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적 모습의 거친 산야와 2만여 고려동포인, 두번의 민주혁명을 만들어낸 나라 키르키스탄을 다녀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한 키르기즈의 산야는 때묻지 않은 태고적 자태를 간직한 곳이었다. 아침해가 가장 먼저 3000m대 높이의 흰백색 만년설에 와 닿아 발생하는 강력한 황금빛의 신비감은 말로 형용하기 어렵다. 수도 비슈베크에서 카라콜시로 가다가 나타난 대협곡은 사람의 손이 닿지않은 달 표면의 일부를 보는 것만 같았다. 대(大)목초지 알틴아라샨 캠프지 그리고 라첵산장으로 이어지는 숲속 길 좌우로 가문비나무가 거대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쭉쭉 뻗어 곧고 기품있게 자란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들꽃을 보면서 거친 땅에서 이처럼 잘 자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척박한 땅에서 솜다리꽃, 장구채, 엉겅퀴, 에델바이스 등등 숱한 꽃들이 동양에서 온 이방인들을 반갑게 맞아줬다. 키르기즈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엄청난 물이다. 이 나라 강수량이 500mm 내외지만 겨울에 내린 눈이 녹아내려서 생겨난 252개의 강과 제주도 4배 크기의 산악호수를 만들어 냈다. 국토의 90%가 산악지대이고 4%가 빙하로 이루어져 사암(沙岩)구조로 된 스카스카계곡, '7마리 황소'라는 뜻의 제틔오구스계곡, 봄계곡, 황금온천을 뜻하는 알틴아라샨계곡과 카라콜계곡 등 숱한 천혜의 자연경관을 빚어냈다. 키르기즈의 고려인들은 약2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1937년 소개(消煯)정책으로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키르키즈스탄으로는 1958년 거주 이전의 자유가 주어지자 많이 이주하였다. 1991년 구소련연방에서 분리독립 후 두 차례의 시민혁명을 통해 민주화를 이루었다. 시내 '꺼지지않는 불'의 알라토광장이 키르기즈 국민 가슴속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사람들이 온순하고 신이 주신 '중앙아시아의 스위스', 생애 첫 고산 등반과 아름다운 인연을 맺은 곳, 이곳이 바로 키르기스였다.
1일차 2019.7.20 토요일 인천공항에서 카자흐스탄 알마티, 키르키스탄 비슈케크를 가다
인천공항 제1터미널 3층 A카운터 혜초여행사에서 체크하고 F19에 가서 수화물을 탁송했다. 기내반입과 탁송해야 할 것을 사전에 신경써서 구분한 덕분인지 부치는 짐 때문에 번거로운 일 없이 완료가 잘 됐다. LG유플러스에 가서 로밍을 했다. 7일께42000원 정도,10일거는 1만원정도 비쌌다. 개통 시간을 비슈케크에 도착하는걸로 해서 7일이용권으로 결정했다.(로밍은 26일 오전 11시 kab이사회 영상회의가 있어 가입했지만 산속에서는 먹통이 돼서 사흘째되는 날 탈퇴했다) 11시 40분쯤 이륙했다. 함께 온 물망초님이 옆에 탔다.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1시간쯤 지나 갑자기 배가 아팠다. 베개와 요청한 담요로 배를 따뜻하게 해줬다. 조금 덜하였지만 계속 불편했다. 화장실에 다녀오고부터 차츰 좋아졌다. "비어 오아 치킨?" 스튜어디스 말에 닭고기도시락을 택했다. 시장해서인지 맛이 더 좋았다. 레드와인을 곁들인 기내식 점심이 그만이다. 남은 음식이 생긴 걸 핑계삼아 맥주 1캔을 더 시켜 싹 비웠다. 승무원들 키가 훤칠하고 상냥하다. 중년쯤 되어 보이는 여승무원도 있다. 여전히 일선에서 일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노동자 우대의 사회주의 노사정책이 밑바탕에 깔려있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거의 7시간을 날아와 수도 알마티에 도착하였다. 항공 환승을 위해 탑승권 확인과 사람, 짐검사를 함께 받았다. 까다롭지 않았다. 이후 거의 3시간 정도 횐승비행기를 기다렸다. 여행기간 동안 등산회원들끼리 필요한 비용을 쓰기위해 1인당 20달러를 걷었다. 제일 먼저 작은 주류코너에서 총무가 맥주와 샌드위치를 샀다. 바가지였다. 맥주 한캔 가격이 12,000원. 비싼 술 먹었다며 투덜대는 소리가 났다. 소나무님에 의해 반전이 생겼다. 바로 옆 면세점에서는 술값이 1/12가격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작은 보드카를 구입한 것으로 몇몇이 나눠 마셨다. 약간의 여흥이 돋고 기분전환이 되었다. 알마티공항 환승장에 다시 들리게 된다면 '시바스' 스낵코너의 바가지 요금을 떠올리면서 면세점 물품으로 시간을 때우리라. 오랜 기다림과 달리 약 55분 정도 걸려서 키르기스탄 수도 비슈케크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고 버스로 이동했다. 바깥 기온이 41도, 찜통날씨다. 승차하자 마자 현지 가이드가 얼음생수 한병씩을 나눠 줬다. 생각지않은 서비스에 약간의 감동을 느꼈다. 유도선수였다는 우슬란 수석가이드(35)는 한국 장수막걸리공장에서 3년간 일한 경험이 있고 그 때 배운 한국말 이라고 한다. 다시 자기 나라로 와 혜초여행사 가이드생활을 한 지 5년 됐다고 한다.
