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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비샘 원문보기 글쓴이: 김주학
이영훈씨등이 올해 펴낸 <반일종족주의>가 10만권 이상 팔렸다고 한다. 조국 전 법무장관은 "이 책을 읽고 구역질이 났다"고 발언해서 이 책의 판매에 엄청난 도움을 줬다. <반일종족주의>의 연관 검색어의 70%가 <조국>이라고 한다. 조국 전 장관의 바람과는 달리 이 책의 성공에 큰 도움을 준셈이다. 이 책에 대하여 들리는 풍문만으로도 열이 받아서 읽을 수도 없고 또 이 책의 판매에 일조하고 싶지도 않아서 책을 사지 않았다. 그대신 우연히 팟캐스트 방송 <만인만색 역사공작단>에서 반일종족주의 비판이라는 내용으로 방송이 있어서 소개한다.
이영훈과 그의 스승인 안병직은 기계적 마르크시스트로 원래는 식민시대를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규정했던 NL계통의 좌파였으나, 전향하여 식민지 근대화론자가 된 것이다. 역사학계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은 충분히 반박했고 더 이상 논쟁거리가 아니고, 이영훈도 비슷한 내용의 책을 서너번 출판했지만 아무런 반향을 얻지 못했었는데 드디어 이번 <반일종족주의>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반일종족주의>의 서론에서 우리나라가 <거짓말의 나라>라고 하면서 위증죄, 무고죄, 사기죄가 미국의 100배가 넘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사법제도는 나라마다 다르므로 이런 통계로 단순 비교할 수 없다. 그런 식이면 독일의 그런 범죄지표는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살인률은 우리보다 엄청 높을 것인데 그러면 미국은 살인자들의 나라가 된다. 범죄통계로 어떤 나라를 판단할 수는 없는게 당연하지만, 이들은 이를 근거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짓말을 일상화하고 있다고 인종적인 편견에 근거한 발언을 하고있다. 그러나 이 발언은 간단한 삼단논법으로 무너진다. <한국인은 거짓말을 일상적으로 한다. 이영훈은 한국인이다. 그러므로 이영훈도 거짓말쟁이일껄!>이 되고만다. 자신은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특히 가장 큰 거짓말을 하는 집단이 역사학계라고 주장한다. 이덕일은 우리 역사학계를 친일이라고 주장하고. 이영훈은 반일이라고 주장하니 두 사람이 만나서 토론을 벌려야 할 것 같다.
"거짓말 문화는 물질주의의 심성에 있고 물질주의는 샤머니즘에 기반하고 있다"(아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는 무슨 소린지 모를 논리에 맞지않는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샤머니즘에 빠져있는 종족은 다른 종족에 적대적이라면서 우리가 <반일종족주의>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민족은 근대적인 민족주의의 나라가 아니라 이성적인 행동을 못하는 종족주의
< 즉:야만주의>의 나라 라고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조정래 선생의 소설 <아리랑>에서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할 때 이를 반대하는 조선인을 대낮에 학살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다 거짓말이라면서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다 <반일종족주의>에 빠져있다고 한다. 그러나 소설을 사실 그대로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문학적 성취를 위한 허구일 뿐이다. 현재 우리 역사학계에서 토지조사사업때 일본 경찰이 반항하는 조선인을 즉결처분했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새로운 제도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손해를 본 사람들이 있었고, 이에 항의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폭력적인 대응이 있었다고 서술한다고 한다. 즉결처분이 없다고 폭력적인 상황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일종족주의>는 조선이 일제에 합병된 것을 유럽이 EU로 통합된거와 같은 것으로 묘사하면서 식민지에 대한 일제의 수탈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조선의 경제는 일본의 경제상황에 맞춰 그때 그때 이용되었는데 그것을 아니라고 하니 황당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의 자본주의가 최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 식민지를 이용한 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1918년 일본에서 식량폭동이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조선에 산미증산계획을 벌이고 많은 양의 쌀을 일본으로 가져갔고, 농민들이 먹을 쌀마저 가져간 수탈 행위를 현대국가의 정상적인 수출처럼 묘사하고 있다.
반일종족주의의 심성을 자극하는 주술적인 토템 역활을 하는 것에 백두산이 있단다. 백두산이 우리 민족에게 민족의 영산이 된 시기는 근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북한의 김정은 일족이 특히 백두산을 신성시 한다면서 남쪽의 진보 인사들도 거기에 넘어가서 백두산을 찬양한다는 것이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백두산 모임을 비판하기 위해 뜬금없이 들어간 듯하다. 즉 "백두산을 민족의 영산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빨갱이닷!!"
