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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현상학과 시차적 관점
가끔씩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마음가짐(mind-set)은 어떠한 모습일까에 대해서 생각하곤 한다. 최근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장 잘 표현한 이는 부시 정부시절 국방부 장관이었던 도날드 럼스펠드(Donald Rumsfeld)가 아니었나 싶다. 그는 기자와의 정례 브리핑에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로부터 위협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것들(the unknown unknowns)’이라 얼버무린 적이 있다. 이와 유사한 현상이 우리의 무의식적인 마음가짐이라고 고원의 히어로우 지젝도 종종 언급했던 것 같다. 지난 세기 라캉은 “인간의 무의식성은 언어로 구조화된다(The unconscious is structured as a language).”라고 주장하면서 전 정신분석의 구성물을 철저하게 언어적으로 독해하려 했다. 그렇지만 인간의 무의식이 우리의 언어로 표현된다 해도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우리 마음의 무의식적인 차원은 기술이 거의 불가능한 현상일지 모른다. 전 철학사에서 논리나 이성 이전의 시간 축을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은 우리의 이러한 학문적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특히 4세기말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시간에 대한 비밀을 밝히고 있는 『고백록』 제10권과 제11권은 오늘날 정신 분석가는 물론 현상학자들에게도 여전히 가장 어려운 숙제로 남아있다. 20세기 여러 심오한 시간 현상학의 포문을 열었던 후설 스스로 자신의 최초 시간의식에 대한 강의에서 오늘날 인간의 선(무)의식을 다루는 시간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그 어떤 사상가도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을 비껴갈 수도, 뛰어넘을 수도 없다고 절망스럽게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보다 절실히 요망되는 것은 우리의 무의식적인 마음가짐(mind-set)의 굴레를 덜어주는 작업을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위에서 전 미 국방부 장관이 모른다고 얘기한 미지의 신념과 가정은 우리 자신이 거기에 얽매어 있음을 자각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행위와 감성을 결정하게 되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50년도 채 안되어 이룩했던 근대화 작업은 사실 지난 500년 동안 서구를 지배해왔던 모더니스트적인 마음가짐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근대화를 시작할 무렵 서구 유럽에서는 이러한 근대적인 마음가짐을 어떤 식으로나 덜어내거나 교정하려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오늘날 사태(things)에 대해 기존의 모더니스트적인 틀보다는 보다 적합한 관찰을 가능하게 하는 틀을 제공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흥미롭게도 현재 우리는 그 두 작업을 동시에 시도하고 있다.
라캉의 무의식에 대한 통찰과 다르지 않게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 또한 바로 언어에 대한 포스트모던적인 비판에 내포되어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담론은 탈영역화 되고, 로고스 중심의 형이상학과 거대담론을 지양하고, 표상주의(representationism)의 함정도 피해가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노력들을 반영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언어 역시 모더니스트적인 담론과 다를 바 없이 하나의 방언일 따름이라면 어찌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언어 그 자체가 인간조건과 삶의 질을 결정하는 모태를 형성하게 된다는 문제의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장 단순히 표현해서, 모더니티에서는 합리화가 어떤 역할을 떠맡고 있다면 포스트모더니티에서는 상상력이 중요하다. 이러한 유비에는 우리 인간이 이성을 관장하는 아폴로와 비이성을 대변하는 디오니소스 둘 다를 필요로 한다는 입장이 깔려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한 해의 9개월은 델피 신전에서 아폴로 신을 모시며 제 정신으로 살고, 나머지 3개월은 디오니소스가 델피 신전을 떠맡아 인간의 주신성, 생명력 그리고 비합리성을 드높이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에 대한 니체적인 통찰을 20세기 정치이론가인 왈도(Dwight Waldo)는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조건 속에 깊숙이 새겨져 있는 것은 하나의 이중성으로서 어느 정도는 두 개의 경향들, 두 개의 가능성들 간의 적대성이다. 이들 중의 하나는 이성, 합리주의, 인지, 논리, 고전주의 등과 같은 용어들에 의하여 의의가 부여된다; 다른 하나는 신념, 감성, 직관, 감정, 정열 등의 용어들에 의하여 의의가 부여된다. 서양의 역사는 하나의 경향의 다른 경향에 대한 상대적인 우위와 거기서 생기는 특정한 ‘혼합’의 입장에서 쓸 수 있고, 대개의 경우는 그렇게 쓰여 졌다 (Public Administration in a Time of Turbulence, Chandler, 1971, 270쪽).
