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12.11일.토요일
성주답사
박성진
1.성주
‘별 고을’ 성주(星州).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지세가 별 모양을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낙동강과 소백산맥의 명산인 가야산의 수려한 풍광이 조화를 이룬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성주를 “산천이 밝고 수려해 일찍이 문명이 뛰어난 사람들과 이름 높은 선비가 많았다. 논은 영남에서 가장 기름져서 씨를 조금만 뿌려도 수확이 많다. 때문에 고향에 뿌리를 박고 사는 이들은 모두 넉넉하게 살며 떠돌아다니는 자가 없다”고 했다.
옛 성산가야1)의 터전이었던 성주. 성주읍의 동남쪽에 있는 성산(星山)에는 크고 작은 무덤들이 능선을 따라 밀집돼 있다. 이 성산고분군은 가야시대 지배집단들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성주와 인근 지역에서는 가장 커다란 고분들로 구성돼 있다. 현재까지는 129기가 확인돼 정비와 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무덤은 장방형으로 석실을 만들어 시체를 안치하고 부장품을 함께 넣은 석실분의 구조를 갖고 있다. 석실의 벽은 막돌로 쌓았다. 위를 덮은 천장석(天障石)은 평평하고 큰 돌을 몇 개 덮어 만든 뒤 한쪽 입구를 쌓아 막은 횡구식(橫口式)석실묘와 주부곽식(主副槨式)의 수혈식석곽묘(竪穴式石槨墓) 등으로 확인됐다. 주부곽식의 묘들은 장방형의 주곽과, 주곽보다 작은 장방형의 부곽을 나란하게 놓아 당시 순장의 풍습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월항면 인촌리로 발길을 옮기면 성주의 대표 문화유적인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 국가지정사적 444호)’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세종 20~24년(1438~1442) 사이에 조성된 전국 최대 규모의 태실지로서 수양대군을 비롯한 세종의 왕자태실 18기와 왕손인 단종의 태 등 총 19기를 안장했다. 조선 초기 왕실에서는 국왕과 왕자들의 태(胎)를 항아리에 담아 전국 명당에 안치해 왕권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했다. 이는 관상감에서 주관해 길지로 선정된 곳에 정해진 의식과 절차를 밟아 묻었는데, 이렇게 해서 완성된 시설이 태실이다. 또한 ‘태봉(胎封)’은 태실 가운데 그 태의 주인이 왕에 오를 경우, 격에 맞는 석물을 갖추고 가봉비(加封碑)를 세운 것을 일컫는다. 이러한 태실이 성주에는 태종과 세종대왕의 아들, 단종 등 세 곳이나 있어 ‘태실의 고을’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문화해설사 은덕희씨는 “태실은 풍수지리학으로 볼 때 산 사람의 거주지를 뜻하는 양택(陽宅)의 기(氣)를 받는 곳”이라며 “네모난 기단석은 땅을, 연꽃을 새긴 둥근 뚜껑 모양의 돌은 하늘을,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중동석은 인간을 상징한다. 이는 곧 천(天)·지(地)·인(人)이 한 곳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라고 설명했다. 태실 들머리 오른쪽에는 선석사(禪石寺)가 있다. 소박한 정취의 이 절은 근처에 세종대왕자태실이 조성되면서 이의 수호사찰로 유지되었으며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받기도 했다.
독용산성은 해발 955m의 독용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포곡식(包谷式) 산성2)으로 가천면 금봉리와 금수면 봉두리, 무학리와 영천리에 걸쳐 있다. 성의 평균 높이는 2.5m, 전체 둘레는 7.7km에 이른다. 성 안쪽에는 샘물이 풍부하고 밭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도 넓어 장기간의 전투에도 대비했다.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00여 년 전 성산가야 때 쌓은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조선 숙종 원년(1675년)에 관찰사 정중휘가 개축했으며 현재 네 방향의 성문터와 암문지(暗門址) 3곳, 객사·창고·군기고 등 건물터와 불망비(不忘碑)·선정비(善政碑) 등이 남아 있다.