또 하나의 토템이 독도인데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는 독도가 있는지 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면서 근래에 들어서서 반일종족주의에 빠져 독도를 우리 것이라고 우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고지도만 봐도 독도가 조선영토로 되어있는 것이 엄청 많다고 한다. 이영훈은 자신이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인 것저럼 일본인을 대변해서 독도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반일종족주의>의 저자들은 일제시대 때 강제동원이 없었다면서 우리나라 학계가 날조한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기를 "한국의 연구자들은 동원된 조선인들이 대부분 일본관원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고, 다시 말해 강제동원 되었고 이를 노예노동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하면서 "밤에 잠자고 있는데, 논에서 일하고 있는데 순사가 와서 일본으로 끌고 가서 죽도록 일만 시키고 짐승처럼 학대받다 돈 한푼 못 받고 돌아왔다고 한국의 연구자들이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우리나라의 어떤 연구자도 강제동원을 이렇게 설명하는 사람은 없다. 문장 하나하나가 다 틀린 내용이다.
강제동원의 핵심개념은 일본 헌병이 집집마다 들이닫쳐 막 끌고 갔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군수물자의 보급과 인력을 동원하기 위해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했다는 것이고, 1938년에 제정된 <국가총동원법>으로 법과 제도에 의한 강제동원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강제>라는 말은 일본순사가 집집마다 사람을 끌고 갔다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의 의사에 반해서 법과 제도로 끌고갔다는 뜻이다. 물론 자발적으로 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까지도 일제가 전쟁에 필요한 직종에 동원한 것 자체가 강제동원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박하기도 한다. "<국가총동원법>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강제동원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물론 일본인도 강제동원이 되었다. 그렇다고 강제동원이 아닌 것이 아니다. 일제가 일본인과 조선인을 전쟁을 위해 폭력적으로 강제동원한 것이 맞다. 국제기구에서는 이미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강제동원한 것을 불법으로 보고있다.
그리고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실제로 순사가 와서 끌고갔다는 내용이 있다. 아무리 법과 제도에 의한 강제동원이래도 전쟁 막바지에 군부가 할당인원을 채우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이 사용하기도 한 것이다. 일제의 서류에는 물론 이런 폭력적인 동원이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일제의 통계서류만 신뢰하고 피해자의 증언은 무시하고 있다.
이책은 <강제징용>이라는 말도 비판한다. 노무동원을 강제로 보이기 위해 중언부언 하면서 징용이라는 말을 <강제징용>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계에서 <강제징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본 극우세력이 징용을 합법적인 것으로 보이기 위해 <강제징용>이라는 용어를 먼저 사용했다는 것이다. <징용>이라는 말 자체가 강제라는 뜻이 있으므로 <강제동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맞다. 강제동원이라는 큰 범주 안에 인력동원과 물적동원이 있고, 인력동원 밑에 노무동원이 있고, 노무동원 아래 모집, 징용, 관알선이 있었던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
<반일종족주의>의 저자들은 한국인 연구자들이 징용에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들이 노예노동에 종사했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게 징용에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과의 민족적 임금 차별은 없었고 잘 먹고 잘 살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 노동자와 임금차이가 없다고 해도 강제동원의 불법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은 일본노동자의 임금의 반 밖에 받지 못했다. 그리고 산업재해율이 일본인 보다 높게 나타난다. 이를 <반일종족주의>는 임금의 차이는 기술 숙련의 차이이고 산업재해율이 높은 이유는 조선노동자들이 젊고 건장해서 위험한 작업을 맡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기술숙련도가 높은 일본 노동자들은 숙련기술이 필요한 위험한 작업에 투입도 되지 않으면서 임금은 훨씬 더 많이 받았다는 뜻이 된다. 이게 노예노동이 아니면 뭐가 노예노동인가?
<반일종족주의>는 강제동원이 이상적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산업현장 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도망가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다. 임금차별도 없고 노동착취도 없는 노동현장에서 왜 도망가겠는가? 이것을 마치 정상적인 직업변경인 것 처럼 묘사하고, 강제동원된 조선 노동자들이 웃는 사진을 보여주면서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행복했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반일종족주의>가 강제동원의 실상을 은폐하려는 그들 나름의 특유의 본말전도 방식이다. 그들은 사소한 것이 틀렸으므로 강제동원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항상 그런 식의 주장을 한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 "홀로코스트를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재판하는 것이다."
먼저 이렇게 정의하고 시작하고 싶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군이 관여한 전쟁범죄이다. 일본의 국가권력이 식민지 여성을 전쟁수행을 위한 도구로 이용한 용서할 수 없는 국가폭력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위안부에 대한 인식은 자본주의의 계약관계에 대한 맹신, 여성인권에 대한 철저한 무지, 성 산업에 대한 그들만의 환상이 녹아있다.
