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늘 새롭게 탄생하십니다!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함께 하시길 빕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밤,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저희 수도자들도 이토록 외진 시골에서, 저희끼리만 지내면, 세상 울적한 분위기일 텐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 가족 같은 동네 주민들, 먼길 마다하지 않고 와주신 피정객들과 함께 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토록 어렵고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또다시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돌아왔습니다. 이번 성탄 아기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극심한 고통과 깊은 상처 그 사이로 분명히 탄생하시리라 굳게 믿습니다.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며, 우리를 더 나은 길로 인도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만사형통할 때도 함께 하시지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 질 때도,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가 아무리 비참하다 해도, 오늘 우리가 아무리 큰 죄 속에서 산다 할지라도, 이런 우리를 어여삐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 안에 새롭게 탄생하십니다.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오늘 이 대축제를 만끽해야 하겠습니다.
한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은 너무나 소중하고 엄숙한 순간이어서, 그에 걸맞는 예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유능한 의료진이나, 그도 아니라면 탈 없는 출산에 도움을 줄 분들의 보살핌 아래 태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요, 인류의 구세주가 되실 예수님의 탄생 여건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출산에 도움이 될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무런 경험이 없는 요셉 성인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소와 말들이 이게 뭐지 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지극일 호의적이지 않은 출산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너무나 독특하고 이해되지 않는 육화강생의 방식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대체 무엇일까 고민해봅니다.
제가 자주 타고 다니는 모닝 승용차가 27만 킬로를 육박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달리고 있는데, 꼭 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저도 수도 생활 40년째로 폐차장 가기 직전 중고차인데도,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셔서 아직 잘 달리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참으로 우울하고 서글프기 마련입니다. 여기저기 시름시름 아프고, 고장 나고, 매일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우리네 삶 한가운데도 탄생하시고 길이 머물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연세 들었다고 우울해 할일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늘 새롭게 탄생하시며,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십니다.
지금 큰 고통 속에 계신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에 허덕이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어디 가서 하소연 할 곳 없어 답답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여러분들의 힘겨운 일상 그 한 가운데 매일 탄생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십니다. 여러분들이 흘리고 있는 눈물과 쓰라린 상처 그 사이에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그러니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겠습니다. 고통이 다가올 때면 즉시 탄생하신 구세주의 이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탄생하신 분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란 의미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이름 임마누엘, 이제와 항상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주님이란 의미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자기처럼 될 것을 믿지 않으면 구하러 내려가지 않는다>
복음: 요한 1,1-18
성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께서 내려오신 이유는 우리를 올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어둠에 속한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요한 1,12-13)
그렇다면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는 이들이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당신처럼 높여줄 분임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루마니아의 14세 소년 크리스티안 마리안 베키아노(Christian Marian Vecchiano)의 이 이야기는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생생한 예를 보여줍니다.
아주 좁은 우물 파이프에 세 살 아기가 버려진 우물에 빠졌습니다. 구조대가 도착하였지만, 아기를 구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우물 입구가 30cm로 어른은 들어가 아기를 데리고 올라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아기는 줄을 붙잡고 올라올 수도 없었습니다. 깊이가 15m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파이프를 깨면 아기 생명이 위험했습니다. 굴착기로 11시간 동안 팠지만, 15m 깊이까지 주위를 파며 내려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경찰들이 모여있는 이곳을 구경하러 온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자신이 다리를 묶고 거꾸로 내려가 아기를 잡고 올라오겠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어른들은 말렸지만, 그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그 어둡고 좁은 통로로 내려가 아기를 데리고 올라옵니다. 부모는 기뻤고 크리스티안도 행복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마을의 영웅이자 루마니아의 영웅이 되었고 현재 결혼하여 아기를 낳고 잘살고 있습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크리스티안은 이 일로 국가의 보조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내려오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동등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8).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땅의 어둠으로 사람이 되어 내려오셨다면 분명 다시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인간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면, 인간도 당신의 모습으로 회복시킬 수 있음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1-12)
그런데 누가 하느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받아들일까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만큼 자신도 올라갈 수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이 되고 하늘에 살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이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둠에만 갇혀있어야 하는 존재라면 하느님께서 왜 인간을 위해 이 어둠 속까지 내려와야 하셨을까요? 가톨릭 교리서(460항)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셨으니, 이는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이야기를 많이 봅니다.
또 난간에 걸린 아기를 목숨을 걸고 구한 영웅들도 많습니다. 이수현 씨는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남의 나라 땅에서 선로에 쓰러진 취객을 도우려다 숨지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믿었던 것은 하나뿐입니다.
‘나도 살 수 있고, 저들도 나처럼 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구함으로써 자신이 사는 곳에 살 자격을 얻기도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2018년에 한 불법 체류자가 5층 높이 난간에 매달려 있는 아기를 구하기 위해 벽을 타고 올라가 아기를 구했습니다. 대통령은 그를 프랑스에 살 자격이 있다고 하여 프랑스 시민으로 삼고 직장도 구해주었습니다. 우리도 낳을 수 있어야 살 자격도 얻습니다.
