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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맞섬과 침묵
I. 들어가는 말
1. 침묵, 관계와 맥락의 언어
침묵은 다양한 뜻을 전달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뜻일 수도 있고, 대답할 가치가 없기에 무시한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대답이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수사적인 질문에 대해 전적으로 수긍한다는 뜻으로 대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이 침묵이 무슨 뜻으로 쓰이느냐는 대화의 맥락(context)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 의해 결정됩니다. 수도원에서는 침묵이 주(main) 언어입니다. 침묵으로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말로 주고 받는 것보다 더 많고 또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침묵 중에 드리는 ‘기도’는 찬양이고 복종이고 대화입니다. 갓 수도원에 입회한 수도사들은 수화를 써서 동료들과 의사소통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아무도 무례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눈빛만 봐도 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같은 팀 선수들도 큰 소리 치지 않아도 동료의 움직임만 보고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채기도 합니다. ‘관계’ 자체가 큰 언어인 셈입니다. 레딩교회교인들도 이젠 좀 농담도 하면서 편하게 지낼 만 하니 다들 귀국해버리셨습니다.
2. 요나의 침묵과 요나서의 침묵
요나서는 침묵의 성경입니다. 그런데 그 침묵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맥락이 설명합니다. 그것은 요나와 하나님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1장에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다음에 요나의 침묵이 나옵니다. 그 대신 말없이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가 등장합니다. 대풍을 만나도 태평하게 잠자고 있는 요나가 나옵니다. 선원들처럼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라고 부르짖지 않는 요나가 나옵니다.
2장은 1장과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지 않고 ‘자아도취’에 빠진 요나의 말들이 연신 이어집니다. 기도가 아니라 소음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이 듣고 싶었던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알맹이 없는 공허한 말이요 말 하지 않음만 못한 공치사입니다.
3장에서 요나의 말은 고작 ‘40일 후에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다’가 전부였습니다. 3일 길을 가야 할 니느웨 성에 하룻길만 다니면서 전한 반쪽짜리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와 하나님 자신을 뒤틀어버린 자기 말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긴 침묵이 이어집니다. 그 침묵을 깨는 말이 4:2에 나옵니다.
4장에서 요나는 하나님의 두 번 질문에 침묵하고 한 번 질문에는 하나님께 대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서 전체는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납니다. 침묵으로 끝나는 것이 요나서입니다.
과연 요나의 침묵과 요나서의 침묵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고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들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II. 몸 말
요나의 반쪽자리 메시지에도 니느웨 왕과 백성들은 회개하였습니다. 왕이 자기 왕좌에서 내려와 어의를 벗었습니다. 그리고 베옷을 입고 재가운데 앉았습니다. 짐승까지 금식하도록 조서를 내렸습니다. 이는 자신들은 요나가 말한 대로 하나님이 멸망시키신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란 것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누가 알랴?”(9절) 회복의 가능성이 전혀 없을지도 모르지만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참 회개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요나에게 기대하신 반응입니다. 그것은 여로보암 2세의 지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대하셨던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문밖에서 나간 자식 기다리는 아비처럼, 그 아들이 멀리서 느릿느릿 걸어보는 것을 보고 맨발로 뛰어나가 맞이하는 아비처럼, 하나님은 니느웨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4장에서는 3:4 이후 무대에서 사라졌던 요나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과연 긴 침묵 끝에 나온 요나의 반응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요나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1. 요나의 반응과 하나님의 질문(:1-4)
A. 요나의 반응(:1-3)
4:1 그것은 요나를 극도로 불쾌하고 하였으며, 요나는 화가 났다.