수륜면 신정리에는 회연서원(檜淵書院, 경북 유형문화재 제51호)이 있다. 조선 선조 16년(1583)에 성리학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이곳에 회연초당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했는데, 훗날 문인과 유학자들이 선생의 높은 뜻과 학덕을 기리고자 초당을 헐고 세운 것이 이 서원이다. 평탄한 대지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인 강당을 중심으로 동·서재를 배치했다. 왼쪽 뒤에는 사당이, 앞뜰 백매원(百梅園)에는 신도비가 있다. 대가면 칠봉리 산중턱에 있는 청천서원(晴川書院)은 동강(東岡) 김우옹(1540~1603) 선생을 봉향했던 곳으로 1729년(영조5년)에 창건됐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훼철됐다가 1992년에 이곳에 복원됐다. 서원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위로는 세심교(洗心橋)가 놓여있다.
2. 김창숙 선생 생가
1) 김창숙 선생의 생가
김창숙(1879~1962) 선생은 조선 중기의 명현(名賢)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13대 종손으로 성주에서 태어났다. 호는 심산이고 본관은 의성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서는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해방 후에도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고 민족통일운동을 주도했다. 그로 인해 그는 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결코 굴하지 않았다. 죽을지언정 구차하게 살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김창숙 선생의 생가는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마을에 있다. 지금의 건물은 선생이 22세 되던 해 화재를 당하여 1901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사랑채는 1992년에 새로 지었다. 이곳에는 90세가 넘은 선생의 둘째 며느리 월성 손씨 할머니가 1992년부터 집을 지키고 있다. 할머니 나이 스물일곱에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이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그 충격으로 목소리까지 변했지만 삯바느질로 두 자녀를 키우며 모진 고문으로 걸음조차 어려운 시아버지의 손발이 되어 평생을 보냈다.
2) 심산의 독립운동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자 김창숙 선생은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과 함께 대궐 앞에 나아가 이완용·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목을 베자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렸다. 그러나 고종의 회답은 없었고 그는 통곡하고 돌아왔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의 반역배인 송병준(宋秉畯)·이용구(李容九) 등이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사주를 받아 한일합방론을 제창하자, 그는 뜻을 같이하는 유학자들을 모아 “이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다”라며 처벌을 주장하는 건의문을 중추원에 보냈다.
이때 성주에 주재하던 일본 헌병분견소 소장 노전미지개(盧田彌之介)가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곧 반역이 아닌가?”라며 건의문 취소를 요구하자, 심산은 “나라가 임금보다 중한지라, 혼미한 상태에서 내린 명령은 따르지 않는 것이 바로 충성하는 길이다”라고 선생은 자서전(自敍傳)에 기록하고 있다.
1910년, 끝내 나라가 망하자, "나라가 망했는데 선비로서 이 세상에 사는 것은 큰 치욕이다"하고 매일 술을 마시어 취하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고 취하면 문득 울었다. 선생은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방황하다가 선세(先世)의 유업을 망치겠다는 모친의 꾸짖음을 듣고 그 후 5년 동안 학문에 전념하였다. 선생은 "나의 일평생의 학문의 득력은 실로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했다.
1919년, 독립선언서에 유림이 참여하지 않은 것을 보고 선생은 “지금 광복운동을 선도하는 데 3교(천도교·기독교·불교)의 대표가 주동을 하고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유교를 꾸짖어 '오활한 선비, 썩은 선비와는 더불어 일할 수 없다'할 것이다”며 뜻을 같이하는 유림들을 규합하여 파리평화회의3)에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를 보냈다.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은 그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귀국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 제1차 유림단사건으로 체포됐다.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서로군정서 군사선전위원장과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을 맡았다.
1925년, 의열단원(義烈團員) 나석주(羅錫疇)에게 폭탄을 주어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를 폭파하고, 독립군 양병에 힘쓰는 한편, 주만독립군(駐滿獨立軍) 군사고문으로 활약하였다. 1926년 12월, 지병인 치질이 재발해 들것에 실려 상하이에 있는 영국인 경영의 공제병원에 입원했다. 1927년 2월, 재수술을 받고 가료를 하던 중 일본 영사관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3) 감옥에서의 투쟁
선생은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장기(長崎·나가사키)와 하관(下關·시모노세키)을 거쳐 입국하였고, 대구경찰서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선생의 자서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형구를 야단스레 벌려놓고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나는 웃으며 ‘너희들이 고문을 해서 정보를 얻어내려느냐? 나는 비록 고문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종이와 붓을 달라 하여 시 일절을 써주었다"
조국 광복을 도모한 지 십 년에
가정도 생명도 돌아보지 않았노라
뇌락(磊落)한 일생은 백일하에 분명한데
어찌 야단스럽게 고문하는가.
