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가까운 설날 연휴 기간에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황도 사뭇 달리진 양상이다. 잘 알다시피 우크라이나의 주요 전선은 돈바스(도네츠크주·州와 루간스크주)와 러시아 쿠르스크주(州) 일대인데, 후자(쿠르스크 전선)의 경우, 파병 북한군의 존재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을 뿐, 전투 자체가 치열하다고 할 수는 없다. 러시아에게는 전략적인 가치도 낮은 편이다.
러-우크라 양군의 주력부대가 충돌하는 곳은 돈바스 전선이다. 지난해(2024년) 후반부터 확연히 달라진 흐름을 보이는 돈바스 전선에서는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대규모 탈영 현상과 맞물려 우크라이나군 방어선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게 아니냐는 불안이 싹트고 있다. 그동안 가까스로 버텨온 우크라이나군의 주요 방어 도시들도 지난 열흘 간의 러시아군 공격에 함락되거나 함락 직전으로 몰린 느낌이다. 중국의 대하 소설 '삼국지'에 비유하면 러시아군의 집요한 서진(西進) 공격에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의 남은 성(城)들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눈 덮힌 도로를 따라 진격하는 러시아군 병사/사진 출처:러시아 SNS인 vk영상 캡처
러시아군은 지난해(2024년) 하루 20㎢씩 점령하는 속도전 끝에 우크라이나가 방어 요새를 구축한 도네츠크주 거점 도시 바흐무트(2023년 함락), 셀리도보, 아브데예프카(아우디우카), 우글레다르(부흘레다르), 쿠라호보 등 5개 성을 점령했다.
남쪽의 자포로제(자포리자)주로 향하는 길목의 벨리카야 노보셀카(혹은 벨리카 노보셀카)도 연휴 기간에 러시아군에 함락됐다. 도네츠크주 전선에 배치된 러시아군이 남·서진(南·西進)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으로 평가된다.
도네츠크주 주도인 도네츠크시(표식)를 중심으로 본 우크라이나 요새 도시들.(왼쪽 맨아래에서 위쪽으로) 우글레다르, 쿠라호보, 셀리도보는 이미 함락됐고, 그 위 포크로프스크는 거의 포위된 상태다. 도네츠크시 위쪽(북쪽)으로 보이는 아브데예프카와 오체레티노도 러시아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남은 곳은 그 위쪽의 토레스크와 고를로프카다/출처:얀덱스 지도
러시아군이 연휴 기간 집중 공략한 토레츠크(표식). 토레츠크 점령후 위쪽(북쪽)에 있는 도네츠크주 최대 산업도시인 크라마토르스크(맨위)로 나아갈 것으로 예상된다. 왼쪽 맨아래는 연휴기간 러시아군의 수중에 떨어진 벨리카 노보셀카. 그 위로 쿠라호보 포크로프스크가 보인다/출처:얀덱스 지도
러시아군의 사정권에 들어온 요새는 도네츠크시 북서쪽의 포크로프스크와 북쪽의 토레츠크 등이다.
rbc 등 러시아 매체에 따르면 러시아 국방부는 1일 토레츠크 공략의 관문 격인 크림스코예 마을(поселок Крымское)을 장악했다고 밝혔다. 이 마을은 토레츠크의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토레츠크는 도네츠크시에서 북진(北進)하는 기존의 러시아군과 북동쪽에서 새로 가세한 러시아군에 의해 3방향에서 압박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다.
◇최대 요충지 포크로프스크 포위망 조여
도네츠크주의 핵심 요새인 포크로프스크도 러시아군의 포위망에 갇힐 판이다.
스트라나.ua는 지난(1월) 31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 중 '전황'(戰況, Ситуация на фронте) 코너에서 "러시아군은 포크로프스크의 측면을 차단하기 위해 코틀리노 마을로 진격했다"고 전했다. 도네츠크시에서 북서쪽으로 66㎞ 떨어진 포크로프스크는 도네츠크주의 산업및 교통의 요충지다. 전쟁 발발후 사통팔달(四通八達) 교통망(철도와 도로) 덕분에 우크라이나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해왔다. 토레츠크와 콘스탄티노프카, 차소프 야르, 크라마토르스크-슬라뱐스크 지역 등 돈바스 주둔 우크라이나군의 가장 중요한 '공급 허브'라는 점에서 포크로프스크의 전략적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점령지역에 삼색기를 게양하는 러시아군/사진출처:VK영상 캡처
로이터 통신도 이날 이례적으로 포크로프스크 전황을 상세하게 전했다. 이 통신은 미국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선임 연구원 마이클 코프먼 등 전문가 3명의 작전 분석을 인용해 "러시아군이 지난 며칠 간 (포크로프스크에서) 드네프르페트로프스크주(州)의 주도 드네프르(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시로 연결되는 철도에 다다랐다"며 "포크로프스크를 장악하면, 러시아군은 철도와 도로망을 발판으로 북쪽과 서쪽으로 공격을 계속할 수 있는 발판으로 확보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군이 서쪽으로 향할 경우, 요새화하기 힘든 초원 지대를 치달아 곧바로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주 경계선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강이나 산악지대와 같은 자연 장애물도, 요새화한 도시도 없다고 한다.
반면 북쪽으로 기수를 돌리면 밀집한 산업지대를 통과해야 한다. 그만큼 돌파하기는 힘들겠지만, 도네츠크주의 최대 산업도시인 크라마토르스크-슬라뱐스크 일대를 압박할 수 있다. 또 토레츠크를 넘어선 러시아군이 공격에 합류할 가능성도 높다.
