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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공수부대의 활동상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려진 반면 해병대가 어떻게 시위진압을 했는지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해병대 1사단 7연대가 부산대학교를 주둔지로 삼았다는 사실만이 공개됐을 뿐이다.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병대의 진압과정은 충정훈련으로 단련되고 최루탄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와는 매우 달랐다.
당시 군 작전상황에 대한 기록은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기록물 존안(存案) 당시인 1980년 ‘향후 30년 동안의 기밀’로 분류돼 2010년에 빛을 볼 예정으로 육군 문서보관소에서 먼지만 들이켜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학술과장인 이동일씨는 “광주 민주화운동과 달리 부마항쟁에 대한 군 관련 기록은 전혀 공개된 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한 해병대 관계자들과 현장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3공수여단의 대규모 병력과 달리 해병대는 7연대 73대대라는 소규모 병력이 계엄 1진으로 투입돼 시위진압에 나섰다. 7연대 71대대와 72대대는 10월26일 수영비행장 투입 직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맞아 지역 관공서와 부산대로 이동했다.
해병대는 공수부대의 강경진압과는 달리 시위진압시 학생들과 시민들이 던진 벽돌과 돌멩이에 맞아 피를 흘려도 묵묵히 ‘무력(無力)행진’으로만 시위대를 밀어냈다. 제일 앞줄은 간부와 병장이, 두 번째 선은 상병이, 그 뒤로 일병, 이병이 서서 총기 멜빵끈으로 서로 팔을 동여맨 채 시위대에 대응했다. 앞줄이 돌에 맞아 쓰러지면 뒷줄이 앞으로 나섰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이등병은 앞에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소대장으로 현장에 투입됐다는 김동일(53)씨는 “전경은 말할 것도 없고 육군도 시위진압훈련을 해왔지만, 우리 해병대는 한 번도 진압훈련을 해본 적이 없어 그런(몸으로 때우는) 방식이 최선이었다”면서 “총기를 뺏기지 않기 위해 멜빵끈을 최대한 늘려 옆 동료와 팔을 동여매고 무조건 전진만 했다”고 회고했다.
학생시위대의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해병대원들이 계속 전진하자 나중엔 주변의 시민들이 나서서 시위대를 말리기까지 했다. 당시 박구일(뒷날 해병대사령관 역임) 7연대장은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시민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시민들에게 손대지 마라. 다만 총은 뺏기지 마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구일 연대장이 장병들에게 직접 정신교육을 했던 내용은 해병대 예비역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박구일씨는 후에 14대 국회에 진출, 민자당 전국구 의원을 거쳐 1992년 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박 전 의원은 기자의 거듭된 요청에도 당시 사건에 대한 인터뷰를 거부했다.
대학생으로 시위대에 참여했다는 김현숙(48)씨는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맞기만 하는 해병대와는 재미가 없어 시위를 포기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고 전했다.
시민들이 빵, 우유 건네
10월20일 마산과 창원지역에 내려진 위수령으로 505명이 연행되고 59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부산에선 1058명 연행, 66명 군사재판 회부)되는 것을 끝으로 부마민주항쟁은 일단락됐다. 10·26사태 직후 공수부대 1여단과 3여단은 부산에서 철수했지만, 해병대는 남아서 계엄작전을 계속했다. 주된 작전은 ‘위민 및 선무활동’이었다.
10월27일 소대별로 부산역과 시청 등 관공서로 이동한 해병대는 건물 인근에 있는 싸리나무를 잘라 빗자루를 만들어 오전, 오후 매일 2시간씩 주둔지 건물 주변과 골목길 등을 청소했다. 특히 해병대 1사단의 의전행사 담당부대인 32대대(일명 99대대)로부터 근무교대 의장식을 전수받아 시민들의 이동이 잦은 출·퇴근 및 낮 시간대에 집중적으로 선보였다. 국기 게양식과 군가를 우렁차게 부르게 행진하는 해병대원들의 구보 광경도 시민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시위대가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뽑아놓은 가로수 받침대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도심 교통정리도 해병대의 몫이었다.
