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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세 번째 강의 시작하는 날입니다.
오늘 수요일이죠. 여러분들 판공성사 다 보셨지요? 잘 보셨습니까?
깨끗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 맞이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판공 때가 되면 신부님들이 모여서 합동으로 고백성사를 드리죠.
저도 은근히, 여기가 음성지구인데 후배 신부님들이 ‘성사 보는 것 도와주십시오.’ 할 줄 알았더니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대개는 시골이라 지구 신부님들만으로도 옮겨 다니면서 성사를 줘도 충분하기에
은퇴한 신부의 도움이 별로 필요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또 한편으로는 내가 늘 바쁜 신부로 소문이 나 있기에, 부담될까, 부탁을 안 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이제 주님의 성탄 얼마 남지 않았죠. 준비 잘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을 걸쳐서 2번 혹은 3번에 나누어 묵상한 것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인간이 가장 많이 질문을 던지는 때는 행복할 때가 아니죠.
‘나 왜 이렇게 행복하지?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하면서 행복이 왔을 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고통과 시련이 오면 ‘내가 왜 고통을 당해야 하지?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질문합니다.
이 ‘고통과 죽음에 대한 문제’는 인류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제기되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종교 방식으로 그 대답할 거고요. 또 철학자들은 또 철학자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려고 애쓰겠죠.
우리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이 고통에 대한 답을 구약에서는 결국에는 못 찾습니다.
구약에서 욥기 있죠, 나중에 이제 욥기를 보시겠지만 욥기는 고통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 세상 하느님이 만들어 하느님께 지음을 받았을 때는 어떤 고통이나 죽음도 분명히 없는 상태로 우리를 만드셨을 터인데,
왜 우리들이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할까?
혹시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어떤 규칙을 위반한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생각들.
그래서 욥기는 고통에 직면한 인간들이 그 고통을 해석해 보려고 애쓰는 그런 성경입니다.
욥기에 나오는 욥은 정말 정직하고 하느님 섬길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마귀가 하느님과 내기하죠.
‘하느님, 당신이 욥에게 그렇게 축복을 많이 주니 저 인간이 당신을 흠숭하지, 만일 고통을 줘봐, 그러면 당신 배반할 거야.’
하느님도 내기합니다. 오만 고통을 허락합니다.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욥은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죠.
그래서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고 난 다음 고통이 오기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축복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사실 욥기에서는 고통의 진정한 의미,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한 바른 해법은 나오지 않습니다.
신약에 이르러서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바로 그 고통의 신비라고 하는 것이 밝혀지게 됩니다.
신자가 아닌 어떤 분이 저에게 사인을 부탁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에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적고 싸인했습니다.
그분이 보시더니 표정이 밝지 않습디다, 고마워하는 것 같지도 않고.
‘왜, 글귀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물었더니
‘신부님 글씨는 명필이라 너무 잘 쓰셨는데 내용이 좀 저항감이 옵니다.’ 하셨어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내용이죠. 그래서 왜 그러시냐 물었죠.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이가 둘이 있는데 둘 다 태어나면서부터 큰아이는 뇌 쪽에 문제가 있어 지금도 병원 신세를 지고 있고요.
둘째 아이는 또 뇌성마비라 걷다가도 넘어지고.
‘두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병에 걸려서 나왔는데 어찌 하느님이 자비로운 하느님이십니까?
신부님 이 말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정말 자비하시다면 아무 죄도 없는 아이의 뇌를 망가뜨리고
또 뇌성마비가 걸려서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 하게 할 수 있습니까?
어찌 이게 하느님이 사랑이라고 얘기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제 앞에서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저는 그 자매님의 얘기를 듣고 뜨끔했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위로해야 할 지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자식 둘을 낳았는데 자식 둘 전부 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병 중에 태어났을 때,
그런 부모의 입장이라면 ‘하느님이 자비하시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다’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똑같이 그 말에 분명히 반감을 갖게 됐을 겁니다.
‘왜 인간은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가?’, ‘왜 인간에게는 고통이 있을까?’
우리들이 자주 토하는 말이고 또 인간의 역사 속에서 수없이 외쳐진 소리이죠.
세상을 둘러보면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을 몸에 지닌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또 아주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정말 슬프게 살아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감히 위로의 말을 할 수 없는 큰 고통을 당하는 분들도 너무너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을 만나면 사제인 저라도 뭐라고 딱히 위로의 말이 떠오르질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교리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뭐 다 좋은 얘기지만 기도해서 해결 안 되는 고통도 사실은 있습니다.
기도할 수가 없는 고통이 많습니다.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를 막아버리는 고통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도 사제생활하면서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다른 사제들이 한 번도 겪을 수 없는 정말 큰 고통을 저는 많이 겪고 살았습니다.
