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식의 정치비사 | 대통령 이야기 노태우
그래도 신도시·인천공항·KTX는 盧 없으면 없었다
노태우는 어떤 인물이었나?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지만 친구 따라 대통령이 된 것은 아마 노태우(盧泰愚)가 유일한 사례 아닐까?
전두환(全斗煥)은 40년 가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그에게 자신이 맡았던 공직을 다섯 차례나 넘겨주었다. 그러나 혜택을 입은 2인자의 입장에서도 그 지위를 계속 유지해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 <뉴욕타임스> 일요판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한 특파원이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2인자의 장수 비결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았더니 그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주석궁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모든 영광을 윗분에 게!”라고 대답했다는 기사가 기억난다.이 점과 관련해 노태우도 1980년 가택연금하의 김종필(金鍾泌)을 찾아가서 1인자와 틈이 벌어지지 않는 비법을 물어보았고 그로부터 “같이 걸을 때조차 그림자를 밟지 않도록 한 걸음 물러나서 걷는 것”이라는 대답을 얻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런 충고 때문이었는지 노태우는 내무장관 시절 전두환이 부른다는 전갈을 받자 “내가 지금 감기가 몹시들었는데 대통령에게 옮기면 안 되니 다음으로 미루어 달라”고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전두환은 “노 장관이 최고다. 저렇게까지 나를 위하는구나” 하고 흐뭇해 했다는 것이다. 다음 수순은 기다림이다. 2인자가 실각하는 것은 대개 마음이 성급해서 자기 때를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내심의 면에서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곧잘 비교되던 노태우는 “만에 하나 내가 대통령이 되고 싶어하는 언동을 하고 다녔다면 대통령이 되기는커녕 어떤 비운을 겪었을게 틀림없었을 것”(조갑제, <노태우육성회고록>, 2007)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발톱을 숨기는 것이 2인자의 성공 요령이다. 본래 두 사람은 막역한 친구 사이였는데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뒤로는 군신 관계가 되었다. 거기다 전두환의 성격은 불 같았다. 그래서 받은 수모와 설움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런 편린은 가령 후계자로 낙점받기 직전인 1987년 5월 20일 시점에도 “어이, 노태우. 내가 뭐란다고 당신 한강에 나가 울었다며?” 하고 전두환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다는 일화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서운한 감정을 절대로 밖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전두환 앞에서는 항상 고분고분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뒤 태도가 바뀐다. 그는 자신의 등 뒤에서 ‘상왕’ 노릇을 하려던 전두환의 계획을 무산 시켰을 뿐 아니라 대선 후 야당과 국민이 요구한 5공 청문회의 바람에 실어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보냈다. 이후 그는 전두환과 정반대되는 탈권위주의·정치자유화·민주화 등의 문민적 정책들을 펼쳐 나갔고, 경제적으로도 5공 흑자의 기조가 되었던 긴축과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경제정책을 추진해나갔다. 또 전두환식 남북 대결 모드를 북방외교의 화해 모드로 돌려놓았다. 이처럼 매사에 전두환과 반대되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전두환의 그림자를 지워나갔던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
노태우와 전두환
변화의 조짐이 처음 보인 것은 13대 대선 직후였다.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러 전두환 부부가 찾아왔을 때 노태우를 대신해 부인 김옥숙(金玉淑)이 그 ‘속마음’을 표출했던 것이다.
남편이 2인자로 살아온 탓에 나이가 네 살이나 아래인 전두환의 아내 이순자(李順子)를 ‘성님’으로 모시고 살아왔던 김옥숙은 그날 선거과정의 어려움을 얘기하는 가운데
“민정당이 인기가 없어 정말 고생이 많았어요” 하는 식으로 슬쩍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도움을 받은 만큼 수모 또한 컸던 것일까?
그들의 ‘속마음’은 12월 20일 노태우의 당선을 축하하기 위해 부부 동반으로 모인 육사11기 모임 자리에서
“우리는 국민이 직접투표로 뽑아 준 대통령이어서 체육관 대통령 하고는 달라요”라는 김옥숙의 말을 통해 다시 한 번 표출되었다.
“5공 측 관계자 Q씨는 ‘노 후보 내외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전까지는 전 대통령 내외 귀에 들어갈까봐 입 밖에 함부로 꺼내지 못했지요.