이쯤 되자 시민들은 계엄군인 해병대를 신뢰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군복을 입고 버스를 타거나 대중목욕탕을 찾을 때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열흘 전 시위학생들에게 우유며 음료수, 빵 등을 나누어주던 시민들이 그때부터는 해병대원들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유신독재의 먹구름이 걷히며 민주주의 햇살이 부산 일대를 환하게 비추었다.
당시 부산역 주변에서 술집을 운영했다는 박경미(64)씨는 “계엄령이 내려져 밤 10시면 통금이었는데 고위 공무원들로 보이는 손님들이 돌아가지 않고 난동을 피우는 일이 종종 있었다”면서 “이럴 때면 해병대에 신고해 이들을 쫓아내곤 했다”고 말했다.
“여러 번 신세를 져서, 집으로 가기 전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해병대 초병에게 술과 안주를 건네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한번은 바지주머니 속에 술병과 안주를 집어넣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더라. 내심 ‘이게 바로 해병대구나’ 하고 감탄했다.”
당시 부산시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다는 강민호(61)씨가 들려준 얘기도 비슷하다.
“해병대가 오기 전에는 수송, 보급 등 육군 기간병들이 주둔했다. 해병대는 이들과 달랐다. 국기게양식과 경계근무, 아침 구보 등 하나부터 열까지 절도 있는 모습을 보여 공무원들, 특히 여직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주둔지 관공서 여직원과의 사랑
71대대 소대장으로 계엄임무를 수행했다는 박용감(53)씨는 “시민들에게 인기가 좋기는 좋았던지, 오토바이 뒤에 해병대 깃발을 꽂은 채 환호하면서 우리 주위를 빙빙 돌던 시민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한번은 병사들이 칼같이 다려 입은 얼룩무늬 위장복을 입고 2시간 동안 꼼짝도 않고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데, 여학생들이 지나가면서 인형인 줄 알고 눈을 찌르기도 했다. ‘귀신 잡는 해병’이라지만, 국민 앞에 서면 한없이 순한 어린 양이 됐다.”
이처럼 계엄군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는 평화스러운 위민활동에 해병대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와 자랑스러움은 깊어갔다. 특히 절도 있고 패기 넘치는 해병대원을 바라보는 젊은 여성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광주가 시민과 계엄군 간 불꽃 튀는 총포탄의 ‘화려한 휴가’지였다면, 부산은 시민과 계엄군 간 불꽃 튀는 사랑의 ‘아름다운 휴가’지였다. 실제로 부산에서는 계엄군과 한 여성이 사랑을 꽃피워 결혼에 골인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해병대 김모 소위는 박 대통령 시해 다음날인 10월27일, 주둔지이던 부산대를 떠나 한 관공서에 주둔하게 됐다. 준수한 외모의 김 소위는 이듬해 2월 철수하기 전까지 박구일 연대장의 지침에 따라 위민활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근무하던 A씨를 만났다. 이후 포항으로 원대복귀한 김 소위는 외출·외박을 나갈 때마다 A씨와 만나 사랑을 쌓았고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다.
김 소위의 동기생들과 주변 인물들을 수소문한 끝에 9월말 당사자인 김 소위를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2001년 소령으로 예편했다는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휴가’에 대해 한마디로 “우연이자 행운이었다”고 표현했다.
부마항쟁 당시 계엄군 1진으로 부산대에 주둔한 해병대는 7연대 73대대였다. 김 소위가 소속된 7연대 71대대는 2진으로 72대대와 함께 10월26일 수영비행장에 주둔하다가 부산대로 옮긴 뒤 이듬해 2월 철수했다. 하지만 김 소위는 1진 투입 전 73대대로 배속됐다.
“계엄군 투입일에 앞서 당직근무를 섰다. 이튿날 오전 근무취침을 하려는데 중대장이 급히 찾더니 소대원들과 함께 출동대기를 명령했다. 하루 종일 내무반에서 대기했는데, 밤 11시경 중대장이 불러 ‘73대대에 배속됐으니 그곳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무작정 73대대에 합류했다.”
