨리포르티스(Bellifortis)」에 나오는데, 그 책에서는 정조대
가 플로렌스(Florence - 이탈리아의 중부, 로마 북서쪽의 토스카나[Tuscany] 주의 주도[州
都]. 원명 피렌체[Firenze]) 지방의 여성들에 의해 쓰인다고 하였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뤼체토(luchetto)(정조의 거들)가 파두아(Padua - 북이탈리아의 파도바[Padova] 주의 주도
[州都][역자 註])의 폭군이었던 카라라(Carrara) 가문의 프란체스코(Francesco) 2세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공통된 소문에서부터 유래한 것일 것이다 - 그는 1406년에 베네치아 인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가죽끈을 포함하는 그의 고문 도구의 대다수가, 여전히 베니스의 팔라초
듀칼르(Palazzo Ducale)의 무기고에서 현존하고 있다. 16세기 무렵까지는 그 거들은 유럽
전역에서 잘 알려지게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멜셔 셰델(Melchior Schedel)의 유명한 장서표
(藏書票 - 소유자의 이름과 문장[紋章] 등을 기록하여 책표지의 안쪽에 붙이는 표[역자
註])에서 보여지며, 다른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있는, 하인리히 알데그레버(Heinrich
Aldegrever)가 만든 단검 집을 위한 조각에서 보여진다.
<88∼89페이지>
①p88∼89 - '파리스의 판결'을 에칭 조각한, 1540년경의 가벼운 갑옷의 가슴받이
<90∼91페이지>
①90페이지 - 1553년의 자콥(Jacob) 7세 트랍프(Trapp)의 갑옷의 가슴받이에 새겨진 에칭
조각
②91페이지 - 1560년경의 남부 독일의, 기사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모습이 에칭
조각되어 있는 무거운 가슴받이
장식된 갑옷
갑옷 위에 조각을 새긴 것은 매우 드문데, 이것은 끝이 뾰족한 도구(금속 조각용 칼
[burin]) 혹은 가벼운 금속용 정·끌로 도안의 선을 새기는 과정을 포함하는 제작 과정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16세기 중반 무렵에 덜 고된 에칭 조각 작업이 점차 인기를 끌게 되
었다. 이것에는 두 가지 사용 가능한 방식이 있었다. 첫 번째 방식은 표면 전체를 보호용
도료(에칭에서 산에 의해 부식되지 않도록 바르는 파라핀 등의 것[역자 註])로 덮고 나서,
필요한 도안의 선에 따라 바늘로 도료를 긁어내면, 산(酸 - 질산 등을 사용함[역자 註])이
금속에 그 선의 자국을 내는 것이다. 두 번째 방식에서는 보호 수단으로 칠해지는 것은 도
안이며, 배경이 부식되어 새겨지도록 한다. 두 번째 방식이 독일의 에칭 조각가 유파들에
의해 대중화되었는데, 이들 조각가들은 배경을 볼록한 작은 돌기로 채웠다. 위에서 보여지
는 가슴받이에 이와 같은 방식으로, 표준적인 '기어오르는 포도 덩굴(running vine)' 무늬
의 하나가 에칭 조각되어 있다.
<92∼93페이지>
①92페이지 - 1580년경의 북부 이탈리아 형식으로 에칭 조각된 그랜드가드(grandguard -
마상 창 경기에서 경기자의 왼쪽 가슴과 어깨를 특별히 보호하기 위해 가슴받이 위에 추가
로 겹쳐 달아 두는 갑옷[역자 註])
②93페이지 - 1540년경의 안톤 페펜하우저(Anton Peffenhauser)가 제작한, 작센(Saxony)의
선제후(選帝侯 - 신성 로마 제국에서 황제 선거권을 가진 제후[역자 註]) 크리스티안
(Christian) 1세의 마상 갑옷에 딸린 버거닛(burgonet)
종이 위에 찍은 에칭 판화와 갑옷 위의 에칭 조각 사이에는 강한 연관 관계가 있으며,
그의 판화로서 예술사가(藝術史家)들에게 알려져 있는 적어도 한 명의 에칭 조각가 - 아우
구스부르크의 다니엘 호퍼(Daniel Hopfer) - 의 서명이 갑옷에도 나타나 있다. 만약 이와
같은 갑옷 장식을 이 예술가 자신이 행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 장식은 그의 출판된 도안들
로부터 모방된 것이었다. 갑옷 제작자들과 예술가들, 특히 그들 중 아우구스부르크 출신들
은 대다수가 결혼이나 지연(地緣) 등을 통해 서로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다
니엘 호퍼는 갑옷 제작자인 콜만 헬므슈미트(Kolman Helmschmied)의 딸과 결혼하였다. 1526
년에 헬므슈미트는 한스 부르크마이어(Hans Burgkmair) 1세와 함께 살기 위해 떠났는데, 그
는 위대한 예술가로서 '막시밀리안의 승리(The Triumph of Maximilian)'(62페이지를 보라)
의 대부분을 준비하였으며 몇몇 훌륭한 갑옷에 에칭 조각을 하는 것을 지도하였다. 반대쪽
에서 보여지는 투구를 제작한 사람인 안톤 페펜하우저는, 아우구스부르크의 갑옷 제작자들
과 예술가들의 유파의 또 다른 일원이었다.
<94∼95페이지>
①94페이지 - 1550년경의 이탈리아의, 양각으로 조각된 오른손용 건틀릿
②95페이지 - 1555년경의 인스부르크의 세바스티안 카츠마이어(Sebastian Katzmair)가 제
작한, 카스파 폰 몬타니(Kaspar von Montani)의 양각으로 조각된 갑옷
16세기 중반 무렵에는 퍼레이드용 갑옷에 있어서, 잎 무늬(foliage), 기괴한 모양, 그리
고 고전적인 장면이 양각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것들이 상당히 유행하게 되었다. 어떤 갑옷
에는 금과 은이 상감되어 있었으며, 몇몇 갑옷에는 선명한 색채로 에나멜(금속 기구·도
기·유리 그릇 등의 위에 무늬를 착색할 때 쓰는 유리질의 도료. 법랑[琺瑯][역자 註])이
칠해져 있었다. 1572년에 파리의 금 세공사인 피에르 레동(Pierre Reddon)은 프랑스의 샤를
(Charles) 9세를 위해, 금과 에나멜로 장식된 투구와 방패를 만들었다. 또한 예전의 고대
시대의 모델을 직접적으로 모방하여 만들어진 갑옷의 일군(一群)도 존재하였다. 이러한 갑
옷에 있어서 현존하는 최고의 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1546년에 페사로(Pesaro - 이탈리아
북부의 우르비노[Urbino] 주의 주도[州都][역자 註])의 바르톨로메오 캄피(Bartolomeo
Campi)에 의해 만들어진 카를(Charles) 5세 황제의 '로마 식' 갑옷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
든 환상적인 장식들은 이에 관련된 장인(匠人)들의 기술 수준을 입증해 주는 것이면서도,
결국은 멋을 부린 의상에 지나지 않았다.
