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년 |
10월 20일,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는 벨기에 국경 근처인 북프랑스의 샤를르빌에서
태어난다. 아버지 프레데릭 랭보는 근처 소도시에 주둔한 보병 제47연대 소속의 대위,
어머니 비탈리 퀴이프는 로셰의 농가 출신으로 광신적인 가톨릭 교도로서, 엄격한 성격임. |
1860년 [6세] |
그의 양친들은 성격상의 불화로 별거, 어머니는 세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샤를르빌의 부르봉 거리에 있는 낡은 집으로 이사를 하여 여기서 영주하게 된다.
여기서 막내딸 이자벨이 태어나다. |
1862년 [8세] |
샤를르빌에 있는 로사 학원에 입학. |
1864년 [10세] |
숙제장에 '태양은 아직 뜨거웠다'라는 작문 등을 쓰다. |
1865년 |
샤를르빌에 고등중학교 제7급에 입학한 이후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와
그 밖에서도 눈부신 재능을 발휘하여, 겨우 몇 달만에 제6급으로 진급하여 교사들을
놀라게 하다. 또 신앙심도 두터웠다고 한다. |
1866년 [12세] |
이 무렵부터 가톨릭교에서는 이단의 책들로 되어 있는 라틴어의 시 따위를
탐독하게 되다. 그러나 성적은 뛰어났고, 형 프레데릭이 제6급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는 제4급으로 진급하다. |
1868년 [14세] |
5월, 황태자가 처음으로 성체배령(聖體拜領)한 것을 축하하는 라틴어의 시를 바쳐
감사장을 받다. |
1869년 [15세] |
그 해 아카데미의 콩쿠르에서 라틴어로 시를 지어 수상, 이 해 연말에 프랑스어로
시(詩)의 처녀작 '고아들의 새해 선물'을 쓰다. |
1870년 [16세] |
1월 2일, 전해 연말에 쓴 '고아들의 새해 선물'이 '라 르뷔 풀 투스'지에 발표되다.
한편 젊고 진보적인 조르쥬 이장발이 수사학(修辭學)의 교사로서 샤를르빌 고등중학교에
부임해 오다. 이장발은 랭보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하고, 좋은 상담 상대가 되다.
이 젊은 교사가 랭보에게 끼친 영향은 커서,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 문단의
대가 위고의 작품과 고답파(高踏派) 작가의 시들을 랭보에게 빌려주기도 한다.
5월 24일, 랭보는 고답파의 시인 테오도르 드 방빌에게 '감각', '오필리어',
'일체를 믿다'(나중에 '태양과 육체'라고 게제됨)의 작품과 편지를 보내고,
"고답파 시인들 틈에 공석을 만들어 주신다면..."하고 그 게제를 의뢰했다.
8월 29일, 이미 7월 19일에는 프랑스와 프러시와의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승리를 거듭하는 독일군은 국경을 돌파하여 파리 포위의 직전에 있었다. 이날, 랭보는
학업을 포기하고, 책을 팔아버린 후 파리로 첫번째 가출을 하다. 그러나 교통비 부족으로
체포되고, 또 스파이 혐의로 마자스에 투옥된다. 랭보는 9월 5일자 편지에서 이 어려움을
이장발에게 알려 도움을 청하고 있다.
9월 8일, 이장발의 노력에 의해 석방된 랭보는 거기서 두에로 갔다가, 이 달 27일에
샤를르빌로 돌아오다. 그러나 방랑의 맛을 알게된 그는 그로부터 10일 뒤에 두번째 가출을
하게 된다. 이때는 걸어서 벨기에로 가고, 샤를르르와나 브뤼셀을 방랑하고 다시 두에로
간다. 이 동안에 '푸르름', '깜찍한 아가씨', '찬장', '겨울을 위한 꿈', '나의 방랑' 등을
쓰다. 10월 말, 랭보의 어머니는 이장발에게 부탁하여 그를 샤를르빌로 데리고
돌아오게 하다. |
1871년 [17세] |
2월 25일, 랭보는 세번째 가출을 하다. 이 출분은
혁명적 정열과 방랑벽에 의한 것이었으나, 3월 10일까지 파리를 방랑하고,
결국에는 걸어서 샤를르빌로 돌아왔다. 3월 18일에는 파리 코뮌의 소요가 일어났다.
그 무렵의 랭보는 혁명적 정열을 작품과 언동으로 토로했다. 그리고 네번째 파리로
가기를 결심한 것은 4월 말이었다. 이 네번째의 방랑에서 그는 눈으로 본 반란군의
실태에 환멸을 느끼고, 혁명에 대한 정열은 식었으며, 시작(詩作)에 그의 정열을 돌렸다.
5월 13일에 이장발 앞으로, 그로부터 이틀 뒤인 15일에는 드므니 앞으로 랭보는
편지를 보내어, 새로운 시법을 개진하고 있다.
9월 초, 랭보는 이미 서정시인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던 대선배 폴 베를렌에게
편지와 작품을 보냈다. 베를렌은 그의 작품을 보고, 랭보의 재능에 감탄하여 그에게
파리로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9월 중순, 랭보는 파리로 가서 베를렌과의 방탕하고 기묘한 생활을 보낸다. 랭보의
초기 운문시의 태반은 이 시기에 씌어졌다. |
1872년 [18세] |
랭보는 베를렌과의 동거생활에 싫증을 느껴, 3월에는
샤를르빌로 돌아왔다. 그러나 5월에 베를렌이 부르는 편지가 와서 다시 파리로 간다.
이 시기에 '눈물', '카시강', '갈증의 희극', '아침의 좋은 생각', '금의 시대',
'새 살림' 등의 후기 운문시를 썼다. 또 운문의 대작 '일뤼미나씨옹'은 1872년의
작품이라 추정되고 있다.
