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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3. 묵상글 (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 복음에서 삶으로, 삶에서 복음으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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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5.03 05:08
- 복음에서 삶으로, 삶에서 복음으로!
오늘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인데
우리 교회는 야고보와 필립보 사도 축일이라고 하지 않고,
왜 이렇게 붙였을까? 왜 야고보를 앞에 두지 않았을까?
시답지 않은 질문일 수도 있는 질문을 해봤습니다.
왜냐면 복음에는 필립보 사도가 여러 번 등장하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야고보 사도가 꽤 중요한 분입니다.
어제 그러니까 부활 5주 목요일 독서로 우리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 얘기를 들었고,
거기서 야고보 사도가 전체 사도단을 대표하여 연설하는 장면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 외에도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을 때 야고보에게 알리고,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야고보를 특별히 찾아가 만난 사실을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이 각기 기록합니다.
"이 일을 야고보와 다른 형제들에게 알려 주십시오."
"바오로는 우리와 함께 야고보를 찾아갔는데 원로들도 모두 와 있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의 두 기둥인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도 중요한 순간에
야고보 사도를 찾아가고 야고보 사도에게 알렸을 정도로 중요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축일 이름의 순서에서 누가 더 중요한 존재였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 없을뿐더러 세속적인 생각일 뿐이니 우리는 야고보 사도가 어떻게 또 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봄이 오히려 더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 사도는 무슨 이유로 교회의 중심적 인물이 되었을까요?
주님의 형제였기 때문일까요?
주님의 형제였기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매우 세속적인 생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혈육 관계를 넘어선 분이었기에 위대하고
그래서 사도단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형제에서 어떤 제자보다도
주님의 진정한 제자요 사도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야고보서의 저자가 맞다면 그는 그 어떤 사도보다도
주님 말씀을 입이 아니라 실천으로 따른 분이었을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시작부터 이렇게 실천을 강조합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이렇게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였기에
은총과 믿음을 강조한 바오로 사도를 더 따르는
개신교가 야고보서를 성서에서 빼고 싶어 할 정도였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지점에서 믿음의 올바른 균형을 찾아야겠습니다.
은총을 받은 사람은 은총을 받은 사람답게 실천하는 믿음을 가져야겠지요.
은총을 많이 받았다면
그만큼 더 믿음을 더 잘 실천해야겠지요.
그리고 이것을 재속 프란치스코의 구호처럼 바꾼다면
“복음에서 삶으로, 삶에서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인데
야고보 사도가 이 면에서 우리의 모범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어제 다시 제목만 올라오고 내용이 올라오지 않았지요.
예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럴 경우
밑에 댓글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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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얼마 전에 철학자 니체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니체는 여행자를 다섯 등급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최하급 여행자는 남에게 관찰당하는 여행자입니다. 다음 등급은 스스로 관찰하는 여행자이고, 세 번째 등급 여행자는 관찰한 결과를 체험하는 여행자입니다.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습득해서 계속 몸에 지니고 다니는 여행자이고, 마지막으로 최고 수준의 여행자는 관찰한 것을 체험하고 습득한 뒤에 집으로 돌아와 일상적인 생활에 반영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삶 안에서 우리 모두 여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수준으로 살고 있을까요? 수준 낮은 수동적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습득한 지혜를 일상에서 남김없이 발휘하며 사는 능동적인 삶을 사십니까?