차비 안 받는 버스 안내양
그는 “당시 소대장은 인접 중대에도 많았고, 우리 중대에도 여럿 있었는데 하필 내가 73대대로 배속돼 투입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끝내 실명을 밝히지 않은 그는 결혼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경위와 연애 스토리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무리 우리가 그곳에서 잘하고 시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도, 지금 사람들은 계엄군 투입 자체를 좋게 보지 않는다”면서 말을 맺었다.
1980년 2월 철수 전까지 4개월간 계엄군으로 부산에 주둔했던 해병대 1사단은 그해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에 따라 또다시 대구(연대본부, 21대대), 마산(23대대), 부산(22대대)에 상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는 7연대가 해안방어부대로 이탈하고 2연대가 계엄 임무를 맡는다. 한편 광주에는 3·7·11여단 등 공수부대가 주력군으로 투입된다.
광주가 공수부대의 강경진압과 시민군의 반발로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데 반해 해병대 1사단 2연대가 투입된 대구, 마산, 부산은 상대적으로 평온했다. 시민들의 시위는 광주 못지않게 격렬했지만 계엄군의 대응방법이 달랐다. 정행원 2연대장은 부마항쟁 당시의 박구일 7연대장과 마찬가지로 “시민과 학생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그들을 자극하지 마라”는 지침을 내렸다.
당시 2연대 작전주임으로 현장에 있었던 김현기 예비역 대령은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국민이 돌 던지며 때린다면 맞는 것이 당연하다. 국민보다는 우리가 더 많은 피해를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계엄작전에 임했다”면서 “부마민주항쟁 당시 닦아놓은 해병대의 위민정신과 평소 체계적인 훈련으로 쌓은 해병정신 덕택에 큰 탈 없이 작전을 끝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때도 부마민주항쟁 진압 당시 톡톡한 효과를 본 무력(無力)행진이 우리의 유일한 진압방법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광주민주항쟁 당시 집단 발포와 관련된 ‘자위권 발동’ 논란에 대해 “최근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면서 ‘자위권 발동’에 대한 명령과 수용 여부가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차이로 비쳐지고 있지만, 해병대에도 분명 ‘자위권 발동’이라는 용어는 존재했다”고 밝혔다. 그는 “다만 우리는 6·25전쟁 당시 강원도 양구의 도솔산 전투에서 24개의 목표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하사받은 ‘무적해병’이라는 명칭과 한국군 최초의 상륙작전인 통영상륙작전을 보고 ‘뉴욕타임스’ 기자가 붙인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칭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광주와 부산의 지형적 차이
부마항쟁 계엄작전에 참여했다는 또 다른 관계자도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해병대의 역사적 전통이 나 때문에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당시 대원들 사이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면서 “해병대의 성공적인 진압 작전은 이를 듣고 생활하며 훈련해온 장병들이 위기 때 보여준 좋은 사례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아직까지 문서로 정리돼 보존되거나 언론을 통해 드러난 적은 없지만, 부마민주항쟁과 5·18계엄 당시 보여준 해병대의 위민정신은 지금도 후배 해병대원들에게 구전(口傳)되고 있다”고 말했다.
해병대 예비역들의 증언에는 자화자찬도 섞여 있는 듯싶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한 육군 예비역의 증언을 들어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1980년대 초반 친구인 해병대 장교와 함께 부산에 간 일이 있다. 그런데 버스 안내양이 나한테는 차비를 받으면서 해병대 친구의 차비는 한사코 받지 않는 것이었다. ‘야, 왜 네 차비는 안 받는 거냐?’ 하고 물었더니 친구는 멋쩍게 웃음만 짓고 아무 대답도 안했다. 버스 안내양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에서 해병대가 인기가 좋기는 좋구나’ 하는 느낌이 확 왔다.”
