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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추수감사주일설교-감사의 삶에 도전하라
다니엘6:1-10
오늘 설교제목이 ‘감사의 삶에 도전하라.’입니다.
도전이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성취나 기록경신 같은 것에 나서는 일을 말합니다.
신문기자였던 마가렛 미첼은 사고로 다리를 다치고 다니던 신문사를 퇴직합니다.
26살에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인생이 무너지는 것 같은 좌절과 낙심을 경험합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미첼은 기자의 경험을 살려 소설 쓰는 일에 도전합니다.
그러나 처음 쓰는 소설이 잘 쓰여 질 리가 없었습니다.
인내하며 한편의 소설을 쓰는데 무려 10년이 걸렸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소설을 출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3년을 쫓아다녔지만 무명작가의 소설을 받아주는 출판사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뤠이슨이라는 출판사 사장을 만나기 위해 기차역으로 가서 여행할 때 딱 한 번만 읽어보라고 원고를 건넵니다.
간절한 부탁에 원고를 받았지만 여행 중에도, 집에 돌아와서도 읽지를 않습니다.
그 사이 ‘딱 한 번만 읽어주세요’ 간절한 부탁을 담은 몇 번의 전보가 와서 겨우 잊었던 원고를 읽게 됩니다.
원고를 읽는 순간 그 작품에 빠져들고 출판을 하게 되는데 하루에 5만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 소설이 영화로도 대성공을 거두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입니다.
마가렛 미첼은 소설을 쓰고 출판하는데 도전하여 마침내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어떤 일에 도전한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감사의 삶에 도전하라’는 말은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감사는 그냥 하면 되지 거기에 무슨 도전하라는 거창한 말까지 붙일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감사의 삶은 그냥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전하는 자세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인내하며 노력할 때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10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고침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은 당시 불치병으로 알려진 나병을 고치기 위해 도전을 합니다.
①먼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자기들의 거처를 나옵니다.
당시에 나병환자들은 그들만의 거처가 정해져있었고 거기에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거처를 떠나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②가까이 올 수는 없었기에 멀리 서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높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소리를 칩니다.
③예수님이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시자 이들은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갑니다.
이들의 믿음이 얼마나 좋았습니까?
당시의 나병은 불치의 병입니다.
그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큰소리로 간구합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했을 때는 병이 나은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나을 줄을 믿고 제사장에게 갔던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했을 때 가다가 병이 나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긋지긋한 불치병이 나았습니다.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회에 정상적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그 열 명중에 한 명만 주님 앞에 돌아와 감사하고 나머지 9명은 감사하지 못하였습니다.
감사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불치병을 고침 받았는데도 감사하지 못하였습니다.
더군다나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감사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감사에 도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애쓰고 힘쓰고 노력할 때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게 감사생활에 도전하여 성공한 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생활하고 있던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가서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다리오 왕 밑에 있던 3명의 총리가운데 하나요, 가장 총애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남다른 왕의 신임이 시기를 일으켜서 다니엘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어떻게든지 올무를 걸어서 다니엘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이 얼마나 깨끗하게 일을 잘 하였는지 국사에 대해서는 고발할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다니엘의 신앙을 가지고 올무를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한 법을 만들어 다리오 왕에게 허락을 구합니다.
‘삼십일 동안에 왕 외에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입니다.
별 생각 없이 자신을 높여주는 일에 만족했던 다리오 왕이 윤허를 하면서 다니엘은 정말 큰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자기를 제거하려는 대적들의 소행임을 알았고 이 법을 어기면 사자 굴에서 자기의 인생이 끝날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매일 세 번씩 해오던 기도를 그만 둘 수도 없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다니엘은 감사생활에 도전하기로 결심합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은 사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얼마든지 기도생활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①제일 쉬운 것은 30일 동안 기도를 잠깐 멈추었다가 30일 후에 다시 하는 겁니다.
②지금까지는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했지만 이제는 창문을 닫고 거기다가 커튼을 치고 기도하면 발각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③하루 세 번씩 하던 기도를 한 번으로 줄여도 잘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런 편법을 쓰지 않고 감사의 생활에 도전을 합니다.