籌謨光復十年間 性命身家摠不關
磊落平生如白日 何須刑訊若多端
1928년, 변호사 김용무(金用茂)와 손치은(孫致殷)이 변호하겠다면서 위임서에 승인을 요청하였을 때, 선생은 시 두수를 써주고 거절하였다.
병든 몸 구차스레 살려고 안했는데
달성감옥에서 몇 해를 묶여 있구나.
어머니 가시고 아이는 죽으니 집은 망했고,
아내는 흐느끼고 며느리 통곡하니 숨결에도 놀라는구나!
사방득같이 기구한 신세 도망친들 무엇이 좋으랴!
문천상의 강개한 심정이면 죽어도 영광이리,
화복과 궁통은 명수에 정해진 것
병든 몸 구차히 살려고도 아니하노라.
病夫非是苟求生 豈科經年繫達成
母死兒亡家已覆 妻啼婦哭夢猶驚
崎嶇枋得逃何樂 慷慨天祥死固榮
禍福窮通元有命 病夫非是苟求生
그 후에도 변호사 김완섭(金完燮)이 변호를 자청하며 여러 번 만나자고 요청하자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변호를 거절하는 것은 엄중한 대의이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 군은 일본 법률론자이다. 무슨 말로 나를 변호하겠는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이 말씀은 독립기념관에 세워져 있는 심산 김창숙 선생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
결국 14년형을 선고받은 선생은 대전형무소에서 감옥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나는 고문을 받은 이래 병이 더욱 악화되어 두 다리의 마비로 진작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일어날 때 남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고 쓰고 있다. 대구경찰서에서 받은 고문 때문에 불구자가 되었던 것이다. 선생은 심산 외에도 벽옹이란 호를 갖고 있다. 앉은뱅이 노인이란 뜻이다.
1933년, 선생은 신임 간수장 궁기(宮崎)가 절을 할 것을 종용하자 “감옥 생활 6, 7년 동안 옥리에게 머리 숙여본 적 없다”면서, “내가 너희를 대하여 절을 하지 않는 것은 곧 나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고수함이다”라고 거부하니 읽을 책을 한권도 주지 않아 울분에 시 한수를 지었다.
7년 세월 죄수로 몸져 누웠으나
나의 본 자세를 지킴은 나쁘지 않으리라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으라니 어찌 차마 말하랴
분통의 눈물이 창자를 찢는구나
病臥刑餘己七霜 行吾素位亦無傷
搶頭膜拜那堪說 憤淚難收欲裂腸
1944년,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결성된 건국동맹(建國同盟) 활동을 하다 다시 체포되어 감옥에서 평생 그리던 해방을 맞았다. 선생은 자신뿐만 아니라 두 아들도 독립운동의 재단에 바쳤다. 큰 아들 환기(煥基)는 북경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1927년 옥사하고, 둘째 아들 찬기(燦基)도 학생운동으로 두 차례나 투옥되는 고초를 겪고 1945년 10월 머나먼 이국 땅 중국의 중경에서 해방의 기쁨도 느끼지 못하고 한 줌의 재로 돌아왔다.
4) 해방 후 통일운동
1946년, 선생은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1953년, 성균관(成均館) 초대 관장과 성균관대학 초대 총장을 역임하였으나 이승만 독재를 반대하자 문교부는 김창숙의 이름으로는
신입생 모집 불허 방침을 통보했고, 1957년, 결국 총장직도 사임한다.
1951년, 이승만 대통령 하야경고사건(下野警告事件)으로 자유당 정권의 부정을 국민들에게 알렸으며, 40일간 부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나온 후 반이승만 투쟁에 나섰다. 이승만이 집권연장을 위해 국가보안법을 개악하자 사퇴권고문을 보내는 등 반독재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축출되자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自統) 대표로 추대되어 통일운동에 나섰다. 1962년 5월 5일, 박정희 장군이 5․16에 성공한 후 병석의 심산을 찾아왔으나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돌아누웠으며, 5월 10일, 84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하셨다. 선생은 비록 돌아가셨지만, 그 염원은 1957년, 선생이 지은 ‘통일은 어느 때에’라는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역사적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조국광복에 바친 몸
엎어지고 자빠지기 어언 사십년
뜻한 일 이미 어긋나 실패하고
몹쓸 병만 부질없이 오래 가네.