<96∼97페이지>
①96페이지 - 1543년에 밀라노의 필립보 네그롤리(Filippo Negroli)가 제작한 투구를 위에
서 본 모습
②97페이지 - 1530년경의 네그롤리 가문의 한 명이 제작한, 양각으로 조각된 투구
모든 갑옷 양각 조각가들 중 가장 위대한 이들은 밀라노의 네그롤리 가문이었는데, 그들
의 서명은 가장 정교하게 장식된 갑옷과 투구 위에 나타나 있다. 반대쪽에서 보여지는 투구
는 필립보 네그롤리가 만든 것인데, 아마도 프랑스의 프랑수아(Francis) 1세를 위한 것일
것이다. 이들 예술가들의 위대한 기술을 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들 투구들이 금속 한
판을 두드려 만들어졌으며, 또한 세부적인 부분들이 칼로 조각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투구의 정수리 부분은 고르곤의 머리를 쥐고 있는 여성상으로 윤곽이 잡혀 있
다. 이와 유사한 머리가 1541년도의 방패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두 명의 다른 네그
롤리 가문의 형제인 지아코모 필립보(Giacomo Filippo)와 프란체스코(Francesco)가 카를 5
세 황제를 위해 만들었던 것이다 - 이것은 현재 마드리드(Madrid)의 왕실 무기고에 소장되
어 있다. 위에 묘사된 투구 역시 대담한 도안과 숙련된 기법에 근거하여, 필립보의 손으로
부터 나온 것이라고 믿어지고 있다.
<98∼99페이지>
①98페이지 - 사우샘프턴(Southampton) 3대 백작인 헨리 라이어시슬리(Henry
Wriothesley)(1573∼1624)의 초상화
②99페이지 - 1620년경의 아우구스부르크의 히이로니무스 링글러(Hieronymus Ringler)가
제작한 골짓(gorget - 갑옷의 목가리개[역자 註])
반대쪽의 초상화는, 그 대상이 더 이상 전신 갑옷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시대의 대단히 화
려한 옷을 입고서 초상화가 그려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다. 그의 갑옷은 분해
되어 그의 주위에 놓여 있다. 배 부분이 길쭉한, 즉 완두콩 꼬투리(peascod) 모양의 가슴받
이에 주목하라 - 이것은 뾰족한 모양의 더블릿(doublet -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한 허리가
잘록한 남성용 상의[역자 註])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갑옷은 현재 히버
(Hever) 성에서 애스터(Astor) 경의 수집품에 포함되어 있으며, 잎 무늬에 뱀과 달팽이, 잠
자리가 군데군데 함께 얇게 에칭 조각된 장식으로 인해 주로 흥미를 끌고 있다. 이 갑옷은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는 갑옷들의 일군(一群) 중의 하나로서, 이것들은 그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기에 '달팽이와 잠자리의 달인'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한 갑옷 제작자에 의해 안트
워프(Antwerp)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갑옷의 주인인 사우샘프턴 경은 아마도 그가 1614
년에 클레브즈(Cleves)에서 스페인 인들에 맞서서 오라녜(Orange) 공(公)의 편에서 복무하
던 때에, 저지(低地) 국가들에서 이 갑옷을 구입하였을 것이다. 그는 영국인 자원병 부대를
이끌던 도중, 1624년에 베르겐-옵-줌(Bergen-op-Zoom)에서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초상화에
서 그가 단지 골짓만을 착용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위에서 보여지는 골짓은 사람
들이 갑옷의 불필요한 부품들을 버리기 시작하던 시기의 것이며, 또한 이것은 다른 어떤 방
어구도 없이 가죽 코트(buff coat - buff는 들소·소·사슴 등의 가죽을 무두질하여 만든
담황색의 유혁[ 革]이며, 이것으로 만들어진 코트로 특히 군인들이 착용했던 것을 buff
coat라고 함[역자 註]) 위에 착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 다른 흥미로운 특징은 사우샘프턴
경의 혁대에 매달려 있는 검 - 자루가 휘어진(swept-hilt) 레이피어 - 이다.
<100∼101페이지>
①100페이지 - 1590년경에 작센(Saxony)의 선제후(選帝侯)의 경호원이 착용하였던, 레이피
어와 단검 한 짝
②101페이지 - 레이피어를 사용하는 모습. 왼손의 단검은 부가적인 방어구로서의 역할을
한다. 1570년의 마이어(Meyer)의 「쿤스트 더 페흐텐스(Kunst der Fechtens)」(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역자 註])에서.
16세기 중반 이후로, 평복을 입은 신사에 의해 착용된 독특한 검이 바로 레이피어였다.
이 검에는 긴 양날의 칼몸이 달려 있었는데, 이 칼몸은 베기에도 적합하였으나 일차적으로
는 찌르기를 위한 것으로서, 이것은 이탈리아에서 개발된 펜싱 기술에 따른 것이었다. 검투
(劍鬪)는 신사의 생활에 있어서 용납되는 부분이 되었으며, 이것은 그의 검술(劍術)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유리한 입장에 서려고 하게 되면서, 검의 길이가 지나치
게 길어지게 되었다 - 가끔씩은 길이가 5피트(약 152cm[역자 註])에 달하기도 하였다. 엘리
자베스 시대의 역사가인 스토우(Stow)는 그의 「연대기(Annals)」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하 내용은 영어 고어체이기 때문에 해석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역자 註]).
「가장 깊은 러프(ruff - 16∼17세기에 남녀 모두가 사용하였던, 목 주변 등의 주름 깃[역
자 註])와 가장 긴 레이피어를 가진 이가 제일 멋쟁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러프가 다른
이들의 눈을 성가시게 하였고 레이피어가 그 상대의 생명을 상하게 하였기에, 마침내 여왕
폐하는 그들 모두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택받은 착실한 시민들을
모든 성문에 배치하여, 그 곳을 통과하는 모든 이들에 있어서 길이가 1야드(약 91.44cm[역
자 註])가 넘은 레이피어의 끝을 부러뜨리고 깊이가 1야드의 1네일(a nayle of a yard - 정
확한 의미를 알 수 없음. 만약 nayle을 nail로 볼 경우, 1네일은 피륙의 길이를 재던 옛날
의 단위로서 2.25인치(약 5.715cm)임[역자 註])이 넘은 러프를 잘라 내게 하였다.」
<102∼103페이지>
①102페이지 - 1600년경의 프랑스의 레이피어 자루. 성경에 있는 장면들과 상징적인 인물
들이 조각되어 있음
②103페이지 - 반대쪽에서 보여지는 검의 자루끝
레이피어의 자루는 다양한 형태를 취하였다. 몇몇 검에서는 주된 방어구는 곧고 폭이 넓
은 십자형 보호대(cross-guard)였으며, 여기에 단순한 손가락 관절 보호대(knuckle-guard)
와, 엄지손가락이 칼몸의 기단을 감쌌을 때 엄지를 가리기 위해 측면으로 튀어나온 막대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1570∼1630년경부터 고전적인 형태의 레이피어에는 반대쪽에서 보여지
는 것과 같이, 현대의 수집가들이 '휘어진 자루(swept hilt)'라고 부르는 것이 달리게 되었
다. 폭이 넓은 십자형 보호대는 관절 보호대와 퀼론(quillon - 칼몸과 수직한 막대 모양의
날밑. 즉 위의 cross-guard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고유 명사[역자 註])이 이어져 있는 것으
로 대체되었는데, 이것들은 S자 곡선을 그리면서 휘어져 있었다. 손은 막대들과 고리들을
다양하게 배치한 것으로써 더욱더 보호받았다. 16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레이피어의 자루에
측면으로 달린 고리(side ring)들이, 종종 구멍이 뚫려 있거나 혹은 그렇지 않은 판금으로
채워졌다. 17세기에 이것들은 마치 납작한 접시와 같이 생긴 커다란 보호구 - 접시 모양 자
루(dish-hilt) - 혹은 속이 깊은 사발 모양의 보호구 - 컵 모양 자루(cup-hilt) - 로 발전
하였다.
