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셔우드 홀 가족
양화진 홀 가족 묘에는 홀(Hall)가(家)의 삼대(三代) 묘역이 있다. 제임스 홀, 로제타 홀, 셔우드 홀을 비롯하여 1991년 10월 5일 대한결핵협회 장(葬)으로 안장된 메리안 B. 홀도 있다. 제1대 윌리암 제임스 홀(忽)은 최초로 평양의료선교사로서 광성학교를 설립했다. 부인 로제타 홀(許乙)은 맹인 점자교육의 선구자로, 평양에 최초로 병원을 건립했다. 제2대 셔우드 홀은 한국최초 결핵요양원 설립자이며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했다. 그 부인 메리안 버텀리 홀도 결핵요양원과 크리스마스 실의 선구자이다. 미국에서 유복자(遺腹子)로 출생하여 어머니(로제타) 품에 안겨 한국에 왔지만 3살의 나이로 양화진에 묻힌 에디스 마가렛과, 또 한 사람은 셔우드 홀의 쌍둥이 중 프랭크가 하루를 살지 못하고 이 땅에 묻히므로, 여섯 식구가 묘역을 형성하고 있다.
로제타 홀(제임스 홀 부인), 셔우드 홀, 에디스 마가렛
“하나님, 한국에서 남은 아들과 빨리 죽지 않고 오래 오래 사역할 수 있게 해 주세요” 1. 한국에서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끝까지 한국에 남아서 남편의 뜻을 이어 받아 의료선교에 평생을 바쳤던 순교자의 아내 로제타 홀 여사의 고백입니다. 2. 그녀는 한국에서 낳은 아들까지 의사로 키워서 한국의 결핵퇴치 사업에 대대로 헌신했습니다. 자그마치 43년을 이 땅을 위해 봉사를 하신 그 사랑에 감사할 뿐입니다. ... 3. 그녀의 러브 스토리를 알게 되면 더욱 감동적입니다. 4. 로제타 선교사는 조선에 여자 의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정보를 듣고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 위하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병원실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는 로제타의 성품과 성실성에 반해 한평생 함께 사역하기를 원하여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5. 그러나 로제타는 그 프로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윌리암은 이미 중국 선교사로 가기로 내정되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웬 말이냐구요? 로제타도 윌리암 홀을 좋아하고 있었지만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선에 오기 위하여 윌리암의 프로포즈를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6. 결국 그녀는 1890년 조선 땅에 처녀의 몸으로 혼자 들어오게 됩니다. 7. 윌리암은 로제타가 조선을 향해 떠난 후 결국 선교부에 찾아가 선교지 변경을 간곡하게 요청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윌리암은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1891년 12월 한국 땅에 오게 됩니다. 8.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1892년 6월 서울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결혼식이 조선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되었습니다. 로제타는 윌리엄 제임스 홀과 결혼함으로 그때로부터 홀 부인으로 칭함 받게 됩니다. 9. 윌리엄 홀은 청일전쟁이 조선 땅에서 벌어지자 전쟁터가 된 평양에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다가 과로로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 홀의 손을 붙잡고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임신 중인 새 생명을 뒤로 하고 숨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조선에 온지 2년 그때 그의 나이 34세였습니다. 선교에 헌신하여 조선 땅에 온지 2년만에 이국 땅에서 순교한 것입니다. 로제타 홀은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내게 말하려 한 것은 그가 평양으로 간 것을 후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 일을 하였고 하나님이 나에게 갚으실 것”이라는 말을 하더라고 회고했습니다. 10.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가 죽자 제임스 홀의 가족들은 순교자의 아들 셔우드 홀과 며느리 로제타를 애타게 보기 원했습니다. 로제타는 만삭이 되자 출산을 위해 어린 아들 셔우드 홀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거기서 남편 제임스 홀이 자라고 섬겼던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11. 남편 제임스 홀의 모습을 닮은 아들 셔우드를 본 교우들은 눈물로 그들을 반겼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로제타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암 홀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 12. 그래서 1897년, 로제타는 아들과 미국에서 낳은 딸을 데리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 안타까운 일이 또 발생합니다. 그녀가 조선에 오고 몇 해가 지난 후 딸이 또 조선의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13. 이때 로제타는 딸을 남편의 묘 옆에 묻었습니다. 조선에 복음을 전하고자 헌신한 로제타에게 남편과 딸의 연이은 죽음이라는 시련은 너무 가혹했습니다. 그런데 두번의 고통에도 로제타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남은 내 아들 셔우드와 조선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 14. 결국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고, 그들은 한국에서 그 후 오랫동안 사역했습니다. 15. 평양에 최초의 병원 설립, 맹인 농아학교 설립, 점자도입과 한글용 점자개발, 어린이 병동설립, 여자의학교 설립(현 고려대 의대의 전신), 동대문병원(현 이대부속병원), 인천 기독교병원, 인천간호보건대학 등을 설립합니다. 16. 그녀는 활발히 사역을 섬기다가 43년간의 한국 선교사역을 마감하고 1935년 귀국하였습니다. 17. 그 후 로제타 홀은 1951년 미국에서 소천했습니다. 그녀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그 재를 서울의 남편과 딸 곁에 묻었습니다. 18. 양화진에는 지금도 로제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와 조선을 향한 열정이 숨쉬고 있습니다. "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19. 이들의 러브 스토리가 한국 교회사가 되었고 이들 가족의 사랑과 헌신 위에 한국교회는 아름답게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20. 우리가 받은 복음은 이러한 깊은 헌신을 바탕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욕과 탐심으로 우리가 받은 복음의 영광 앞에 자꾸 초라해져가는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 이상갑목사.