4:2 그가 주께 기도하였다. 이르기를 “오 주여, 이것이 내가 생각한 바가 아닙니까? 내가 나의 땅에 있을 때부터 다시스로 급히 도망한 것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은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며, 좀처럼 노하지 아니하시며, 변치 않는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시며, 벌하려는 생각에서 돌이키시는 분임을 제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니느웨가 용서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에 대한 이스라엘의 선지자 요나의 반응입니다. ‘불쾌했습니다(displeased).’ ‘맘을 상하게 하였습니다(hurt).’ 그것도 ‘극도로’(greatly) 싫었습니다.
‘불쾌하다’란 이 히브리어 단어(히, 라아)는 요나서 안에서도 ‘재난’(욘 1:8), ‘사악함’(1:2), ‘벌’(4:2), ‘괴로움’(4:6) 등의 뜻으로 5번이나 쓰이고 있습니다. 두 번은 요나에게(불쾌하다, 괴로움), 두 번은 니느웨 백성에게(사악함, 벌), 그리고 한 번은 요나와 선원들에게(재난) 쓰입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라아’의 대상이 요나와 이방인 선원들, 니느웨 사람들에게 모두 해당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니느웨 백성들에게 내릴 수 있는 징벌이 요나에게도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불쾌하게 여기는 요나의 마음’이 하나님께는 니느웨 백성의 ‘사악함’과 다를 바 없다는 암시를 주고 있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여기서 쓰인 ‘극도로’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앞에서 자주 나온 ‘가돌’입니다. 이것은 ‘큰 도시 니느웨’(1:2), ‘큰 바람’(1:4), (선원들이) ‘크게 두려워하다’(1:10, 16), ‘큰 물고기’(1:17), (니느웨는 하나님께) ‘중요한 도시’(3:3) 등에 쓰였습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도시(3;3)가 용서 받았는데 요나는 ‘극도로’ 화가 났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큰 물고기’에서 구원 받은 것을 모르는 소치입니다. 정작 요나 자신이 ‘큰 바람’으로 휘몰아치는 바다 가운데서 죽었어야 했던 사람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 역시 선원들처럼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했어야 했는데, 그 대신 ‘크게’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가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말하였습니까?
우리는 2절이 ‘기도하다’란 말로 시작하기 때문에 당연히 요나가 하나님께 고백한 말이 옳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 이 요나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부분은 출애굽기와 시편을 정교하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저도 이 고백을 히브리어로 써서 책상 앞에 붙여놓고 내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되새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순복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의 대면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대결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그분의 지혜와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을 관철시키지 못한 데 대해 분을 품고 하나님께 맞서는 태도였습니다.
심히 불쾌하고 성난 마음으로 그는 자신의 지난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오 주여, 이것이 내가 생각한 바가 아닙니까? 내가 나의 땅에 있을 때부터 다시스로 급히 도망한 것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다시스로 도망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니느웨를 용서하신 것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잘못이라는 겁니다. 오판이라는 겁니다. 다시스로 도망간 자신의 태도가 옳다는 겁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자신의 뜻을 따라야 했다는 겁니다. 요나는 감히 하나님을 가르치려 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게 되었습니까? 그건 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은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며, 좀처럼 노하지 아니하시며, 변치 않는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시며, 벌하려는 생각에서 돌이키시는 분임을 제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이중잣대를 쓰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모스, 호세아, 요엘 선지자들을 통해서 거듭거듭 회개의 기회를 얻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요나는 바다 속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성품이 싫은 것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이 자비 때문에, 이 은혜 때문에 철천지 원수가 내 형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1장과 3장이 요나와 이방인들의 태도를 대조함으로써 요나를 간접적으로 책망했다면 2장과 4장은 요나의 기도를 통해서 요나의 이중성을 비꼬고 있습니다. 2장에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찬양하지 않았습니까(2:7-8)? 주께서 구원해 주신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습니까(2:9)? 그런데 이제 그 대상이 달라졌다고, 즉 자기 자신에서 이방인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런 하나님의 속성을 불평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기도는 출애굽기와 시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맨 처음 나온 곳은 바로 출애굽기 34장 6-7절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예배하자 하나님은 율법을 새긴 첫 돌판을 깨뜨리게 하십니다. 그리고 출애굽의 은혜를 불과 며칠 만에 망각한 이들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이제 이 이스라엘을 버리기로 맘 먹는 데까지 이릅니다. 