이와 같이 아폴로적인-디오니소스적인 대비를 통해서 담론의 위계적 방식을 벗어나고자 하는 방식은 단지 어떤 입장도 없는 (positionless) 것으로 오인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언어에 대한 이러한 해석적 방법은 인간의 조건에 본래 내재되어 있는 아폴로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두 개의 경향, 두 개의 법칙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또한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우리 마음의 무의식적인 굴레를 어느 부분 덜어주려 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우리 의식 안에 깔려있는 이율배반적이거나(anti-nominal) 또는 양률적인(bi-nominal) 입장들이 단순히 모더니티의 방언과 포스트모더니티의 방언 내지는 입장을 병렬시키려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잠시 여기서 니체의 아폴론적-디오니소스적인 대비를 현상학 본래의 영역에 위치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먼저 우리는 이러한 대비와 관련하여 무엇이 현상학적으로 본래적(primordial)인가를 궁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세기 초반 횔덜린-헤겔-쉘링으로 이어지는 독일철학의 정점은 지난 세기 20년대와 30년대 후설-하이데거-아렌트로 이어지는 현상학자들에 의해서 재현된다. 특히 하이데거와 그의 가장 명민한 제자인 정치현상학자 한나 아렌트 양자의 현상학적 통찰은 탄생성(natality)과 필멸성(mortality)이라는 궁극적인 경험의 준거로 집약된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은 존재론적으로 탄생성과 운명성의 법 아래에 놓이게 된다. 탄생성의 특징은 우리를 새로운 시작으로 인도하며 그 특징은 마치 사춘기의 질풍노도의 시기처럼 출발점의 속성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모든 단계에서 이러한 탄생성을 경험한다. 예컨대, 유엔 창설, 갈릴레오와 소크라테스 등과 같은 이름은 탄생성의 속성 없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탄생성이야말로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충분한 이유를 선언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이는 맥락 안에 놓이게 된다. 탄생성이야말로 모든 욕망의 어머니로서 극대화를 지향한다. 우리의 탄생으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는 충동은 우리로 하여금 뭔가 '공통적인 것'에 대한 형상을 정립하도록 한다. 다시 말해서 탄생성은 우리를 원칙, 토대, 나아가서는 일종의 지배적인 환상을 정립하도록 한다. 이러한 공통적인 것에 대한 환상들은 죽음이 우리를 단독화 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들을 단독화 하는 현상들의 조건에 의해서 부서지게 된다.
한편 필멸성의 특징은 일상생활의 사태(things)와 더불어 작동한다는 점이다. 이 필멸성은 자기에게만 주어진 무엇을 단독화 하는(singularize)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종국점에 직면하게 되는 모든 경험을 불확실하게 하는 탈맥락화(decontextualization)를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 단순하지 않은 본래적인 단독성이 존재한다. 있다. 우리의 미래는 종국으로 치닫는 필멸성이 있어 더욱 공고해 지고, 탄생성의 궁극적인 경험의 준거가 있기에 우리의 미래는 총체적이 된다.