10월12일을 시작으로 11월24일까지 부마민주항쟁 28주년 행사가 부산과 마산에서 성대히 열린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동일 학술과장은 광주와 달리 부산과 마산의 시위진압 과정에서 사망자 없이 항쟁이 마무리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마항쟁 당시에도 시위가 아주 격렬했다. 주요 관공서, 방송국이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광주와 같은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배경은 우선 지형적 여건의 차이다. 광주는 도로 몇 곳만 봉쇄하면 완전히 고립되고 통제된다. 그러나 부산과 마산은 바다를 등지고 있어 완전 통제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시위진압에도 한계가 있다. 또한 ‘계엄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군이 투입됐더라도 시위나 저항이 계속됐느냐’ ‘진압과정에서 대치하는 쌍방이 어떤 폭력을 수반했느냐’에 따라 양상은 크게 차이가 났다. 게다가 군 통수권자의 차이도 있다. 부마항쟁 와중에 박 대통령이 시해된 것도 큰 변수였다. 만약 통수권자가 발포 명령을 내렸다면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3공화국이 저물어가던 시기. 박 대통령은 부산과 마산의 소요사태에 격노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산의 소요사태를 시찰했다.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치는 시위대를 대하는 순간 그는 전율했다.
10월26일 궁정동 비밀안가에서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보고하면서 “정부가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태가 또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훗날 김재규는 재판정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했다. 결국 뒤이어 집권한 신군부는 광주에서 박 대통령의 ‘유지’를 계승했다.
근래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의 민사작전이 국내외적으로 각광받고 있다. 미국이 우리의 민사작전 교범을 도입할 정도로 대민 및 위민활동은 한국군이 단연 뛰어나다는 게 정설이다. 1979년과 1980년 부산에서 보여준 해병대의 계엄작전은 한국군의 정신사에서 흑요석처럼 빛나는, 성공적인 민사작전의 시초라 할 만하다.
그러면 ‘왜 이제까지 해병대의 ‘미담’이 묻혀 있었을까, 왜 지금껏 국민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 들 만하다. 답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있다. 한 해병대 예비역 장교는 “당시 계엄군을 총지휘한 전두환·노태우·정호용 등이 다 특전사 출신인데, 해병대의 진압과정과 공수부대의 진압과정을 언론이 비교하도록 놔뒀겠냐”고 반문했다.
“해병대가 광주에 투입됐더라면…”
또 다른 해병대 관계자도 “당시 전두환 정권은 해병대의 전통을 인정하는 듯했으나 ‘어떻게 하면 해병대의 위상을 격하시킬까’ 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면서 “박정희 대통령도 월남 파병 이후 비대해진 해병대를 버겁게 여겨 1973년 사령부를 해체하고 사령관 계급도 대장에서 중장으로 끌어내려 해군에 통합시켰다”며 해병대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제기했다. 그는 “이후 대선을 앞두고 노태우씨가 해병대 표심(票心)을 얻기 위해 1987년 11월 해병대 사령부를 재창설하기까지 해병대는 14년간 시련을 겪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이들은 특전사와 해병대의 지휘계통과 정치적·지역적 상황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당시 해병대를 광주에 투입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하지만 “해병대가 광주에 투입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다행이었는지 모른다”는 말로 5·18민주화운동의 또 다른 희생자인 공수부대원들의 처지를 배려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책임 있는 인물 중 하나로 전쟁이 끝난 후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지내다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재판과정에서 그는 “나는 업무를 수행하면서 사람을 죽이려는 어떤 의도도 갖고 있지 않았고, 유대인에 대한 그 어떤 증오도 없었다. 다만 제3제국이 ‘합법적’으로 나에게 부과한 의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며 “나의 위치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그도 동일하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판을 지켜본 정치철학자 한나 이렌트는 아이히만이 악의 화신도 괴물도 아닌 극히 평범한 인간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이히만의 증언을 들은 세계는 경악했다. 아이히만 개인이 유대인에 대한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 이런 ‘완전한 무사고(無思考)’가 그가 유죄인 이유였다. 이에 대해 이렌트는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교훈을 얻게 됐다고 말한다.