"키르기스탄은 600만명이 살고 이중 100만명이 수도에서 살죠. 4% 정도가 한국인 까레이스끼에요. 현지언어 소개할까요? '살람 안녕하세요, 라흐만 감사합니다, 캄차 얼마에요...' 이 나라는 90%가 산입니다. 특이한건 돈있는 무슬림 사람들의 경우 결혼을 4명까지 가능합니다. 대중적인 술은 보드카, 42도입니다. 무슬림국가이기 때문에 돼지고기는 거의 안먹고 양이나 소고기, 말고기를 많이 먹습니다. 닭고기도 잘먹어요. 지금이 수박 메론 살구 제철입니다. 휘발유는 1리터에 500-600정도로 쌉니다. 1달러에 69솜하고 산에서 자라는 수종중 가문비나무가 가장 많습니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40분정도 걸렸다. 골든드래곤 5성호텔이다. 1층 한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돼지고기 두루치기에 육개장, 잡채와 입맛에 맞는 반찬이 나왔다. 보드카와 맥주를 곁들였다. 얼굴은 전에 뵙지만 인사를 나누지 못했던 동반자님과 한의원장님, 처음 뵙는 포천 털보님과 인사를 나눴다. 가이드 팁이 80달러, 식사후 전달했다. 원정 첫날 함께 묵을 사람은 총무인 새신발이다. 씻고 짐을 분류했다. 내일부터 2박3일간 알라아르차국립공원과 라첵산장을 걷게 된다. 처음으로 나온 고산 등산에 대한 기대감에 마음이 설렌다. 어느 정도 짐을 분류하고 숙면했다.
2일차 2019.7.21 일요일 국립공원 1호인 알라아르차국립공원, 라첵산장 3200m을 가다
부스럭소리에 5시가 좀 안돼서 깼다. 어제 일정 정리하고 다시 잤다가 일어났다. 호텔 아침식사가 좋았다. 특히 메론과 살구, 자두가 싱싱하고 당도 역시 높았다. '다방커피' 한잔으로 마무리했다. 1.5 리터 물을 보충하고 남은 짐 정리를 다시했다. 고추와 양파를 의성마늘햄과 곁들이는 술안주와 멸치, 어묵-국물떡볶이, 꽁치묵은지찜 재료, 매운연어와 낮은 기온의 산장을 고려해 가져온 패딩, 두툼한 내복 다수, 물 1.5리터, 기타 악세사리들이 배낭무게를 급격히 끌어올린다. 고민 고민하다가 술안주 일부와 소주4팩, 물1리터를 포터에게 맡겼다. 짐이 조금 줄어들자 살짝 안심이 왔다. 우리 차는 1시간 정도 시내를 관통하여 교외로 달렸다. 차창밖으로 천산산맥 줄기가 보인다. 올려다본 고산, 설산의 준령들이 하늘과 맞닿아 신비로움을 연출한다. 오늘 오를 산들이 저 멀리 그저 까마득하기만하다.
알라아르차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배낭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코펠, 후라이펜, 햄과 어묵, 떡볶이, 행동식, 등산악세사리, 소주4개, 물2리터, 속옷, 겉옷, 등산복, 신발, 배낭50리터 자체무게...라첵산장에서 2박을 하는 일정이기 때문에 호텔에서 짐을 분류할 때 고민이 많았지만 내가 해야할 역할을 생각해서 준비한건 모두 담아왔기 때문이다. 알라아르차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약 2100m에서 트래킹을 시작했다. 산이 워낙 험하고 고산이다보니 계곡이 깊고 경사도 매우 가팔랐다. 속도를 내지않고 뚜벅뚜벅 걸었다. 산을 둘러싼 대부분의 수종은 가문비나무였다. 오래된 것은 2, 3백년은 족히됐을 거목들이 눈에 띈다. 설산에서 내려오는 하천 옆 군락을 이룬 모습이 장관이었다. 발을 딛고 걷는 길 아래는 안전펜스 하나 없는 천길 낭떠러지여서 무척 조심하면서 전진했다. 너덜지대가 반복하여 나타났다. 모래와 자갈이 많을 때도 있었고, 붉은색 이끼로 변한 큼지막한 바위구간이 나타났다. 몹시 힘들었다. 날씨는 많이 더웠다. 길 옆 들꽃들-장구채, 솜다리꽃, 괴불주머니, 찔레꽃, 엉겅퀴가 7월의 폭염을 힘겹게 이겨내고 있었다.