그러자 모세가 나섭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당신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출 32:11-12)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이 전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전에 자신이 범죄에 가담한 자들을 심판합니다. 그리고 전 백성의 회개를 이끕니다. 이에 하나님은 심판을 철회하시고 다시 언약의 돌판을 주십니다. 돌판을 받기 위해 호렙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의 산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로다.”(34:6-7).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전멸을 면한 것은 다 이 하나님의 속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나라로서 생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오래 참으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자격이 없었습니다. 요나는 이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때, 특히 자기에게 원수가 되는 사람에게 적용할 때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가장 큰 책망을 들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죄인과 세리들과 어울리는 예수가 못 마땅했습니다. 누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 15:1-2)
이 말씀을 들은 예수님이 주신 예화가 바로 ‘탕자(헤픈 아들, prodigal son)의 비유’입니다. 하지만 이 제목은 이 비유의 의도를 잘 반영하고 있지 못합니다. 제가 제목을 다시 짓는다면 ‘헤픈 하나님’(prodigal God)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돌아온 아들’이 아니라 돌아온 둘째 동생을 아무 조건 없이 맞아주고 잔치를 베풀어준 아버지에게 불평하는 ‘큰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이런 큰 아들을 꾸짖습니다. 이 큰 아들의 태도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태도라고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고 또 간접적으로 그들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꾸중을 들은 요나의 태도입니다.
요나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 볼까요?
4:3 “그러니 주여,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내가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니느웨 사람들과 형제가 되느니 차라리 그만 살겠다는 뜻입니다. 눈 뜨고는 도저히 못 볼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을 것입니다. 니느웨에 대한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순 사건 때 자기 아들들을 죽인 공산주의자를 용서하고 자기 아들로 받아들인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 이야기를 우리가 두고두고 하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건 어찌 보면 요나처럼 우리도 우리가 받은 용서와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고 향유를 부은 여인을 보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이 많음이라. 사함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그래서 사랑이나 용서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권면하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4:7-8)
우리가 사랑한 만큼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4:10, 19)
이것 때문에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증거하는 것을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에게 없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풍요의 시대의 선지자 요나처럼 겉으로는 신앙생활 하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는 시대에 저희들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가장 큰 걸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받은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고 가진 것을 당연히 여기면서 우리의 마음이 점점 자기 생각과 자기 만족에 길들여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이 무너지고 자기 신념을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이 죽기만큼이나 힘들어집니다. 연일 계속되는 흉측한 피살과 동반 자살의 소식. 풍요의 시대가 준 절망과 나약함의 단면이 아닐까요?
B. 하나님의 반응 (:4)
이런 요나에게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4:4 주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내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참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신다’고 비난 받았던 하나님이 요나가 ‘노하는 것’에 대해 추궁하십니다. 이 요나의 분노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6절부터 나옵니다. 그 전에 우리가 기억할 것은, 여기서 ‘화내다’(히, ㅋ하라)는 직역하면 ‘타오르다’ ‘뜨겁다’의 뜻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후에 하나님이 ‘뜨거운 태양과 동풍’을 보내신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단어입니다.
2. 요나의 반응과 하나님의 질문 (:5-11)
하나님의 질문만 나오고 우리가 기대한 것과는 달리 요나의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대답을 했는지 안 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저자는 의도적으로 싣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문맥상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4:5 Now Jonah had gone out of the city and sat down east of the city and built there a booth for him, and sat under it in the shade until he might see what would happen in the city.
“요나는 도시 밖으로 나가 도시의 동쪽에 앉았다. 거기서 자신을 위해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 그 도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보려고 하였다.”