<104∼105페이지>
①104페이지 - 흑인 비너스. 1620년경의 검의 조각된 자루끝(pommel)임
②105페이지 - 1650년경의 고트프리트 라이게베(Gottfried Leygebe)(?)가 만든 검
검에 대한 흥미 중 대부분은 자루나 칼몸의 형식보다는, 검의 장식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전적으로 장식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설계된 어떤 자루들은 금과 에나멜로
장식되었기는 하였지만 - 덴마크의 크리스티안(Christian) 4세는 그를 위하여 궁정 금 세공
사 코르비니아누스 사우르(Corvinianus Saur)가 제작한 그러한 검을 가지고 있었다 - 대다
수의 자루들은 장식적인 효과를 위해서 금속을 조각하는 것에 의존하였다. 1550∼60년경에
활동하였던 리용(Lyon)의 피에르 외이리오(Pierre Woeiriot)와 같은 조각가들이 발간한 도
안집으로 인해, 도드라지게 양각으로 조각하는 기법이 장려되었다 - 피에르는 나체, 끈 모
양 장식, 기괴한 장식 등을 가장 복잡하게 배치하는 구조를 발전시킨 사람이다. 뉘렘베르크
의 예술가였던 고트프리드 라이게베(Gottfried Leygebe)는 강철을 조각하는 데에 있어서 놀
랄 만큼 능숙하였으며, 그는 단지 검과 단검 자루뿐만이 아니라, 같은 재료로 작은 조각상
(像)도 제작하였다. 1668년에 그는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의 선제후로부터 쿠르퓌르슬
리허 문츠슈나이더(Kurfurslicher Munzschneider)(동전의 철인주형[鐵印鑄型]을 제작하는
사람 - 철인주형이란, 음각으로 되어 있어서 금속판에 박아서 찍는 금형을 말함[역자 註])
로 임명되었다. 여기에서 보여지는 검과 자루끝은 일단은 레이게베의 것으로 추정되어 온
것으로, 흑인의 머리가 지배적인 주제인 무기의 일군(一群)에 속한다.
<106∼107페이지>
①106페이지 - 자루가 은으로 되어 있는 사냥용 검
왼쪽 영국의 검. 1644년 던더로의 알렉 맥나흐탄 경(Sir Alexr Macnachtan,
Dunderaw, 1644)이라고 새겨져 있음
오른쪽 1750년경의 독일의 검. 가죽으로 된 칼집에는 나이프와 포크가 갖추어져 있
음
②107페이지 - 왈드팍스(Waldpaxe) 혹은 트루스 드 샤스(Trousse de Chasse - 프랑스어로
'사냥용 연장을 담는 주머니'라는 의미임[역자 註]). 고기 다지는 큰 칼, 칼집, 그리고 나
이프 혹은 도구 6개로 이루어져 있다. 손잡이는 청동을 도금한 것으로, 수사슴과 사냥개 모
양으로 주조되어 있다. 칼몸엔 브란덴부르크 후작(markgraf - 공작과 백작 사이의 작위인
후작[侯爵], 즉 marquis의 독일어 명칭[역자 註])인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카를(George
Friedrich Carl)의 문장(紋章)과 이름이 나와 있으며, 연도는 1732년으로 적혀 있다.
<108∼109페이지>
①108페이지 - 러틀랜드(Rutland)의 엑스턴(Exton)에 있는 로버트 킬위(Robert
Keylwey)(1580년 사망)의 묘의, 설화석고(雪花石膏)로 만든 인물상(像)
②109페이지 - 켄트(Kent)의 셰브닝(Chevening) 교회에 있는, 스탠호프(Stanhope) 백작의
장례식용 투구와 볏 장식
갑옷의 쇠퇴
16세기 후반기 동안 화기(火器)의 효율성이 늘어나면서, 갑옷을 착용하는 것이 이득보다
는 오히려 부담이 되어버렸다. 오직 특별하게 제작되어 시험을 거친 가슴받이와 등받이, 그
리고 투구만이 납 탄환을 막아낼 수 있었다. 전신 갑옷은 동시대의 의상을 모방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실용적인 측면에서의 이점을 잃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았다. 반대쪽에서 보여지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갑옷에서, 가슴받이는 길고 뾰
족하게 되어 있어서 그 안에 받쳐입은 완두콩 꼬투리 모양의 더블릿(doublet)을 가릴 수 있
었으며, 태싯(tasset)은 구부러져 있어서 펑퍼짐한 바지 위에 들어맞을 수 있었다. 러프
(ruff)와 프릴(frill - 소매 끝이나 옷깃 등에 레이스 따위를 주름잡아 붙인 것[역자 註])
이 목과 손목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튀어나와 있다. 그러나 교회의 기념비에 있는 갑
옷 입은 인물상이 항상 믿을 수 있는 안내인은 아니다. 기사의 투구를 그의 묘비 위에 걸어
두는 오래된 관습 - 캔터베리(Canterbury) 대성당에 있는 흑태자(Black Prince - 영국의 에
드워드 3세의 아들이며 백년 전쟁 당시 군 지휘자로서 명성을 떨친 에드워드 태자
[1330-76]. 항상 검은 갑옷을 입었다 하여 후세에 '흑태자'라고 불리었음[역자 註])의 투구
가 그 좋은 예이다 - 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 싸구려 장례식용 투구가
이러한 의식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졌다.
<110∼111페이지>
①110페이지 - 1650년경의 북부 독일의 흑백(black-and-white) 갑옷
②111페이지 - 1530년경의 독일의, 금속 한 판으로 만들어진 코드피스(codpiece)
16세기 말과 17세기의 많은 가슴받이에서 발견되는 총알 자국은, 대개 방탄 시험을 통과
하였다는 검인(檢印)이었지 그 갑옷이 실제로 전투에 쓰여져서 생겨난 결과는 아니었다. 이
러한 형식의 갑옷이 더욱더 많이 쓰여지고 전신 갑옷이 지나치게 무거워지게 되면서, 군인
들은 못 미더운 방어력보다는 운동성을 보다 선호하여 갑옷에서 덜 중요한 부품들을 버리기
시작하였다. 필립 시드니(Philip Sidney) 경은 그의 퀴스(cuisse)를 착용하지 않았기에, 총
알이 그의 허벅지 뼈를 부숴 버려서 목숨을 잃었다고들 말한다. 반대쪽에서 보여지는 반신
(半身) 갑옷은 란츠크네흐트(Landsknecht)의 전형적인 갑옷으로서, 팔과 다리는 완전한 움
직임을 위해 자유롭게 남겨져 있다. 그러나 곧 사람들은 오직 가슴받이와, 시야를 방해하지
않는 탁 트인 형식의 투구만을 착용하는 데에 만족하게 되었다. 리처드 호킨스(Richard
Hawkins) 경이 그의 남태평양 항해 보고서(1593)에서 언급한 것에는, 직업 군인들의 냉소적
인 태도가 드러나 있었다. 그는 비록 그가 부하들을 위해 다수의 갑옷을 준비했음에도 불구
하고, '어느 누구도 그것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으며 방탄 갑옷보다는 차라리 포도주를 담는
냄비를 더 좋은 방어구로 여기고 있었다'라고 불평하였다.