여행자의 등급처럼 주님의 제자 되는 길 역시 등급을 매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수동적인 삶이 아닌, 능동적인 삶을 살아야 주님의 참 제자에 더 가깝게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사실 수동적인 삶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남 눈치만 보면서 살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남 하는 대로만 살면서 여기에 굳이 어떤 결정도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런 모습을 원하실까요? ‘남’처럼 사는 삶이 아닌 ‘나’처럼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남처럼 사는 삶을 결코 재미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만의 삶을 살면서 그 안에서 보고 느끼는 주님의 손길에 동참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랑받기보다 나의 의지를 내세워 사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가장 높은 단계의 주님 제가 되는 방법입니다.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축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필립보가 예수님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직접 뵙기를 바라는 필립보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힘들고 어려운 예수님과의 전교 활동을 통해 흔들리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를 보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도록 하느님 아버지를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이미 하느님을 보여주셨다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일상 안에서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곧, 주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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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린 길을 찾을 수 있어요. 단지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지...(욘 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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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 라는 필립보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듣기 전에, 먼저 이 질문이 ‘하느님을 아는 것’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맥락 안에서 나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가르침 다음에,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라고 말씀하시자,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라고 필립보가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어떻게 하느님을 보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먼저 ‘보는 것’의 한계를 일깨워주십니다. 곧 필립보에게 그가 오랜 동안 당신을 보았음에도 당신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합니다. 사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 1,3)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께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뵙고 하느님을 뵐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에서 ‘참된 앎’이 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 11,40)
결국, 하느님을 보는 것의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 것에 귀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것은 곧 당신께서 하신 말과 일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는 단순히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신 말과 일이 참이라는 인식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들어주겠다.”(요한 14,14)고 하시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셋째는 오늘 <복음>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으로 ‘계명을 지키는 일’, 곧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요, 넷째는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힘을 입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진정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요한 14,9)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
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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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마음 한 몸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짐작하여 알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오래도록 함께 지낸다 해도 마음의 문을 열어 서로를 내보이지 않는 이상 상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내보여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닫혀 있으면 상대를 알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 형성을 잘해야 합니다. 비록 어두운 밤일지라도 마치 남의 귀와 눈이 집중된 장소에서 하듯 눈속임이 없는, ‘동상이몽’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뵙게 하여 달라고 청하는 필립보에게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셨지만, 아직도 믿지 못하는 필립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있었다고 해도 마음의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가정 안에서도 고부간, 부부간에, 부자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함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마음’으로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15,11-32)에서 보면 작은아들이 방종한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버지의 자비 덕분에 작은아들은 모든 권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를 타이르자, 그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하며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그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큰아들이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고 하니 참으로 훌륭한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가 불평하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히 읽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곁에 있었으나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겉으로만 아버지를 섬겼으니,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가 되지 못하였고, 자기 스스로 무엇을 얻기 위해 계산된 가운데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지 않았으니,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으니, 동생에 대한 사랑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하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합니다.’하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으니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2-13). 고 약속해 주셨음에도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나 봅니다.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은 고사하고 그분의 일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으니 믿음이 부족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부족한 저의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당신을 안다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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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노자의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의 특성을 들어서 이야기했습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니 겸손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담는 그릇에 따라서 모양이 변하니 부드러움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막히면 돌아가니 유연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부드럽지만 시간을 주면 바위를 뚫으니 강인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자연에 활력을 주니 생명력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런 물의 특성을 들어서 노자는 물을 가장 좋은 선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여기서 물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물은 잘못을 씻어주니 정화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물의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회개와 정화의 상징이었던 물은 이제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는 성사(聖事)가 되었습니다. 이제 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이제 물은 지난날의 죄를 사함 받는 은총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신앙 안에서 물은 은총의 성사가 되었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이 벨라뎃다 성녀에게 발현하였던 루르드는 ‘치유의 물’이 나오고 있습니다. 루르드의 샘물로 치유된 사람이 수천 명이 넘는다고 하니 치유의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례에 온 많은 사람이 물을 마시고, 물을 몸에 바르면서 치유의 은사를 청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전에는 물에 침수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물의 예식만 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기도하고, 손과 눈에 물을 바른 후에 물을 마시는 예식입니다. 저는 루르드의 물이 아닌 다른 것에서 치유의 은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루르드에는 많은 봉사자가 있었습니다. 봉사자들은 휠체어에 의지하는 환자들을 샘물로 모셔 왔습니다. 물의 예식을 하는 곳에는 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에 음악 봉사자들이 성가를 불러주었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많은 젊은이가 손에 묵주를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물이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순례자들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물이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시간을 내는 봉사자들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동안이나 물에 들어가지 못했던, 그래서 치유의 은사를 받지 못했던 환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그렇습니다. 연못의 물이 치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이 치유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의 것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유다는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2000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그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묶인 이를 풀어 주는 것,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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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아무것도 너를’이라는 제목으로 자주 불리는 성가가 있습니다. 이 성가의 가사는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가 써놓은 기도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어지럽히지 않게(nada te turbe)
아무것도 너를 놀라게 하지 마라(nada te espante)
모든 것이 다 지나가지만(Todo se pasa)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Dios no se muda)
인내가(la paciencia)
모든 것을 얻게 하리니(todo lo aicanza)
하느님을 가진 사람은(quien a Dios tiene)
아무런 아쉬움 없고(nada le falta)
하느님만으로 넉넉하도다(sols Dios basta)
오늘 복음과 이어져 있는 성녀의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본 사람은 하느님을 본 것이고, 너희가 내 이름은 청하면 다 이루어 주겠다고 하신 주님의 마음이 전해져오는 듯합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청하는 것보다 그저 주님을 만나기를 바라십시오. 그 만남은 우리 모든 기도를 이룰 것입니다.
성가 한번 들어보세요.
아무것도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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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때 필요한 것은
가끔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다양한 광고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광고 중 눈길을 끄는 광고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광고들은 모두 같은 내용의 광고들이었습니다.
관절에 관한 광고
등산의 명인이 등장하는…. 호 땡 원
행진곡을 필두로 관절 건강을 선전하는…. 콴땡
관절이 아플 때 통증을 캐내는…. 캐 땡 톱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들 때 필요한 것은 숨김이 아닙니다.