요나의 대답 대신에 요나가 과거에 했던 한 행동이 나옵니다. 이 행동은 3:4 다음에 나와야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는 필사하는 과정에서 잘못해서 여기 들어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학자들은 자기 논리가 안 서면 으레 그렇게 말하니 별로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꼭 이야기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야 한다고 믿는 고약한 태도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히브리어 본문과 다른 사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즉 4:5이 3:4 다음에 나오는 사본은 아직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저자는 요나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요나는 “40일 후에 니느웨가 멸망할 것이다”라고 선포한 후 니느웨 동쪽으로 갔습니다. 거기다 초막을 짓고 이제 그 도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았습니다. 당연히 니느웨가 회개하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악독한 무리들이 그렇게 빨리 돌아서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어지간히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설사 뭔가 반응이 있더라도 그들은 결국 41일째 되는 날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체증이 ‘확’ 내려가는 멋진 장면을 보기 위해 니느웨 시를 다 내려다 보이는 곳에 명당을 잡고 임시거처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렇게 화내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요나가 행동으로 보인 대답은 무엇입니까? “옳습니다” 입니다. 말로 한 것보다 더 강한 효과를 줍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고 완악한 맘으로 하나님을 거스리고 있는지 풍자하고 있습니다.
B. 하나님의 질문(:6-11)
1) 키카욘과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심 (:6-8)
이제 하나님 차례입니다.
하나님도 아무 말씀 안 하시고 행동하십니다. 1장에서와 흡사합니다. 1장에서는 요나가 아무 말 않고 도망가니 하나님도 아무 말 않고 대풍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방금 전에는 요나가 말로 하나님께 대드니 하나님도 말로 요나에게 꾸짖듯 질문하십니다. 이제는 요나가 말 없이 초막을 짓자 하나님도 말없이 뭔가를 진행하십니다. 이렇듯 둘의 관계는 결코 만나는 법이 없는 철길 같은 평행선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또 왜 그렇게 하셨는지 볼까요?
4:6 주 하나님이 키카욘을 준비하셨다. 키카욘이 요나의 머리 위까지 자라 그의 머리에 그늘이 지게 하였으며 그를 괴로움에서 구원하셨다. 이에 요나가 키카욘 때문에 매우 즐거워하였다.
‘키카욘’이 무슨 식물인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대로 ‘키카욘’으로 번역했습니다. 앞에서 대풍을 임명하시고, 물고기를 임명하셨는데, 이번에는 키카욘을 임명하셨습니다(appoint or commission). 그러자 즉각 순종합니다. 요나가 그늘에 편히 쉴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상관없이 식물은 곧장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맘에 안 맞다고 불순종하는 요나와는 다릅니다. 초막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는데, 이제 키카욘 때문에 요나는 뙤약볕이 주는 ‘괴로움’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괴로움’이란 단어는 앞에 나온 ‘징벌’과 같은 단어입니다. 요나가 니느웨에게 내리기를 바랐지만 하나님이 철회하셨던 바로 그 징벌입니다. 요나는 뙤약볕이 주는 괴로움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 하나님이 내리시는 벌을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 자격없는 요나에게 키카욘의 순종을 통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요나는 즐거웠습니다. 요나가 물 속의 ‘재난’에서 구원 받은 후 즐거워했던 모습을 떠올리지 않습니까(2:9)?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2장과 3장에서는 구원해 주고 끝났는데, 이번에는 요나가 더 완강하게 하나님께 맞서자 하나님도 더 강력한 수단으로 그의 문제가 무엇인지 지적하십니다.
7절입니다.
4:7 그러자 하나님은 벌레를 준비하셨다. 다음날 동이 틀 무렵 벌레가 키카욘을 공격하자 키카욘이 시들었다.