드디어 라첵산장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5시간의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다. 설치물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겼다. 우리가 묵는 곳은 다인실이다. 내일 일정은 4500m 우치텔피크를 찍고 10시간 정도 예상되는 이번 등산의 하이라이트 구간이다. 고소증, 난이도, 거리를 생각해서 짐 정리를 했다. 화장실을 다녀왔다. 양철로 얽어 맺다. 푸세식이 아니고 그냥 싸는 구조고 주변으로 흘러내리는, 자연방뇨 무대책의 현장이었다. 우리나라 5, 60년대를 연상케 했다. 국립공원이니 산업적인 인식을 해줬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다. 주변을 살폈다. 좌우전방 깍아지른 산과 계곡이 장관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설산이 태고의 신비감을 준다. 풀 한포기 없이 오직 날카롭게 손톱을 세운 바위가 나를 향해 찌를 듯이 기울어져있어 위협감 마저 감돈다. 푸른 하늘과 스치는 바람의 결이 우리나라 도시에서 느낄 수 없을 만큼 색다르다. 설산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계곡물에 손과 얼굴을 당궜다. 10초도 못견디고 몸을 세울만큼 얼음장처럼 차다. 자연에서 발산하는 날 것 그 자체의 면모를 라첵산장에서 본 것 같아 기분이 참 좋았다.
산장 주변에 여러 동(棟)의 텐트가 쳐졌다. 한국산악구조대 창립 10주년을 기념하여 120명의 산악 봉사자들이 이곳에서 묵는중이었다. 제주에서 온 유광개(62)라는 분이 우리방 안으로 들어와서 "기록을 남기고 싶어 사진하나 찍을 테니 양해좀 구합니다" 라고 하자 모두 '오케이' 했다. 산악구조대 대장이고 57년생이라고 했다. 라첵산장을 끼고있는 4000m대 6개를 올라갔다 왔고 본인은 정상까지 갔다가 스키로 내려왔다고 한다. 우리가 내일 오를 우치텔피크를 4시간 30분만에 다녀왔다는 말도 했다. 정말 초능력자 같은 분을 만난 셈이다. 저녁은 혜초여행사에서 준비한 김치국으로 해결했다. 저녁마치고 한잔하자는 얘기가 있었지만 내일은 이번 등산중 가장 높은 곳을 오르는 만큼 높이와 난이도면에서 최상급이니 좀 자제하기로 하고 9시에 소등했다.
3일차 2019.7.22 월요일 라첵산장에서 우치텔피크454m를 가다
오전 4시15분쯤 기상하여 헤드랜턴을 키고 소변을 보러 나왔다. 천둥번개에 장대비가 내린다. 고생 길 훤하겠다는 생각이 머리속을 스쳤다. 다시 들어와 짐을 꾸리고 대기했다. 5시 반쯤 콩나물북어국에 밥을 말아서 한그릇 다 비웠다. 한번 더 화장실을 다녀와서 최종 짐 점검을 마쳤다. 다행히 내리던 비가 그쳤다. '그래 오늘 좋은 날씨 계속 허락해다오' 하며 속마음으로 기도했다. 준비운동후 6시20분에 출발했다. 여행사 임원이 "밤엔 걱정이 컸는데 비가 잦아들고 날이 개여서 정말 다행"이라고 하고 어제처럼 낮에 잠깐 비나 우박이 내릴 가능성이 있지만 일정이 지장받을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했다. 초반부터 너덜구간이다. 어제 라첵산장을 오를 때 봤던 너덜은 너덜도 아니다. 바위 돌맹이들이 그리 크지 않지만 잔돌과 모래가 섞여 미끄러지는 등 '자갈밭' 오르기가 무척 힘들었다. 선두에 붙어 올랐다. 4500m 정도 오르는 구간이어서 혹시 있을지 모를 고소증이 나타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쓰며 걸었다. 산의 경사각도, 너덜지대의 위험도도 진짜 장난이 아니다. 우리나라 너덜구간으로 으뜸인 설악산 황철봉구간 보다 몇배는 넓고 더 힘들어 보였다. 초입보다 위로 오를수록 바위가 크고 고정되어 있지않아 자세가 흔들리고 아차하면 넘어질만큼 길이 험했다. 들머리를 시작으로 약 2시간 쯤 지나 먹구름이 끼고 간간이 우박이 내려 오늘 일정에 어떤 지장이라도 생기지는 않을 지 걱정이 됐다.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은 금방이었다. 조금 내렸던 우박이 빗물과 섞여 내리면서 질척질척하니 미끄러웠다. 그 양도 점차 많아져서 눈이 쌓일 정도였다. 몸에 달라붙으면서 녹는 것들은 겉옷을 지나 속으로 스며 들었고 돌길은 무척 미끄러웠다. 손목시계는 고도 3800m를 가리키고 있었다.