이영훈은 <반일종족주의> 위안부를 다루는 내용의 첫머리에서 "1991년 위안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라고 서술한다. 악의적인 서술이다. 위안부 문제는 1930년대 일어난 것이고, 1991년에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이 종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최초로 증언을 했다. 1991년에 위안부에 대한 문제제기가 일어난 것이다. 이영훈은 1991년까지 위안부 문제가 없었다고 말한다.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어떤 사실을 모르면 사실이 없었던 것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 사실을 들어내서 문제를 만드냐는 식이다. 위안부 할머니들 조차도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는데 특정한 의도를 가진 단체가 세뇌를 시켰다는 것이다. 이영훈 등은 1991년 전에도 위안부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문제삼지 않았지만 <반일종족주의> 의식이 성숙된 1991년에 와서야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반일종족주의>가 성숙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야만이 성숙한다는 것인가. 아마도 이승만, 빅정희 독재정권에 이어 전두환 군부독재가 1987년에 끝나고 민주주의가 성숙하던 시기를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런 뜻없이 쓴 것이라고 본다. 피해자 증언이 1981년에 있었다면 1981년이 반일종족주의가 성숙해진 시기였다고 했을 것이다.) 피해자가 가만 있으면 아무일도 안 일어날텐데 괜히 이야기해서 문제를 만들었다는 것은 성폭력 문제 등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가해자의 시선이다.
이영훈의 위안부를 보는 핵심 시각은 위안부에서 일본군의 존재를 지우려는 것이다. 일제시기의 문제가 아닌 한국사회 보편적 문제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기생제도를 끌어와서 마치 기생이 군을 위안하기 위한 군위안부라고 강변하고 있다. 또 그것을 일본의 공창제도와 연결시키고, 해방후에 성매매 사업과 연결시키면서 국군위안부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조선의 기생제도가 일제시기의 공창제도가 되었고, 공창이 바로 종군위안부이고, 이것이 해방후의 민간인 위안부, 국군위안부, 미군위안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군위안부가 일제시기의 특수한 제도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보편적인 제도라고 주장한다. 국군위안부는 보편적인 제도가 아니라 일제의 종군위안부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악습일 뿐인데, 마치 일반적인 제도인 것 처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참을 수 없을만큼 악랄한 것은 이영훈이 종군위안부와 국군위안부의 임금을 비교하면서 종군위안부가 훨씬 생활조건이 더 좋았다는 식으로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또 종군위안부의 원인을 일제가 아닌 당시 조선의 가부장제도로 돌리고 있다. 가부장제를 탈출하고 싶은 어린 소녀들이 가출하여 도시에 모여 들었다가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하여 유곽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매춘업에 종사하고 있는 조선인 매춘업자들이 전쟁이 나자 더 영업이 잘되는 군인들이 있는 중국등지로 옮긴 것이 위안부란다. 부족한 매춘여성들을 공급하기 위해 조선인 매춘업자들이 인신매매와 납치등을 하여 위안부를 공급했다고 한다. 물론 공창이 종군위안부로 지정된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피해자를 구분해서는 안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있었던 일본군의 개입을 없애고 마치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영업활동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영훈은 종군위안부는 공창제 하의 창기보다 고위험, 고노동, 고수익 직업이라고 한다. 이영훈은 종군위안부가 미국의 고급 콜걸산업과 동일시한다. 강제연행이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거짓으로 돈 벌수 있다고 속이고, 간호사가 된다고 속이는 행위 자체도 일본군의 강제행위와 마찬가지이다.
<반일종족주의>의 저자들은 위안부 문제로 한일 관계가 파탄나면 한미일 삼각동맹이 깨진다고 뜬금없이 걱정한다.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한미일 삼각동맹을 깨고 북한, 중국 한국의 동맹을 맺기위한 좌파들의 속셈이란다.
이들은 위안부의 규모를 20만명이라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고 자신이 계산한 바로는 3600명 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영훈의 주장이 맞는다고 해도 이영훈은 교대율을 계산하지 않아 규모가 훨씬 커질 수 있다. 최대 수만명까지도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종군위안부의 규모는 모른다는 것이 정답이다. 그 인원이 몇명이든 그 범죄사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위안부의 인원이 틀리다고 강제동원의 범죄사실이 없어지지 않는다.
<반일종족주의>의 저자들이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객관적이지 않고 건조하지 않다. 그들은 부글부글 끓고 있다. 그들은 공정한 척 하지만 항상 가해자인 일제를 변호하는 변호사의 입장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틀린 것은 아니다. 쇠말뚝 이야기나 국군 위안부 이야기는 우리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소한 부분이 틀렸다고 해서 일제 군국주의의 범죄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