그런데 당선되자마자 태도가 바뀐 것입니다.
이 여사는 청와대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전 대통령에게 이 얘기를 했다더군요.
나중에 이 여사는 그 얘기를 들은 당시의 심경에 대해‘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고 회고하더군요.
친구라기보다부하라고 생각될 정도의 인간관계를 유지해 오던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뀐 것을 실감할 만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라고 기억했다.”(오병상,<청와대 비서실4>,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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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이 12·12 및 5·18 선고공판을 받고 있다.노태우의 태도는 냉담했지만 전두환은 그래도 40년 친구를 믿었다고 한다. 자신이 도와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담사로 갈 때까지만 해도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노태우의 말을 믿었으나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답답한 나머지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느냐”는 전언을 보낼 때마다 되돌아온 답은 “조금 더 기다리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 고비” 라고 해서 국회 증언까지 나섰는데 그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원망은 훗날 12·12사건의 수사과정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들인데, 당시 전두환은 수사를 담당했던 검사에게 “김 부장검사, 동기생을 조심해. 주요 자리 맡기면 안 된다고” 하며 회한 섞인 충고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노태우가 변한 이유에 대해 “내가 땜장이(대구공고) 출신이고 노태우는 명문고(경북고) 출신인데도 항상 나보다 뒤처진 현실에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군 시절 나에게 계속 뒤처져 따라온 노씨가 대통령이 된 뒤 나에 대한 패배감을 보상받으려고 나를 냉대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전두환·노태우 수사비화’, <신동아>, 1997년 1월호)
전두환의 해석을 읽고 노태우의 생애를 다시 살펴보니 그가 처음부터 전두환을 따라다닌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적어도 육군 소령 때까지는 노태우 쪽이 전두환보다 앞서 있었다. 이를 입증해주는 것이 ‘북극성회’의 회장 자리다. 육사11기 동창모임인 ‘북극성회’ 회장에 노태우가 뽑힌 것은1962년이고, 전두환이 뽑힌 것은 1969년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군이나 육사 계통은 서열이 중시되는 조직이고 회장은 곧 그 모임의 리더다. 그러니까 북극성회의 회장이었던 노태우는 적어도 1962년까지는 전두환을 따라 다닐 입장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럼 노태우는 왜 그리고 언제부터 전두환의 2인자가 되었던 것일까?
노태우와 육사
일반적으로 노태우는 소극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사실 노태우는 군인 가다(型:타입)가 아닙니다”라고 증언한 육사 동기(李東熙)도 있다.(김준범, ‘노태우·전두환비교연구’, <월간중앙>,
1988년 8월호에서 재인용)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뜻에서 6공 시대 그의 별명은 ‘물태우’였다.
그의 리더십을 다룬 학자들은 ‘대세순응적’(김호진,
<대통령과 리더십>, 2006)이니 ‘상황중심적’(정윤재,
<정치 리더십과 한국민주주의>,
2003)이니 하는 용어로 그를 정의한다. 분명 그런 면도 있었다.
하지만 12·12 숙군 쿠데타와 같이 결정적인 때는 과감히 뛰어들기도 했다. 그런 흔적이 그의 생애 여러 대목에서 발견되는데,
그런 순간의 하나가 1963년에도 있었다.
그 해 5·16 주역들이 엎치락뒤치락 주도권 싸움을 벌이자 노태우는
동창회장으로서 총대를 메고 ‘김종필의 퇴진과 관련자 문책’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에게 올렸다.
이 건의서 때문에 ‘반혁명 모의’로 혁명검찰부의 조사를 받게 된
육군 소령 노태우는 군복을 벗어야 할 입장이었다.
이때 그를 살려준 것이 박정희의 각별한 신임을 얻고 있던
육군 소령 전두환이었다.
그는 5·16 다음 날 육사 생도의 5·16 지지 시가행진을 주도한 공으로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이 무렵 의장실 민정비서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노태우가 전두환을 ‘형님’으로 모시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비단 그보다 나이가 한두 살 위였기때문만은 아니다.