기상악화 조짐이 생기면서 선두 가이드와 총괄이사가 이 상황에 대해 협의했다. '날이 어느정도 갤 것으로는 본다. 2시간 20분 정도 왔고 앞으로도 정상근처까지는 눈비와 우박이 내릴 가능성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아이젠없이 하산할 때의 위험성이다. 약 3시간을 더 올라갔다 내려와야 하는데 안전을 생각하고 가이드 의견을 종합하여 철수를 결정한다.' 하산이 정해졌다. 마음속으로 무척 아쉬웠지만 바로 받아들였다. 여행사측에서 일정에 없던 빙하호수를 보고 내려가기로 했다. 이리저리 길따라 하산을 시작했다. 자갈길이 미끄러웠다. 조심조심하면서 1시간 좀 넘게 걸려 빙하호수에 도착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눈이 쌓이고 얼기를 반복하면서 거대한 얼음산을 만들어냈다. 기념사진을 찍고 너댓명이서 햄과 양파, 고추로 만든 술안주와 소주 두팩으로 거친 땀을 식혔다. 하산을 완료 후 중도에 내려온 것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봤다. 나는 안전을 우선 생각해서 퇴각을 결정했으면 그것은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쉽지만 마음속으로 바로 승복했다. 한국사람한테 흔하게 나타나는게 등정주의다. 오직 더 높은 곳을 목표로 삼고 빠르게 정상을 밟는 것을 말한다. 등정주의의 반대말은 등로주의다. 최소한의 장비와 고유한 길로 과정의 가치를 두는 산의 사상이다. 내 안의 신성을 찾거나 존재의 본원을 생각하며 걷는 존재등반을 거론하는 이도 있다. 3가지 중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고, 나는 그런 위치에 있지도 않다. 말장난같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리 높은 산도 허공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산 정상에 섰다고 감격한다. 하지만 꼭대기 위에 허공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런 면에서 고산은 그 고도(altitude)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산을 대하는 인식적 태도(attitude)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상 못밟았지만 너무 서운해 하지말자는 얘기를 좀 길게 썼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그렇다고 여행사가 면제될 사안은 아니다. '날씨가 나빠졌으니 하산하자'는 식은 곤란하다. 나름 다 큰 뜻이 있어서 많은 돈 내고 왔으면 여행사측에서 혹시 있을지 모를 모든 상황에 대비하여 일정을 소화하도록 최선을 다했어야 한다. 하산결정후 30분도 안돼서 날이 개고 우박도 그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더욱이 안전가이드를 3명이나 붙혔으면 거기에 상응해서 정상까지 철저한 준비를 해줬어야 했다. 이 점이 부족했다. 혜초가) 오후 1시쯤 라첵산장으로 하산을 완료했다. 일정이 변경되면서 시간이 많이 남게 됐다. 준비해간 먹거리로 회식아닌 회식을 했다. 버너에 불을 붙였다. 가장 먼저 국물떡볶이를 만들었다. 어묵과3 야채를 썰어 넣고 맛을 냈다. 다들 맛있다고 한마디씩 한다. 두번째는 묵은지꽁치찜. 멸치로 국물을 내고 묵은지와 꽁치를 넣고 끓여줬다. 한숱가락 정도 msg를 넣었다. 먹을만했다.
4일차 7.23 화요일 라첵산장에서 하산하여 비슈케크로 돌아오다
6시 기상. 7시 식사, 된장국으로 한그릇을 비웠다. 8시 준비운동후 3시간 예상되는 하산을 시작했다. 우리가 왔던 길인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새롭게 걸어 내려오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가늘고 길게 내려오는 빙하 폭포 옆 인공 밧줄을 보고 어제 우리가 올라왔던 길임을 알아챘다. 물 내려오는 폭포 물소리가 초원을 뒤흔든 수천의 기마들이 쏜살같이 달려가고 난 뒤 이어지는 말발굽소리같았다. 여유있는 하산길이어서 가급적 많은 들꽃과 자연을 카메라에 담았다. 미국에서 프랑스에서 러시아에서 트래킹을 즐기러 오는 등산인들이 계속 오른다. 노장도 있고 주니어도 있다. 서로 스칠 때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현지인이나 러시아인에게 살짝 "즈드라쓰부이쩨. 미냐 자붓 바다. 야이즈 까레이. 야 까리얀까. 스빠씨바 볼쇼이" 하고 인사를 건네면 반색하며 화답해 준다. 사람들이 온순하고 차림새도 소박하다. 가문비나무 군락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겼다. 어제 오르면서 점심을 했던 곳에서 간단히 행동식을 먹으며 땀을 식혔다. 하산을 완료했다. 3시간 소요, 계획대로 내려왔다. 오후1시 조금 넘어 한국교포가 운영하는 아리랑식당에 들어갔다. 물냉면과 비빔밥, 감자전이 나왔다. 사전에 예약한 비빔밥은 너무 짜서 서너 숟가락 들다 마쳤다.
시내관광을 1시간 했다. 말로만 듣던 알라토광장이다. 알라는 흰색, 토는 호수라는 뜻이라고 한다. 기마자세로 지휘하는 듯한 동상이 우뚝 서 있다. 6세기경 중국의 침략을 물리친 만하스장군 동상이라고 한다. 동유럽이 무너지면서 이곳 키르기즈도 민주화과정을 거쳤다.1992년 8월 민주혁명, 특히 2001년 2차혁명 때는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구(舊)대통령궁과 레닌동상이 마주하고있다. 레닌동상이 존재하는 곳은 우주벡키스탄, 키르키스탄, 타지키스탄 3국이 유일하다고 한다. 러시아 푸틴과 정치적 연대의 표징같은 설치물로 이해하면 될 듯 싶다. 도로리나무에 가지가 휠 정도로 열매가 열려 있다. 고려인들은 이걸 줏어서 도토리묵을 쒀 먹는다. 아름드리 자작나무와 잘 단장된 나무들이 울창하다. 가끔 차창밖으로 목동이 양이나 소를 몰고지나간다. 현지인들 모두 양이나 염소, 소와 같은 것을 유목하는게 아니고 목동에게 1마리당 월100솜 정도 주고 맡긴다고 한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오래된 재래시장을 차창바깥으로 봤다. 길에서 저렴한 과일을 샀다. 수박(대) 무등산크기의 23kg 정도되는게 7천원 정도다. 메론(대) 8천원, 살구12000원...