눕히고 일으킴, 사람 손 필요한데
숨찬 증세 이상하게 오히려 끌고
가마에 실려서 고향에 돌아오니
언덕과 돈대에는 잿빛연기 가렸도다.
<중략>
아아, 조국의 슬픈 운명이여
모두가 돌아갔네 한사람의 손아귀에
아아, 겨레의 슬픈 운명이여
전부가 돌아갔네 반역자의 주먹에
평화는 어느 때나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에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영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므나
3. 백세각
1) 경북 유림들의 파리장서 사건을 의논한 곳 성주 '백세각'
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에 자리 잡은 백세각은 조선의 문신이었던 야계(倻溪) 송희규 선생(1494~1558년)4)이 지은 경북유형문화재 제 163호이다.
당시 세도가였던 윤원형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전라도 고산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섯 해 동안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 이름을 고산이라고 바꾸고 이곳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백세각이 남다른 것은 바로 이곳에서 지난날, 1919년 3·1운동 당시에 공산 송준필을 비롯하여 성주 지역 유림들이 성주 장날이 서는 4월3일 만세운동에 쓸 태극기를 만들고 보관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북 유림단이 '파리장서 사건'을 의논하며 모여서 유림들의 궐기를 독려하는 '통고국내문'을 만들고 배포한 곳이기도 하다.
백세각에 들어설 때, 우리를 가장 먼저 맞아 주는 건 키가 큰 회나무 세 그루다. 본디 회나무는 대과에 급제한 집안에서만 심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 집에는 세 그루나 있다. 이 집의 회화나무는 해평 북애고택이나 성주 회연서원의 회화나무처럼 대문간이나 집앞에 있는것이 아니라 집안에 있는데 이것은 남달리 불에 약한 터와 집을 화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집안에 심은게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 실제로 이집에서 불이 여러 번 났었고, 최근에는 13년 전에도 불이 나서 사랑방이 타버린 일도 있었다고 한다.
'口' 자 모양으로 된 안채에는 높다랗게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세워졌는데, 맞배지붕 건물에다가 쇠못을 쓰지 않고 구멍을 뚫어 사리로 얽어놓았다. 또 대패질을 하지 않은 채 자귀로만 깎고 다듬어서 집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오른쪽으로 얕은 나무 계단을 밟고 좁은 난간을 붙잡고 올라서면 다락방이 두 곳이 있다. 바로 이곳이 옛날 경북 유림들이 한데 모여서 '파리장서 사건'을 의논하고, 성주 장날에 맞춰 만세운동을 펼칠 때 쓸 태극기를 손수 만들고 보관했던 곳이다. 또 파리장서 사건을 일으키며 전국의 유림들이 일어나 줄 것을 부탁하는 '통고국내문'을 쓴 곳이기도 하다.
2) 국내에 통고하는 글(통고국내문)
아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나라가 회복되면 죽어도 오히려 사는 것이요, 나라가 회복되지 못하면 살아도 또한 죽은 것이다. 이 날이 무슨 날인가 서울을 비롯하여 밖으로 이름 있는 도시와 큰 항구 및 깊은 산골 외진 마을에 이르기까지 혈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환호하고 춤추며 한 마음으로 함께 외치지 않는 자가 없으니 하늘의 뜻이 화를 내린 것을 뉘우치고 사람들의 마음이 단결되었음을 이미 알 수 있도다.
아 우리가 입을 다물고 혀를 깨물며 분노의 눈물을 흘리고 소리 없이 통곡한 지가 지금 십년이 되었도다. 이제 천 년에 한 번 있는 기회를 만나 만방의 여론이 스스로 공평하여 나라를 회복할 가망이 있는데도 우리가 어떤 사람이기에 문을 닫고 앉아만 있을 수 있겠는가 이에 우리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글을 띄워 우러러 고하노니 이것은 실로 온 나라가 같은 심정일 것이며 여러 군자들의 생각 또한 마음속에서 빛날 것이다.