힘들 때 필요한 것은 자존심이 아닙니다.
힘들 때 필요한 것은 도움입니다.
힘들 때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돌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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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만남의 여정
-오늘 지금 여기가 정주의 ‘꽃자리’이다-
올해로 요셉수도원 설립 37주년이 되지만 초창기에는 요즘처럼 수도원 전역에 애기똥풀꽃이 없었습니다. 26년전쯤부터 시작된 애기똥풀꽃이 지금은 수도원 전역 곳곳을 덮고 있습니다. 아마 몇 달은 계속될 것이며 집무실곁길도 꽃길로 변했습니다. 26년전 ‘검정고무신’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이때만 해도 많은 형제들이 검정고무신을 신었습니다.
“볼품없는 검정고무신
애기똥풀꽃밭에 다녀 오더니
꽃신이 되었다
하늘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들 수놓은
꽃신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별들 떠오른
하늘이 되었다”-1998.5.7
살아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꽃신’으로, ‘하늘’로 격상된 신자들의 존엄한 품위를 상징하는 ‘검정고무신’입니다. 올해도 여지없이 수도원 성전 응달에 끊임없이 피어나는 파스카의 봄꽃, 샛노란 애기똥풀꽃입니다. 2년전에 써놨던 ‘꽃자리’란 시입니다.
“음지든 양지든 상관없다
자리 찾지 않는다
자리 탓하지 않는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어디든 뿌리내리면 거기가 꽃자리이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아도 성전옆 북향 응달
그늘진 외딴곳
늘 거기 그 자리 꼬박 1년, 기다렸다가 때되어 피어난
샛노란 별무리 애기똥풀꽃들
외롭지 않다
눈물 겹도록 고맙고 반갑고 기쁘다
살아있음이 찬미와 감사다
꽃처럼 폈다지는 인생이고 싶다
사랑의 꽃, 주님 파스카의 꽃이 되고 싶다
늘 거기 그 자리,
정주의 꽃자리에서”-2022.4.
피정자들에게 부단히 강조했던 살아 있는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시간전례나 미사전례의 목적도 살아있는 주님과의 만남임을 강조했습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이요, 이런 만남의 여정중에 ‘만남의 기쁨’으로 산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필립보 사도의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요청은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는 물론이고 신자들의 갈망을 반영합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수년간에서 수십년에 걸쳐 주님의 집에 정주하는 우리 수도자들 모두를 향합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늘 주님을 만나면서, 주님을 보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 것인데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니 어찌 그런 요청을 할 수 있는지 필립보는 물론 우리의 무지를 책하는 예수님같습니다. 늘 거기 그 자리 꽃자리, 주님의 집에서 주님 사랑 안에 정주하면서, 날마다 미사전례를 통해 주님을 만나면서 어찌 그런 요청을 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 주님의 말씀인 진리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복음 구절은 예수님의 자기계시에 근거한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의 최고봉이요 요약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뵌 것이다.”
좋고 나쁜 장소의 여부가 아니라 주님과 관계의 깊이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어디든 주님이 함께 하시는 정주의 꽃자리에서 ‘아버지께 가는 길이신 생명이자 진리이신 파스카 예수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관계라면 그대로 생명이자 진리이신 아버지를 뵙는 삶이기에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필립보는 주님의 이 말씀에 큰 충격적 가르침과 더불어 무지의 눈이 열려 깊은 깨달음에 도달했을 것이며 더 이상 이런 요청은 하지 않았을 것이며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두었을 것입니다.
바로 제1독서 코린도 1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주님과 은총의 만남을 고백합니다. 주님과의 깊은 관계로 때가 되어 눈이 열려 파스카의 주님을 만났음에 대한 체험의 고백입니다. 먼저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야고보가 나중에 바오로 자신이 언급됩니다.
“그 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같은 나 바오로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바로 이런 살아계신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이요, 날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사는 꽃자리 정주의 삶’에,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관계임을 깨닫게 해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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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 닮은 나>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당신
그리 가시어
당신
아니 계셔도
당신
늘 그렇게
당신
이리 계심은
당신
닮은 나
여기 있기
때문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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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아들 안에 보이는 아버지의 초상화
주님께서는 이 모습을 통하여 필립보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을 보는 이는 아버지의 초상회를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초상화가 어떤 종류의 초상화인지 새겨 보십시오. 그것은 진리, 의로움, 하느님의 권능입니다. 그것은 ‘말씀’이므로 침묵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혜’ 이기에 지각 없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이기에 영혼 없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이기에 죽은 것이 아닙니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사람은 새로운 성전이다.