5시쯤 공연이 되는 큰 식당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토마토로 만든 스프가 나왔다. 이 나라에서는 고기를 소스에 찍어 먹지 않는다. 고기 보완제가 없다는 얘기다. 빵과 고기, 야채가 풍족하게 차려졌다. 보드카와 맥주가 곁드려졌다. 공연이 좋았다. 모두 4명이 출연했다. 두성을 통해 연주소리를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현악기의 줄은 양의 위로 만들고 통은 살구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아리랑을 반주와 노래로 흥을 돋웠다. 기분도 좋고 이국적인 음악과 노래선물을 받은 것 같아 연주자 한 분에게 사진을 찍을 때 살짝 20달러를 팁으로 드렸다.
5일차 7.23 수요일 비슈케크에서 바칸바예바 카라콜을 가다
늦잠을 잤다. 얼른 씻고 식사하고 차에 올라탔다. 아침 8시 15분. 시내를 벗어나고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양방향 편도 1차선이다. 농사가 가능한 곳은 대체로 밀과 감자를 심었다. 살구나무와 복숭아, 사과밭도 쉽게 볼 수 있다. 농지를 벗어나 산쪽으로는 풀하나 자라지 않는 불모지다. 어느쯤에는 대협곡이 만들어져서 마치 미국의 그랜드캐년처럼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했다. 예전에는 바다였던 것이 융기하여 소금산을 이루고 있는 부분은 토양 색깔이 하얗다. 우리나라와 달리 마을입구에 묘지를 썼다. 매장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매장과 함께 유르타를 치고 묵으면서 기도와 예를 올린다. 우리나라처럼 49제를 지내고 양을 잡아 정성들여 제사를 올린다. 1주기에는 말을 잡고, 살림 형편에 따라 비석이나 건축물을 올린다. 호텔에서 바칸바예바로 출발한지 4시간 40분 정도 걸려 작은마을의 게스트하우스에서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당근과 오이, 토마토샐러드와 양고기배추스프, 홍차, 녹차가 기본으로 나왔다. 메인 음식은 양고기야채덮밥이다. 맥주와 곁들였다. 마당에는 유르타가 있어 손님들 식사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화장실은 샤워와 용변을 볼 수 있게 했다. 청소가 잘돼있고 위생적이었다. 기념으로 수제로 만든 가죽슬리퍼를 9달러에 샀다.
점심 후 오후2시 쯤 카라콜로 차량이동을 시작했다. 얼마 안가서 세계 2위의 담수호인 이쉬쿨호수가 나타났다. 해발 1600m에 위차한 산정호수로, '따뜻한 물'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휴양지답게 해수욕 인파가 피서를 즐기고 있다. 천산산맥에서 흘러 들어오고 밖으로는 나가지 않은 구조여서 수증기로 증발하여 염도가 어느정도 생기면서 어종이 다양하거나 물고기가 많이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겨울에도 얼지않는 특징이 있다. 제주도의 4배 크기에 여름에만 약 200만명이 몰려든다. 비슈케크 수도에서 이곳 이쉬쿨까지 철도가 깔려있다.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수평선에 에메랄드 물빛이 하늘과 맞닿은 뭉게구름과 어울리면서 한폭의 수채화 그림이 이런 것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후 5시 쯤, 3시간 정도 걸려 카라콜시에 들어왔다. 카라콜은 이쉬쿨주의 주도이다. 인구 7만명의 소도시로, 천산산맥의 주봉인 승리봉과 한텡그리봉이 있다. 중국,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이루는 곳이다. 소비에트연방 때에는 소련 군인들이 많이 거주했다고 한다. 당시의 집단농장과 거주했던 아파트를 차를 타고 가다 봤다.(현재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다고 한다. 선두 가이드 고향이 이곳이라고 했다)가스66이라는 특수차량이 왔다. 바퀴 하나가 어른 키만하다. 마르고 키가 큰 노(老)기사가 차를 모신다. 시내에서는 질주하듯 빨리 달렸다. 얼마쯤 지나 산길로 접어든다. 울퉁불퉁 비포장길이다. 돌길에 물웅덩이, 장애물을 거침없이 넘어간다. 반면 얼마나 덜컹거리고 흔들거려 몸에 고달픔을 주는지 죽는 줄 알았다. 메스껍고 힘들어 토하기 직전 상황까지 갔다. 거의 2시간 와서 알틴아라샨산장에 도착했다. 5인실에 입실하여 '놀란 속'을 가라앉힐 생각으로 인천에서 가져온 유동골뱅이를 땄다. 팩소주 2개로 5명이 맛있게 나눠 먹었다. 저녁식사는 성찬이었다. 양을 두마리 잡았다고 한다. 머리는 윗 사람에게 존경의 표시로 제일 연장자에게 먼저 드린다고 한다. 천천히 맛있게 먹었다. 식사후 황금온천 4호실로 갔다. 깜짝 놀랐다. 첩첩산중에 온천이라니.....마치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 들었다. 물도 뜨겁고 유황냄새가 코로 확 들어왔다. 모두들 즐기는 표정이다. 하루의 피로가 확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6일차 7.24 목요일 알틴알라샨 캠프지 3600m 에 오르다
아침에 다시 온천탕을 들렸다. 이번에는 2호실. 어제 갔던 곳보다 더 뜨거웠다. 유황물질도 더 강력하게 발산하는 것 같았다. 발을 담그기 힘들 정도로 뜨거웠다. 계속 바가지로 온천물을 끼얹거나 탕안으로 잠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아침식사도 한그릇 싹 비웠다. 산이조아님과 1시간 30분 정도 산장주변을 오르면서 컨디션을 조절했다. 이른 점심을 11시에 먹었다. 돼지고기 두루치기가 나왔다. 소나무님이 반주로 소주 한병을 냈다. 메인음식으로 미역국이 나왔다.