원컨대 지금부터 군에서 향으로 향에서 동에 이르기까지 각각 독립의 깃발을 세워 종노릇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뜻을 밝히자. 그리고 다시 만국 회의에 글을 보내어 우리의 실정과 소원을 알게 함으로써 공평한 여론이 널리 펼쳐지게 한다면 천만다행이리라. [통고국내문 전문]
3) 파리장서 사건의 발단이 된 '백세각'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儒林)대표 곽종석(郭鍾錫) ·김복한(金福漢) 등 137명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탄원서를 작성 서명하여 이를 심산 김창숙 선생이 상하이[上海]에서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일경(日警)에게 발각되어 곽종석 이하 대부분의 유림대표가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국외로 망명하였다. 그 후 곽종석 ·김복한 ·하용제(河龍濟) 등은 감옥에서 순사하고 그 밖의 인사들도 일경의 고문에 못 이겨 죽거나 처형되었다. 3·1운동 때엔 온 나라의 일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고 한다면, 파리장서 사건은 그때 함께 하지 못했던 유림들은 일제에 강제로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잘못된 일을 세계에 알리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의미가 담긴 사건이었다.
백세각의 안채의 안과 밖에 새로 쌓은 듯한 축대는 몇 십 년 앞서 더 좋게 꾸민다고 개인 돈을 들여서 쌓은 것이다. 그러나 도리어 원형을 훼손한 꼴이 되어버렸고, 몇 해 앞서 불이 나는 바람에 사랑방에 걸린 한석봉 선생이 쓴 '백세각'이란 현판조차도 불에 타서 지금은 볼 수 없다.
4. 한개마을
1) 마을유래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자리한 한개마을은 1450년경 성산 이씨(星山 李氏)인 진주 목사를 지낸 이우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그 후 성산 이씨 정언공파(正言公派)의 씨족마을로 발전하였다. 이후로 이 마을에서는 응와(凝窩)이원조(李源祚)5)나 한말 성리학의 이론가로 알려진 이진상(李震相)6) 등 이름난 선비들을 많이 배출했다. 마을은 높이 325m의 영취산(靈鷲山)을 주산으로 삼고 백천(白川)을 바라보는 풍수적으로 좋은 형국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앞으로 낙동강 지류인 백천이 흐르는데 이곳에 큰 나루가 있었다고 해서 한개마을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개마을에는 70여 채의 한옥과 초가 등이 어우러져 있고, 몇 집을 제외하고는 현재까지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곳에는 북비고택과 교리댁, 하회댁 등 보존상태가 특히 뛰어난 집들이 많이 있으며, 마을의 건물들은 대부분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건립되었다.
2) 북비고택
한개마을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아서는 안 되는 인물과 건물이 있는데 바로 북비고택이다. 북비고택은 영조때 무신 이석문이 사도세자 참사 후 이곳에 내려와 그를 애도하며 ‘북쪽(北)’으로 ‘사립문(扉)’을 내고 평생을 은거했다는 충절이 깃든 곳이다. 이 집은 응와종택, 대감댁으로도 불린다. 사랑채 건물 아래에는 아궁이 굴뚝이 마당 쪽과 집 뒤쪽으로 양 갈래로 뚫려있다. 굴뚝 안쪽에는 홈이 파여 있어 그을음을 걸러낸다. 이덕주 문화해설사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마당 쪽으로 낸 굴뚝으로는 흰 연기가 나오게 되어있는데 배기의 기능뿐 아니라 동시에 모기 등의 해충을 쫓는 역할을 한다”며 “굴뚝을 양쪽으로 낸 것은 가난한 이웃들을 배려한 점도 있다”고 설명했다.
북비고택北扉古宅이라는 명칭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1762년 영조 20년,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려 했다. 사도세자의 호위 무관이었던 이석문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막으려 어명을 어기면서까지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결국 그는 어명을 거역한 죄로 곤장 50대를 맞고 관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사도세자의 호위 무관이었던 이석문은 남쪽으로 난 사랑채 문을 헐어 담으로 둘러치고 북쪽 담을 헐어 작은 문을 달았다. 북비北扉라는 말은 북쪽으로 난 사립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석문은 매일 새벽 의관을 정제하고 비명에 죽어간 사도세자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북향사배를 했다고 한다.