그대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기로 작정을 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고 생명이 끊어질 수 있는 형편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감사생활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어렵고 힘들고 슬프고 답답할 때 감사하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감사의 삶에 도전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애쓰고 힘쓰고 도전할 때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감사의 삶에 도전할 수 있겠습니까?
현실만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니엘은 지금 참으로 곤혹한 입장에 처해있습니다.
기도생활을 계속하자니 왕의 법령을 위반하는 일이 되고 왕의 법령을 어기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 거의 잃는 것이 확실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기도생활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지 못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을 생각할 때 다니엘은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고 고민이 되었겠습니까?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감사할 수도 없고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니엘이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현실만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를 드립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기도하였다는 말은 다니엘이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였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의 하나님, 성전에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던 하나님, 우리 민족을 지키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 다니엘이 창문을 닫지 않고 기도하였다는 것은 위기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감사의 삶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위기 속에서 하늘의 창문을 열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며”(고후4:8-9)했습니다.
왜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한다고 했을까요?
사방, 팔방에서 심한 압박이 왔을 때 어떻게 싸이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현실만 생각하면 길이 없는 것 같은데 하늘을 바라보니 길이 있었습니다.
나아갈 길이 있었고 탈출할 길이 있었고 새로운 길이 보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나아가는 인생의 길은 정말 쉽지 않은 길입니다.
험하고 힘들고 고달픈 길을 갈 때 현실만 바라보면 답답하고 한숨이 절로 나오고 원망과 불평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3:1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는,
어느 곳을 보아도 모든 것이 핍절하고 부족하고 답답한 상황에서도 하박국 선지가가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는 현실을 바라보던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나아갈 길이 있고 문제가 해결되고 병든 몸이 치유되고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이 바라보았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1.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다니엘은 소년시절 포로로 잡혀 와서 지금까지 바벨론 왕국과 메데와 바사 왕국으로 나라가 바뀌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지켜주셨습니다.
포로가 되어 아무 희망이 없이 머나먼 이국땅으로 잡혀왔지만 하나님은 그를 지혜롭게 하셔서 나라의 총리까지 되게 하셨습니다.
이번 일뿐 아니라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은 늘 자기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합니까?
그 하나님을 생각할 때 지금 어려운 일을 만났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족합니다.’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삶에 도전하기 위해서도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듯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 풍요롭고 건강하고 안정되게 살아온 것,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 등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을 생각할 때 우리도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2. 다니엘이 바라보았던 하나님은 앞으로도 인도하실 하나님이십니다.
사무엘이 블레셋 군대를 물리치고 에벤에셀이라는 승전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라는 뜻인데 하나님이 도우셔서 블레셋을 물리쳤다는 상징이었습니다.
그 기념비를 볼 때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념비를 볼 때에 사람들은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뿐 아니라 장래에도 인도하실 하나님을 생각하였습니다.
블레셋을 한 번 물리치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블레셋이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인도하실 하나님을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은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장래에도 인도하실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볼 때 현실과 미래의 암울한 상황에서도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변함이 없으신 신실한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실 때에도 변함이 없으신 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앞이 캄캄한 상황에서도 범사에도 감사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3. 다니엘은 세 번째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다니엘은 이미 죽음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구원받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일이나 역사의 변천과정을 보면서 다니엘은 역사의 주관자,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사람에 의해 역사가 움직이고 생사화복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풀무 불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사자 굴에서도 구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감사하였습니다.
왕이나 대적들이 내 생명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 결과 비록 모함에 의해 사자 굴에 들어갔지만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봉하실 뿐 아니라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대적들이 왕의 분노를 사서 대신 사자 밥에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역사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도 하나님의 능하신 손안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위기 속에서도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신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감사가 충만한 마음도 있고, 감사보다는 원망이나 불평이 있는 마음도 있고, 그저 그런 마음도 있을 줄 압니다.
그 어떤 마음을 갖고 있더라도 여러분, 감사에 도전하는 삶을 다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감사의 삶을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는 그저 형편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오는 현상이 아닙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에서 나오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앞으로도 인도하실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감사에 도전하여 감사의 귀한 열매를 맺게 될 줄 믿습니다.
(2022.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