우리의 과제는 이러한 탄생성-필멸성, 맥락화-탈맥락화, 극대화-단독화, 공동-개인을 가장 본래적인 “처음”의 “조건들”로 재차 거슬러 가서 모더니티 방언과 포스트모더니의 방언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여기서 모더니티의 방언은 탄생성-맥락화-극대화-공동-합리화를 지향하며, 반면에 포스트모더니티의 방언은 필멸성-탈맥락화-단독화-개인을 지향하게 된다. 서로 보완 관계에 있는 두 방언 내지는 시각들은 개인을 희생하지 않고서 공동체의 공동선을 정당화할 필요성을 지향한다. 하지만 정작 여기서 우리를 구속하는 것은 단순히 '공통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필멸성에서 비롯하는 '단독적인 그 무엇'도 우리를 구속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단독적인 것은 공통적인 것과는 별개의 진리 안에, 즉 포스트모더니티의 방언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공통적인 것은 생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단독적인 것은 지금-이것(this-now)과 관계있는 그 무엇이다. 결국 탄생성과 필멸성이라는 두 궁극적인 경험의 준거에서 볼 때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의 관계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법칙에 의해서 작동하며 서로 분리될 수 없으리만큼 얽혀있으며, 늘 갈등적인 상황을 야기할 수밖에 없는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다시 말해서, 모더니티의 보편화를 지향하는 충동의 궁극적인 것들과 포스트모더니티의 단독화를 지향하는 철회 사이에는 어떤 조정도 가능하지 않다.
한편 탄생성과 모더니티의 축에 있는 원칙과 충동의 극대화 과정은 늘 일상 언어의 환상적인 작업, 즉 일상 언어로 공유된 것 안에서 발생한다. 여기서 환상은 법칙들 가운데의 법칙(the law of laws)으로서 탄생성과 모더니티를 축으로 하는 궁극적이고 주도적인 원리를 가리킨다. 이러한 환상이 주도적이라 함은 전 문화가 거기에 의존하게 되는 상태를 이름이다. 문제는 그러한 주도적인 환상이 말할 수 없는 단독자에게도 작동할 때이다. 이렇게 작동하는 환상은 모든 다른 현상들을 흐리게 만드는 지속적인 이미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보통명사와 환상은 우리로 하여금 단독자를 탈실재화(de-realize) 하고 단정적인 실재를 극대화시킨다. 이런 이유로 환상의 영역에서 단독성은 특수성으로 변형된다.
이러한 지배적인 환상은 무엇보다 우리의 역사적인-언어적인 관용어에 의해서 제도화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언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가 우리를 관용적어적인 방식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에 의해서 제도화된 지배적인 환상을 통해서 사물들(things)과 실재(the real)는 하나의 대상(objects)이 되고 그럼으로써 세계를 상실한다. 역으로 대상 대신에 사물들에 대해서 얘기한다함은 실체들을 기획하고 있는 도식(scheme)이나 궁극적인 틀(frame)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오늘날 근대성의 기획 아래에서 이러한 거대 도식은 예외 없이 사물들을 대상 쪽으로 밀어붙인다.
이러한 패러다임적인 두 방언들 사이의 관계는 소위 고진과 지젝이 주장하는 시차적인 관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후자의 방언, 즉 포스트모더니티의 입장을 통한 언어 이해는 우리의 관심을 타자에 대한 개방성(openness)으로 인도한다. 이는 또한 인간의 이성 능력에 대해서 철저히 회의적이며 동시에 문화적인 위계질서를 거부하기에 점진적으로 다문화적일 수밖에 없는 시대에 지극히 다문화적인 형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타인”에 대한 개방성, 다양성의 선호, 상위 내지는 거대설화에 대한 반대, 그리고 기존 질서에 대한 반대를 표방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티 언어는 “유희적이고(the playful), 잠정적이며(the tentative), 개방적인(the open)” 특징들을 갖는다.