12시쯤 알틴아라샨산장 2100m에서 캠프지 3600m를 향했다. 오전 내내 비가 오락가락했다. 출발부터 비옷을 입었다. 계곡을 거슬러 점차 고도를 높였다. 1시간 쯤 올라서자 광활한 초지가 나왔다. 내가 서 있는 지점부터 하늘과 맞닿은 지점까지 온통 풀밭이다. 소와 말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다. 언듯언듯 해가 들다 빗방울이 굵어지더니 약한 소나기 비슷하게 도착할 즈음까지 쏟아졌다. 기압이 서서히 낮아지고 고도는 높아지면서 체력 소모도 늘어났다. 3300m 쯤 올라서자 고소증이 왔다. 눈이 뻑뻑해지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약간 메스껍기도 했다. 조금전 했던 일을 기억할려고 애를 써도 약간 멍해지면서 생각이 가물가물하다. 속도를 좀 더 줄이고 코로 숨을 길게 들이 마시면서 스틱 사용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선두에 붙어 보행을 지속했다. 비와 땀에 젖어 행색이 말이 아니다. 손도 시럽고 몹시 추웠다. '사서 고생한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지만 그 만큼 행복한 시간이 됐다. 고소증이 잠시 왔다가 지나간거를 빼면 해외 트레킹의 재미와 멋을 맛보기에 충분한 구간이었다. 6, 7개 언덕 능선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게 지루하지 않았고, 넓은 목초지가 주는 초록 비쥬얼과 개방감이 주는 자유로움을 느꼈으며, 회색도시에서 잠시 떨어져서 나를 돌아본 힐링의 시간을 오롯이 즐겼다.
4시간 정도 걸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은 혜초여행사 전용 캠프지이다.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유르타나 텐트 사용이 가능하게 돼 있다. 오후 7시에 저녁을 먹었다. 꽁치김치국이 나왔다. 보드카 한잔 곁들이니 추위가 많이 가셨다. 송도, 주안에서 오신 분과 처음으로 말을 섞었다. 재미와 개성, 등산에 대한 소신을 가진 분들이었다. 식사 후 집에서 가져온 에코마이크로 돌아가며 1시간 정도 노래와 여흥을 즐겼다. 산노을님이 노래를 많이 아셨다. 섹스폰을 부시는 소나무님의 열정가무가 대단하셨다. 새신발과 지점장님이 합석하여 분위기는 클라이맥스를 향했다. 나는 뒷정리를 하고 밖을 잠깐 돌아봤다. 내일 알라콜패스3900m를 밟고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7박9일의 일정도 그리 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주 캄캄한 밤, 구름까지 끼어 더 어둡다. 그렇지만 하늘빛만은 여린 것은 큼지막한 별들이 듬성듬성 있어서다. 우리나라 별과 얼마나 다를까 마는 그래도 머나먼 고산에서 보는 별은 뭔가 다른 것 같다. 불우했던 고흐가 그랬다지? 생은 걸어서 별까지 가는 것이라고. 내일이면 알아콜패스3900m 정상을 찍고 집으로 간다. 고흐 작품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 어둠은 작가의 내면이고, 별은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다. 이 고산에서 생각했던 저 먼 별에 대한 그리움이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좀 더 길게 남기를 기도하였다.
7일차 7.25 금요일 알틴아라샨캠프지에서 알라콜(alacol)패스3900m를 오르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에 잠시 눈을 붙였다가 6시 조금 넘어 깼다. 화장실을 보고 짐정리를 했다. 오늘은 아라콜패스 3900m를 올랐다가 11km 약 7시간 정도 하산하는 일정이다. 이번 해외산행을 하면서 짐에 대한 생각을 했다. 나는 백패킹을 오래한 경험이 있어 중량이 나가는 배낭에 대해 거부감이 없는 편이다. 이번 키르기스 원정등반에도 먹을 것을 포함해 비교적 많이 가져온 편이다. 그런데 배낭이 무거우면 등산이 힘든 것은 자명하다. '오래 산탈려면 무게를 줄여라' 주위의 충고도 있었다. 아직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말 꼭 필요한걸 가져가는지는 생각해봐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우선 이번 산행에서도 짐에 대한 중복이 있었다. 기능이 비슷하면 하나 또는 가짓수를 줄이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옷, 신발류, 선그라스 등이 대표적이겠다. 음식, 특히 술과 술안주도 머무는 날짜나 사람 수 정도를 따질 뿐, 현지조달 가능성이나 중복이 안되도록 선소통 후구매같은 방법론을 찾지않는 것은 문제로 보였다. "행복한 여행의 가장 큰 준비물은 가벼운 마음이다" 생떽쥐뻬리의 이 말을 되새겨 본 것 만으로도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것이 참 많았다고 생각든다.
