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7일(금)
* 시작 기도
주님...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살 때는 그저 윤리도덕적인 삶을 추구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우리 주님 안에서 살되 윤리도덕적인 삶이야 기본적인 것이고 이를 뛰어넘어 하늘의 신령한 은사를 받기 원합니다.
우리 주님이 주기 원하시는 영생은 오직 복음을 통하여 얻을 수 있사오니 그 복음 안에 거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옵소서.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다시 예수를 못 박는 자가 아니라 나를 못 박아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장사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부활의 소망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느 12:31-47
제목 :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31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32 그들의 뒤를 따르는 자는 호세야와 유다 지도자의 절반이요
33 또 아사랴와 에스라와 므술람과
34 유다와 베냐민과 스마야와 예레미야이며
35 또 제사장들의 자손 몇 사람이 나팔을 잡았으니 요나단의 아들 스마야의 손자 맛다냐의 증손 미가야의 현손 삭굴의 5대 손 아삽의 6대 손 스가랴와
36 그의 형제들인 스마야와 아사렐과 밀랄래와 길랄래와 마애와 느다넬과 유다와 하나니라. 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잡았고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
37 샘문으로 전진하여 성벽으로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 다윗 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다윗의 궁 윗길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수문에 이르렀고
38 감사 찬송하는 다른 무리는 왼쪽으로 행진하는데 내가 백성의 절반과 더불어 그 뒤를 따라 성벽 위로 가서 화덕 망대 윗길로 성벽 넓은 곳에 이르고
39 에브라임 문 위로 옛문과 어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 양문에 이르러 감옥 문에 멈추매
40 이에 감사 찬송하는 두 무리가 하나님의 전에 섰고 또 나와 민장의 절반도 함께 하였고
41 제사장 엘리야김과 마아세야와 미냐민과 미가야와 엘료에내와 스가랴와 하나냐는 다 나팔을 잡았고
42 또 마아세야와 스마야와 엘르아살과 웃시와 여호하난과 말기야과 엘람과 에셀이 함께 있으며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
43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44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 때문이라.
45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여 모두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명령을 따라 행하였으니
46 옛적 다윗과 아삽의 때에는 노래하는 자의 지도자가 있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노래와 감사하는 노래를 하였음이며
47 스룹바벨 때와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몫을 주되 그들이 성별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또 성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
* 나의 묵상
성벽 봉헌식은 성전을 향한 신성한 행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제물의 봉헌도 수반되었다고 한다(43절; 큰 제사를 드리고).
성전을 향한 행진을 위해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인도하는 두 무리가 구성되었다.
행진은 예루살렘 성벽 남쪽에서 북쪽에 있는 양문을 향하여 이루어졌고, 성전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난다.
에스라의 무리는 오른쪽(동쪽)으로 향하여 갔고 분문을 지나 수문에 이르렀다.
느헤미야의 무리는 왼쪽(서쪽)을 향하여 갔고 에브라임문과 어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 양문에 이르러 경비대 문에서 멈추었다.
행진은 레위인뿐 아니라 제사장, 합창대, 고위관리, 가문의 지도자들 중의 절반이 포함되었다.
행진의 참가자들에게 정결 의식을 행한 것을 볼 때(30절), 통상적인 봉헌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 점에서 행진은 모든 부정한 것을 제거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벽 자체를 둘러싸기 위한 의식으로 파악된다.
행진은 감사 찬송하는 두 무리가 하나님의 성전에 서는 것으로 끝난다.
이때 느헤미야와 가문의 지도자들의 절반이 함께 하였다.
제사장 엘리아김과 마아세야와 미냐민과 미가야와 엘료에네와 스가랴와 하나냐는 다 나팔을 잡았다.
또 마아세야과 스마야와 엘르아살과 웃시와 여호하난과 말기야와 엘람과 에셀이 함께 있었다.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였다.
봉헌식을 하는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기뻐하였다(43절).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기쁨이 너무도 벅차서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함께 기뻐하니, 그 기뻐하는 소리가 예루살렘에서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43절).
43절에서 기쁨, 기뻐함의 어근은 히브리어 ‘사마하’이며 5번에 걸쳐 반복된다.
이는 당시 백성들의 기쁨의 열광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다.
성벽 봉헌식이 있는 그 날, 두 가지 일을 시행한다.
하나는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을 위해 양식을 두는 일이다(44-47절).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회에 들어올 수 없는 이방인들을 축출하는 일이다(13:1-3).
한편 느헤미야는 성벽 봉헌식을 마친 후 아닥사스다 왕에게 가서 그간의 일을 보고하였다(13:6; 주전 433년).