“하느님이 자신의 뜻에 따라서 강력하게 다스리고자 하신 이 성전은 사람의 영혼입니다. 하느님은 자신과 똑같이 닮은 영혼을 지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그리고 하느님은 그대로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사람의 영혼을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놀라운 방식으로 창조하신 눈부신 피조물 가운데 사람의 영혼만큼 하느님을 닮은 피조물은 하늘나라에도 이 세상에도 없습니다.
인간이야말로 하느님의 걸작 하느님의 모상이다. 그 무엇도 인간에 필적할 수 없다.
“영혼은 숭고하고 고귀한 선이 되도록 운명지어졌습니다 ... 영혼은 항상 이 선에 이르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그렇게만 하면 영혼은 모든 유용한 수단을 동원하여 영원한 선이신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혼이 지음 받은 것은 바로 그것을 위해서입니다.(163)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요한 크리소스토모
셰례를 받은 사람은 새로운 생활 자세를 취해야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그분은 여러분의 회개와 올바른 행동 그리고 선행들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이들에게 공동으로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을 보는 사람들이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게 되도록 여러분이 열성을 다하여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므로, 완전성의 스승이며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열성적으로 노력했고,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온 세상을 다니며 많은 일을 행한 바오로 성인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2코린 5,17).
그분께서 우리에게 “너희들은 낡은 옷을 벗어 버리고 새 옷을 입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씀은 너무나 밝아서 햇빛보다 더 밝았습니다. 이러한 밝음 속에서 여러분이 입은 옷의 아름다움을 지켜가도록 조심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의 영적 옷이 빛을 내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 구원에 적대적인 나쁜 영이 우리에게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나쁜 영은 밝은 빛을 무척 두려워합니다. 영적 옷으로부터 뻗어 나가는 빛은 그의 눈을 부시게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이 처음부터 온갖 노력을 다하여 여러분의 모든 빛을 발하도룩 하고, 여러분의 옷이 그 아름다운 빛을 내도록 하기를 권합니다. 또한 아무 말이나 충분한 생각을 하지 않고 하거나,말을 급하게 하지 않고,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 듣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말을 하기 바랍니다. 나아가,말을 할 때에는 마치 누군가가 우리의 말을 모두 받아 적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듯 조심을 다하십시오.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생각합시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는 쓸데없는 말은 심판의 날에 모두 그만한 갚음을 받을 것입니다.”(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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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 미사에서는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의 일화가 봉독됩니다.
복음에서는 필립보가 예수님께 아버지를 뵙게 하여 달라고 청하고, 독서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야고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느님을 뵙고 만나는 일은 사도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필립보가 하느님을 뵙게 하여 달라고 요청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하고 되물으십니다.
사실 하느님을 뵙고 만나는 일은 그분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며 돌아다니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내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더 깊이 나의 내면으로 들어갈 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무르라고 하시며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 안에 계시고, 그분 안에 온전히 하나로 계시며, 서로의 ‘안’에 ‘깊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 긴밀한 관계성을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삼위일체 하느님을 온전히 뵙고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뵙고 만나는 일은 이론이나 설명, 논증으로 확인되는 일이 아니라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은총입니다.
그럴듯한 설명을 들으려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는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내면 깊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토록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께, 여전히 필립보처럼 ‘어서 하느님을 보여 달라.’, ‘그분을 만나게 하여 달라.’고 우기는 일이 되풀이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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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구약에서 하느님을 본 사람으로
소개되는 사람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과 친구처럼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고 바라보았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모세가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동안
하느님의 영향을 받아 얼굴이 빛나게 되어
모세가 사람들에게 다시 다가갔을 때에도
그 빛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빛이 너무 눈부셔서
모세 얼굴에 너울을 씌우게 됩니다.
모세 얼굴을 보기 힘들어 하는 것은
여기에서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직접 바라보는 것을
힘들어 하는 것과 연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하고
모세는 더 이상 하느님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고 나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더 이상 나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뵙는 것을
두려워한 것을 넘어서서
이제는 볼 수 있는 가능성 조차도 없어졌습니다.
직접 볼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거리가 생긴 것이고
그만큼 인간은 하느님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하느님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또한 삶에 의문이 생길 때
더 나아가 신앙에 의문이 생길 때
정말 하느님께서 계시는지 묻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도 하느님을 보고 싶은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의문이 생긴다는 것은
인간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한계의 상황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안 된다고 느껴질 때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홀로 버려진 존재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세상으로 다가오셨음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게 다가오시는 길이기에
반대로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멀어졌던 관계를 가깝게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즉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은
우리가 홀로 버려진 존재가 아님을
하느님께서 몸소 말씀하신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방식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도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때로 우리는 나만의 방식
즉 황금 송아지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오히려 하느님을 볼 수 없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즉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과 대화를 통해 만들어가는
상호 관계로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가오시는 하느님과
마주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평화와 기쁨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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