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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크게 역사하시는 하나님 (6부)
- 산상보훈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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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크게 역사하시는 하나님 (6부)
- 산상보훈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말 씀:마태복음5:1~12
부 르 심:22:37~40
찬 송:
80(101), 93(93),211(346),395(450)
기 도:1)복음의 하나님의 능력이 되게 하옵소서
2)다윗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3)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게 하옵소서.
4)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5)예수한국 복음통일, 부정선거,주사파척결, 성령충만
1. 아홉 가지의 복이 있는 자
마태복음에는 예수께서 산에서 설교하신 두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산에 올라가 앉으시어 제자들이 나아왔을 때 설교하신 산상설교입니다.
또 하나는 감람산에 올라가 앉으시어 제자들이 나아와 질문하실 때
설교하신 감람산 설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산상설교의 산상수훈 또는 산상보훈이라 부르는
산상설교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입니다.
감람산 설교가 마태복음 24장부터 25장까지입니다.
산상설교와 감람산 설교의 공통점은 산에 올라가 앉으시어
하늘의 보좌를 펼치시어 보좌에 앉으신 모습으로
하늘의 모형을 지상에서 펼치시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첫 번째로 가르치신 것은 “복이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이 있는 자”를 아홉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홉 가지의 복 있는 자에 말씀으로 은혜받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2)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3)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4)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5)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6)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7)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8)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9)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지난 시간에 이어 “복이 있는 자”의 네 번째 복이 있는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입니다.
2.의를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
세상 사람들의 복은 배부른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는 자”라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어떤 자가 복이 있는 자인가
네 번째 복이 있는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
의에는 사람의 의가 있고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의란 사전적 의미는 사람으서 지키고 행하여야 할 바른 도리입니다.
사람이 만든 의는 매이게 하고 실상 지킬려고 하다가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히려 맹목적인 의가 되어 이기적이고 명분을 내세우다가
다 망하게 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하나님의 의로 나라도 살리고 자유통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의를 드러내어 모순에서 아집과 고집과 독선으로 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하겠습니다.
느헤미야의 의에 주리고 목마름)) 느헤미야 1:1~11
느헤미야는 바사의 아닥사스다왕의 술관원장으로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형편을 들었습니다.
“그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큰 어려움과 수모를 당하고 있으며
예루살렘 성벽은 불탄 이후로 다시 세우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주야로 기도하여 주 앞에 이스라엘 자손의 범죄함을 자복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자기와 아비의 집이 범죄한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이 종을 도우셔서 황제의 은혜를 입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황제의 술을 따르는 관리였습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시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이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리라 (느헤미야1:11)”
하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기도를 들으시어
복이 있는 자가 되게 하시어 배부르게 하심을 믿습니다.
느헤미야가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왕에게 드렸는데
왕이 느헤미야의 얼굴에 수색이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느헤미야2:2)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갈급함을 보게 하시고 도울 자를 돕게 하십니다.
왕은 느헤미야가 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이유를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은 느헤미야의 이야기를 듣고 대답하는 것은
느헤미야에게 왕의 은혜를 입게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였고 왕에게 고하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며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서 하였는데(느헤미야2:5)”
왕은 느헤미야의 소원함에 은혜를 입게함으로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아 3차 포로귀한을 하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의 총독이 되어 예루살렘 성벽을 52일만에 재건하였고
강력한 종교 개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간구하여 복이 있는 자로
형통함의 배부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편42:1)”
3.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1>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5:7)“
“긍휼”의 사전적 의미는 다정히 사랑하며 측은히 여기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겨 동정하고 상대방에게 대한 불붙는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은혜를 배푸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들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야고보서5:11)”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에게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4:16)”
2>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가복음10:46~52)
예수께서 여리고에게 가까이 가셨을 때에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앉아 구걸하였습니다.
구걸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렀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마가복음10:47)”
바디매오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다윗의 자손 예수님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기를 소원하는 소리 지름이었습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듣기는 “나사렛 예수”란 말이었습니다.
바디매오가 소리지른 이름은 “다윗의 자손 예수”입니다.
바디매오가 부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기록된 이름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라 불렀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마태복음1:1)”
사랑하는 여러분,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경제적으로 가장 가난합니다.
그리고 앞을 못보는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봐도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소경에다가 거지인데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소경에다 거지이지만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라 소리질렀습니다.
바디매오가 정확하게 구하는 것은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소리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길 것을
소리질렀으나 듣는 군중들의 반응은 바디매오를 무시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마가복음10:48)”
바디매오는 군중들의 부정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자신을 압니다.
사람들에게 구걸하여도 눈을 뜰수도 없고 생활이 나아질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이 자기를 불쌍히 여기시어
가장 소원하는 것을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라고
포기하지 않고 더욱 소리지르는 바디매오를 부르게 하여 바디매오게 물었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누가복음18:41)”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소리 지르는 것을 들으시고
그를 불러 소원을 들으시어 바디매오를 불쌍히 여기시어
바디매오를 보게 하셨습니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누가복음19:43)”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되니 보이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따름으로 더 이상 맹인이 아닙니다.
더 이상 구걸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에게 긍휼하심을 받아 예수님을 보고 따라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비유(누가복음18:9~14)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하나님에게 아뢰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눅18:11~12)”
바리새인의 기도는 듣기에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듣기에는 역겹습니다.
회당중심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줄도 모르는 자들입니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였다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은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토색하고 불의 하였던 세무서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유하셨습니다.
간음을 자주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게 물을 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다섯이나 바뀌었던 여인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여
거듭나게 사마리아인들을 전도하여 예수님에게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요한복음4:29~30)”
바리새인은 일 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는데도
세리를 무시하고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아니하였다고 예수님에게 자랑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의 전도로 세리와 불의한 자와
간음하는 자가 거듭나게 함으로 허다한 죄를
사함받게 하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야고보서5:19~20)”
바리새인이 무시하던 세리의 기도에는 자기의 자랑이 하나도 없습니다.
세리의 기도는 자기를 의롭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리는 하나님께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누가복음18:13)”
사랑하는 여러분, 불의한 바리새인의 기도가 되지말고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에게 회개하고 불쌍히 여김을 받고
죄사함을 받아 의롭다 함을 받는 구원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4>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인가? (누가복음10:25~37)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자기를 옳게 보일려고 예수께 여쭈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님은 대답하여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을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이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다 죽게 된
강도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 부어주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을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그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때까지 갚으리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하시고 율법교사에게 질문하였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질문에 율법교사는 대답하였습니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11:37)”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본받아 불쌍히 여겨
너도 이같이 하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쌍문동 산소망교회 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