부산·마산과 광주에서 전개된 군의 진압방식 차이를 두고 ‘공수부대는 악하고 해병대는 선하다’는 이분법을 세운다면 옳지 않다. 공수부대나 해병대나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고 국민의 군대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진압과정 차이는 ‘명령과 복종’으로 대변되는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에서 지휘관 등 상급자의 의식과 태도, 그리고 조직이 존재하는 목적에 대한 구성원의 공감대가 어떤지에 따라 얼마나 상반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역사적 교훈이라 할 만하다.
우선 해병대 7연대는 박구일 연대장이 직접 나서서 장병들에게 작전에 임하는 자세와 목적에 대해 정신교육을 하고, 그 공감대를 바탕으로 부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광주의 공수부대원들에게는 이와 같은 교육이 없었고 ‘내가 왜 광주에 왔는지’에 대해, 다시 말해 부대의 출동 목적에 대한 주체적인 자각이 없었다.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진압과정 차이를 조직구조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군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해병대 지휘계통은 공수부대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해병대는 적 후방에 침투해 게릴라전을 펴는 것이 주목적인 부대다.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
그렇기에 간부 중심 지휘체계인 특전사에 비해 해병대는 병(兵) 통솔만으로도 작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병대의 지휘체계는 소대나 중대 단위로 작전임무를 수행할 때 적의 집중 폭격이나 사격을 받아 전멸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평시 소규모 분대 단위의 전투훈련에 집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간부 중심으로 구성된 공수부대는 원리원칙을 존중한다. 그들은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상부의 지시를 철저히 수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당한 명령에도 공수부대원들은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모토처럼 공수부대에는 ‘안 되면 되게 하라’ ‘사나이 태어나 한번 죽지 두 번 죽냐’는 상징적 표현이 존재한다.
심리학의 유명한 학설인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은 1961년 스탠리 밀그램이 처음 이론화했다. 그는 사람들이 권위에 굴복하는 이유는 성격보다는 상황에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대단히 설득력 있는 상황이 발생하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도 도덕적인 규칙을 무시하고 명령에 따라 비도덕적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입증했다. 이러한 상태를 복종을 넘어선 단계, 즉 ‘응종(應從)’이라고 부른다.
전문가들은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이라는 심리가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에게도 있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들이 불합리한 상부의 명령에 복종해 시민들을 강경하게 진압한 것도 인간 내부에 잠재된 심리적 본성의 하나라는 설명이다. 특히 책임을 명령권자와 희생자들에게 돌리며, 도덕적 판단의 의무로부터 회피하려는 것은 군과 같은 조직사회의 구성원이 불가피하게 가질 수밖에 없는 속성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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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80년당시에 포항 해병 1사단 2연대2대대 화기중대 81mm 박격포 반장을 하였습니다.하사4호봉으로 중고참이였지요.타군같았으면 원만하면 진급을 하였겠지만 내위로도 5.6.7.8호봉되는 하사관도 진급이 적체되어 있었기에 걍 중고참이였습니다(하사1호봉= 만1년) 어느날 단독무장으로 출동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대구경북대학으로 갔습니다. 2달정도있다가 부산으로 이동하여 부산대학교에서 2달보름인가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부산대후문 경비오장으로 있었는데 시민들께서 음료수니 빵이니 많이 갔다주며 수고한다 말씀들 하신거 지금도기억남니다..당시 부대원 대부분 광주에서는 북한간첩이 파견되 소요사태가 나는걸로 알고있었습니
뺑뺑이님 멋지십니다. ^^ 짝짝짝
나비효과? 제1차 세계대전은 사라예보를 울린 총성 한방으로 시작되었다? 10.26은 무엇에서 시작?(큰 사건의 원인, 근인은 여러가지가 있고 오랜 시간 축적된 것이 특별한 계기로 터지긴 하지만.) YH무역 근로자들의 당시 신민당 당사 농성 사건을 아십니까? 가발업체인 YH의 부당폐업에 반대하며 벌인 농성을 경찰이 난입해 폭력으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노동자 한명 사망. 신민당 당원들도 무차별 구타 당하고 연행. 이건으로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의원직 제명. 폭력진압. 강제연행 반대 시위확산. 부산 마산지역(김영삼씨 정치적 고향) 시위 점증.. 그리고....김재규 박대통령 시해....