포크로프스크의 전략적 활용도가 큰 만큼, 러시아군도 가능한 한 빨리 점령하기 위해 속도전을 펼치고 있다는 평가다. 우크라이나군 당국도 포크로프스크 전선을 우크라이나군이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곳으로 규정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지난 몇 달 동안 포크로프스크의 남쪽과 동쪽 마을들이 점령했다고 주장했고, 연휴 기간에도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 결과, 포크로프스크 동쪽으로 수㎞ 떨어진 미르노그라드에서는 이미 주민들의 대피가 시작됐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이 퇴각할 수 있도록 서쪽만 비워놓은 채, 남북과 동쪽 3방향에서 포위망을 죄어가는 형국이다.
스트라나.ua는 "포크로프스크는 이미 우크라이나군의 물류 기능을 상실했다"며 "주요 도로와 철도가 러시아군의 포병과 드론 사정권 안에 들어가면서 우크라이나군 차량은 대부분 시골길로 우회한다"고 밝혔다.
러시아군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군은 앞으로 러시아군 포위망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퇴각하거나 결사항전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군이 포크로프스크 점령에 사력을 다하는 것은 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우크라이나 에너지 시장 전문가인 올레그 포펜코는 “러시아가 포크로프스크를 노리는 것은 군사적 목적 외에도 이 지역의 코크스용 석탄(코크스 원료탄) 매장지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제철및 야금 과정에 쓰이는 코크스 원료탄은 주로 이곳에서 채굴된다. 매장량은 2억 톤으로, 2023년 생산량은 560만 톤으로 추정된다. 포펜코는 "이론적으로는 코크스 원료탄 의 수입 대체가 가능하지만, 물량과 복잡한 물류, 가격 등을 고려할 때 얼마나 현실적일지 모르겠다"며 의문을 표시했다.
석탄 광산외에도 포크로프스크 근처에는 리튬 매장량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군은 새해들어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큰 리튬 매장지가 있는 셰브첸코 마을도 접수한 바 있다. 리튬은 야금, 2차전지 등 전기·전자 공학, 세라믹 등 화학 산업, 의학 등에 사용되는 물질인데, 최근 리튬 배터리가 각광을 받으면서 시장 수요가 크게 늘었다.
◇ 벨리카야 노보셀카의 함락
도네츠크주 벨리카야 노보셀카의 함락은 우크라이나 남동부 방어선이 위험해졌다는 의미다.
도네츠크주의 벨리카야 노보셀카(동그라미 표시)에서 맨왼쪽(서쪽)의 자포로제시까지 약 120Km 떨어져 있다. 벨리카야 노보셀카 오른쪽(동쪽)으로는 러시아군이 이미 점령한 우클레다르, 쿠라호보 등이 보인다/지도 출처:젠 블로그
스트라나.ua는 지난(1월) 27일 "러시아군은 벨리카야 노보셀카를 점령했다"며 "러시아군의 향후 전략에 따라 우크라이나 남동부 전선이 위험해졌다"고 진단했다. 직접적으로 위기를 느끼는 곳은 자로포레주의 주도 자포로제시(市)다. 두 도시간 직전 거리는 약 125㎞다. 그러나 자포로제시가 있는 드네프르 강까지는 대초원 지역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새가 별로 없다고 한다.
우크라이나군 당국은 최근 이 곳의 참호 건설 영상을 수시로 올렸지만, 전문가들은 거의 무시하는 편이다. 이들이 벨리카야 노보셀카의 함락이 남동부 전선 전체에 도미노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유다.
지도를 보면, 러시아는 도네츠크주 최남단의 벨리카야 노보셀카에서 북쪽으로 포크로프스크에 이르는 긴 전선에서 서진(西進)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리적 목표는 드네프르강 도달이고, 도시로는 드네프르페트로프스크(140㎞)와 자포로제(120㎞)다.
일각에서는 러시아군이 굳이 요새화된 포크로프스크를 점령하지 않고도 서진을 계속하다보면, 포크로프스크는 병참및 통신의 두절로 스스로 손을 들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르코프주 공략
돈바스 지역의 루간스크주(州)에서 북진(北進)중인 러시아군은 하르코프(하르키우)주 오스콜강의 서안(西岸)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러시아군이 자연 방어망인 오스콜강을 건넜다는 것은, 앞으로 하르코프주 주둔 우크라이나군을 다각도로 위협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남쪽으로는 쿠퍈스크 주둔 우크라이나군의 배후를 노릴 수 있고 △서쪽으로 주도인 하르코프시(市)로 진격할 수도 있다.
물론 러시아군의 추가 진격을 위해서는 오스콜강의 교두보를 지탱할 수 있는 충분한 병력을 확보해야만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으로 퇴로가 끊기지 않을 수 있다. 러시아군은 개전 직후 하르코프주 깊숙히 진격했으나, 2022년 가을 퇴로가 끊어질 위기에 처하자 서둘러 후퇴한 바 있다.
◇우크라 후방지역 공습
우크라이나 후방 지역의 인프라를 겨냥한 러시아군의 공습도 연휴 기간 내내 계속됐다. 우크라이나 측은 1일 중부 도시 폴타바, 북부 하르코프, 북서부 수미 등에서 러시아군의 미사일, 드론 공격을 받아 도시 인프라및 주택이 무너지고 수십명이 사상했다고 밝혔다. 이 정도의 물적, 인적 피해는 거의 매일 나오는 편이다.
남부 오데사 지역도 러시아군의 공습을 받아 시립병원이 피해를 입었고, 포격 당시 수술을 진행하던 의사를 포함해 4명이 부상했다. 또한 행정부 건물과 곡물 창고, 트럭 등 피해도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