예컨대, 우리는 데리다가 언어의 외재성(exteriority)이 갖는 해방적 효과의 측면에서 직접 정의의 문제를 다룰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항상 정의의 문제를 다루어 왔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데리다가는 1989년 자신의 기념비적인 강의를 담고 있는 『법의 힘』에서 불어를 모국어로 가지고 있는 그가 타자의 언어인 영어를 가지고 타자로서 전문 법학도들에게 정의의 가능성을 기를 쓰고 이야기하려는 것처럼, 타자의 언어로 타자에게 말하는 것이 모든 가능한 정의의 조건이라는 그의 주장은 예사롭지 않다. 일찍이 비평고원에서도 데리다의 『법의 힘』(2004)을 다분히 독단적으로 논의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현상학적 탈구성주의를 표방하는 데리다에게 있어 정의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한 마디로 어떤 언어 안에서 동일한 관용어(idioms)를 사용하는 것이다 -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진태원 선생은 이 “idioms”을 보다 고상한 표현으로 옮겼던 것으로 얼핏 기억한다. 우리 인간들은 그러한 언어 안에서 누가 되었건 간에 어떤 판단 능력을 갖추고 있다. 관용어를 구사하는 능력의 차이와 별 상관없이 문제는 한 공동체의 모든 성원들이 시종일관 동일한 관용어를 공유하지 않을 때 부정의의 폭력은 시작된다는 점을 우리는 지난번 용산 사태에서 처절하게 경험한 바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방언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용어인 “주체의 탈중심화(a decentering of the subject)”에도 잘 드러나 있다. 예컨대, 여기서 가능한 질문은 “어떻게 모더니티의 중심에 있는 우리가 자신의 언어인 모더니티 언어의 국외자가 될 수 있겠는가?”이다. 이에 대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의 표현을 빌어서 대답한다. “요람에서 아기를 훔쳐 내어서 곡예사가 타는 줄을 걸어라(steal the baby from its crib, walk the tightrope).” 여기서 아기는 모더니스트 언어를, 곡예사가 위태롭게 타는 그 탄탄한 줄은 포스트모더니티의 언어를 은유화 하고 있다. 결국 타자에 대한 개방성은 반권위적이며 권위주의 집단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모든 결정들을 공동체에게 개방하려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그 개방성은 상당한 정도의 실질적인 무정부주의(anarchism)가 필요하고 이와 병행하여 지역공동체의 형태로 미시정치가 발전해야 할 필요성을 담고 있다. 여기서 무정부주의는 어떤 지역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위 어떤 권위조직의 전문적 판단과 상충하더라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민들은 질서유지를 위해서 자신들의 의지로 줄을 서는 방식으로 자체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다(self-police). 이러한 방식은 과정상 규모를 줄이면서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무정부적인 안배를 용이하게 해주는 부분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의 무의식적인 마음가짐의 굴레를 언어의 다층적인 차원을 드러냄으로써 다소 완화시킬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각기 개인의 경우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라 생각된다. 어떤 사람이 몇 개 국어를 그리고 어떤 언어를 말하는가에 따라, 곧 그에게 얼마만큼 그리고 어떤 사물, 세계 또는 자연이 열리는지가 결정된다. 그리고 그가 입 밖에 내는 모든 단어는 그가 몸담고 있는 세계를 변화시키며, 이 세상에 있는 그와 그의 장소를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언어 안에서 그 어떤 것도 무관하지 않다. 또한 그 어떤 것도 말하는 방식만큼 요긴하지 않다. 언어의 부패는 곧 인간의 부패이다 (Sternberger, D., G. Storz, and W. E. Süskind. 1968. Aus dem Wörterbuch des Unmenschen. Hamburg and Düsseldorf., 7쪽을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의 방언 사이에서 우리 모든 텍스트의 직물이 다시 짜여질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실과 이 실이 다시 기술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의 가능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텍스트를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 차이를 인정할 수 있을 뿐 세상 그 어디에도 아르키메데스 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물을 볼 때 어떤 시각적인 견해들을 피할 수 없고 아무런 시각적 구성없이 파노라마를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우리는 이 모든 구성행위가 필연적으로 언어의 맥락 내에서 행해지고, 우리의 사고는 언어에 새겨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각과 렌즈는 그것이 탈구성의 윤리를 위한 유용한 도구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유용함은 언어가 텍스트 의미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언어는 생각하고, 생각들을 구상하고 소통하기 위한 도구 이상이다. 국가 간의 언어의 차이를 보라. 우리는 미국인들이 흔히 쓰는 관용적인 표현에 익숙지 못하면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그들과 우리가 달리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각각 그들과 우리의 현실, 그리고 대상을 달리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언어가 바로 우리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관념, 접근방법, 제도, 가정 그리고 충동의 용광로인 셈이다. 누군가의 말대로 “언어가 우리의 모습을 만든다(It shapes us)”를 생각해 보라.