6살 워커라는 아이는 4살 자기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얼굴에 90바늘을 꿰매야 하는 상처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셰퍼드와 싸웠습니다. 이는 자신도 회복될 수 있고 여동생도 지켜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가족의 일원이 될 자격을 스스로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동의하여 예수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이것을 ‘착한 뜻’이라고 합니다. 아기가 무엇보다 엄마의 손을 잡지 않으면 살 수 없음을 아는 것처럼, 우리도 창조자 하느님 구원의 손을 잡지 않으면 살 수 없음을 아는 사람만이 하느님 자녀가 되어 영원히 살게 됩니다.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착한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1-18: 사람이 되신 말씀과 볼 수 있는 영광
생명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아주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바로 이분을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알아듣게 되었으며 참 주님으로 고백했다. 그분이야말로 생명을 가지신 분이며, 생명을 주시며,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으로 고백했다. 잠깐 밤 미사에서도 언급했지만, 부활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든 삶을 보기 시작했으며, 이 성탄도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그 참된 의미를 보기 때문에, 지금 탄생하신 그분은 힘없는 한 아기의 모습이 아니라, 진정 주님이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하느님이신 그 말씀이, 그 아들이 우리 인간의 모습을 취하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신 것도 바로 당신의 생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어 당신의 생명에 함께 하려 하심이다. 우리를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한 모습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한다. 그분은 바로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나를 구원해 주시는 그리스도 즉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큰 축일이기 때문에 참여하는 미사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며, 이제 우리가 말씀으로 변화되어 가야 한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마리아,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믿은 목동들의 모습을 본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다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타나시길 원하신다. 그래서 제1독서에서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이사 52,7)하는 말씀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며,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우리를 통해 계속해서 태어나시게 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가진 우리의 모습이 그분의 모습과 같이 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으며, 우리를 보는 이들이 그 안에 생명을 가진 자라고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때가 다 되었을 때, 당신 외아들을 통하여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당신 아들의 모습을 닮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다.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태어나게 하시는 사업을 즉 구원사업을 바로 우리 자신을 통해서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잉태하며, 낳아주기 위해서는 고통의 신비인 십자가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하면 어렵다. 자신의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체험이 바로 말씀을 낳아주는 마리아의 모습, 그리스도의 모습이 될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이겨보려는 끝없는 노력이다.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께 진정한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우심을 청하자. 이 용기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 되도록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삶이 이 성탄의 신비를 언제나 나타낼 수 있도록 기도하자.
레오 교황님의 말씀을 듣자.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품위를 인식하고, 이제 하느님의 본성을 함께 나누어 받게 된 자들로서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머리와 어떤 몸의 지체인지 생각하고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나라와 광명으로 옮겨졌음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세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마귀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여러분의 더러운 행실로써 그 성전에 거하시는 고귀한 손님을 멀리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피의 비싼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이 미사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봉헌하며,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로 사는 삶을 살도록 우리의 결심을 봉헌하자.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물은 번제물이 아니라 자선이라고 했다. 진정한 사랑의 삶이며, 사랑의 제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사의 생활이며, 말씀을 낳아주는 삶이며 성탄의 삶이다.
“여러분 가정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신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종종 희망이 없다면서 절망과 좌절에 빠진 사람들을 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함께하기보다 혼자 있으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인간은 희망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내일을 살아갈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져야 오늘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암 투병 중에 계신 분을 많이 만났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포기하고 절망에 빠지는 사람도 보았고, 오히려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키우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행복할까요? 끝까지 희망을 품었던 분이었습니다. 이런 분만이 또 실제로 건강도 찾으셨습니다. 지금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소한 일상 안에서 작은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희망이라고 별것 아닌 것으로 무시한다면, 점차 절망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느 젊은 아빠가 “우리 아이가 처음으로 저를 보며 ‘아빠’라고 했어요. 눈물 날 정도로 기뻤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빠’라는 말이 대단한 것일까요? 세계 신기록에 등록될 정도로 유일한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이처럼 작은 것에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냥 ‘없다’라고 단정지을 것이 아니라, 주위를 둘러봐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희망의 이유가 차고 넘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단순히 이 땅을 시찰하기 위해 오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힘없고 연약한 아기의 몸으로 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계시려고 새롭게 태어나신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아기를 보게 되면 거부감이 없어집니다. 얼굴만 봐도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기가 말을 하지 못해도, 아기가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지 않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기와 함께 할 미래를 떠올리면서 더 큰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약하고 힘없는 아기의 몸이지만, 그 자체로 커다란 희망이었습니다. 거부감 없이 당신을 받아들이라고, 당신과 함께하고 있음 그 자체로 기쁨과 행복을 간직하라고,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떠나 근본적인 행복을 향해 나아가라고 이 땅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었습니다.
희망의 시작은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풍날, 여행 날, 합격발표날, 소중한 손님의 방문 날 등…. 날짜를 하루하루 기다렸던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설레임에 더 기뻤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을 직접 만날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주님과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들이 희망으로 나아가는 걸음걸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그것은 젊을 때 결혼하여 살아온 늙은 배우자이다(탈무드).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우리가 소외된 이들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2천 년 전의 구유를
그저 역사 속의 한 사건이나
전설로만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우리 현실에도 마구간도 있고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거짓과 기만을 서슴지 않고 행사하며
권력을 무자비하게 행사하는 권력자들도 있고
자기만 생각하고 이기적이고
욕심에 가득 찬 탐욕스러운 이들도 있고
권력 앞에 진실이 가려지고 은폐되고
음모로 억울하게 감옥에 가고 죽음에 처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도
똑같이 존재하는 오늘입니다.
2천 년 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아기도 있어야 합니다.
그 아기가 ‘오늘’ 태어났습니다.
그 아기 때문에 절망스러운 ‘오늘’
우리는 웃으며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아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 아기가 이제 우리들 마음 안에서 다시 태어납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9,1-6
1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2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
수확할 때 기뻐하듯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
3 정녕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십니다.
4 땅을 흔들며 저벅거리는 군화도 피 속에 뒹군 군복도
모조리 화염에 싸여 불꽃의 먹이가 됩니다.
5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
6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공정과 정의로 그 왕국을 굳게 세우고 지켜 가리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토서 말씀입니다.2,11-14
사랑하는 그대여,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12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13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줍니다.
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14
1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2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3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4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5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6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7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8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10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11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1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13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