윌리엄 제임스 홀: 아내와 함께 의료 활동을 했다. 1894년 청일전쟁 와중에 평양 전투로 인해 청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치료하다가 티푸스에 걸려 사망
로제타 셔우드 홀 - 의료활동.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녀관(保救女館)에서 활동한 여의사. 기록상으로 1891년에 조선에서 두번째로 결혼한 외국인 부부이다. 첫번째는 언더우드 부부. 외간 남자와 만날 수 없는 조선여성들을 치료하고 박에스더를 추천하여 유학 보냈으며, 맹인 교육을 위해 최초로 한글 점자를 고안했고 맹인학교를 설립했으며 한국 장애인 교육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셔우드 홀 - 의료활동. 위의 홀 부부의 아들. 국내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 도입
셔우드 홀(Hall, Sherwood, 1893-1991)
셔우드 홀(Hall, Sherwood, 1893-1991)은 1893년 11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1900년 6월 평양외국인학교 첫 입학생으로 베어드(Baird) 등 4명과 1908년까지 수학했다. 1911년 미국 오하이오 주 마운트 허몬(Mount Hermon)학교를 거쳐, 1919년 마운트 유니온대학을 졸업하고 1922년 메리안과 결혼했다. 1923년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24년 뉴욕 롱아일랜드의 홀츠빌 서퍼크 결핵요양소에서 결핵을 전공했다. 1925년 8월 미국 감리회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어 1926년 4월 19일 부인 메리안 버텀리(Marian Bottomley)와 함께 내한하였다. 1926년 7월 해주구세병원(Norton Memorial Hospital) 원장으로 부임하여, 의창(懿昌)학교 교장직도 겸임하였다. 운산금광(동양연합광업회사) 담당의사로 환자들을 진료하기도 했다. 1928년 10월 27일 해주 왕신리에 폐결핵 퇴치를 위하여 한국 최초로 ‘해주구세요양원’을 설립했다. 결핵요양원의 필요성에 대하여 셔우드는 “결핵은 다른 나라에서는 20명에 한사람 꼴인데 한국에서는 5사람 중 한사람 비율로 희생자가 난다. 일단 병균이 침투하면 한국인은 병을 피할 수 있는 희망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결핵은 불치의 병으로 <부끄러운 병>이며, 악귀의 기분을 상하게 한 사람이 운명적으로 받는 벌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요양원은 치료뿐만 아니라 계몽과 교육 목적에서도 꼭 필요하다.”고 했다. 거의 불치병으로 인식하는 결핵 환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치료에 확신을 심어주어 효과가 있다. 그는 “시범농장을 통하여 환자들은 지루한 회복기 동안에 육체적으로 덜 힘든, 현대적 영농방법을 배울 수 있으며, 치료에 도움이 되고, 특히 농민 환자는 퇴원 후 고향으로 돌아가 현대식 농사법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 했다. 시범농장 운영을 통하여 환자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선하고 영양가 높은 식료품을 제공하고, 퇴원 후 경제적 자립 능력 배양과 영농기술 보급 등의 효과가 있었다.