당시 만찬에서 차지철 경호실장의 무력진압 가능성 발언(캄보디아 사태 언급. 강경진압주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반대입장....이 과정에서 10.26 발생...... 최소한의 생계를 위협받는 노동자. 근로자들을 강경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된 문제가 일파만파로 퍼진 것이죠.. 과거 역사가 알려주는 사실이 있지만 오늘도 우리 주변에 이와 유사한 강경 대응은 계속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왕도(仁이 근본.德.유약)와 패도(이익 우선, 힘 우선. 강경. 강폭)를 생각하게 하는 날들입니다. 위 말씀대로라면 해병대는 '참을 인'으로 대응했고, 광주의 특전사는 강경으로..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포항 7연대 출신으로 뿌듯합니다.^^;;
51대대 출신입니다. 반갑습니다....^^
完化自焚....
???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군대가 가장 강한 군대입니다. 합법적인 촛불집회에 과격진압이 말이 많습니다. 전,의경 기동대 지휘관들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작금의 촛불시위에 긴장봉으로 휘두르며 활약하시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시던..조@#경감등은..이런 역사적인 사실에 접할때..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발전에 불철주야 노력하시는 노고에 오버랩 되더군요..아울러 군화발로 쓰러져 있던 소녀를 버스속으로 굴러가도록 즈려 밟으시던..대국민 봉사에 여념이 없으셨던 민중의 지팡이의 늠름한 기백말이죠...
52대대출신인데 반갑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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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뭔소리여?...공수부대출신들은...군인도 아닌감?....거참 몇놈 때문에 욕많이 먹는구먼....그래도 공수부대 참 멋들어진 곳입니다....전국을 누비며 산을 타고 다니고..심심하면 하늘에서 한번씩 떨어지고...해병대로 물과 친하지만...공수부대 또한 물과는 대단히 친한....족속들입니다...대한민국의 특수교육 받는 특수부대 대북공작원부터 해병대부터...공군부터..다 다녀가는 곳이 공수부대 교육코스입니다....udt만 빼고 웬만한 스쿠바등 교육도 공수부대 자체 소화가 될 정도로 광범위한 특수집단입니다...해병대 화이팅 .....공수부대..스페셜 포시스...화이팅..대한민국 특수부대 화이팅...그렁께... 국민들을 하늘로 모셔라 이말
특전사가 멋진 부대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신군부의 파렴치한 병력 운용으로 오명을 쓰기는 했었습니다만. 국민을 위하고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군대는 무조건 멋진 군대 입니다....^^
멋져부러...입니다...제가 특수부대에만 있다가 보병부대로 옮기면서 전역을 결심했드랬습니다...얼마나 재미있는 부대인데... 등산? 남들은 돈쓰고 등산가지만 ..돈주면서 등산가라고 합니다...가다가 심마니도 되어보고..사냥꾼도 되어보고..ㅎㅎㅎ..시원한 계곡물에 발담고 목욕도 하고,,,고기도 구워먹고..대한민국의 산이 바로 내집이었습니다..어디 그뿐인가? 여름되면 해양레져시켜주지...아웃트모터타고 광어나 전복 따러 다니고..가끔가다 인명구조활동도 하고...심심하면..총알도 쏴보고..자동으로 놓고 글어보기도 하고....비행기내 대테러 숨박꼴질도 해보고..그리고 축구를 하면 오전은 전반전 오후는 후반전...
참 재미있는 부대였습니다... 폭풍구보라고...그거 전력질주하는 맛에....살아있는 맛을 느끼고....5시 땡 종치면..퇴근..부어라 마셔라... 그래도 아침되면 언제 술먹었냐고 말끔했지요....그때가 그립습니다. 그때는 바이크도 타고 다니고...장발에 머리 묵고 다녀도 아무말 안할때입니다....보병부대에서는 머리 빡빡 밀어 제끼고 다니던 시절이었죠...
