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36]『학산당인보學山堂印譜』와 전각篆刻
한문학자 정민 교수(한양대)가 엮고 지은 『돌 위에 새긴 생각』(2000년 1쇄, 2017년 개정판 열림원 펴냄)을 통해 명나라 말기 장호張灝의 『학산당인보學山堂印譜』를 알게 됐다. 옛글에서 좋은 글귀를 간추려 당대의 내로라하는 전각가들에게 새기게 한 작품 200여개가 실려 있는 인보(책)이다. 서예와 조각, 회화와 구성을 아우르는 종합예술이라는 ‘전각篆刻’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 지 4년만에야 이런 귀중한 ‘인보’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순전히 게으른 탓이다.
전각의 글씨는 바로 밑에 원문이 실려 있지 않으면 거의 한 자도 알아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뜻풀이도 할 수 없다. 흰 것은 종이, 검은 것은 글씨일뿐. 그런데, 정교수가 좋은 글귀에 대한 짧은 ‘쏙쏙 해설’까지 해줌으로써 한 권의 아담한 책이 되어 나같이 우둔한 독자를 한없이 행복하게 해주지 않은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엮은이는 정말 복받을 것이다. 조선의 ‘책만 아는 바보’ 간서치看書癡 이덕무를 아실 터, 그 이덕무가 이 인보에 필이 꽂혀 풀이글을 따로 베낀 후 <북학의>라는 저서로 유명한 박제가에게 서문을 부탁했다고 하고, 그 서문 원문이 고스란히 남아 전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오직 감격스러울 뿐이다. 아마도 정민교수가 그 서문을 국역했을텐데, 어찌나 명문인지(원문이? 국역문이? 아니면 둘다? 그것을 내가 안다면 내가 아닌 것을), 이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사색과 성찰을 거듭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이런 일은 ‘큰일’이지만 ‘보람된 일’이다.
박제가는 대뜸 “오늘날 총명하지 못한 자는 옛사람의 책을 무덤덤하게 보는 것이 문제”라고 못박았다. 옛사람들이 결코 범상한(보통의) 말을 하지 않았을 터인데, 오늘날 사람들은 어찌 그것을 무심코 보느냐?는 질책이 잇따랐다. 또한 이 글귀들이 “멍청한 자를 지혜롭게 할 수 있고, 우뚝함은 여린 자를 굳세게 할 수 있으며, 소인들의 원망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하고, 군자의 바른 기운을 붙들어 세우기에 넉넉하다”면서 “진실로 명리의 심오한 곳집이요, 글쓰기의 열쇠이며, 용렬한 자의 눈에 낀 백태를 긁어내는 쇠칼이요, 무너지는 풍속의 버팀돌인 셈”이라고까지 상찬賞讚을 하지 않은가. 일단 서문만 읽어도 마음이 확 당겼다. 마지막 구절은 더욱 비장하다. “아! 압록강 동쪽에서 무덤덤하지 않게 책을 보는 자가 몇이나 되랴. 결국 사람들은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嗚呼! 鴨水以東, 不淡看書者幾人. 則宜余言之不見信也夫. 噫!)” 하하하. 조선의 나라에서 자기의 말을 믿고 제대로 책을 읽을 사람이 없는 것을 한탄하고 있지 않은가.
대체 얼마나 대단한 글귀들이 실렸기에 이렇게 옛사람이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아니나다를까, 원문을 먼저 읽은 후, 원문을 새긴 인장印章을 살펴보고, 정민 교수가 해설한 짧은 글을 읽으며 한 장 한 장이 한없이 더디게 넘겨졌다. 서안書案 머리에 인장 하나 하나를 올려놓고 그 뜻을 곰곰 음미하자면 하루로도 부족할 좋은 글투성이다. 말하자면, 좌우명座右銘(늘 앉은 자리 옆에 갖춰두고 가르침으로 삼는 문구)으로 필요충분조건을 갖춘 명구名句들의 집합이다. 나의 취향으로 고른 몇 개를 사진으로 선보이는 까닭이다. 찬찬히 감상해 보시기를 부탁한다.
전각이란 방촌(사각모양)의 돌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것인데, 글자를 새긴다는 것은 곧 자기의 마음을 돌에 새긴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돌에 글자를 새겨 꽃을 피우는 예술. 그래서 외우畏友 전각예술인 진공재는 ‘심각心刻’이라는 단어를 만들었을 터. 그는 독학자습으로 익힌 전각과 서예를 바탕으로 나이 32살때부터 9년간 인대가 끊어지는 등 시련을 극복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명철보신明哲保身의 글귀로 가득한 <채근담> 12,611자를 새겼다. 그 결과, 흑발黑髮이 백발白髮로 변했다하니, 중국의 천자문千字文을 왜 백수문白首文이라 하는지 그 까닭을 미뤄 짐작할 수 있겠다(4자성어로 250구를 지은 주흥사의 머리가 몽땅 흰머리가 됐다는 고사에서 연유).
전라고6회 동창회 | [문화야 놀자]천상천하유아독존, 전각예술인 진공재 - Daum 카페
오죽했으면, 당대의 거장이 진공재의 채근담 작품을 보고 “암중분효한暗中分曉漢(어둠에서 새벽을 가르는 사나이)”이라고 했을 것인가? ‘미쳐야 미친다(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이 절로 생각난다. 무슨 일이든 미치지 않고서야(不狂), 미치는(성취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불급不及)? 마침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낸 사람이, 여기 소개하는 『학산당인보』를 엮은 정민 교수이다. 정교수는 『한시미학 산책』 『와당의 표정』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다산의 재발견』 『첵벌레와 메모광』 『옛사람이 건넨 네 글자』 『우리 선시 삼백수』 『석복』 『일침』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등 고전들을 풀이한 쟁쟁한 저서들이 수두룩하다.
옛사람들의 뜨거운 숨결을 인장의 행간에서 느껴보자. 돌 위에 새겨진 옛사람들의 생각을 따라 읽어가다가, 오늘, 지금, 여기의 우리의 삶을 성찰해보는 것이 어찌 헛된 일이랴. 200여개의 인장 작품 중 개인적으로는 가장 마음에 드는 글귀는 맨 첫 페이지에 실린 아래의 글이다.
<好學者는 雖死若存이요, 不學者는 雖存이나 行尸走肉耳니라(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비록 죽더라고 산 것과 같고/배우지 않는 자는 비록 살아 있다해도 걸어다니는 시체이고, 달리는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별곡Ⅱ-70]전각예술인 정병례의 ‘새김아트’ 작품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