육사 11기인 노태우·전두환·김복동(金復東) 3인의 성격에 대해 상관실에 들어가 “전두환은 (부하를 챙기기 위해) 청탁을 하고 나오고,
노태우는 좋은 말만 하고 나오고,
김복동은 싸우고 나온다”는 얘기가 훗날 나돌게 되는데,
노태우는 이 무렵부터 부하를 챙기는 전두환의 성격을 알아보고
그의 2인자 노릇을 하기로 자청했던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남의 도움을 받으며 자란 사람은 자기에게
득이 되는 사람에게 몸을 낮추는 훈련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노태우가 전두환을 처음 만난 곳은 대구공업학교(대구공고)에서였다. 팔공산 북촌의 공산초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본래 문학에 취미가 있었으나 그걸로 벌어먹기 힘들다는 어른들의 판단에 따라 5년제 대구공업학교 항공기과에 진학했던 것이다.
바로 이 대구공업학교에서 그는 1년 뒤 기계과에 입학한 하급생 전두환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광복 후 그는 경북중학교(경북고)로 편입하는 바람에 전두환과 헤어졌다. 그 후 6·25가 터지면서 학도병으로 입대,
헌병 이등중사로 근무하던 그는 공보판에 나붙은 포스터를 보고
정규 육사1기(육사11기)에 지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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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들어가서 보니 대구공업학교 시절의 전두환이 입학해 있었다. 운명의 재회였다. 전두환은 축구부, 그는 럭비부였다. 그러나 특별히 가까웠던 흔적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땜장이’ 학교를 나온 투박한 전두환과 달리 명문고를 나온 노태우는 톨스토이와 헤르만 헤세를 읽고, 명동의 ‘돌체’ 음악감상실에 드나들며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문화적인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퉁소도 잘 불었다.
이 때문에 육사 시절에 그와 가까웠던 친구는 보다 문화적인 김복동이었다. 여름방학 때 김복동의 집에 놀러 갔던 그는 거기에서 경북여고 1학년이던 그의 여동생을 처음 보았다. 유난히 흰 살결이 돋보이는 소녀였는데, 그녀가 바로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된 김옥숙이다.
노태우와 군대생활육사를 졸업한 노태우가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육군 중위 때였다. 이 무렵 김옥숙은 경북대 가정과에 다니는 여대생이 되어 있었다.미모가 있어 대구의 마야 미장원에서는 미스코리아에 나가볼 것을 권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릴케의 시집 같은 것을 주고받고,차이콥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를 같이 듣곤 하던 두 사람은 1959년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집안으로 보아서는 노태우 쪽이 한참 기울었다. 1932년 팔공산 근처에서 아버지 노병수(盧秉壽)와 어머니 김태향(金泰香)의 장남으로 태어난 노태우는 7살 나던 해 면 서기를 하던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은 뒤 조부와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그에 비해 일제강점기에 아버지가 경찰공무원이었던 김옥숙의 집은 대구에서도 꽤 잘사는 축에 속했다. 그녀의 5남매 또한 오빠 김복동을 위시해 모두 댕댕했다. 이를테면 막내 동서(琴震鎬)만 하더라도 서울대 법대를 나온 처지였다. 노태우는 한 해 먼저 결혼한 전두환이 그랬던 것처럼 과분한 아내를 얻은 셈이었다. 그의 단짝이던 김복동이 결혼을 밀어붙였다고도 한다. 젊은 시절의 전두환처럼 그 또한 핸섬했다는 점은 두 사람의 결합에 플러스로 작용했을 것이다.처갓집과 관계에서도 노태우와 전두환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둘 다 한다 하는 처갓집에 대해서는 심리적 부담감을 느꼈다.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래서 두 사람 다 처갓집에 대해서는 권좌에 오른 뒤에도 각별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이 있다. 결혼한 지 사흘 만에 미국 유학을 떠나야 했던 그는 귀국 후 대위 계급장을 달고 ROTC 교관으로 서울대 사대에 파견을 나갔다. 그 무렵 육군 대위 전두환 또한 서울대 문리대에 ROTC 교관으로 파견 나와 있었다. 숙명적인 인연이었다. 5·16 직후 전두환이 주도한 육사 생도들의 5·16 지지 시가행진설득잡업에 노태우도 가담했다.