이번에는 또 벌레를 준비하십니다. 앞에서 썼던 ‘임명하다’ ‘사명을
주다’라는 단어를 또 쓰고 있습니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요나가 잠든 사이에 벌레가 일어나 사명을 이행하기 시작합니다. 요나가 깨기 전에 벌레는 야금야금 키카욘 잎들을 먹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내 키카욘은 시들었습니다.
그리고는 1장에서는 깨닫지 못하는 요나에게 대풍을 보내셨는데, 이번에는 ‘뜨거운 동풍’을 보내십니다. 1장에서도 수고하지도 않았는데 마침 배를 만난 것을 보고 요나는 좋아했을 것입니다. 4장에서도 마침 키카욘이 초막 위를 덮어준 것을 보고 요나는 즐거워했습니다. 하지만 배나 키카욘은 모두 요나의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습니다. 8절입니다.
4:8 해가 떠오를 때에 하나님은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다. 해가 요나의 머리 위에 내리쬐자 요나가 기력을 잃고는 ‘내가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라고 말하며 죽기를 청했다.
1장에서도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던 요나가 이번에도 또 죽겠다고 나섭니다. 자기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조금도 참지 못하면서도, 태평하게 그늘에 앉아 니느웨가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겠다는 이 선지자의 태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냉정하다 못해 잔인한 선지자의 성품. 너무하다 싶다가도 이해하게도 됩니다. 자기 딸이 아무 이유 없이 살인마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시신이 토막난 것을 본 부모가 그 살인마가 살아서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지켜보고 싶겠습니까? 앗수르는 그 이상으로 잔인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많이 다른 것 같지만, 실은 그들이나 우리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온전할 수 없는 사람이란 데 대해서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조금만 내 뜻대로 안돼도 이렇게 불평하고 원망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세상에 나올 때 아무 것도 가지고 나온 것 없고, 내가 나오겠다고 결정하고 나온 것도 아니고, 살면서 내가 수고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많은 것을 가졌고 또 누리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이 원래부터 우리 것이었던 양 불평하지 않습니까?
2) 요나의 불평과 하나님의 질문(:9-11)
그런 우리에게, 그런 요나에게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4:9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키카욘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네가 그렇게 불평하는 것이 옳으냐?” 우리가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그렇게 억울하냐? 그렇게 서운하냐? 원래부터 그것이 너의 것이었느냐? 원래부터 넌 그런 대접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었느냐?” 항상 대접을 기대하고, 인정을 기대하고, 실패 없는 깔끔한 인생을 기대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물으십니다. “그렇게 기대하는 것이 옳으냐?” “지금 너의 상실이 너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아프다면 정말 너는 날 가장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냐?”
요나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요나가 대답하였다. ‘내가 죽기까지 화내는 것이 옳습니다.’”
새번역성경이 번역을 참 실감나게 했습니다.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죽을 만큼 화가 나니 화내는 것이 옳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이젠 말대답까지 합니다. 하나님이 틀리고 자기가 옳다는 것을 아주 직설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중간이 회개한 사람의 태도가 전혀 아닙니다. 중간에 마음을 바꾼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는 1장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마음을 바꾼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더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요나가 화내는 것이 왜 옳지 않은지, 그리고 하나님이 니느웨를 구원하시는 것이 왜 옳은지를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요나서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메시지가 나옵니다. 10-11절입니다.
4:10 주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일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저녁에 나왔다가 저녁에 죽어버린 키카욘을 염려하는구나.”
4:11 “그런데 내가 저 큰 도시 니느웨를 아끼지 않아야 하겠느냐? 그 성에는 좌우를 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명이나 있고, 많은 짐승들도 있느니라.”
요나는 키카욘이 생기고 또 자라는 데 전혀 일조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여 생기게 한 것은 없습니다. 고작 이미 있는 것으로 만들거나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을 할 뿐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씨 뿌리고 물을 주었을 뿐 자라게 하는 데는 전혀 관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아름답고 거대한 빌딩 숲 속에서, 정교한 로봇 앞에서, 우주를 넘나드는 우주선을 가리키면서,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고 새로운 의약품을 만들어 내는 사람의 손을 보여주면서, 그리고 변화무쌍한 일기를 미리 예상하면서 인간의 위대함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우리 인간은 할 말이 없습니다.
