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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시는 복
□ 본문 : 창세기 35장 9-15절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같은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벧엘로 돌아온 야곱을 축복하십니다. 성도는 예배의 자리에서 복을 받습니다. 성도는 말씀의 자리에서 복을 받습니다. 성도는 사명의 자리에서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2023년 새해에 우리들에게 예배의 자리로, 말씀의 자리로,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벧엘로 돌아온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세 가지 복을 주십니다.
1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 첫 번째 복은 이스라엘이라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은 10년 전,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겼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존재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는 인생이 아닙니다. 더 이상 사람과 다투는 인생이 아닙니다. 더 이상 속이는 인생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사람과 다투고 속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오직 하나님만 붙잡고, 하나님과 기도의 씨름을 하며 살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고 불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에서 삽니다.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 씨름하며 사는 이스라엘의 인생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의 힘과 자신의 꾀와 자신의 방법으로 사는 야곱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인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십니다. ‘부르시고’는 ‘카라’입니다.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야곱을 향해 ‘너는 이스라엘이야’ 큰 목소리로 외치시는 것입니다. ‘너는 세겜에서 살 인생이 아니야. 너는 세겜에서 사람 눈치보며 살 인생이 아니야. 너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며 살 인생이 아니야. 너는 이스라엘이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인생이야. 그런데 왜 두려워하느냐?’라고 외치시는 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인생임을 기억하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너는 나의 것이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벧엘로 돌아갈 때 받는 첫 번째 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허랑방탕하게 살며 아버지의 재산을 허비했습니다.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결국에는 궁핍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이것이 벧엘을 떠난 인생입니다. 이것이 세겜에 머무는 인생입니다. 처음에는 육신의 즐거움을 따라 사는 것이 행복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인생에 흉년이 옵니다. 그래서 궁핍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돼지를 치며 사는 부끄럽고 천한 인생이 됩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비참한 인생이 됩니다.
아버지가 없습니까? 아닙니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버렸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이 좋아서, 세상에서 즐기고 싶어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돼지를 치며 사는 부정하고 수치스럽고 고통 받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좋으신 아버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지처럼 살아갔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둘째 아들이 깨닫습니다. 자기가 있을 곳이 아버지 품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자기가 있을 곳이 벧엘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15:22)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15:24) 내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아버지께 돌아온 둘째 아들이 받은 최고의 복입니다.
벧엘로 돌아갈 때, 예배의 자리로 돌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너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다, 너는 사랑하는 내 딸이다’ 불러주십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아도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그 아들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벧엘을 떠난 사람에게는 ‘너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다, 너는 사랑하는 내 딸이다’는 아버지의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부정하고 부끄러운 인생, 비참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나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삶의 목적을 잃고 방황합니다.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아갈 때는 이런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잘 나가는데, 재미있게 사는데 이런 말씀이 들리겠습니까? 내 계획대로 척척 잘 풀리는데, 그래서 자신은 절대로 둘째 아들처럼 될 리가 없다고 자신만만한데 이런 말씀이 들리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전12:1)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벧엘로 돌아간 야곱이 받은 최고의 복이었습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다, 너는 사랑하는 내 딸이다’ 불러주십니다. 이것이 성도의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무엇이 걱정이고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세상 무엇이 부럽겠습니까? ‘너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다, 너는 사랑하는 내 딸이다.’ 오늘도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1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2. 두 번째 복은 생육하며 번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생육하며’는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번성하라’는 크게 되는 것입니다.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는 것은 야곱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며, 야곱의 후손 가운데 여러 왕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구속사로 보면 야곱의 후손 가운데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이 태어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야곱이 계속 세겜에서 살았다면 절대로 받을 수 없는 복입니다. 육신은 편했겠지만, 세겜에서 가나안 사람처럼 살면서 쾌락을 누렸겠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아무 상관없는 헛되고 헛된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영원한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벧엘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많은 민족이 조상이 되었습니다. 생육의 복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야곱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야곱은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이 한 민족의 이름이 되었고, 한 나라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는 이스라엘이 되었으니(갈6:16) 야곱은 번성의 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받은 복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비록 야곱의 인생에 고난도 많았고 아픔도 많았지만, 벧엘로 돌아간 야곱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풍성하고 위대하게 쓰임 받은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벧엘로 돌아갈 때, 사명의 자리로 돌아갈 때 생육하며 번성하게 하시는 복을 받습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인생이 됩니다. 나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나로 인하여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그 인생의 운명이 바뀌었다면 이보다 더 의미 있는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로 인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이보다 더 존귀하고 위대한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 38만 유튜브 채널 ‘위라클 WERACLE’을 통해 희망을 전하는 박위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위라클’은 박위의 ‘위(We)’에 ‘미라클(Miracle)’를 합성해서 만든 것으로, ‘우리(We) 모두 기적(Miracle)으로 모든 세상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새롭게 하소서’ ‘다니엘기도회’ 그리고 여러 교회에서 간증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나누고 있는데, 작년에 ‘위라클 - 우리 모두에게 기적을’(토기장이) 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신문에 실린 기사를 읽어드리겠습니다.