<112∼113페이지>
①112페이지 - 30년 전쟁(1618∼48) 당시의 군인들의 갑옷을 모방한 장난감 갑옷
②113페이지 - 17세기의 퀴라시에(cuirassier - 프랑스 등의, 동체에 갑옷을 입은 중기병
(重騎兵). 흉갑[胸甲] 기병[역자 註])의 갑옷을 모방한 장난감 갑옷
17세기에 방탄 능력이야 어떻든 전신 방탄 갑옷을 착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군인들은 퀴
시에(cuirassier)라고 알려져 있는 중기병들었으며, 그들은 보통 무릎까지 내려오는 태싯
(tasset)이 달려 있는 3/4 길이의 갑옷에 만족하였다 - 정강이받이(greave) 대신 높은 구두
가 착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먼드 루드로우(Edmund Ludlow)는 에지힐(Edgehill)
전투(1642)에서의 자신의 경험에 대해 쓰면서, '중기병의 무장을 한 상태에서 한 번 말에서
내리게 되면, 나는 어려움 없이는 다시 말 위에 오를 수 없었다'라고 불평하였다. 반대쪽에
서 보여지는 장난감 갑옷은 원래의 갑옷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 주는 모형으로서, 이 시기의
갑옷이 겉모습에 있어서 얼마나 추해졌으며 실제 쓰임에 있어서 얼마나 불편해졌는지를 보
여 주고 있다.
<114∼115페이지>
①114페이지 - 1600년경의 북부 이탈리아의 꼭 들어맞는 '토텐코프(Todenkopf - 독일어로
'해골'이라는 의미임[역자 註])' 투구
②115페이지 - 16세기의 스위스의 흑백 반신 갑옷
중기병의 투구에 있어서 이탈리아의 독특한 형태의 것이 소위 토텐코프(Todenkopf) 혹은
사브와야르(Savoyard - 프랑스의 옛 지방인 사브와[Savoie]를 가리킴[역자 註]) 투구(위)인
데, 이 투구의 면갑은 마치 두개골 혹은 해골의 머리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구멍이 뚫리고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제 갑옷은 그야말로 실용적인 물건이 되었다. 제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투구는 종종 두 부분으로 만들어진 뒤 볏 부분(comb)을 따라 합쳐졌으며, 금속의
표면은 '망치로 두들긴 뒤의 울퉁불퉁한 상태' 그대로 남겨졌다. 이런 갑옷의 장식은 대갈
못들을 박아 넣은 단순한 외곽선, 혹은 흰색 경계선으로 돋보이게 한 검게 칠한 부분 등으
로 이루어졌다.
<116∼117페이지>
①116페이지 - 잉글랜드 공화국(Commonwealth - 크롬웰이 청교도 혁명을 통해 찰스 1세를
처형한 뒤 수립한 영국의 공화정[1649∼60][역자 註])의 문장과 '잉글랜드 공화국을 위하여
'라는 제명(題銘), 그리고 연도인 '1650'이 새겨져 있는 브로드소드(Broadsword)
②117페이지 - 영국 내전(civil war - 혹은 청교도 혁명[역자 註])이 발발한 시기인 1642
년 당시에 소년이었던, 찰스 2세를 위해 만들어진 중기병 갑옷
이 브로드소드는 오늘날 '죽음의(mortuary)' 칼이라고 알려져 있는 유형에 속하는 것으
로서, 17세기의 영국 기병의 매우 우수한 검이다. 그 이름은 바구니 모양의 자루에 사람의
얼굴 모양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 - 특히 왕당파(王黨派 - 청교도 혁명
당시 찰스 1세를 지지했던 이들. 주로 대지주, 귀족, 구교도[舊敎徒], 빈농들이었음[역자
註])를 동정하였던 이들 - 이 그 얼굴을 찰스 1세의 데드마스크를 본뜬 것이라고 간주하였
던 사실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118∼119페이지>
①118페이지 - 1610년경의 잉글랜드의 브로드소드. 자루는 은으로 상감되어 있으며, 아마
도 켄트(Kent)의 로이던 홀(Roydon Hall)의 윌리엄 트위스든(William Twysden) 경의 것으로
보임
②119페이지 - 1740년경의 스코틀랜드의 백소드(backsword). 자루는 황동으로 상감되어 있
으며, 제작자의 머리글자인 J.A.S.(스티어링[Stirling]의 존 앨런[John Allan] 2세)가 찍혀
있음
엄밀히 말하자면 브로드소드라는 용어는 폭이 넓고 양날의 칼몸이 달린 모든 검에 적용되
는 것이겠지만, 17세기 말부터는 이 용어를 바구니(basket) 혹은 조개 껍질(shell) 모양의
자루가 달린 군도(軍刀)에만 거의 배타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백소드가 브로
드소드와 다른 것은, 오직 칼등이 무딘 외날의 칼몸이 달려 있다는 점에서였다. 바구니 모
양의 자루가 달려 있는 브로드소드의 또 다른 형식은 스치아보나(schiavona)였는데, 이것은
베니스 공화국에 고용된 슬라브인 용병(스치아보니[schiavoni])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이
것은 자루의 뼈대들이 대각선으로 교차하는 것과, 황동으로 된 자루끝에 납작한 날개가 달
려 있는 것으로 식별된다. 일반적으로 잉글랜드의 브로드소드는 그것에 달려 있는 묵직하고
둥근 자루끝으로써 구별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클레이모어(claymore)라고 잘못 알려져 있
는 스코틀랜드의 브로드소드에는, 보다 원뿔에 가까운 모양의 자루끝이 달려 있다. 덧붙이
자면 진짜 클레이모어, 즉 클라이드헤므 모어(Claidheamh mor)는 거대한 양손 검이었다. 스
코틀랜드의 브로드소드는 글래스고(Glasgow)와 스티어링(Stirling)과 같은 도시의 대장장이
회사의 구성원들에 의해 주로 만들어졌다. 칼몸은 거의 모두 독일에서 수입된 것이었고, 그
것들 중 다수에서 안드리아 페라라(Andria Ferrara - 이탈리아의 유명한 도검 제작자인 안
드레아 데이 페라리[Andrea dei Ferari][1530∼1580경]를 말함[역자 註])의 위조된 서명(철
자가 다르게 되어 있음)이 발견된다.
