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퓨전요리가 널리 퍼진만큼
모중국집에서는 아니, 차이나 레스토랑에서는
자장과 짬봉이 합체? 해서 나오더군요.
이른바, 짬자면이라고 식단명단에 당당히 자리매김을 했던데...
전 개인적으로 자장도 아닌 짬뽕도 아닌
우동을 좋아합니다. ^^
--------------------- [원본 메세지] ---------------------
중국집에 가면 나는 묘한 딜레마 하나에 여지없이 빠지고 만다. 이른바
'짜짬딜레마'다.
앞에 앉은 친구 녀석은 짬뽕을 시키고 나는 자장면을 시켰는데
음식이 나오는 순간 짬뽕이 더 맛있어 보이는 것이다. 내가 짬뽕이고 녀석이
짜장일 때는 얄궂게도 짜장면이 맛있어 보인다.
짬뽕이든 짜장이든 가격도
겸손(?)하지만 양 또한 무척이나 겸손해서 녀석의 그릇에 무자비한 젓가락을 휘둘러 몇 안되는 면발을
실례해오는 것이 과히 점잖은 일은 아니기에 녀석의 앞에 놓은
그릇에 속입맛을 다시면서 맛없는 내 것을 먹어야하기 일쑤다.
나는 중국사람들의 위대함이랄까, 무서움이랄까 그런 걸 들라면 이 중국집의 생명력을 생각해낸다.
그랜드호텔 마천루에서 중흥동 부품골목 뒷동네에 이르기까지
불그레한 간판을 매단 중국음식점이 한두 개쯤 없는 곳이 없잖은가.
그리고 그것이 어디에 있든 우리가 길들여져 있는 어떤 맛을 실망시키지
않고
제공해준다는 점과 음식값이 비교적 만만하다는 점이 우리를 쉽게 그
붉은 간판 아래로 끌어들인다.
어쨌거나 앞자리에 앉은 녀석이 짬뽕을 맛있게 먹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
노라면 참으로 군침이 돈다.
새우 구운 색깔과 비슷한 불그스름한 국물은 더없이 얼큰해보이고
그 국물 속에 쫄깃쫄깃한 자태로 다소곳이 내려앉은 면발과 면발 사이로
드러난 빨간무와 갖은 야채들의 군무는 금지된 맛의 천국처럼 아스라하다.
뿐만인가. 송송송 썰어져 국물 속에 헤엄치고 있는 오
징어다리나 문어 따위의 해물들은 또 얼마나 씹고싶은 마음을 자극해대는가.
중국 음식 특유의 고추기름 같은 것이 둥둥둥 떠있는 것도 '맛'져 보이고 그
붉은 수면 위에서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김과 강렬히 풍기는 후끈한 냄새를
맡노라면 가히 식도락의 비경을 말할 만 하다. 녀석, 저런 짬뽕을 선택
하다니 정말 복도 많아. 괴상한 질투심이 치민다. 정말 웃기는 짬뽕같은 마음이다.
녀석이 짜장을 시켰을 땐 뒤바뀐다. 우선 저 짙은 고동색의 짜장액에서 풍겨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도발이 사람을 못살게 군다.
8살 때인가 처음
짜장면을 먹었을 때가 기억난다.
어머니가, 목포에 나온 기념으로(육지를 밟은 기념으로...섬사람들의 애환이 무척 심하던 때였다.)
들른 어느 중국집에서 이 별난 음식을 사주셨는데 나는 우선 검쭉한 색깔이 찜찜하고
맛 또한 어찌나 닝닝하고 물컹물컹한지 그릇을 반도 못비웠다.
하지만 그 이후
짜장면은 내 몸 내 살의 절반? 아니 확 에누리해서 10%는 족히 이뤄왔을
넘버원의 식사메뉴로 자리잡았다. 배가 고프기 시작하면 머릿 속에 그 눅눅하고
퀴퀴하면서도 정겨운 기억이 면발처럼 풀려나온다.
시원하고 후련한 맛은 분명코 아니되 언제나 내 위장의 희망사항,
혹은 목구멍의 요구조항을 꿰뚫고 있는 듯한 이 검은 액체의
비밀이 뭔지 아는 바는 없다. 오로지 나의 식식食食거리는 본능이
짜장을 갈구하는 것이다.
