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17,22-24
22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23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24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되리라.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 5,6-10
형제 여러분,
6 우리가 이 몸 안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7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8 우리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9 그러므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10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사랑이 불타오르는 6월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저 높은 곳으로 부터 품고 온 아버지의 나라,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가 선사됩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우리에게 선사된 '하느님 나라'입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손수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고, 그 나무가 무성하게 하는 이가 당신 주님이심을 알게 하리라.”(에제 17,22-24 참조)고 새로운 나라의 희망을 알려줍니다.
이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비유로 말씀하신 ‘겨자씨’를 떠올려줍니다.
제2독서에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2코린 5,9)라고 하느님 나라를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마르 4,27)
그렇습니다.
먼저, ‘씨’는 우리에게 선사됩니다.
선물로 주어집니다.
곧 주시는 분에 의해 건네져 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가는 나라’, 혹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건네 ‘온’ 나라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 나라의 이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우리들 가운데 들어와 있고, 스스로 줄기를 뻗고 싹을 틔우며, 이삭을 맺고 낟알을 영근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매 순간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여,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알아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곧 눈이 맑아져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믿음으로 체험하는 일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상호 침투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왔지만,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곧 체험하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들어오는’ 나라요, 동시에 ‘들어가는’ 나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성장하고 자라며,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이삭을 맺고 낱알을 영글어 갑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하느님 나라가 퍼져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막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위대한 은총이 우리 안에서 계속 자라도록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마르 4,31)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와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작은 모습’으로 와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이미 우리 안에 심어진 씨앗입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처럼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됩니다.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듯, 그 그늘에 짐 진 이들을 불러 안식을 주듯, 자라게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작은이의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를 품고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이 앞에, 작은이로 오실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작아져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작은이로 계신 그 씨앗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작은 ‘겨자씨’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공동체에서, 비록 작은 ‘겨자씨’지만, 결코 작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 속에서 썩기만 하면 말입니다.
‘씨가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르게’ 그렇게 썩는다면 말입니다.
그들 속으로 들어갈 만큼, 작아지고 낮아지면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나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요, 그 나라를 체험하게 되는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나라의 이 놀라운 신비에 순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마르 4,31)
주님!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오늘 제가 형제들 앞에서 작아지게 하소서!
십자나무에 인류의 거처를 마련하듯, 형제들의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