2014년 5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박위 씨(온누리교회)는 낙상 사고를 당했고, 목이 부러지며 척수가 손상됐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28살이었다. 인턴으로 일하던 의류회사에서 정직원 합격 통보를 받았고 출근을 일주일 앞두고 있을 때, 건물 2층 높이에서 떨어졌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전신마비였다.
의사가 말했다. “박위 씨, 당신은 경추골절로 인한 척수신경의 손상으로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걷지 못할 것이고 두 다리도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을 거예요. 재활이 아주 잘 된다면 전동 휠체어에서 생활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옷을 입고 벗는 것, 밥을 먹는 것, 대소변을 처리하는 것, 심지어 아침에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한강에 나가 휠체어를 밀며 운동했다.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스스로 좌약을 넣는 데 성공했다. 휠체어를 스스로 분리하여 차에 넣기 위해 땀을 흘리며 연습했다. 그렇게 그는 좌절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재활병원 기도실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방법은 유튜브였다. 지난 2019년 유튜브를 시작했다. 직접 경험하고 있는 삶이 이미 기적임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콘텐츠들을 하나씩 올리기 시작했다. 휠체어로 계단 오르는 법, 휠체어로 택시 탈 때의 반응, 장애인들의 결혼과 연애, 눈 오는 날 휠체어로 집까지 가는 방법, 휠체어 타고 세계 여행은 물론 심지어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법까지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는 영상을 올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오는 이들과 통화를 하거나 직접 찾아가서 용기를 전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채널에는 희귀병 진단으로 좌절에 빠진 사람,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 하루하루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 등이 찾아와 위로받고 삶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많은 분들이 제게 질문해요. 진짜 많이 힘드실 때는 어떻게 이겨내세요? 라고. 눈앞에 닥친 고난과 아픔은 마치 우리의 인생을 삼킬 것만 같은 착각을 주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조차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저는 고난을 극복하지 않았어요. 고난 속에서 기쁨을 찾아 느끼는 중이죠. 저는 힘든 순간들이 잘 기억나지 않아요. 제 인생에는 행복한 순간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에요. 오늘도 우리 같이 일어나요!”
(한국기독공보, 2022년 09월 11일)
박위라는 청년은 ‘불완전한 삶을 통해 인생의 진정한 행복과 가치를 깨닫게 됐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통해 낙심과 절망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살아나고 회복되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불의의 사고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을 보냈고, 또 보내고 있지만 박위 청년은 그 누구보다도 생육하며 번성하는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박위 청년을 통해 어둠속에 있는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벧엘로 돌아간 자들이 받는 복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3. 세 번째 복은 약속하신 땅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땅은 가나안 땅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때에도, 그리고 야곱의 때에도 가나안 땅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다윗 왕 때에 가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이방 나라들에게 빼앗기다가 결국은 나라가 망합니다. 그렇게 땅 없이 나라 없이 살다가 1900년 가까이 지나서 이스라엘이 독립하지만, 다윗시대의 영토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가나안 땅의 궁극적인 의미는 하늘나라입니다. 벧엘로 돌아가는 자에게 주시는 복은 천국의 복입니다.
