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가 70이 넘어 20대의 신부를 맞이하여 신혼여행을 갔다.
부러운 대목인가, 아님 민망한 이야기일까?
피카소가 세계미술계에 던진 다양한 실험과 작품들은 회화와 조각, 빛을 통한 장식미술에까지
다양한 형태로 그의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미술계의 괴물, 큐비즘의 창시자....그의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했던 것일까?
단순하게 젊은 아내를 맞이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왕성한 기질은 그가 만들어낸 다양한 창작품들만큼 열정과 저력이
있음을 말하고 싶다. 미켈란 젤로는 89세에 모세 상을 완성하고 괴테는 85세에 명작 파우스트를 완성한다. 세상에 남겨진 명작들은 분명 창작들의 나이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최근작 <아메리칸 스나이퍼>을 몇 일전 감상을 하였다.
올해 나이 84세에 그의 전쟁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 완성되어 극장에서 상영이 되고 있었기에 어떤 의무감마저 들어서 극장엘 가게 된 것이었다.
한때 잘 나가는 연기자로 주로 거친 액션과 카우보이 스타일의 웨스턴 무비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였던 그가 어느 날 감독이 되어 미국사회와 전쟁을 통한 자신만의 영화적 언어를 창조하면서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감독으로 다시 찾아온 노년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신작이었다.
그의 전작 중 필자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 중의 하나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로 기억된다. 여성 권투선수와 퇴역한 복싱 트레이너와의 관계를 통하여 미국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승리를 이야기하던 감독의 특출한 연출스타일은 그가 연기자였던 사실을 망각 할 정도로 깊은 감정의 전이를 남겼다.
향년 84세, 이 노년의 감독이 도저히 나이를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의 젊은 감각과 스타일의 정형을 보여주는 영화를 소개 해 본다. 그가 이전까지 만들었던 전쟁에 관한 영화들은 <아버지의 깃발>,<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있으며 전작의 영화 속 전쟁의 배경이
2차 세계대전중의 일본군과의 전쟁 이었다면 이번 영화<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이라크 전을 소재로 한 미국과 이라크라는 틀 속에서 진행이 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실제의 이야기이며 미국과 이슬람이라는 종교성과 사회성, 또는 서로의 국가관 까지도 얼키고 설켜서 관객들에게 다양한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케냐의 미국대사관 폭탄 테러와 911 사태이후 미국에 대한 이슬람 터레리스들의 활동에 자극을 받은 주인공 크리스 카일(브레들리 쿠퍼)은 미 특수 해병대인 네이비 씰에 자원입대한다.
여기서 그는 탁월한 사격솜씨를 발휘하여 저격수(스나이퍼)가 된다.
이어 4번의 이라크전에 파병되어 참전 미군 사이에서 레전드라 불렸던 그는 반복되는 전쟁 속 상황이 실제생활에서 극복되지 못하는 트라우마를 겪게 되면서 영화의 내용과 감독의 탁월한 연출이 씻줄과 날줄처럼 매끄럽게 진행된다. 영화의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적군에겐 악마이지만 아군에겐 영웅이고 그런 그는 조국과 전우들을 살려 내기위해 160여명을 저격하여 사살한 그의 존재 이유와 전쟁이 끝나고 귀가한 그가 겪는 트라우마를 극복해 가는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관객들은 몰입을 하게된다.
투철한 국가관의 소유자가 인간적인 딜레마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만 하는가는 관객들에게 살짝 내려놓고서 감독은 적당한 생략이 주는 극명한 상상력과 간결함으로 풀어지는 이야기의 구성을 내보이고 있다. 영화 속 스토리의 전개는 주인공이 파병된 4차례의 과정 속에 이라크군의 도살자라 불리는 인물의 사살과 시리아 출신의 이라크군소속의 저격수인 무스타파와의 대결이라는 줄거리의 전개가 펼쳐진다.
2시간이 넘어가는 영화 속 내내 관객들의 몰입을 위해 경험 많은 이 노년의 감독은 치밀하면서도 과감한 전개를 펼쳐낸다.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인 모래폭풍 속에서의 이라크군들과의 전투장면은 관객들이 그 전투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고 긴장감 있는 연출력이 돋보인다.
실제 인물인 크리스 카일의 에세이를 영화화한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왜 이 시대의 거장의 반열에 서 있는지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영화적인 기교의 연출이 우수함은 물론이지만 연출한 감독의 저력은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방향에서 노장감독의 역량이 빛난다. 단순하게 크리스 카일이라는 인물의 활약상도, 이라크전의 이데올로기적 합리화도 아니다. 감독이 전하는 진짜 메세지는 전쟁에서 돌아온 주인공이 가장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대비해 보여주면서 전쟁터의 악몽이 한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의 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무엇이 그들의 평범한 삶을 앗아갔는가, 라는 질문과 그들을 누가,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라는 진중한 물음이 있다. 미국과 이라크라는 전쟁을 큰 비중으로 다룸에도 불구하고 전쟁 장면보다는 한 인간의 그 이후의 삶이 더 강한 잔상을 남기는 것은 노년의 감독의 여유와 경험에서 만들어진 결과물로 풀이된다.
영화의 엔딩은 감독이 생략의 묘미를 보여준다. 2013년에 주인공은 우울증을 앓고 있던 또다른 파병군인에 의해 살해된다. 출입문 사이로 불안한 얼굴을 보이는 주인공부인의 얼굴을 서서히 페이드아웃하면서 그의 죽음을 알리고서 영화의 끝을 맺는다.
우리에게 예술사에 기록된 명작들의 완성은 결코 젊은 작가들의 과감한 실험에서만 탄생되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준다. 우리 무용계에 조로 현상이 우려된다는 지적을 근 20여 년 전에 말씀하시던 분이 기억난다. 현재 50이 넘어서 무대에서 춤을 추는 무용가는 몇인가? 또 60이 넘어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무용가들은 누구인가?
이제와 생각해보니 상당히 올바른 지적이다.
이 영화를 통해 조로하는 우리무용계의 안무자들과 무용수들에게 한번 더 명작의 완성은 나이와는 상관없음을 알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