이 검은 설렘 속에 버무려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면발들의 미색은 가히
이 음식의 모양새를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절묘한 자태를 연출한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이 걸쭉한 국물을 면발과 섞는 동안 내 마음 속에는
이미 위액과 침샘이 충분히 그 뚜껑을 열고 이 귀한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한다.
저 앞에 앉은 녀석이 풍미 味의 미사일을 사방으로 쏴대며 짜장을 척척 버무리고 있는 꼬락서니는
왜 이리 봐주기 어려운가. 입술 주변이 검은 액체로 너절해질 정도까지
'중국'을 지지리도 핥는다고 타박이
라도 해볼까 하지만 그러면 짬뽕은 국산이냐고 대뜸 반격할 테니 괜히 논리가
궁색해질 것임에 틀림없다. 하릴 없이 내 벌건 짬봉국물을 들여다 보며
질투와 슬픔을 삼킨다.
녀석의 젓가락질은 위풍당당 도도찬란한데 둥둥 떠다
니는 오징어다리를 건지고 있는 나는 왜 이리 초라한가. 이런 불공평이 어딨는가.
정말 웃기는 짜장면이다.
이런 음식시샘을 좀 줄여볼까 하여 처음에 시키기 전에 엄청난 고민을 하게 된다.
짬뽕이냐? 짜장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러나 그런 고민 끝에 난
산난산한 결정의
결과도 후회스럽긴 마찬가지다. 짜장 하고보면 필시 맛있는
건 짬뽕이고 짬을 고르고 보면 반대다. 짜짬 두 그릇을 한꺼번에 먹기엔 배가
부르고 녀석과 반반씩 나눠먹기엔 둘 다 입만 버릴 것 같은 아쉬움이 있
다.
에라 모르겠다. 둘다 똑같은 걸 시키면 그런 후회가 덜 하겠지? 그러나
시켜놓고 보면 우리 자리 옆자리 혹은 건너편 자리의 짜장이나 짬뽕이
더한 유혹으로 우릴 비웃고 있지 않은가.
짜짬의 딜레마는 어찌 보면 우리 살이[生]의 모양새와 닮아있기도 하다.
어느 교과서엔가 보았던 '가지 않은 길'의 아쉬움을 표현한 시처럼
스스로가 가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과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이 공존하는 마음의
허황한 지향같은 것이 이 딜레마 속에는 고스란히 숨어있다.
사실은 이미 선택한 것이 당시에도 최선이었고 다시 살아도 그런 선택
이상이 있을 수 없을 지 모르는데도
이 길이 아니었으면 뭔가 나았을 것이라는 엉터리 확신으로
뒤돌아보게 되는 마음의 지도를 이 중국집의 고민은 리얼하게 보여준다.
어떤 날은 더 좋은 학교를 나오지 못해서 슬프고 어떤 날은 월급 더
많이 주고 더 폼나는 직장과 직업을 갖지 못해 슬프고
어떤 날은 내 재능이 요것 밖에 아니어서 답답하고
어떤 날은 차인표 만큼 내 얼굴이 안받쳐 줘서 신경질나고
어떤 날은 내 키가 허재보다 작아서 약오른다.
어떤 날은 내가 의사가 아니어서 배아프고
어떤 날은 내가 이건희씨 아들 재용이가 못되서 씁쓸하다.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이 유치한 비교와 자기 모멸이
마음 속 고질병처럼 숨어있다. 물론 이런 터무니없는 자학이 오히려 존재를 긴장케하고
분발케하여 더욱 치열하게 살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이 온갖
어리석음들의 견본을, 짜짬딜레마라는 한겹 마음에서 우리는
보고도 남는다.
내 그릇에 담긴 것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은 바로 살이의 큰 지혜일지 모른다.
내 그릇의 것이 순간적으로 맛없어 보인다고 휘휘 못된 마음의
젓가락질을 해대기 시작하면 내 식사만 망칠 뿐이다.
단무지 하나를 천천히 베물면서 생각해보라. 아니 양파껍질 위에 식초를
휘휘 뿌리면서 한번 생각해보라. 내 접시에 든 것이 진짜 맛있는 거구.
저 녀석은 오히려 나를 부러워하고 있는 거야.
자신있게 젓가락을 들자구. 군침을 삼키면서
자! 한 젓가락 신나게 말아올려봐?
깨달음은 짬뽕 속에도 가득하다.
원산우회 회원 여러분들~~!!
내일 점식식사는 짜장으로 해 볼실래요? 짬뽕으로 해 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