그리고 다시 왕의 허락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그 사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부재할 때에 몇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13:4-31절은 그 일들을 수습하기 위한 느헤미야의 개혁을 진술하고 있다.
성벽 봉헌식은 레위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제금을 치고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두 무리로 나누어져 한 편은 예루살렘 남쪽에서 오른쪽으로 올라오고, 다른 한 편은 왼쪽으로 올라와 성전에 이르렀다.
이들은 감사 찬송을 하며 성전에 섰고 합창단은 크게 찬송을 하였다.
하나님께서 온 무리로 하여금 크게 기뻐하게 하셨고, 여인들과 아이들도 기뻐하여, 예루살렘의 기뻐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언약을 깨뜨림으로써 공의의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정한 때에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셨다.
그들은 포로된 지 70년 만에 해방되었고, 본향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꿈꾸는 것같이 기뻐하였고 그들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그들의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찼다(시 126편).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크신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여전히 포로 상태에 있는 이들을 위해 눈물로 간구한다.
남방 시내, 네겝과 같이 그들을 돌려보내시기를 간구한다.
본래 남방 시내, 네겝은 언제나 말라 있다.
그러나 우기에 비가 내리면 갑자기 시내로 변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때는 예기치 않은 때에 갑자기 임하며, 그들은 그의 구원을 사모한다.
그리고 그들 곧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거둘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크신 일을 행하셨다.
그 크신 일은 아들을 힘입어 자기에게 나오도록 하신 일이다.
이는 창세전 약속된 아들의 생명을 주시는 것이며, 이 생명을 얻은 자는 기뻐하며 아버지께로 나아간다.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은 기뻐하며 존재하셨다.
(잠 8: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아들은 기쁨으로 아버지께 복종하였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자신을 다 내어주는 기쁨으로 사랑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주신다.
영생의 본질은 창세전부터 아버지와 아들이 기뻐하면서 가진 교제에 참여하는 것이다(요일 1:3; 요 17:24).
그러므로 구원을 얻은 자, 하늘 성전에 올라가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크신 일을 찬송한다.
곧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신 그 크신 일을 인하여 찬양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그 크신 기쁨의 일인 구원을 알지 못하는 자였다.
그저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신앙의 본질은 영생이요, 이 영생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다.
그 뜻을 알지 못한 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였던 나는 기독교를 또 하나의 종교로만 알고 이해하였을 뿐이다.
내가 믿는 기독교는 결코 종교가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유익하게 하고 자기의 유익을 얻게 하는 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이 시내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했던 것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이 마음대로 움직이기도 하고 자기들의 뜻대로 이끌어갈 수 있는 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애굽에서 400년 동안 보고 배운 것이 바로 금송아지 아니었던가?
그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너희를 인도할 신이라고 했던 것이다.
사실 그런 패역을 행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오늘 나와 같은 자들을 위한 기능적 이스라엘의 역할을 수행하는 모형으로 세움을 받았을 뿐이다.
문제는 오늘 이 시대에 내가 바로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서 그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하나님으로 바꿔버린 죄인 중에 괴수임을 고백한다.
때로는 무언가를 꼭 갖고 싶은데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허락하지 않으실 것 같으니까, 그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고 내 마음대로 행한 자가 바로 나였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희롱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너 자신을 구원해 보라고 말이다(마 27:40-41).
하지만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자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 자리를 포기하고 내려오시면 당신은 구원하실 수 있을지 모르나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렇게 모독과 조롱을 서슴지 않았던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한 이유는 예수님이 없는 십자가는 다만 빈 십자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빈 십자가에 자기들의 행위를 덕지덕지 붙이려는 것이었다.
당시 가장 윤리도덕적으로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받은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아니었던가?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를 감히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어떻게 행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결코 우리의 행위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가능하다.
죄인 중에 괴수인 나라 할지라도 우리 주님께서 이미 그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따라서 죄인인 내가 의인이 된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날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의로 인함이다.
오늘도 나를 그렇게 의인 삼아주신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자신들의 생각을 내려놓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필두로 찬양 대열에 선 레위인들을 봅니다.
누구라도 제일 앞에 서서 지도자로 서기를 원할 터이나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렇게 큰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날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죄인 중에 괴수인 우리를 의인으로 삼아주신 주님께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어린 찬양과 경배를 드리기 원합니다.
그 큰 일을 이루신 주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여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저 영원한 생명문을 여셨습니다.
그렇게 나도 우리 주님을 따라 그 열린 생명문으로 들어갑니다.
나의 모든 것 되신 우리 주님이 계시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