하이데거는 전후 긴 공백을 깨고 다시 재개한 강의에서 언어 현상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단순히 수단이 아니다. 그게 지금은 이 방식이 될 수 있고, 또 지금은 저 방식이 될 수 있다. 언어는 도구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언어는 이것이나 저것이 아니다. 즉 언어는 그 자신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언어는 언어이다(Die Sprache ist die Sprache)”(M. Heidegger, 1961. Was heisst Denken? 100쪽을 보라). 여기서 그의 관심은 단순히 언어 철학이 아닌 언어의 존재와 그것의 본질적인 물음에 있었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구름이 하늘의 구름이듯이 존재의 언어가 된다. 따라서 현존재(Dasein) 또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 (“Das Dasein hat Sprache.” Heidegger, Martin. 1972. Sein und Zeit, 165쪽). 세계-내-존재를 의미하는 현존재의 언어는 공적이며 담화 또한 현존재의 구성에 관여하기 때문에, 현존재는 늘 벌써 스스로를 표현해왔다(ausgesprochen) (하이데거에게 있어 “세계”의 공공성에 대해서는, 그의 Sein und Zeit, 71쪽을 참고하라).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데거는 “언어가 말을 한다(Die Sprache spricht)”고 주장한다(M. Heidegger, 1961. Was heisst Denken?, 100쪽.). 이를 달리 표현하면, “사실들은 스스로 말할 수 없다”가 된다. 인간의 두뇌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르긴 몰라도 인간만큼이나 정교한 뇌구조를 가지고 있는 돌고래가 생각할 수 없다면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사실들은 말할 수도 쓸 수도 없지 않는가? 요컨대, 말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며 말하는 것과 쓰는 것 둘 다 언어를 가진 주체를 필요로 한다. 주체는 또한 필연적으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명백히 드러나 있는 개념체계를 통해서 대상을 본다. 우리의 언어와 우리가 속해 있는 집단 언어에 의해서 모든 의미와 사회적 구성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중시할 필요가 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현상학에서는 다양한 층위의 ‘세계’ (worlds)를 기술해 왔다. 예컨대, 현상학은, 삶의 세계, 본래적인 세계, 계시의 영역들로서의 세계, 본래적인 현전의 존재법칙(economies)에 따라 작동하는 세계, 놀이의 세계, 집약(gathering)의 세계, 맥락화의 세계 등에 대해서 논의해 왔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세계는 각기 자신의 법칙에 의거해서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는 현상화 과정을 밟아간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topoi)와 영역들을 가로지르거나 무시할 수 없으며, 거기에 따르는 다층적인 세계는 결코 하나의 층위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즉 우리는 언제나 이처럼 다양한 세계에 새겨진 우리 자신들을 발견한다. 특히 후기 후설과 후기 하이데거의 현상학에서는 지역을 초월하고(trans-regional), 세계를 초월해 있는(trans-worlds) 궁극적인 팬타즘(fantasm)에 극렬하게 저항한다.
일상 언어를 통해서 제도화된 지배적인 환상이나 강한 이미지가 사태 그 자체나 실재를 왜곡을 시키는 과정에 대한 비근한 예를 현상학적인 통찰로 영화작업을 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홍상수 감독의 얼마 전 영화, “해변의 여인”의 한 장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장면은 주인공인 영화감독 중래가 자신의 여자 친구 문숙에게 간밤에 자신이 저지른 예기치 않은 외도의 상황을 정당화시키려는 대화의 한 부분이다.
중래: 아, 이거 이거 옛날에 깨달은 건데 내가 지금 다시 싸우게 되니까 좀 더
자신이 생긴 것 같애. 이거 잠깐 봐봐.