<120∼121페이지>
①120페이지 - 18세기 스코틀랜드의 더크(dirk)와 그 칼집
②121페이지 - 18세기 스코틀랜드의 타즈(targe) 즉 가죽으로 감싼 방패
분별 있는 작가들은 한때 말하기를, '고대의 고지인(highlander - 스코틀랜드 북부의 산
악 지방[highland]에 사는 사람들[역자 註])들은 거의 항상 무장하고 돌아다녔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언제라도 그들 자신을 보호하거나 그들의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다
는 관점 때문이었고, 또한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그러한 살인 도구에 익숙해짐으로써 그것들
을 덜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확실히 스코틀랜드 군인은 모
든 이들 중 언제나 가장 중무장해 온 이였다. 한 쌍의 권총과 바구니 모양의 자루가 달린
검뿐만이 아니라, 그는 또한 1617년에 고지를 방문한 한 사람이, '고지인들이 덕크(durcke)
라고 부르는, 기단 부분은 폭이 넓고 끝 부분은 뾰족한 긴 단검의 일종'이라고 묘사하였던
것을 휴대하였다. 더크(dirk)에는 어두운 빛깔의 나무로 된 짧은 자루가 달려 있었는데 그
자루에는 서로 얽혀 있는 켈트식 문양이 새겨져 있었으며, 부러진 백소드의 것으로 만든 칼
몸이 달려 있었다. 방어를 위하여 가죽을 씌운 둥근 방패인 타즈(targe), 즉 타제드
(targaid)가 휴대되었다. 보통 표면에는 둥근 문양에 따라 못 머리들이 박혀 있었다.
<122∼123페이지>
①122페이지 - 육군 대장 에어 쿠트(Eyre Coote) 경(1726∼83)의 초상화
②123페이지 - 황동으로 도금된, 1796∼1830년 형식의 골짓(gorget)
근대 프랑스 중기병, 영국 근위 기병(Horse Guards), 그리고 그 외의 유사한 연대가 착용
하였던 가슴받이와 등받이를 제외하고는, 골짓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갑옷 부품이었다. 99
페이지에서 보여진 골짓은, 가죽 코트(buff coat) 위에 독립적으로 착용하도록 되어 있던
것이었다. 17세기 말에 군대에서 갑옷이 마침내 버려졌을 때, 골짓은 장교들에 있어서 계급
의 상징으로서 계속 사용되었다. 영국군에서 18세기 동안에, 골짓을 리본으로 목에 매달아
두는 것은 정규 복장이었으며, 또한 골짓은 제복의 장식 끈이나 단추의 색깔에 따라 은으로
만들어졌거나 혹은 도금되었다. 많은 연대는 그들만의 독자적인 의장(意匠)을 지니고 있었
으나, 가장 일반적인 문양은 왕실의 문장과 연대의 번호를 결합한 것이었다. 1796년에 이것
이 위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이, 왕실의 모노그램과 왕관으로 공식적으로 교체되었다. 이것
은 골짓이 마침내 폐지되는 1830년까지 유지되었다. 골짓은 미국 독립 전쟁에서 양측(영국
군과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의 독립군[당시에는 아직 미합중국이라는 정식 공화국이 탄
생하지 않았으며, 독립군 역시 정식 군대의 조직을 갖추지 못한 민병대의 성격이 짙었음]
[역자 註]) 모두에 의해 착용되었으며, 이것은 또한 영국과 미국 감독관이 인디언 추장에게
표했던 경의(敬意)의 상징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후자의 것은 상인들이 그것을 모피와 교
환하기 시작하면서, 단순한 장신구로 전락하였다.
<124∼125페이지>
①124페이지 - 검은 색의 적동(shakudo - 적동[赤銅]의 일본식 발음인 'しゃくどう'를 의
미한다. 적동은 금과 구리를 합금한 것으로서, 표면은 자줏빛을 띠는 검은 색이다[역자
註])으로 도금된 자루가 달린, 18세기 초의 소년들의 스몰소드(smallsword - 17∼18세기의
펜싱·결투용 찌르는 칼[역자 註]). 유럽 시장을 겨냥하여 중국에서 만들어졌음
②125페이지 - 은으로 도금된 스몰소드. 프랑스와의 전쟁 기간 중 해군 대령이었으며 훗날
대장이 되는 토마스 리 머쳔트 고슬린(Thomas Le Marchant Gosselin)(1765∼1857)이, 리워
드(Leeward) 섬으로의 수송 선단을 성공적으로 호위한 뒤 1798년 3월에 상선단의 장(長)으
로부터 선물받은 것임
스몰소드
1630년경 이후 레이피어는 짧아지고 가벼워졌으며, 현대의 펜싱용 검의 원형으로서 두 개
의 납작한 조개 껍질 모양의 보호대가 달리고 관절 보호대는 없는 것이 등장하였다. 17세기
의 마지막 4반세기엔 가느다란 관절 보호대가 추가되었으며, 그 기단 부분으로부터 두 개의
팔(보통 민들레[pas d'ane]라고 불림)이 휘어져서 그 아래의 두 개의 작은 타원형의 조개
껍질 쪽으로 내려갔다. 이 검은 오늘날 우리가 스몰소드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18세기
내내 아주 사소한 변화(팔 모양의 것이 점차 작아졌다)만을 거친 채 계속 사용되어졌고, 여
전히 현대의 경기용 검으로서 질이 떨어진 형태로 현존하고 있다. 비록 숙련된 이의 손에서
는 스몰소드는 치명적인 무기였지만, 그것은 주로 개인적인 장신구의 한 품목이면서, 거의
보석 장신구의 하나로서 여겨졌다. 자루는 귀금속(반대쪽을 보라)이나 조각된 강철(128∼
129페이지를 보라)로 만들어졌거나, 혹은 보석이 박혀 있었고 에나멜이 칠해져 있었다(130
페이지를 보라).
①128페이지 - 1670년경의 프랑스의 조각된 강철제 자루
②129페이지 - 17세기의 스몰소드의 조각된 강철제 칼자루
위 이탈리아식 아래 네덜란드식
<130∼131페이지>
①130페이지 - 은으로 도금되고 에나멜이 칠해져 있으며, 다이아몬드로 돋보이게 한 검.
1797년의 캠퍼다운(Camperdown) 전투 후 런던 시(市)가 해군 대장 던컨(Duncan) 자작에게
선물한 것임
②131페이지 - 칼몸에 문구가 새겨져 있는 검(50파운드 짜리). 1807년에 마르티니크
(Martinique)에서 프랑스 배 2척을 나포한 것에 대해, 로이드 애국 기금(Lloyd Patriotic
Fund)이 영국 군함 케르베로스(Cerberus) 호의 W.쿠트(W.Coote) 해군 대위에게 선물한 것임
전투 중에 그 자신을 돋보이게 한 장교에게 검을 선물하는 것은 오래 전에 확립된 관습이
었다. 어떤 것들은 개인적인 선물이었으며, 다른 것들은 그 장교의 용감한 행위로 인해 이
익을 얻었던 시민 단체나 사업체에서부터 온 것들이었다. 이러한 검들 중 대부분은 그와 관
련된 행위가 검에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가장 잘 알려진 것들은 나폴레옹
시대의 것들이며, 로이드 애국 기금에 의해 선물된 것들이었다. 이 검들은 그것을 받는 이
의 계급에 따라, 품질에 있어서 4가지 등급으로 나누어졌다 - 하사관과 해사(海士) 생도들
을 위한 30파운드 짜리 검, 위관들을 위한 50파운드 짜리 검, 영관들을 위한 100파운드 짜
리 검, 그리고 마지막으로 트라팔가(Trafalga) 해전에 참전한 이들을 위한 특등품이다. 검
은 또한 영국 해군, 육군, 그리고 동인도 회사의 장교들에게도 주어졌다.