그리고 1963년 ‘건의서 사건’에서 전두환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전두환과 그의 상하관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노태우 자신은 “전 대통령 성격은 일이 벌어지면 누구보다 먼저 뛰어나가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뛰어가다 보면 기회도 많지만 자칫 잘못하면 남과 충돌할 수도 있고, 고립될 수도 있고, 운이 좋지 않으면 쓰러지는 경우도 있지 않겠어요? 그걸 쓰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하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고 봅니다”라고 두 사람의 관계가 상호보완적인 것이었다고 말했다.그러면서 “이런 인연이 계속되다 보니 전 대통령과 내가 군에서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 등 주요 보직을 세 차례나 인수인계했습니다”라고 자신이 전두환으로부터 요직을 물려받는 도움을 받았던 사실을 시인했다(‘노태우 육성회고’, <월간조선>, 1999년 9월호)
12·12 숙군 쿠데타 때 그는 제9사단장으로 거사에 참여했다. 그리고 대장으로 예편한 뒤의 그는 정무장관→체육장관→내무장관→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민정당 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후계자로서의 단계를 밟아나갔다. 모두 전두환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걸어가는 길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노태우와 후계자
우선 노태우를 후계자로 생각하던 전두환 자신의 마음이 때로는 흔들렸던 것이다. 한번은 기자들과 저녁을 하는 자리에서 “권력을 포기하는 것은 타고 있던 호랑이 등에서 내리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는 뜻을 피력한 일이 있다.(오보도퍼, <2개의 한국>, 1998) 그럴 때마다 노태우는 마음을 졸여야 했다.또 여당 대표인 자신에게는 월 400만∼500만원의 판공비밖에 전달되지 않는데, 야당 총재에게는 월 1000만∼2000만원씩의 활동비가 제공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전두환이 자기에게 인색한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곽병찬, ‘노심 읽는 5가지 힌트’, <월간중앙>, 199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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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1985년 4월 3일 명동성동 주교관으로 김수환 추기경을 예방, 환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5공 실세들의 괄시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가 처음 국회에 진출할 때 민정당 대표였던 권익현(權翊鉉)은 그의 고향 출마 계획을 좌절시켰고,5공 실세의 한 사람이었던 권정달(權正達)은 지역구 사무실로 찾아간 그를 1시간 이상 기다리게 하는 모멸감을 주었다. 또 5공 후기의 실세였던 장세동(張世東)으로부터는 안기부 사찰을 받는 수모도 당했다. 그러나 노태우는 이 같은 서러움을 절대로 내색하지 않았다.그렇게 참고 참아온 7년이었다.
마침내 1987년 6월 2일 민정당 간부를 전부 청와대 상춘재로 불러 만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전두환은 노태우를 후계자로 추천한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참석자 전원이 박수로 동의의 뜻을 표하자 노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려움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각하,끝까지 지도해주십시오” 하고 말했다.(김성익,<전두환육성증언>, 1992)
그러나 시국은 험난했다. 1987년 1월, 경찰 고문에 의한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의 사망사건이 언론에 폭로되면서 사태를 방관하던 중산층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각제와 대통령직선제의 여·야 협상이 결렬된 것을알리는‘4·13호헌조치’가 발표되자 군사정권에 대한 시민의 염증과 분노가끓어올랐다.
이런 가운데 민정당은 6월 10일 올림픽공원 내에 있는 실내체육관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전당대회를 강행했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 “우리 헌정 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이양의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며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에 지명했다.“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대통령과 정부가 국민과 역사 앞에 한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과 함께감격스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고 노태우는 회고했다.
전두환이 평화적 정권교체의 약속을 지킨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국민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가발을 쓴 전태우’ 또는 ‘노두환’을 통해 군사정권이 계속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노태우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던 날, ‘민주헌법 쟁취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했다.흰 와이셔츠와 넥타 이 부대로 상징되는 일반 시민들이 시위에 동참하면서 반정부 투쟁은 폭발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노태우는 대통령 후보 지명 축하 리셉션에 참석하기 위해 남산 힐튼호텔을 오가면서 시내가 온통 최루탄 가스에 덮여 있는 모습을 보고 “변화가 있어야겠다. 역사에 하나의 획을 그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노태우 육성회고록)
결국 그 결심이 ‘6·29선언’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