너 이러는 거나 너 순결의식이나 다 이미지잖아? 남들이 심어놓은 이미지를 우리가 반복하고 있는 거잖아.
봐봐 이게 실체라고 생각을 하자고. (울퉁불퉁 아메바 같은 도형 그린다.)
이게 계속 변하면서 무한대 굴곡이 있잖아.
그 예를 들어 사람들이 여기 여기 여기에 이 포인트에 시선이 가면 환기 되는 이미지가 생기게 돼요, 이런 식으로... 너가 외국 남자하고 잔건 이거는 그 섹스 할 때 여자가 신음하는 얼굴이라고 하고 이거는 그 외국 남자의 성기 이미지라고 하고 이거는 그 비디오에 나오는 그 이상한 체위라고 생각을 할 때 이 세 포인트가 세트가 되는 순간에 기존의 불결한 이미지에 딱 맞아 떨어지는 거거든. 그럼 실체가 없어지고 이 이미지만 남게 되는 거거든. 그런데 예를 들어서 한 요 포인트 정도에 너가 전날 밤에 떡볶이 먹고 해피해하는 얼굴을 넣고, 또 요기에다가는 너 친한 친구가 아픈데 걱정하는 니 이쁜 얼굴을 넣고, 또 뭐 이 정도에 너 똥 누는 얼굴 정도를 넣자고. 그래서 이렇게 연결을 하면 대강, 뭐 이런 도형이 나오겠지? 그지? 근데 이건 그 자주 보는 게 아니니까 쉽게 잡히지가 않을 거라고. 근데 어쨌건 이 삼각형 보다는 실체하고 훨씬 가깝다는 거지. 이게 그러니까 계속 노력을 하다 보면은 이 상투적이고 사악한 이미지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애. 깨트릴 수 있을 것 같애. 그러니까 우리는 이 다른 포인트를 같이 볼 수 있게끔 노력을 해야 될 것 같애. 응? 무슨 말인지 알겠어?
문숙: 훌륭하다 자기! 흐흐 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
중래: 허허, 그래 이렇게 싸우는 거야. 지금.
문숙: 이거 정말 좋은 생각인 것 같애. 그래? 똑똑하다 중래 씨!
아마도 정신분석가는 위에서 홍상수 감독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주체로부터 주체가 경험하는 것의 총체를 규율하는 근본적인 환상(fantasy)을 여러 현란한 담화를 통해서 떼어내려 할 것이다. 아마도 또 누군가는 충분히 상이한 방언을 다중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기존의 언어에 나타난 무의식적인 마음가짐의 굴레를 풀어줄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음직하다. 사실 사회적으로 구성된 현상의 측면에서 볼 때 여러 언어들을 통해서 기술해서 얻어진 이해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무의식적인 마음가짐의 굴레를 풀어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이러한 인정이 다중적인 현실 내지는 사건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사건(es; it) 내지는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다. 그것만이 어떤 구속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접근해 갈 수 있을 것인가? 그 사건이 구속력을 갖는 방식은 칸트적이거나 헤겔적인 의미의 시차적인 관점이 아니라 바로 현상학적인 의미의 시차적인 관점을 통해서만이 해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인간이 비극적인 세계에 살고 있음을 전직 대통령을 통해서 실감한다. 그것이 한낱 언론플레이라도 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올가미를 씌우려는 사람도 올가미에 씌지 않으려는 사람도 공히 같은 법칙에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사랑스런 노무현 대통령이 비극적인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도덕률을 몰라서도 여러 도덕률에 혼란스러워서(anomic)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피치 못하게 두 개 법칙(doubly nomic)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비극적인 세계는 무법천지의 세계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은 두 법칙에 이중으로 구속된다는 점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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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 낮부터 아이온님의 글을 출력해서 읽고 있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 많습니다. 홍상수 <해변의 여인>에서 이 장면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상 깊을 것이고, 또한 여러 방면에서 회자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배적인 환상이나 강한 이미지가 사태 그 자체나 실재를 왜곡을 시키는 과정에 대한 예시로 이 부분을 들어주셨는데, 아이온님께서 미처 못다 하신 숨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고원의 천부적인 이야기꾼 ‘이자크 디네센’이라 불릴만한 아이온님께서는 늘 바쁜 분인지라, 시간이 허락한다면, 한번 들려주십사는 청을 드려봅니다.