3) 교리댁과 그 밖에 집
교리댁(校理宅, 경북민속자료 제43호)은 조선 영조 때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 등을 지낸 이석구(李碩九)가 지었다. ‘교리’라는 집 이름은 이석구의 현손인 이귀상(李龜相)이 홍문관 교리(校理)를 역임한 데서 비롯됐다. 집은 안채와 사랑채를 비롯해 대문채, 중문채, 서재, 사당이 서로 떨어져 배치돼 있다. ‘일(一)’자형의 정침을 중심으로 각 건물이 독립돼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튼 입구(口)’자형 배치는 이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이다.
교리댁 옆에는 하회댁(河回宅)이 있다.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깨끗하게 손질돼 첫눈에도 정갈한 느낌을 준다. 사랑채 대청에 우물 반자를 만든 것이나 안채 건넌방 퇴에 난간을 두르는 등 고급스러운 양식을 보여준다. 하회댁이라는 택호는 이 집의 며느리가 하회마을에서 시집을 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며느리의 가문을 따라 택호를 정하는 예는 흔치 않다. 지금도 집의 이름이 하회댁이 이곳에 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다. 86세의 나이임에도 자태가 고운 할머니는 16세에 처음 이곳에 시집을 왔으니까 70년을 이곳에서 지낸 셈이다.
이 집에 며느리로 들어온 후 시어른으로부터 귀여움을 받아 건넌방 옆에는 일하다가 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처음 시집 왔을 때 식구가 30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옛 법도에 따라 바깥 출입은 거의 하지 못하고 규중 안에서만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할아버지는 노인회관에 나가시지만 할머니는 함께 나가지 않는다.
북비댁 위로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월곡댁이 있다. 이 집은 삼성생명 이수빈 회장의 집이라고 한다. 월곡댁 뒤로는 송림이 우거진 숲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마을 오른쪽으로는 마을의 공동재실인 월봉정이 있다. 이들 외에도 한주종택과 극와고택 등이 있다. 마을 위에는 신라 애증왕 때 창건했다는 감응사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4) 새사랑채를 안으로 들인 독특한 구조
한옥의 구조도 아주 특별하다. 안채, 사랑채, 새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새사랑채가 안채와 나란히 앉아있는데 새사랑채를 안으로 들인 것도 드문 일이다. 안채는 여성의 공간이고 사랑채는 남성의 공간이어서 엄연히 구별되어야 하는 서로 간에 금역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특히 새사랑채는 별난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새사랑채는 누마루처럼 꾸민 마루 한 칸과 온돌방 한 칸, 창고로 구성되어 있다. 누마루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卍자 모양으로 멋을 냈다.
특히나 방은 신혼부부 둘이 묵으면 딱 맞을 정도 크기의 방이다. 한쪽 벽면에 문이 세 개가 있는데 크기가 다 다르고 용도도 다르다고 한다. 한 개는 이불장, 한 개는 책을 넣어두는 서고였고 또 하나가 기발한데, 바로 바람의 공간이라고 한다. 여름에 문을 열지 않고도 밖의 바람이 들어오도록 한 문인데 둘은 넣어두는 공간이었고 하나는 소통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5) 배산임수형 마을
월봉정, 첨경재, 서륜재, 일관정, 여동서당 등 다섯 동의 재실이 있고,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그리며 북쪽으로 사립문을 냈다는 북비고택, 이진상이 학문을 닦던 한주종택, 20세기 초 목조 건축인 월곡댁,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교리댁 등이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진사댁도 유명하다.
특히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대번에 배산임수를 고려한 마을 지세가 눈에 들어온다. 북쪽 영취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산이 둘러싸고 있고, 중앙의 구릉지에 마을이 들어서 있으며, 마을 앞쪽으로는 낙동강 지류인 백천이 흐르고 있다. 이것은 산줄기가 좌청룡 우백호로 뻗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이곳은 영남 최고의 길지로 꼽히는 곳이라고 한다. 전통한옥들 사이로 자연석에 황토를 발라 쌓아올린 토석담 3,300m가 유려한 곡선을 이루며 한국미를 잘 보여준다.