요나는 전혀 애정을 두지 않았던 키카욘에 대해서 무척 애착을 보입니다. 니느웨를 향한 마음과 비교할 때 얼마나 이중적인 태도입니다. 하지만 그 자체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에만 애착을 보인 것입니다. 아무 가치가 없는 것 같은 것이 시들어 버렸다고 죽기를 청했습니다.
그렇다면, 직접 나오게 하고 자라게 하신 하나님은 어떨까요? 얼마나 더 염려하겠습니다. 심지어 사람은 또 어떻겠습니까? 가축은 또 어떻겠습니까?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십 이만명’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를 말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거나 혹은 그간 주변 나라들에게 악명이 높았던 이방인, 즉 니느웨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둘 다 가능하지만 후자가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짐승’ 혹은 ‘가축’을 그 범주에 넣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요나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야 악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키카욘을 아낀다면 가축은 아껴야 마땅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요나가 니느웨의 구원을 반대하고 있다고 폭로하시는 것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하나님을 법을 무시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가 키카욘은 아끼면서 가축은 아끼지 않는 것이 모순입니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밉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화가 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학대한 앗수르가 구원 받는 것을 보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 가지 이유를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추측일 뿐입니다. 만약 요나가 아모스와 호세아와 요엘 선지자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메시지를 알고 있었다면, 그는 이스라엘이 머지 않아 앗수르에게 멸망 당할 수도 있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심각하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아주 심각한 상태라는 것만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앗수르의 용서는 곧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앗수르가 하나님의 확실한 심판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겠습니까? 앗수르가 용서를 받는 것도 마땅치 않거니와,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것은 더욱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남쪽 유다를 향한 메시지를 듣고 하박국 선지자가 가졌던 것과 비슷한 고민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했던 선지자 예레미야를 생매장 시키려고 했던 태도와 같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아니라도 이스라엘 사람이면 누구나 이렇게 요나처럼 반응했을 것이란 뜻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그렇게 반응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인간에게 허락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욥기서에서 보았던 것처럼,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취했던 태도처럼, 하나님과 맞설 수 있고, 대결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고 억울하고 분하여 하나님께 토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면을 위한 것이고 마주함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아니 대결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맞서야 합니다. 그것 없이는 대면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 없이는 하나님과 마주함에서 오는 찬양의 고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결을 통해 벼랑 끝에 설 줄 아는 자,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결은 의심이고 탄식이고 분노지만, 대면은 찬양이고 신비이고 외경심입니다. 대결을 피하고서는 대면이 오지 않습니다. 대결을 거치지 않는 믿음은 “가진 자들에게는 마취제요 없는 자들에게는 진통제”가 될 것입니다. 상식을 무시하고 지적 자살을 감행하는 믿음이 자기도취에 다름 아닌 것과 같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묻지 않는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참된 대면으로 이끌어주지 못합니다. 영광스런 하나님의 형상이면서 동시에 형편 없는 쓰레기보다 못한 존재인 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다스리는데도 불의가 정의를 삼키는 이 세상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실체와 마주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맞섬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 그것에 대한 우리의 맞섬. 여기서 대면, 즉 찬양과 경배와 머리 숙임이 나옵니다. 그것은 “비굴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 끝에 있는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몸가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무능력이나 무관심이나 무정함이나 무자비함이 아니라, 무고한 희생과 고난과 죽음을 욕되지 않게 하는 의미의 산고(産苦)임을 신뢰하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대결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하나님과 맞서 불의를 창출하는 것에 우리가 분노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우리 자신도 침묵하지 않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 침묵을 기존 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묵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놀라와 하시고, 그래서 입을 막고 통곡을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여, 우리도 그 주님의 마음으로 애통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하지만 요나의 대결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기 위한 맞섬이었습니다. 요나의 침묵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항이었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고백마저도 하나님께 전달되지 않은 소음이었습니다. 거기엔 회개와 머리 숙임과 복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이 없고 사랑이 없는 우리의 기도와 찬양에 마음이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천천 만만의 수양의 제사와 번제보다 상한 심령을 더 원하시고 인애를 원하시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을 더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III. 나가는 말
요나서는 이렇듯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납니다. 다시 말해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긴 침묵으로 끝납니다. 이 침묵이 우리를 어떻게 만듭니까? 불편합니까? 아니면 안도감이 듭니까?