<132∼133페이지>
①132페이지 - 덴마크의 프레데릭(Frederick) 7세(1808∼63) 시대의 장성들의 투구
②133페이지 -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Frederick) 대왕(1786년 사망)의 모노그램이 나타나
있는, 소년들의 가슴받이
18세기가 시작될 무렵까지는 전신 갑옷의 형태를 갖춘 모든 방어구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매우 무거운 방탄 투구와 가슴받이는, 공성(攻城) 작전에 임하는 공병들과 장교들에게 여전
히 지급되었다. 1754년까지도 몇몇 크롬웰 시대의 가슴받이와 등받이가 프랑스 인과 인도인
과의 전쟁에 나섰던 영국 육군의 공병들에게 지급되었다. 그러나 비록 갑옷이 완전히 구식
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고위 장성들은 여전히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들의 초상화가 그려
지는 것을 선호하였다. 군수성(Ordnance)의 기록이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이러한 목적을 위
해 몇 차례 런던 탑에서 갑옷이 화가들에게 지급되었으며, 같은 갑옷을 착용한 서로 다른
이들의 그림이 적어도 두 점 존재하고 있다. 때때로, 특히 라이플이 전장에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하기 시작했던 때에 기병용 방탄 갑옷을 재도입하고자 했던 시도가 있었으나, 나폴
레옹 시대 이후로 갑옷의 이점이란 주로 제복으로서의 그 시각적인 매력에 있었다.
<134∼135페이지>
①134페이지 - 왼쪽 스코틀랜드의 왕실 궁수 중대(Royal Company of Archers)의 예복용 검
오른쪽 1850년경의 일반 장교의 검
②135페이지 - 1760년대 잉글랜드의 용기병(龍騎兵 - 기병용 총으로 무장한 기마 보병[역
자 註]) 장교의 검
18세기 동안 장교들에게는 그 자신의 검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여전히 어느 정도의 자
유가 허용되었다. 위에서 보여지는 검은 수제(手製)이면서 강철을 깎아서 만든 자루의 좋은
예이다 - 이 자루에 17세기의 훌륭한 레이피어의 칼몸이 달려 있으며, 검의 전체 길이에 따
라 홈이 파이고 구멍이 뚫려 있다. 그러나 19세기가 시작될 무렵까지는 예복에 대한 규정이
확고히 자리잡았으며, 또한 여러 연대와 계급에 대한 표준 양식이 정해졌다. 이러한 대량
생산된 무기들이 도입되면서, 군용 검은 그 매력과 흥미를 대부분 잃게 되었으며, 많은 경
우 그것은 단지 계급의 상징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도검 장인은 뒷면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형식의 선물용, 그리고 프리메이슨(Freemason - 18세기 초 영국에서 시작된 세계
시민주의·인도주의적인 우애 단체. 회원 상호간의 우호와 정신 함양 및 타인에 대한 자
선·박애 사업을 그 목적으로 함[Free and Accepted Masons][역자 註]) 단원용 검을 설계하
는 데에 있어서, 그들의 상상력과 독창성에 배출구를 마련해 줄 수 있었다.
<136∼137페이지>
①136페이지 - 프랑스의 통령(統領 - 프랑스 혁명기에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통해 총재 정
부를 타도하고 수립한, 통령 정부의 최고 행정관. 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나폴레옹이
제1 통령이었음[1799∼1804][역자 註])의 은으로 도금된 검. 1802년경에 예술 감독관
(Directeur-Artiste)인 니콜라 노엘 부테(Nicolas Noel Boutet)에 의해 베르사이유의 국립
조병창에서 제작되었음
②137페이지 - 1850년경의 프랑스의 마를 프레르(Marrel Freres)이 작성한, 장식적인 검과
단검의 설계도
<138∼139페이지>
①138페이지 - 투르크 식의 17세기의 폴란드 코사크(Cossack)의 갑옷
②139페이지 - 투르크 식의 1600년경의 폴란드 혹은 헝가리의 투구
동양의 무기와 갑옷
중세 말까지는, 폴란드의 무기와 갑옷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서 쓰이고 있었던 것들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16세기에 오스만 제국에 의해 헝가리의 거의 전역이 점령당하
게 되면서, 여러 정치·경제·문화적인 유대로써 헝가리라는 이웃 국가와 이어져 있었던 폴
란드 역시, 동양의 영향력 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폴란드 군의 주력은 그 기병대에 있었다.
이들 중 경기병 부대인 코사크(Cossack)는 사슬 갑옷을 입었으며, 투르크의 스파히(spahee
- 중세 투르크의 비정규 기병[역자 註])의 것과 너무나 비슷하게 생긴 무기를 휴대하였기
에, 빈(Vienna) 전투(1683)에서 존 소비에스키(John Sobieski) 왕은 오스트리아 동맹군이
자신의 군인들을 적으로 오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밀짚으로 된 띠를 차도록
명령해야만 했다. 위에서 보여지는 폴란드 혹은 헝가리의 투구는 아마도 투르크의 '터번
(turbun)' 투구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 투구에는 뾰족한 봉우리 부분과 목 가리개가 달려
있으며, 나중에 투구 전체가 당초(唐草) 문양(Arabesque)으로 장식되었다.
<140∼141페이지>
①140페이지 - 19세기 초의 투르크와 폴란드의 사브르
②141페이지 - 15세기의 투르크의 '터번' 투구
동양의 무기와 갑옷은 대단히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투르크와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
에서 생산된 것들을 구별한다는 것은 종종 어렵다. 이것은 반대쪽에서 보여지는 여러 자루
의 사브르에 의해 잘 입증되어진다. 왼쪽의 것은 투르크의 사브르로서, 자루는 옥(玉)으로
되어 있으며 마운트(mount - 칼집의 장식용 쇠붙이[역자 註])는 은으로 도금되어 있다. 나
머지 두 개에는 초기의 페르시아 식 칼몸에, 폴란드 식 자루와 마운트가 달려 있다. 투르크
의 사브르(kilij)에는 일반적으로 페르시아의 시미터(shamshir)보다 짧은 칼몸이 달려 있으
며, 찌르는 끝 부분이 보다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이 두 가지 형식 모두 품질이 좋고 칼날
에 물결 무늬가 서려 있는 강철제 칼몸이 달려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칼몸에는 타인샤
(Tainshah -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역자 註]) 금 세공 기법으로 이슬람 어 문구가 새겨져
있다. 위에서 보여지는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15세기의 투구는 당대의 터번 모양을 본떠
만들어진 것으로, 여기에 달려 있는 코 보호대(nasal)는 아마도 십자군의 투구에 달려 있던
것으로부터 유래하였을 것이며, 근동(近東)의 여러 나라들을 거쳐 동유럽으로 전파된 수많
은 투구들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속이 깊은 원뿔 모양은 17세기 말까지 투
르크, 헝가리, 그리고 폴란드에서 유지되었으나, 페르시아와 인도에서는 보다 속이 얕은 주
발 모양이 채택되었으며, 몇몇 경우에 있어서 이것들은 단지 사슬로 된 헐렁한 가리개가 달
려 있는 작은 접시 모양에 지나지 않았다.