1) 성산가야 : 《삼국유사》에 5가야의 하나로 전해지는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 있던 나라.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 성산(星山)이라는 지명은 원래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757년(경덕왕 16)에 일리군(一利郡:고령군 성산면)을 개칭함으로써 생긴 것이다. 따라서 성산가야라는 명칭은 적어도 경덕왕 대 이후의 신라 하대에 쓰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근거하여 성산가야라는 국명(國名)은 성산군이라는 관념이 경산(京山:성주군 성주읍) 및 벽진(碧珍:성주군 벽진면) 일대까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던 신라 말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정한 견해가 있다. 즉 이 지역의 지방호족이었던 이총언(李忿言) 세력이 신라 말에 반신라적인 명분의 하나로서 성산가야라는 국명을 조작해 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본래 이 지역에는 벽진국(碧珍國)이라는 독립소국이 있었다가 4세기 말 이후 신라 영향권에 편입되었고, 결국 6세기 초반 무렵에 완전히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한다. 성주지역이 낙동강 서안지역이었으면서도 그 유물의 특징이 이웃한 고령(高靈)과는 달리 신라의 출토품과 거의 유사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였다는 것이다. 기존에 성산가야는 금관가야(金官伽倻)가 중심이 된 전기 가야연맹의 하나였다가 후에 신라의 영향권에 편입된 나라라고 이해하는 것이 지배적이다.
2) 포곡식 산성 : 성곽안에 골짜기(谷)를 포함하여 축조한 것으로 성 내부는 수원(水原)이 풍부하며 활동 공간이 넓은 것이 특징입니다. 대개 테뫼식보다 규모가 크며 보다 후기의 것들이 여기에 포합됩니다. 그 이외에 테뫼식 산성과 복합식 산성이 있는데 테뫼식 산성은 봉우리들을 둘러쌓아 성을 축조한 것으로 산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7~8부 능선을 거의 수평으로 하여 둘러싼 형태이며 산성 가운데 초기 소규모의 산성이 주류를 이룹니다. 마지막으로 복합식 산성은 테뫼식과 포곡식을 합쳐놓은 형태의 산성으로 성곽 안에 산 정상과 골짜기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규모가 큰 산성이며 도성(都城)의 경우 그 규모로 인해 자연히 복합식을 이룹니다.
3) 파리평와회의 :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 전쟁에 대한 책임과 유럽 각국의 영토 조정, 전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 등을 협의한 1919년 ~ 1920년 동안의 일련의 회의 일체를 가리킨다. 영국과 프랑스, 미국 주도로 이루어진 약 5개월 간의 기본 협의(평화회의)와 이에 따라 차례로 진행된 패전국과의 조약협상(강화회의)이 1920년까지 진행되었다. 이를 한데 모아 ‘파리평화회의’라고 지칭한다. 유럽에서 진행된 전쟁으로 유럽을 장기간 무질서 속에 빠뜨린 결과, 새로운 규칙과 제도를 마련하여 질서를 회복하고 지킬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유럽의 정치, 외교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장기간 그리고 다양한 회의를 진행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협상국세력(영국, 프랑스, 러시아 - 이탈리아, 미국, 기타 다수)이 동맹국세력(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이탈 -헝가리, 불가리아, 투르크) 측에 대하여 승리하여, 자연히 회의의 주도권은 협상국(승전국)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동맹국(패전국)은 참여를 허용하지 않았다. 처음 회의는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일본 5개국이 주축이 되었으나, 일본은 유럽 문제에 큰 관심이 없어 자진 빠졌고, 이탈리아는 아드리아해의 피우메 지역 영토 분쟁문제로 파리회의에서 철수하여, 결국 영국(로이드 조지 Lloyd George 수상), 프랑스(조지 클레망소 Georges Clemenceau 대통령), 미국(토마스 윌슨 Thomas W. Wilson 대통령) 세 나라에 의해서 회의가 주도되었다.
이 회의에서 국제문제를 풀어나갈 원칙으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4개조항(The Fourteen Points)을 제시하였다. 공개외교, 공해에서의 해양의 자유, 무역조건의 평등화, 군비축소, 식민지나 영토문제는 당해 주민의 이해에 따라 해결, 러시아는 자신의 체제를 가질 권리, 벨기에에서 독일군 철수,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랑스에 반환, 이탈리아 국경 민족구분성에 따를 것, 합스부르크 제국 안의 여러 미족 자치정부 가질 권리, 발칸반도에서 미군 철수할 것, 투르크의 주권과 영토 보존할 것, 폴란드의 독립, 국제평화기구 창설 등이 강조되었다. 이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 National Self-Determination)와 집단안전보장(集團安全保障) 원칙이었다. 그리하여 패전국에 대한 무배상, 무병합의 원칙을 주장했지만, 전쟁의 상처가 큰 당사국의 반대로 패전국에 대하여 가혹한 제재(배상과 영토 상실)가 주어졌다.
