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살이 60년에
지금부터 60 년 전에는 진주서 서울 오는 통일호 기차가 12시간이나 걸렸다. 그 당시 진주 승객은 삼랑진에서 부산서 오는 통일호를 갈아타는데, 그걸 '노루까이'라 했다. 나는 기차가 삼랑진에 도착하면 재빨리 통일호로 올라가 옆에 빈자리를 만들었다. 혹시 진해서 오는 여대생을 태울 수 없을까 싶어서다. 진해는 해군 기지가 있어 장교들이 많고, 사관학교 나온 소위 중위 계급장 단 장교는 여성들이 선호한다. 그런 집 딸 숙대나 이대생이 인물도 곱다. 그런 사람을 옆에 태우고 장장 12시간을 기차여행한다는 건 행운이다. 그러나 4년 동안 통일호 좌석을 확보했으나, 그런 행운은 얻지 못했다. 대신 꽁 대신 닭의 경우는 있었다. 한 번은 내려오는 하행선 안에서 부산 가는 젊은 새댁 때문에 12 시간 행복을 느껴본 적 있다. 그녀는 그 긴 시간 동안 내내 잠자느라고 까실거리는 빠마 머리칼로 내 뺨을 간질었다. 부산 간다고 간밤 늦게까지 남편과 무슨 일이 있었던지는 나는 모른다. 좌우지간 간질간질 간질거리는 잠든 그녀의 머리카락 촉감을 느끼면서 나는 12 시간 모종의 공상을 펼칠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완전 순수, 단 한 번 여자 손목도 잡아본 적 없는, 순수 그 자체인 총각이었다. 그 당시 통일호에서 기억나던 또 하나 추억은 대전역 가락국수 맛이다. 차가 대전역에 도착하면 젊은 사람들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으로 후다닥 뛰어내려 가서 뜨껀뜨껀한 가락국수를 먹고 올라오곤 했다. 어쨌든 12 시간은 긴 시간이다. 이렇게 서울에 올라와 땅에 내리면, 건장한 젊은 사람도 어지럽고 천지가 빙빙 도는 기분이었다.
그 먼 천리길 서울을 뭣 때문에 올라온 것일까. 청운의 꿈 때문 일가. 八旬 인생 되돌아보니, 남강 위로 높이 날아가던 기러기가 생각난다. 내 인생은 기러기였던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가. 진주 사람들은 흔히 '서울은 눈 뜬 사람한테서도 코 베어가는 곳'이라 했다. 기자 하다가 재벌 자서전을 써준다고 비서실에서 20년 근무했다. 그때 본 사람 대부분이 눈 뜬 사람 코 베어 갈 사람이었다. 정치자금 얻으러 찾아온 국회의원, 권력 다툼 벌이던 10여 개 계열사 사장과 중역들을 접하면서 나는 겉으로 젊잖은 척하던 인물 대부분은 조심해야 하는 걸 깨달았다. 속이 더 시커멓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서울 여자는 겉은 세련되지만, 새침데기 깍쟁이라고 경상도에서 표현한다. 철학을 형이상학이라 부르는데, 나는 안암 캠퍼스에서 형이상학을 같이 배운 서울 아가씨와 결혼했다. 그후 아들 딸은 기업체 간부, 대학교수 되었다. 그러나 '너의 고향이 어디냐?'라고 물으면, '이문3동 **산부인과 병원'이라고 웃기던 아들 딸이 찾아오질 않으니 이젠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평생 같이 산 아내는 아침저녁 끊임없는 바가지 장단으로 나를 더 쓸쓸하게 한다. 캠퍼스에서 형이상학을 같이 공부하긴 했는데, 이제 완전히 형이하학 주장하는 마르크스 엘겔스가 되었다. 기자와 자서전 작가, 수필가 추구한 나를 철부지로 본다.
돌아보면 내 인생은 쓰디쓴 커피 맛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이쯤에서 훌훌 털고 기러기처럼 고향으로 날아갈 일이다. 서울에 올라와 60년 동안 남긴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 수필집 10권 밖에 없다. 진주 망경산 위에 아파트가 있다. 거기선 평거와 서장대와 촉석루가 보인다. 밤이면 발아래 등불이 반짝일 것이다. 남강 위 별들도 보일 것이다. 거길 별들의 고향으로 생각하자. 소년 때 자주 오르던 망경산에는 벚나무 몇 그루 심을 것이다. 봄이면 벚꽃은 첫사랑처럼 곱게 필 것이다. 죽으면 집현면 선산에 묻힐 것이다. 거긴 내가 좋아하는 대봉시 주렁주렁 붉게 달린 과수원이 있다. 들국화와 도라지꽃이 핀다. 기러기처럼 서울로 같이 올라왔다가 먼저 돌아간 형님이 계신다. 자식들은 찾아오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첫댓글 타향살이 참으로 와 닫습니다.아름다움의 극치 입니다.이젠 고향으로 돌아 가고 싶다.가 마음에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