요나를 향한 이 요나서 저자의 혹독한 비판은 어쩌면 누구인지 모르지만 이 책의 1차 독자들을 향한 비판일 것입니다. 요나와 같은 이유로 이스라엘 외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향해 요나서는 쓰여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이 침묵은 무엇을 요구할까요?
요나서 저자는 이 침묵을 우리의 회개로 채우기 원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 침묵의 여백을 우리의 찬양으로 채우기 원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대면이 대결로 이어지고, 우리의 맞섬이 마주함으로 이어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요나는 우리처럼 영웅이 아닙니다. 우리처럼 이기적이고, 우리처럼 자아 도취에 빠지고, 우리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들은 척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요나도 우리처럼 하나님께 대들었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가르치려 들었습니다. 우리처럼 요나도 이중잣대로 사람을 판단했고,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요나서의 이 마지막 침묵이 요나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희망을 남겨줍니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 앞에 인간의 첫 번째 반응이 바로 이 침묵이어야 합니다. 그 자유를 우리가 다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 누구나 알고 싶어하지만 그렇게 손에 잡힐 듯 쥐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침묵은 그 신비를 담는 적절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정’이고 ‘신뢰’입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먼저 아들을 저 세상으로 보낸 후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설교의 말처럼,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지자 요나에 대한 풍자와 조롱으로 일관한 이 요나서가 1차 독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아주 시원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우리 자신의 이중성을 드러내듯 아프게 합니다. 말씀을 맡아 전하는 저 같은 사람에겐 참으로 설교하기 힘든 본문입니다.
저도 요나처럼 힘든 명령은 못 들은 체 하고, 그러면서도 자존심은 있어서 다른 사람 앞에서는 경건한 척 하기 쉽고, 듣기 좋은 기도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살벌한 설교로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도 별 두려움 없이 즐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또아리고 있는 요나를 보기 바랍니다.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다시스입니까, 니느웨입니까? 나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합니까? 하나님이 전하시는 메시지를 똑똑히 듣고 있습니까? 깨달아 아는 대로 니느웨 백성들처럼 즉각 반응합니까? 선원들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십니까? 완강하게 하나님께 저항하고 내 머리를 숙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아끼는 그것이 처음부터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이제 우리 같이 요나서 4:12을 써나갑시다. 이 침묵의 여백을 채워 넣읍시다. 회개로, 찬양으로, 감사로, 헌신의 고백으로,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무한한 인정으로, 그리고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마음을 멍들게 한 그 누군가를 위해,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의 정의를 유린하고 전쟁을 일삼는 무리들을 향해, 니느웨에게 보이셨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그들에게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만한 일을 보여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설령 이 모든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하나님이 일하시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당신을 찬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우리의 다짐을 써내려 갑시다.
우리는 이 요나서의 저자를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이 요나서의 저자가 요나 자신이었다면 이 요나서가 어떻게 보입니까? 바로 이 요나서 전체가 요나서 4:12이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가 요나서 4:12 쓰기 전에 우리의 요나서를 쓰라고 하시는지도 모릅니다. 그 때 비로소 4:12이 제대로 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서의 침묵이 우리의 찬양이 되는 그 순간까지 우리 같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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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