아니, 디네센을?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못들은 걸로 하구요. 말씀하신 홍상수 감독의 그 장면은 이미지로 설명되지요. 저는 그와 비슷한 취지로 이를 우리 일상 언어로 공유하고 있는 데서 발생하는 환상적인 극대화 과정의 좋은 예로 들고 싶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의 지각, 통각, 상상의 영역은 해석의 문제와 맞물려 있고 그러한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를 저는 초월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이 그러한 강한 이미지를 갖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위반(transgression)이지요. 그 위반의 과정이 일상적으로 '표상'이 되는거겠구요. 문제는 표상이라 하는 것이 모든 문화/시대를 주도할 때 일 것 입니다.
우리는 이 궁극적이고 지배적인 원리를 팬타즘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홍감독이 환상 극대화과정을 아메바 모습의 실재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먼저 내게 친숙한 중요한 몇 꼭지를 '선택하고'(select) 그 다음 '배제하는' (exclude) 수순을 밟는거죠. 우리의 강철같은 의지에 기초한 근대화 과정과 철학적인 진리 역시 사실 이러한 과정을 부추기는 기능을 하죠. 특히 진리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한국의 교육현실, 우리나라의 인정 구조 등은 어떻습니까? 너무 많은 것들이 배제되고 중요치 않은 요소들이 버젓이 사안의 핵심이 되고 있지요. 이와 관련된 예는 모모님께서 저보다 더 생생히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사실 디네센은 제가 닮고 싶은 영혼이기도 합니다. 아이온님을 디네센에 비유한 것은 아이온님 특유의 재능(?)을 높이 샀기 때문입니다. 아이온님만큼 타인 안에 내재되어있는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귀한 재주를 가진 분을 만나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자칫 상대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만치 상대의 ‘급소’를 자극해서 스스로 자신의 사유를 펼치게끔 하는 묘한 재주를 가지고 계신 분이 바로 아이온님이시지요. 저도 아이온님께 던진 질문에 대해 스스로 고민을 하긴 했습니다만, 특별히 건진 것은 없습니다. 중래가 다가가고자 하는 실체는 긍정, 부정적인 부분이 함께 어우러진 문숙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형태의 도형,
즉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지요. 중래가 문숙의 과거 행적에 대한 의구심으로 그녀에 대한 특정한/부정적인 환상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그것이 극대화됨으로써 고정적인 이미지/판타지를 갖게 될 것을 경계해야만 한다고 문숙에게, 아니 자기 스스로에게 세뇌시키려 애쓰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팬타즘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중에 갈수록 부정적인 것에, 즉 몇 개의 꼭짓점에서 기인한 선입견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아이온님이 ‘우리의 사랑스런 노무현 대통령’이라 호명하신 노 대통령에 대한 팬타즘이 긍정과 부정을 어지러이 오가다 결국 그에게 치명적인 올가미를 씌우려하는 것처럼,
아웃사이더들까지 일이 어찌 돌아가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처럼, 우리네 삶이 대단히 비극적이라는 것을 절감하고/비통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라는 이름으로 배제시키는/배제되는 것들 중에는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을 뒤바꿔놓을 만한 극적인 설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무수히 보아왔습니다. 우연히 포털 사이트 대문에 걸린 사이코패스를 다뤄서 불편하다는 새 미니시리즈 기사를 읽다가 사이코패스에 대적하는 주인공이 ‘쓰레기 만두 파동’으로 자살한 형의 복수를 시작한다는 대목에서 잊혀진 그때 그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2004년에 있었던 일이라 아이온님은 아마도 이곳에 계시지 않았을 때인 것 같은데,
일명 ‘쓰레기 만두 음모론’입니다. 쓰레기 만두 사건은 정부가 국민연금 사태를 덮기 위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어느 때고 터뜨릴 수 있었던 ‘만두소’ 문제를 자극적인 ‘쓰레기’라는 수식어를 붙여 세상에 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관심을 그쪽으로 쏠리게끔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심심하면 기함할 뉴스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먹거리 사건’들에 비한다면 자투리 무를 사용해서 만두소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새발에 피’ 정도라고 해야겠지요. 우리민족의 파르르 끓어올랐다가 시간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냄비근성’을 잘 이용한 ‘마술’이었습니다.