화장실을 한번 더 보고 7시50분에 인증샷과 함께 출발했다. 이번 산행을 하면서 머릿속은 온통 '고소증없는 등산'이었다. 이 생각만 하고 걷고 또 걸었다. 완만하게 오르다 급하게 치고 오르는 지형이다. 라첵산장을 오를 때와 흡사한 토질이다. 모래와 자갈, 흙이 섞여있고 힘이 없어 밟히면 밑으로 흘러내렸다. 자칫 발이 미끄러지면 낭떠러지로 구를 수 있어서 각별히 조심했다. 거의 1시간을 올랐다. 어제 묵었던 캠프지의 유르타와 노란텐트, 화장실이 미니아처같이 보였다. 고도 3700m에 기압이 640까지 내려가는 지점을 통과했다. 고소증은 없었지만 호흡이 거칠어지고 체력소모도 급격히 커졌다. 다시한번 '고소없는' 등산만을 생각하며 고도를 높였다. 경사각이 거의 80% 돼보이는 마지막 구간을 힘있게 줄여나갔다. 드디어 정상에 섰다. 코발트같은 우윳빛깔을 띤 아라콜호수3500m가 눈앞에 나타났다.
정상석 아니면 표지판이라도 있을 법 하지만 무엇하나 없다. 손목시계에 맞춰 논 gps상의 고도 3900m와 기압 620만 있을 뿐이다. 인중샷을 남겼다. 조용히 서서 동서남북을 응시하며 천산산맥의 설산과 이곳 악사이산군(山群)의 위용을 가슴에 담았다.기념사진을 찍고 하산을 시작했다. 크고 작은 너덜지대가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지루했고 위험했다. 왼쪽으로 아라콜호수가 길게 이어진다. 빙하 특유의 물 색깔을 띠고 있다. 물속에 풍덩하고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좀 더 가니 이 호수에서 흘러 나오는 거대한 폭포가 장관이다. 3000m대에는 자라는 나무나 풀이 없었다. 2700m정도 내려서면서 가문비나무처럼 큰 나무들과 꽃과 풀이 자란다. 중간중간 쉬면서 행동식과 물을 먹었다. 전세계 트레커들이 다 온 것 처럼 등산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표정이 모두 좋다. 젊은이들에게 어떤 좋은 기운을 느끼게 된다. 비박차림의 배낭은 100에서 150리터는 족히 될 정도로 크다. 거의 다 내려와 간이매점에서 맥주 한잔씩 했다. 2시간 좀 안걸려서 카라콜 시내의 작은 호텔에 도착했다. 와이파이부터 챙겨서 글과 사진을 동기화하여 저장을 완료했다. 씻고 비프스테이크로 저녁을 먹었다. 술한잔과 함께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푹 잤다.
8일차(9일차) 7.26 토요일
카라콜에서 비슈비크, 알마티, 인천공항에 들어오다
작은 컵라면으로 아침식사를 때웠다. 씻고 짐정리를 완료했다. 총무와 상의해서 남는 가스(대) 2개를 보조가이드에 주기로했다. 8일간 산장에서 음식을 하거나 챙긴 이 친구에게 수납가방인 D팩과 컵라면 1개, 소주 반병, 현금 20불을 쥐어줬다. 그리고 서울 온다고 했으니 그때 전화하라고 번호를 남겼다. (성실한 이 친구가 서울, 경기, 인천에서 공부를 하거나 직업을 구하고 일하다 자기네 나라로 떠날 때까지 임대료없이 생활할 수 있는 방2화1의 집을 마련해 줄 생각이다)
올 때와 다른 길로 비슈비크를 향했다. 그래서 거대한 이쉬쿨호수를 올 때의 반대쪽까지 거의 온전히 다 볼 수 있었다. 총책임자인 박장순이사님의 배려 덕분이다. 간간이 작은 마을이 지나간다. 조적식의 낡은 흙집에 지붕은 스레트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는 행안부가 중심이 되어 발암물질 1급인 스레트집을 호당 700만원 정도 예산을 들여 철거해주고 지정된 장소에 폐기 처리한다.) 어느 정도 사는 집들은 칼라강판으로 지붕을 교체했다. 좀 더 사는 집들은 단독 혹은 다세대연립을 철근콘크리트로 짓고 산다. 길가 대부분이 구멍가게지만 가끔 우리나라의 주상복합처럼 1,2층은 상가로, 그 위층은 살림집으로 이용한다. 길거리에서 딱지를 띠는 교통경찰이 있다. 우리도 한 때 그랬던 것 처럼 돈 조금 집어주면 '그냥 가는'일이 허다하다고 한다. 나무로 된 전신주가 이색적이다. 콘크리트전신주는 둥글지 읺고 네모형태다. 왜일까? 가격과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고속도로는 편도 2차선이다. 자동차는 토요타, 니산, 벤츠, 폭스바겐같은 수입차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 차는 아반떼가 눈에 띈다. 와이파이가 되는 고속도로 휴게소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배식과 부페식이 섞여있다. 볶은밥에 감자볶금, 양고기스프를 주문했다. 보기와 달리 먹을만 했다. 4시반쯤 서울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김치찜에 잡채, 밑반찬이 넉넉하게 나왔다. 맛있게 먹고 공항으로 향했다. 짐을 분류하면 가위가 배낭에 들어가면서 압수됐다. 면세점에서 모자, 슬리퍼, 방석, 실크스카프, 기념품을 샀다. 알마티공하에서 환승하는 동안 3시간 넘게 기달렸다. 충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기내식이 나왔다. 8시5분 인천공항 도착, 7박9일 모든 일정을 마쳤다. 신에 감사한다.