천국을 말하면 성도들의 반응이 덤덤합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 가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받아야 할 자가 영원한 천국의 복을 받았으니, 이보다 더 감격스러운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벧엘로 돌아간 자에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천국의 복 하나만으로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성도는 천국 가는 그 날까지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입니다. 죽을 때까지, 물론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먹을 양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하루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식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으로 하루를 살면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금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노후대책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양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선이 가득한 집에 산다고 자랑하지 말고, 마른 빵 한 조각을 먹는다고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이 쌓았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한 번 부시면 한 순간에 날아갑니다. 반대로 오늘의 양식밖에 없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양식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수와 복음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많이 가지고 많이 누리고 많이 즐기지 않아도, 세상 사람이 모르는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발견한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천국을 삽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천국을 정말 믿는다면 세상 것을 다 팔아서 천국을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거꾸로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천국을 팔아서 세상 것을 사는 교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면, 돈 많이 벌 수 있다면, 육신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믿음을 타협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자리도 타협하고, 말씀도 타협하고, 사명도 타협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겜입니다. 천국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재로는 천국의 소망도 천국의 기쁨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벧엘로 돌아가지 않고 세겜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절대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세겜에서 살다가 죽을 때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겜은 넓은 길입니다. 넓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겜에 살면서, 넓은 길을 가면서 자신은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복음은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벧엘로 돌아가는 사람이 천국에 갑니다.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벧엘보다 세겜이 좋은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가겠습니까? 좁은 길보다 넓은 길이 좋은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가겠습니까? 예배드리는 것보다 세상에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 좋은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가겠습니까? 천국보다 세상이 더 좋은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가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소망과 기쁨을 잃어버린 채 천국을 교리로만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실재라고 생각하는 이 세상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장막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집은 천국입니다. 천국이 진짜입니다.
12월 마지막 금요성령집회 때 ○국 신 선교사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 2019년 순교하신 동료선교사님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순교하신 선교사님의 선교명이 바로 천국이었습니다. 천국소망으로 사셨기에, 천국을 발견한 기쁨으로 가득하셨기에 당신의 선교명을 천국으로 지으셨고, 그리고 자신의 이름대로 순교하여 천국의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천국의 소망과 기쁨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이 영광이 됩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1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이 천국을 네 후손에게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천국은 대물림이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천국에 간다고 자녀도 아버지 따라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천국을 나만이 아니라 내 후손에게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부모가 천국을 정말 믿으면, 그래서 천국의 소망과 기쁨을 누리면, 그 자녀가 천국을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녀는 부모를 압니다.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어도 그래도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는 믿을 수 있습니다. 자식에게 사기 치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기야 요즘은 세상이 흉흉해서 그런 부모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녀는 부모의 말을 믿고 신뢰합니다.
※ 유기성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하셨습니다. 유 목사님의 아버님도 목사님이신데, 자신에게 목사가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을 목사로 드리겠다고 서원까지 하셨습니다. 그런 아버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버님이 목회하시면서 얼마나 고생하셨는지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회가 너무 힘들어서 유 목사님의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버님이 목사를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은 고생의 길을 걸어가도 자녀만큼은 고생의 길을 걸어가지 말라고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고생의 길을 걸어가시면서 계속해서 아들인 자신에게도 그 길을 걸어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아버님을 보면서 이런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이게 진짜구나. 그러니까 아버님께서 저렇게 나로 하여금 이 길을 걸어가라고 하시는구나. 그렇다면 나도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맞겠지.’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천국소망을 가지고 살면, 우리가 정말 천국을 최고의 복으로 여기며 기뻐하면, 우리 자녀들도 우리의 뒤를 따라옵니다. ‘천국이 있는지 잘 모르지만, 믿어지지도 않지만, 부모님이 저렇게 예수님 믿는 것을 기뻐하고 천국을 소망하는 것을 보면 이게 진짜구나. 고난 중에서 천국을 바라보며 기뻐하시는 것을 보면 나도 이 길을 가는 게 맞는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천국의 복은 나만 받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족과 나의 후손들도 함께 받는 것입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행16:31)
벧엘로 돌아갑시다. 예배의 자리로, 말씀의 자리로, 사명의 자리로 돌아갑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립니다. 둘째 아들처럼 살았다 할지라도 벧엘로 돌아가면 ‘나의 사랑하는 아들, 나의 사랑의 딸’이라고 불러주십니다. 이 음성을 들을 때 모든 걱정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참된 평안을 누립니다.
벧엘로 돌아가면 생육하고 번성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인생을 삽니다. 나로 인하여 죽은 영혼들이 살아가고 회복되는 감격을 누립니다. 이보다 더 보람 있고 아름답고 존귀한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벧엘로 돌아가면 천국의 복을 누립니다. 밭에 감추인 보배를 발견한 사람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도 아깝지 않은 천국의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죽어서만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삽니다. 나만 아니라 온 가족과 후손까지도 천국의 복을 누립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 가지 복은 지금 누릴 수 있습니다. 현재의 문제와 우리가 처한 상황과 상관이 없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만난 그 어떤 문제보다, 우리가 처한 그 어떤 상황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이 시간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세상이 아니라 말씀을 붙잡고 있다면, 생명 다하는 날까지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결단하면, 우리는 벧엘에 있는 것입니다. 2023년, 벧엘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