<142∼143페이지>
①142페이지 - 18세기의 인도의 갑옷
②143페이지 - 18세기의 페르시아의 사브르의 칼자루
동양의 갑옷은 결코 유럽의 갑옷만큼 전신을 완전히 감싸거나 혹은 무겁지는 않았다. 보
다 더운 기후에다가 일반적으로 사람과 말의 체구가 보다 작았기 때문에, 동방의 갑옷은 급
소를 보호하는 작은 판금들을 주요 부분으로 하고서, 여기에 손을 포함한 전신을 감싸는 사
슬 갑옷 혹은 질긴 직물이 연결되어 있었다. 페르시아와 인도의 갑옷의 특징은 팔 가리개인
데, 이것은 휘어진 판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손목으로부터 팔꿈치에까지 닿아 있다. 이 페이
지에서 보여지는 인도의 갑옷과 페르시아의 사브르 모두, 색깔에 대한 동양인들의 애정을
입증하고 있다. 갑옷에 있어서는 강철이 코프트가리(koftgari -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역
자 註]) 금 상감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반면에 윗도리와 치맛자락, 그리고 바지는 솜
을 넣고 누빈 녹색 벨벳으로 되어 있으며 머리 부분이 도금된 대갈못들이 박혀 있다. 검의
에나멜이 칠해진 자루는 끝 부분이 반투명한 녹색의 숫양의 머리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 루
비로 된 눈이 박혀 있다.
<144∼145페이지>
①144페이지 - 자루에는 보석이 박혀 있고 칼집에는 에나멜이 칠해진 페르시아의 단검.
1810년경에 파스 알리 샨(Fath Ali Shan)이 영국 대사인 죤 맬컴(John Malcolm)에게 선물한
것임.
②145페이지 - 인도-페르시아의 단검의 회색 옥으로 된 자루. 칼몸의 연도는 회교 기원
(A.H.) 990년(서기 1582년)으로 되어 있음
인도와 페르시아 무기의 화려함의 대부분은, 보석을 사용한 것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
보석들은 어떤 커다란 개인적인 가치를 지닌 것도 아니었고, 유럽의 보석 세공인들의 정교
하게 작은 면을 낸 보석과도 달라서, 그것들은 보통 단순한 다이아몬드 조각들이거나 질이
낮고 표면이 거친 카보숑(cabochon - 잘라 내어 다면체를 만들지 않고, 위를 둥글게 연마한
보석[역자 註]) 모양의 루비와 사파이어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단히 많이 사용되어
져서, 원시적이고 둥그런 색깔 덩어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반대쪽에서 보여지는 단검의 자
루는, 루비와 자수정으로 돋보이게 한 커다랗고 납작한 다이아몬드들로 뒤덮여 있다. 무기
제작자들이 선호하였던 또 다른 보석은, 미얀마와 중국의 광산에서 생산된 옥(玉)이었다.
이 물질 역시 보통 흰색, 회색, 그리고 창백한 녹색의 영역에 속하는 질이 떨어지는 것이
다. 그러나 위에서 보여지는 자루에서와 같이, 그 조각 기법은 가장 우수한 중국인의 솜씨
에 필적하는 것이다.
<146∼147페이지>
①146페이지 - 인도의 코끼리를 몰 때 사용한 막대기인 18세기의 안쿠스(ankus). 에나멜이
칠해져 있고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음
②147페이지 - 코끼리용 갑옷. 아마도 1757년의 플라시(Plassy) 전투(인도를 식민지화하는
데 있어서의 주도권을 두고 영국과 프랑스가 맞붙은 전투[역자 註])의 전리품인 것으로 보
이며, 클라이브(Clive) 경이 영국으로 가져왔음
기원 전 327년에 알렉산드로스(Alexandria) 대왕이 인도를 침공하였던 시기 이후로, 코끼
리는 전쟁에 있어서 항상 장갑차의 한 형태로서 사용되어져 오고 있다. 인도를 방문한 최초
의 유럽인 여행자였던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미엔(Mien)과
방갈라(Bangala)(미얀마와 벵골)의 왕은 2000마리의 거대한 코끼리를 소유하고 있다고들 하
는데, 그것들 각각의 위에는 튼튼하게 뼈대를 세운 목재로 된 탑이 세워져 있으며, 중무장
한 전사들을 12명에서 16명까지 싣는다'. 가끔씩 커다란 낫이 코끼리의 코와 상아에 부착되
었으며, 나중에는 로켓과 심지어 작은 대포까지 코끼리의 등에서 발사되었다. 코끼리는 오
늘날 보트를 잡아당길 때 쓰는 갈고리 장대처럼 생긴 몰이용 장대, 즉 안쿠스(ankus)로 조
종하였는데, 그 장대 끝에는 돌기가 달려 있었고 그 옆에는 날카로운 갈고리가 달려 있었
다. 여기서 보여지는 실례와 같이, 코끼리의 등에 타고 있는 사람이 사용할 때에는 이 장대
의 손잡이가 짧지만, 보다 긴 종류의 것들도 만들어져서 코끼리를 땅에 서서 조종할 수 있
게 하였다.
<148∼149페이지>
①148페이지 - 판금 32장으로 된 17세기의 일본의 투구. 사오토메 이에치카(Saotome
Iyechika)의 서명이 되어 있음
②149페이지 - 혼다 타다카츠(Honda Tadakatsu)(1548∼1610)의 인물상. 소년의 축제(Boy's
Festival)를 위해 만들어진 축소형 갑옷
일본의 예술가들은 언제나 그들의 최고의 솜씨를 그 나라의 무기와 갑옷에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일본도(日本刀)의 칼몸은 그 모습이 대단히 아름다우며 무시무시한 위력 - 일본도
는 단칼에 사람의 몸을 어깨에서 엉덩이까지 비스듬하게 벨 수 있었다 - 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靈的)이고 상징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다고 확고히 믿어졌다. 그 본질적
인 형태와 구조가 확립된 8세기 이후로 일본도는 현재까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며,
20세기의 일본군 장교가 몇 세기 전의 그의 선조가 소중히 하였던 것과 동일한 무기를 가지
고서 전장에 나서는 것도 보기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서구인의 눈에는 너무나 허약
하고 서툴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일본식 갑옷이 설계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일본도와는
대조를 이룬다. 일본식 갑옷은 강철, 쇠, 혹은 단단하게 한 소가죽으로 된 수없이 많은 길
쭉한 조각들을 서로 겹치게 하고 여러 가지 색의 비단 끈 혹은 가죽끈으로 꿰어서 그 강도
와 유연성을 얻는다. 투구의 볼록한 부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판금들 - 보통 그
개수는 100개를 넘지 않았다 - 을 방사상(放射狀) 구조로 대갈못으로 결합하여 만들어진다.
<150∼151페이지>
①150페이지 - 소오죠오보오(So-Jo-Bo -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음. 하지만 이를 일본어로
옮겼을 때는 'そうじょうぼう'인 것으로 보이는데, 'そうじょう[僧正]'는 승관[僧官]의 최
고위직을 뜻하는 말이며, 'ぼう'는 스님의 이름 뒤에 붙이는 호칭임[역자 註])의 머리가 양
각 조각되어 있는, 18세기의 동체 갑옷(cuirass)과 가슴받이
②151페이지 - 목 가리개를 갖춘, 18세기의 철제 가면
일본식 갑옷을 만드는 데 필요했던 많은 양의 끈에는 결점이 있었다. 끈이 물이나 진흙을
흡수하였을 때에는 무거워졌고 쉽게 마르지도 않았기에, 겨울에는 그것은 가끔 얼어붙었고
여름에는 입고 있기 답답했으며 고약한 냄새가 났다. 매우 길고 고된 작전에 있어서, 일본
식 갑옷은 그 착용자의 건강에 나쁜 영향을 주는 개미와 이(lice)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는
꼴이었다. 그 때문에 많은 무사들은 보다 큰 판금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유럽형의
가슴받이가 본떠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몇몇 경우 진짜 유럽 갑옷의 부품이 정교한 일본
갑옷 안에 삽입되었다. 16세기 이후로 얼굴은 보통 사나운 표정을 한 가면으로 가려졌다.