피에쓰
○ 여행은 좋은 책 한 권을 읽는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키르기즈의 산하와 역사, 삶과 일상을 걷기를 통해 경험한 좋은 시간이었다. 사람 때가 묻지않은 3200m라첵산장과 2200m대 알틴아라샨의 유황온천, 3900m 지점을 밟은 아라콜패스 그리고 2번의 민주화운동과 국민적 자부심, 단순 소박과 일상의 온순한 삶을 사는 키르기즈인들과 키르키스탄국가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 물가가 참 쌌다. 꿀, 검정색 노란색 건포도, 현지인들 주식인 화덕에구워 담백하게 먹는 빵, 실크스카프, 슬리퍼, 방석, 기념품, 메론과 수박같은 제철과일 모두 저렴했다.
○ 배낭담기, 무게에 대한 좀 다른 생각을 하게된 여행이었다. 가급적 체력부담도 고려하자. 챙기는 물품의 기능 중복이 있으면 줄이자. 술과 안주에 대한 생각도 바꾸자. 너무 구태의연한 생각에 얽매여 있었지 않은지...
○ 여행은 사람을 알고 친교를 쌓는 과정이다. 많은 것을 지도하고 생각의 크기를 높여주셨던 정맥산우회 고문님들께 특별히 감사드린다. 감기로 고생한 거북이님께서 어느정도 건강을 회복해서 집으로 가게 돼 마음이 조금 놓인다. 해외원정 전체를 챙긴 산이조아님 꿀돼지님 새신발님 노고에 힘입어 좋은 해외원정이 됐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마산 창원 송도 주안 포천에서 오신 분들과 새롭게 교분을 나누어서 영광이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건강하게 산을 찾으면 또 뵐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분들 건강과 번영을 기원하며...끝.
첫댓글 잘 다녀오시니
축하드려요
그냥 부럽습니다ㆍ
바다를 닮은 바다님 마음도 바다 챙기는 것도 바다 바다처럼 넉넉한 바다님 행복하게 즐겼습니다
바다님수고로움에 황송하기도 하고 진심 감사드립니다
부용산 심금을 울려 밤새 귓가에 아른거렸읍니다 감사합니다^^
부용산은 이동원과 안치환, 2절까지 붙여 음반낸 한영애가 불러서 좀 대중화되었지만 사실은 핵교에서 써클에서 데모끝나고 주점에서 흔히불렸던 운동가 고전이죠. 실제 목포여고 국어교사인 박기동할아버지가 누이동생을 벌교 부용산에 묻고 쓴 시에 같은학교 월북음악교사인 안악(정확치않아요)이 자기제자 장례때 멜로디를 붙여 이노래가 나왔어요. 이게 45-48년 빨치산들이 산노래로 부르면서 부용산은 용공노래가 되고 금지가가 됐죠. 슬픈노래 부르며 콧등이시큰한 노래 한시대의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이만큼 유장하게 만든 노래가 없을거에요. 밥먹다 별얘기 다쓰고있네요
책 한권을 읽은듯한 느낌입니다
성공적인 여행 추카 드리고
바다님에 자유러움이
너무 부럽고 멋찌십니다~~
소나무님 멋진여행 함께해서 행복했어요. 초반 고소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뚝심있게 오르시는걸보고 역시 소나무님, 정맥... 하며 감동받았습니다.
붉은여우님하구 말을 많이 섞지못해 아쉬웠어유. 남편한테 형~하길래 80년대초학번, 같은 써클에 이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남미종속이론 운동가요 노가바를 떠올렸답니다. 담에 산탈때 호적한번까야것슈ㅋㅋ
사삼사님 감사해요.긴 글 읽어주셔서. 산은 기록 이라는 얽매임에 힘들어도 쭈욱 쓰고 있어요. 자유...제일 좋은말이고 유럽에서 시작한 두발로 걷고오르는 알피니즘의 핵심 동기가 자유였답니다. 신분제, 먹고살기, 사회적억압 분위기에서 누군가 자유함을 얻기해
오르기시작한게 지금의 등산의 시초가됐어요. 울 듬직한 사삼사님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