또 상처도 많이 받고 살은 사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우들이 와서 아픔을 호소할 때는 훈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많이 힘들죠?’ 하면서 끌어안아 주는 수밖에, 등 한 번 두드려 주는 수밖에,
말로 그 고통의 짐을 덜어줄 수 없을 때가 사실 많습니다.
예수님 시대 때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죄의 결과다’라는 등식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불구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분명히 부모들이 뭔가 하느님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벌을 받는 것이다.
또 살아가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몰라도 저 사람이 죄지은 것이 있기에’ 하느님께 벌 받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 욥이라고 하는 의인이 받는 고통에 관한 질문,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의롭게 산 사람이었는데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얘기죠.
며칠 동안 우리들이 묵상해야 할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또 3장에 나오는 ‘인류가 타락하는 이야기’ 이런 것을 통해
‘죄의 근원이 무엇이고, 또 그 죄를 통하여 어떻게 고통이 우리에게 내려오고 있는지’ 좀 묵상하고자 합니다.
천지창조 이후에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또 아담과 하와, 사람을 만드셨을 당시에는
이 지상에는 어떤 하등의 고통도 비극도 분명히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분명히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 두 사람은 낙원에서 추방당합니다.
우리들은 알고 있죠. 나체의 두 남녀가 허리에 무화과나무 잎을 두르고 애석하게 추방당하는 그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실낙원’이라고 하는 유명한 그림이죠.
이 두 사람이 추방될 때 인간의 고통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이들은 왜 낙원에서 추방당했는가? 이유 아시죠.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 8절 이하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마련하시고 당신께서 빚어 만드신 사람을 그리로 데려다가 살게 하셨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그 땅에서 돋아나게 하셨다.
또 그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돋아나게 하셨다.
15절에 보면.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 하시며 이렇게 이르셨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마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18절 보면, 야훼 하느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의 일을 거들 짝을 만들어 주리라.’ 하시고
21절에 보면,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시고는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다음, 아담에게 데려오시자. 아담은 이렇게 외쳤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게 되었다.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인류의 타락 얘기가 나오는 3장 1절부터도 한번 좀 읽어보겠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가운데 제일 간교한 것이 뱀이었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이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되 죽지 않으려거든 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그러자 뱀이 여자를 꾀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 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주었다.
남편도 받아먹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렸다.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야훼 하느님 눈에 뜨이지 않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너 어디 있느냐?’
아담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따먹지 말라고 일러둔 나무 열매를 네가 따먹었구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아담은 핑계를 대었다.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주기에 먹었을 따름입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물으셨다. ‘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에게 속아서 따먹었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너는 저주받아, 죽기까지 배로 기어다니며 흙을 먹어야 하리라.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또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하리라.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그리고 아담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22절에는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제 이 사람이 우리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끝없이 살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다.
이렇게 아담을 쫓아내신 다음 하느님은 동쪽에 거룹들을 세우시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
이상은 다소 좀 길어졌지만, 창세기 2장의 일부와 제3장의 거의 전부를 낭독해 봤습니다.
굳이 이 긴 절수를 인용한 것은 ‘인간 세계에 죄가 들어온 경위와 그 결과 인간에게 고민이 따르게 된 순서’가
여기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장과 3장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절대로 인간의 죄에 대하여 논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구원에 대하여도 우리는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2장과 3장 안에는 죄의 정체가 숨겨져 있고, 구원에 대한 것도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2장과 3장은 모든 사람이 특별히 숙독하지 않으면 안 될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숙제로 2장과 3장을 두 번 이상 읽으시고, 그리고 중요한 단어에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놓으시면 좋겠습니다,
2장과 3장을 여러분들이 나름대로. 전에 읽으셨던 분들이라 하더라도 또 새롭게 아마 와닿을 겁니다.
금요일 강의에는 조금 더 본격적으로 2장과 3장에 대한 묵상이 전개될 겁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들으신 것, 제가 낭독한 것 들을 것으로 끝내지 말고
2장과 3장을 좀 깊이 있게 읽으면 금요일 강의를 좀 쉽게 받아들이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되겠습니다. 여러분들 성탄 준비 잘하시고요.
또 성사 아직 못 보신 분들은 찝찝하게 성탄 맞이하지 마시고 신부님에게 찾아가서 성사를 청하십시오.
착한 목자들은 분명히 기뻐하면서 성사를 주실 겁니다.
본당 신부님이 ’합동 판공성사 다 지났는데, 왜 이제 와 사람 귀찮게 하느냐‘
물론 이렇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사제는 없으리라는 희망을 갖지만,
또 그렇다 하더라도 여러분들 상처받지 마시고 다른 신부님 찾아서 성사 보시고 성탄을 맞기 바랍니다.
여러분 늘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정말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애매할 때가 있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