4) 송희규 : 조선전기의 문신. 본관 야로(冶爐). 자 천장(天章). 호 야계산옹(倻溪散翁).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흥해(興海)군수·장령(掌令)·상주목사(尙州牧使)·집의(執義) 등을 거쳐, 1546년(명종 1) 예빈시정(禮賓寺正)이 되어 그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대구부사(大邱府使)가 되었다. 이어 장령으로서 왕의 외숙인 윤원형(尹元衡)의 무도(無道)함을 탄핵, 그를 제거할 것을 상소했다가 5년 동안 고산(高山)에 유배당하였다. 풀려나자 그곳에 집을 짓고 스스로 야계산옹이라 부르며 문필에 힘썼다. 문집 《야계문집(倻溪文集)》이 있다.
5) 이원조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성산(星山). 자 주현(周賢). 호 응와(凝窩). 시호 정헌(定憲). 1809년(순조 9)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1837년(헌종 3) 정언(正言)을 거쳐 1850년(철종 1)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재직중 경상좌도(慶尙左道) 암행어사 김세호(金世鎬)의 탄핵으로 삭직되었다. 다시 기용되어 대사헌을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문집에 《응와문집(凝窩文集)》이 있다.
6) 이진상 : 본관 성산(星山). 호 한주(寒洲). 자 여뢰(汝雷). 경상북도 성주 한개[大浦] 출생. 17세 때 숙부 원조(源祚)의 교훈으로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일찍부터 과거에 뜻을 두었으며 15,6세 때부터 대과책문(大科策文)을 짓기 시작하여 우수한 책문가로 알려졌다.1857년(철종 8) 청나라에서 반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대의 예를 철폐하자는 취지의 상소문을 지었으며, 1862년 삼남 전역에 민란이 일어나 조정에서 삼정문란(三政紊亂)의 대책을 묻는 윤음(綸音)이 발표되어 ‘응지대책(應旨對策)’을 올렸으나 왕의 비답(批答)을 받지는 못하였다. 1866년 국가제도의 개혁안을 제시한 《묘충록(畝忠錄)》을 저술하였다. 1871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에 대해 반대운동을 벌였고, 1876년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가 화의 성립으로 중단하였다. 또 천주교의 전파를 서양과 통상함을 우려, 《대학》 《심경(心經)》을 자주 강조하였다. 1880년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져오자 척사의 뜻으로 글을 지어 고을에 돌렸다.그는 주자(朱子)와 이황(李滉)의 주리론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이일원론(理一元論)을 주장하였다. 그의 학문에 대한 비판·분석·전개는 심오했으며 마침내 심즉이설(心卽理說)에 이른다. 문인으로는 곽종석(郭鍾錫) ·허유(許愈) ·이정모(李正模) ·윤주하(尹胄夏) ·장석영(張錫英) ·이두훈(李斗勳) ·김진호(金鎭祜) 등이 있으며 이들을 ‘주문팔현(洲門八賢)’이라고 한다. 문집으로 《한주집(寒洲集)》이 있고 그 밖의 저서로 《이학종요(理學綜要)》(22편 10책) 《사례집요(四禮輯要)》 《춘추집전(春秋集傳)》 《직자심결(直字心訣)》 등이 있다.
첫댓글 이 자료는 전에 대학원 모임에서 답사갈 때의 자료입니다. 허락을 받고 퍼 오려고 했는데 대명으로 글을 올려서 착각해서 다른 사람에게 허락을 받고 정작 올린 사람에게는 허락을 못 받고 올립니다. ㅠㅠ 추후 문제 생기면 내립니다. ^^
다른 님들도 사진 안 뜨나요? 원 자료 사진은 뜨는데 여긴 안 뜨네요. 올린 날은 떴는데... ㅠㅠ
귀중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저도 사진 안 뜨는데요...
자료를 파일로 붙였습니다. 파일을 다운 받아 보면 뜰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