셔우드 홀은 결핵치료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크리스마스-실(Seal)” 운동을 계획하고 1932년 12월 3일 남대문을 그린 ‘실’을 한국 최초로 발행했다. 남대문은 한국의 상징이며 결핵을 방어하는 성루(城樓)로 나타낸 것이다. 원래 첫 도안(圖案)은 거북선에 대포를 배치하여 한국의 적(敵)인 결핵을 향해 발포하는 그림으로 제작하였으나. 거북선에 패한 일본의 반발이 문제시되어 변경되었다. 그 후 크리스마스-실 운동은 성공을 거두며 계속 발행되었다. 그러나 1940년, 서기로 표기한 연호를 일본 연호로 바꾸라는 압력 때문에 실 발행 9년차 의미로 로 수정되기도 했다. 이것이 셔우드에 의한 마지막 실 발행이었다. 1938년 5월 1일부터 효과적 결핵 예방운동 차원에서 “療養村”이라는 월간지도 발행했다. 크리스마스-실 운동은 시편 번역자 피터스 부부도 동참했다. 1939년 피터스 부인은 부회장으로 피터스 목사는 사업부장을 맡았다. 1940년 8월에는 ‘화진포’ 그의 별장에서 영국 신부(캐럴)를 만나고 동해안 지역 사진을 촬영했다는 협의로 간첩 누명을 쓰고 일제의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3월 또는 천$ 벌금의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을 강제로 떠나야 했다. 1941년 11월 한국을 떠나 인도의 변방 마르다(Marda) 연합결핵요양원에서 결핵 퇴치사업을 계속하다가 1963년 은퇴하였다. 캐나다 밴쿠버로 돌아가 노년을 보내다가 1991년 4월 5일 98세로 별세했다. 4월 10일 리치먼드 사우스 암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1991년 4월 17일 대한결핵협회 장(葬)으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결핵협회는 1993년 11월 10일 셔우드 홀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양화진에 공적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캐나다인 셔우드 홀은 1893년 11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자라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결핵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결핵 퇴치에 헌신할 것을 결심, 토론토의대 졸업 후 역시 의사가 된 메리안 버텀리와 결혼하여 1926년 함께 감리교 의료선교사로 해주 구세병원에 부임했으며 한국 최초로 1928년에 근대적 결핵요양원을 설립하고, 1932년에는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다. 194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 될 때 까지 결핵환자 치료와 실 발행을 계속했으며, 한편으로는 모범농장을 일구어 새 영농기술을 보급하고 의창학교장으로서 교육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2대에 걸쳐 한국인에게 봉사한 공을 찬양해 1984년 한국정부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서울시에서는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 대한결핵협회, 한국결핵사, 1998.2.28)
셔우드 홀 부인 메리안 B. 홀 (1896-1991)
메리안 버텀리 홀(Hall, Marian Bottomley)은 1896년 6월 21일 영국 엡워드(Epworth)에서 출생하여 1911년 캐나다로 이민하였다. 온타리오주 아덴 고등학교 4년제 과정을 3년에 마쳐 마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킹스턴학교(교사양성과정)를 이수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1917년 미국 루츠타운학교 교사로 전임하여 전교에서 가장 규율이 잘 잡힌 반으로 만들었다. 1918년 4월 유니온대학 재학 중 셔우드와 약혼했다. 1920년 9월 필라델피아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졸업 후 1922년 6월 21일 결혼하여 켈로그 결핵요양소(Kellogg Sanatorium)에서 함께 결핵 실무를 익혔다. 1925년 8월 15일 미국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미국을 출발했다. 메리안 부부는 런던을 경유하여 스웨즈 운하, 아테네, 봄베이, 콜롬보, 싱가폴, 홍콩 등 8개월의 긴 여행 끝에 1926년 4월 10일 일본의 코베에 도착하였으며, 1926년 4월 19일 내한하였다. 해주구세병원과 요양원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결핵 퇴치와 크리스마스실 발행에 앞장섰다. 1928년 5월 7일‘어머니와 어린이를 위한 복지 클럽’을 시작하였으며, 해주를 중심으로 의료 선교 활동을 통하여 절망에 빠져있던 환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해주요양원 설립 10주년 때 기고한 선교잡지(Korea Mission Field, 34-7,1938.7)에는 “요양원 설립 10주년을 맞는 오늘, 감회 깊게 시작 당시의 그 어려움들을 되돌아본다. 마치 신비한 힘으로 모든 게 이뤄진 것같이 느껴진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신‘꿈’이었고 그 꿈에 성실히 매달렸기에 하나님께서 이를 성취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우리가 어려울 때 하나님은 친구들을 통해 도와 주셨고, 우리의 온갖 난관은 극복되었다. 이제 이곳은 절망에 빠졌던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얻는 장소가 되었다.”-메리안 B. 홀- 1940년 홀 부부는 간첩 협의로 재판까지 받았다. 10월 25일 변론 기록에는“남자 의사들이 거절한 일도 만삭인 몸에 위험을 무릅쓰고 추운 겨울밤 환자를 보러나가 시골에 앓아 누어있는 청년의 생명을 구했다.”고 메리안을 칭찬했다. 1941년 일제의 강압으로 한국을 떠나 인도에서 결핵사업을 계속하였으며 1963년 은퇴하고 캐나다로 돌아갔다. 1991년 9월 19일 밴쿠버에서 95세로 별세하여 9월 25일 리치몬드 사우스 암교회에서 장례식이 집례되고,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결핵협회장(葬)으로 10월 5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국민일보 1991.10.7일자 참고)묘비에는 Marian Bottomley-Wife of Sherwood Hall 이라 쓰여 있다. 그리고 자녀들의 이름도 쓰여 있다.
[양화진에는 윌리엄 홀 부부, 윌리엄 홀의 아들인 셔우드 홀과 그의 부인, 윌리엄 홀의 딸 에디스 홀(3세에 이질로 사망), 윌리엄 홀의 손자인 프랭크 S. 홀(태어난 지 하루만에 사망) 등 모두 6명의 가족이 묻혀 있으며, 셔우드 홀 박사 공적비가 있다.
에디스 홀 - 위의 홀 부부의 딸로 윌리엄 홀의 유복자이다. 1895년에 태어나 3세에 사망했고, 부모 곁에 묻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