현충일 즈음 분노한 주부들이 만두를 길바닥에 내팽겨 치고 발로 짓밟으면서 울분을 토하는 장면들이 각방송사의 저녁뉴스를 장식했습니다. 이런 마녀사냥식 음모론들은 국민들이 들끓을 때마다 슬그머니 서해바다에 잠입했다던 무장공비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고맙게도 모모님께서 많은 생각거리를 주셨군요. 차분한 시간에 답변 드리도록 하지요. 그나저나 모모님의 어머님 경순 여사의 가정경영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영숙씨라는 분도 예사롭지 않기는 매 한가지 입니다.
그럼요, 아이온님이 차분한 시간이라면 저는 언제든 좋습니다. 제가 까칠하고 불같은 성정이 있기는 해도 기다리기‘는’ 또 잘합니다. 예전에 보수동 헌책방 골목 초입에서 발끝을 내려다보며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린 경험도 있는지라... 이 ‘는’자를 어디에 붙이느냐에 따라 의미가 많이 달라집니다. 한 친구가 저를 두고 그러더군요. “공부에‘만’ 자신감 있다”라고... 이 친구가 이렇게 말한 것은 공부를 열심히 한다 내지는 잘 한다, 가 아니라 공부 말고는 하고자 하는 의욕도 없고, 할 줄도 모른다는 것을 교묘하게 비꼬기 위해서 한말인데, 이것을 “공부에 자신감‘만’ 있다”로 알아들은
같은 친구이자 그 친구의 남편이기도 한, 또 다른 친구가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더랍니다. 경순 씨도 그러하고 영숙 씨도 그러하고 예사로운 가족 구성원은 아니지요. 언젠가 영숙 씨가 경순 씨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을 보고 정말 화가 나서 영숙 씨를 밀친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젖가슴은 오직 내 것이기에, 어린 조카들을 재우기 위해 빈 젖을 물리는 것까지는 하는 수 없이 참아줬지만, 영원한 라이벌인 영숙 씨와는 절대 공유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유치함의 극치에 다다른 행동이었지요. 어이없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던 큰 조카의 얼굴이 떠오르고,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납니다.
모모님의 적나라한 꼬리글을 읽고 있자니 우리 각자가 떠안고 있는 현실이 얼만큼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구성'이 되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거기에 분명 평준화될 수 없는 뭐가 있지요? 그 나이에 근사한 남자의 가슴도 아닌 엄마 젖가슴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것 하며, 어린 큰 조카가 가지고 있는 현실과 비교해도 많이 동떨어져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모모님이 지향하는 행복도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다르실 수밖에요. 하지만 그 현실에 먹구름(환상)이 잔뜩 끼면 정말로 자신이 무엇으로 사는지 종잡을 수 없을 것 입니다. 그래도 모모님께선 계속 자신의 본래 모습 잃지 마시고 그 유치찬란한 자기 현실을 잘 지켜가길 바랍니다.^^
제가 좀 적나라하고 유치찬란한 구석이 많지요? 이제 큰 조카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것에는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아이온님이 자주 멍석을 깔아주시는 의중에, 어쩌면 제자신이 현상학적으로 ‘연구대상’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환상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제자신이 무엇으로 살아가는지는 잘 알고 있으니 고유한 빛을 쉬이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항상, 아이온님 특유의 아낌없는 격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