머리카락 모양의 술 뭉치와 커다란 뿔이 달려 있는 투구의 볏 장식에 의해 추가적인 위협이
표현되었다.
<152∼153페이지>
위에서 보여지는 것은 조립된 채 칼집에 수납되어 있는 일본식 장검(카타나[かたな])이
다. 이와 동일한 검을 구성하는 부품들이 그 아래에서 보여지고 있다. 나무로 된 자루(츠카
[つか])는 절반으로 된 것을 아교로 붙인 뒤 오돌토돌한 가오리 껍질로 감싸서 만들어진다.
이 위로 납작한 끈으로 된 포장이 와서 한 쌍의 장식(메누키[めぬき])을 봉하고, 여기에 뚜
껑 모양의 자루끝(카시라[かしら])이 씌워진다. 자루 위 부분 둘레에 씌우는 이음 고리(후
치[ふち]), 고리쇠(셉빠[せっぱ] - 볼트를 죌 때 너트 밑에 끼우는 얇은 고리 모양의 얇은
쇠붙이. 와셔[washer]라고도 하며, 여기서는 자루와 날밑, 그리고 날밑과 칼몸이 닿는 두
부분에 끼우는 덧쇠를 가리킴[역자 註]), 날밑(츠바[つば]), 그리고 칼몸 꽂이(하바키[はば
き] - 칼몸의 기단 부분을 두르는, 무른 금속으로 된 이음 고리[역자 註])가, 칼몸을 자루
안에 단단히 고정시켜 둔다. 그리고 자루에는 칼몸을 고정시켜 두는 대나무나 뿔로 된 쐐기
못(메누키[めくぎ])이 박히게 된다. 또한 어떤 검들에는 칼집 안에 나이프나 꼬챙이 모양의
다양한 도구들(코즈카[こづか], 코가이[こがい] 등)이 들어 있었다. 일본의 무사 계급인 사
무라이는 한 쌍으로 장식된 장검과 단검을 휴대하였다.
<154페이지>
①154페이지 - 가네모토(Kanemoto)의 서명이 되어 있는, 16세기 초의 단도(たんとう[短
刀])의 칼몸. 나중에 사자 위에 올라탄 문수보살(もんじゅ)의 모습이 조각되었음
일본의 권위자들은 보통 1600년 이전에 만들어진 검을 코토오(ことう[古刀] - 오래된
검), 그리고 그 이후, 즉 일본이 2세기 반 동안의 평화와 쇄국의 시기에 접어들었던 시기에
만들어진 검을 신토오(しんとう[新刀] - 새로운 검)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제작된 연도가
언제이든 간에, 일본도의 제작은 모두 동일한 복잡한 공정을 거쳤으며, 이 공정의 각각을
수행하는 것은 하나의 종교 의식으로서 간주되었다. 그 최종적인 결과물이, 철심(鐵心)은
유연하면서 칼날(야키바[やきば])은 극히 단단하도록 담금질한 고 탄소강으로 되어 있는 칼
몸이었다. 이러한 특성의 외부적인 흔적은 칼몸의 날을 따라 나 있는 물결 무늬의 선, 즉
'다마스쿠스 강철(damask)의 물결 무늬'이다. 이처럼 일렁이는 선(はもん[波紋])은 칼몸의
형태와 재질에 따라 다르기에, 전문가가 칼몸을 감정하는 데에 쓰여질 수 있는 것이다. 하
지만 유럽인 수집가들의 주요 감정 수단은 칼몸 위에 있는 서명이다 - 비록 최고의 품질의
칼몸들 중에는 서명이 없는 것이 많으며 훌륭한 제작자들의 서명이 위조되기도 하였지만 말
이다. 일본인들의 서명에는 종종 제작자들의 이름, 불교식 칭호, 그의 거주지, 그리고 연도
등이 포함되어 있다 - 그리고 금속의 특징과 그 칼몸이 받아 온 시험 과정에 대한 내용도
또한 제공된다.
<155페이지>
①155페이지 - 이치리우 토모나가(Ichiriu Tomonaga)가 제작하였던, 1870년경의 일본도의
날밑(tsuba). 승려와 유령의 이야기를 보여 주고 있음. 호쿠사이(Hokusai - 일본의 우키요
에[浮世繪] 화파에 속하는 탁월한 화가·판화가인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齊][1760∼
1849][역자 註]) 시대 이후의 것
날밑도 당연히 수집가들의 수집 품목이다. 이것들은 쇠, 은, 청동, 황동, 구리, 그리고
일본 특유의 세 가지의 구리 합금 - 샤쿠도오(しゃくどう[赤銅] - 구리와 금의 합금으로 짙
은 자줏빛을 띰[역자 註]), 시부이치(しぶいち - 구리와 은의 합금으로 회색 빛을 띰[역자
註]), 그리고 센토쿠(せんとく - 황동의 일종[역자 註])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다양한 구리
합금은 특수한 산성 용액으로 세척 처리되어져서, 황연색(黃鉛色, chrome-yellow)에서부터
올리브 브라운(olive-brown) 색조를 거쳐, 광택이 나는 짙은 검은 색 혹은 짙은 보라색에
이르는 넓은 영역의 색깔을 띠게 된다. 금속 세공사들의 이러한 보물들을 생산하는 데에 있
어서 최고의 상감·조각 기법의 일부가 도입되었다.
<156∼157페이지>
①156페이지 - 금으로 된 자루가 달려 있는 크리스(kris)를 붙들고 있는, 나무를 조각하여
만든 크리스 대(臺)
②157페이지 - 17세기의 크리스의 자루
크리스(kris) 혹은 케리스(keris)는 주로 말레이 군도(群島)에서 보여지는 도안에 따라
제작된 찌르는 단검이다. 일반적으로 칼몸의 윤곽은 굽이치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가장 우
수한 것의 경우에는 기단 부분을 금으로 상감 세공하여 장식되어 있다. 전통에 따라 크리스
는 마법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졌으며, 초기형의 경우 앉아 있는 신상(神像)의 모
습으로 자루가 조각되어 있었다. 이것이 새의 머리가 달린 인간의 모습을 한 가루다(garuda
- 비슈누가 타고 다닌다는 상상의 큰 새. 머리는 매, 몸은 사람을 닮고, 날개는 금빛이며
입에서 불을 뿜는다고 함. 가루라[迦樓羅][역자 註])로 전락하게 되었고, 그 후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사람이나 동물 모양을 한 것은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으며 그 특징적인 휘어
진 모양만이 남게 되었다.
첫댓글 엄청난 스크롤의 압박;;; 아무래도 컴사양 낮은데 ㅜ.ㅜ 이왕에 올리실거면 복사하시지 마시구 좀 편집을 해주시고 올리셨으면.....
편집한거거든여? 이거 편집 안한거 올려볼까여? 이거에 20배 이상은 될텐데여? 한 페이지씩 올려야 하는데 그렇게 올려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