바람돌이 송호님은 707 출신이신가요? 10월이면 특전 사령부에서 고공강하 경연대회참가부대 중에 장발에 야상을 폼나게 입고 눈빛이 날카롭던 친구들..... 난 처음에 공수 부대 출신 민간 동호인들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특수임무대더라고요....
전 형님이 제일 부럽습니다. 이것 저것 골머리 터지는 생각없이 몸과몸이 부딫치고 극한까지 계속 끌어올려보고.. 그러다보면 어느 경지에 도달하더라는 ........그것도 자기팀을 통솔할수 있는 부사관급 이상으로요.그런 생활을 오래 하셨던 형님이 너무 부럽습니다...요즘 연락도 못드리고 죄송하고요. 담에 혹시 와인이나 맥주 모임이나 번개를 하신다면 전 술맛은 모르지만 형님뵈러 가겠습니다.
나이도 얼마 안된놈이 예전 선후배 들끼리 끈끈하고 약간 뻥 보태서 죽기 직전까지 끌어올려봤던게 (형님한테는 약과겠지만요.) 형님 글 보면서 울컥 하고 올라오네요. 그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형님 건강하세요.
고공강하경연대회에는 뭔일이셨습니까?....아 ..예전에 교육받으실때? 오셨드랬군요.. 손권아우님...아우님에 비하면....명함이나 내밀라나? 몇년전에 내 친한 동기생이 설악산 대대장을 했는데 아우님이 설악산에 있었나? 암튼 고생많은 전문가들이지....나도 한끝발 날렸던 사람이지만...아우님만 하련가?...예전에 아우님 부대원과 우리팀과 한번 맞짱을 뜬 일이 있었지...타격목표를 두고 같은 장소에 임무지원지점을 잡고 서로 물러가라고..ㅋㅋㅋ 그때 주변에서 안말렸으면 산속에서 한번 큰 사고 났을거야..당시에는 서로 총알을 가지고 다녔던 때라....모임때 한번 오시게..바이크로는 아우님이 당연 선배이니 나는 경청함세..
그때를 생각해보면 훈련이 아주 고도로 된 사람들이었지..하나를 보면 열을 알지..나와 몇몇 고참중사들은 일정간격을 두고 반은폐상태로 대응했고....그들도 무방비상태로 대응하지 않고 몸을 숨기면서 서로 견제를 하는 입장이었는데...소속을 물어도 답변도 안하고...무조건 내려가라는 말뿐이었지..ㅋㅋㅋ 그래서 나도 나무뒤에 은신하고...우리가 먼전 찜했으니 물러가라고 했고..한 5분정도 긴장을 한 대치상태에서 그쪽 팀장과 내가 서로 만나서..서로 묵인하며 같이 작전을 뛰었던적이 있었는데...전날 저녁에 목표지점 주변에서 침투경로를 확인하다 시궁창에서 그들이 기어나오는 것을 발견한 얘기들을 하며 피식 웃었던 기억이 있네..
일정한 실력을 갖춘 훈련된 특수부대원들끼리는 누가 먼저보고 먼저 쏘냐에 따라 승패가 갈라지는데...그래서 최대한 은폐를 하는 것이 최고의 실전전술이라네...그런 점에서 그들은 나에게 먼저 딱 걸렷으니..당시 .내가 한수 위인 셈이었지...그때가 그리워...
형님 글 보다보니 하아~~ 한숨만 나옵니다. 형님도 전역 하시면 안될분이셨다고만 생각이 드네요. 연락도 자주 못드리고 하지만 항상 제 마음속에 계십니다. 건강하세요.
저도 천마부대 출신입니다 제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병대,특전사 모두 멋진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천마를 여기에서 보는군요...저는 늙은 호랑이였습니다...
댓글이 흥미 진진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