7월, 압생트주(酒)와 방탕의 무질서한 생활을 버리고, 랭보와 베를렌은 벨기에로 여행에
나섰다. 그러나 무질서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9월에는 둘이서 영국으로 건너간다.
12월, 랭보는 혼자 되는 것을 원하여 고향인 샤를르빌로 돌아온다. |
1873년 [19세] |
1월, 랭보는 베를렌이 런던에서 병으로 쓰러졌다는 것을 알자,
런던으로 돌아간다.
4월, 랭보는 로셰의 가정으로 돌아온다. 그 무렵 그는 산문시 '지옥의 계절'을 쓰기
시작한다. 베를렌으로부터 재삼 편지가 와서 5월에 또 한 번 영국으로 건너 갔으나
두 사람의 사이는 어색해질 뿐이었다.
7월 4일, 마침내 두 사람은 심한 말다툼을 하게 되고, 베를렌은 랭보를 런던에 남겨두고
브뤼셀로 돌아갔다. 랭보는 베를렌에게 런던으로 돌아와 달라고 편지로 애원을 한다.
마침내 기다리다 지친 랭보는 7월 8일, 베를렌의 뒤를 따라 브뤼셀로 간다. 결국
싸움은 되풀이 되고, 랭보가 파리로 혼자 떠나려고 하자, 베를렌은 둘이서 다시 한 번
런던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그러나 랭보의 굳은 의지에 베를렌은 실망과 술기운에
권초으로 랭보를 쏘아 왼쪽 손목에 상처를 입히는 사건이 일어난다. 베를렌은 체포되어
2년 금고형의 언도를 받고, 몽스의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7월 하순, 랭보는 로셰로 돌아간다. 11월, '지옥의 계절'을 완성한다. |
1874년 [20세] |
랭보는 이 해 연초 무렵, 새로 교제를 하게 된 시인 제르망 누보와
같이 런던에 머물렀다. 누보가 4월에 런던을 떠나자, 랭보는 12월 말에 샤를르빌로
돌아왔다. '일뤼미나씨옹'은 1872년의 작품이 아니라 이 해에 그 대부분을
썼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
1875년 [21세] |
1월 16일에 베를렌은 교도소에서 나온다.
2월, 랭보는 슈트드가르트로 가서 가정교사 일을 한다. 그 달 말 몽스의 교도소를 나온
베를렌이 랭보에게 면회를 청하고 신앙을 권한다. 그러나 랭보가 받아들이지 않자
두 사람은 완전히 헤어진다.
5월, 슈트드가르트를 떠나 걸어서 스위스 등으로 여행을 한 다음 이탈리아로 간다. 그리고
밀라노에서 병으로 쓰러진다. 어떤 이탈리아 여성의 간호로 회복되고, 그 달 말에
블린디시로 향했으나, 다시 도중에 일사병으로 쓰러진다. 그러나 병을 무릅쓰고
파로스 섬으로 건너간다.
6월 15일, 리부른의 프랑스 영사에 의하여 랭보는 송환되었다.
그해 겨울, 샤를르빌로 돌아온 랭보는 가족과 같이 지내며 스페인어, 아라비아어,
이탈리아어, 근대 그리스어, 네덜란드어 따위를 배운다. |
1876년 [22세] |
5월 19일, 네덜란드 식민지의 용병이 되어 6년간의 계약으로
300프랑을 받는다. 6월 10일, 일개 사병으로 입대하여 7월 23일 바타비아로 옮겨간다.
그러나 그해 8월에 네덜란드군을 탈주하여 살리타가를 시발점으로 방랑한 끝에
12월 말에 샤를르빌로 돌아온다. |
1877년 [23세] |
랭보는 함부르크로 가서, 파리 곡마단의 통역이 되어
스웨덴과 덴마크를 일행과 함께 돌아다닌다. 스톡홀름에서 프랑스 영사관으로부터
송환명령을 받고 프랑스로 돌아간다.
9월, 랭보는 마르세유로 가 거기서 알렉산드리아로 떠나지만, 도중 병에 걸려
샤를르빌로 되돌아온다. 그 해 겨울은 샤를르빌에서 지낸다. |
1878년 [24세] |
이 해 봄, 랭보는 동양으로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
함부르크로 가지만 뜻대로 안되어 샤를르빌로 돌아온다.
10월, 랭보는 걸어서 겨울의 알프스를 넘어 제노바로 가며, 11월 19일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섬으로 간다. 그곳에서 프랑스 상사의 채석장 감독이 된다. |
1879년 [25세] |
5월, 키프로스 섬에서 노역을 하다 장티푸스에 걸리자 프랑스의
가족들에게 돌아간다. 그 해 겨울은 샤를르빌에서 지낸다. |
1880년 [26세] |
랭보는 다시 키프로스 섬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해 8월에
키프로스 섬을 뒤로 하고, 아라비아 남단에 있는 아덴으로 간다. 아덴에서는 커피를
중개하는 상사에세 근무한다. 그곳 상사의 대표사원 자격이 되어, 이디오피아로
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의 거래는 총기 매매였다.
12월 중순, 랭보는 이디오피아 하단에 있는 회사의 대리점으로 옮긴다. |
1885년 [31세] |
이 해 가을, 랭보는 하단에서 부바사 사이의 미지의 오가딘 지역을
탐험하며 그 보고서를 파리의 지리학회에 제출한다. 그 무렵에서야 그는 약간의 재산을
모은다.
랭보는 10월 초 회사를 사직한다. 그는 독립하여 회사를 경영할만큼 성공한다.
프랑스 상인 페이르 라바튀를 만나 공동으로 무기 수입을 할 것을 계약한다.
|
1887년 [33세] |
2월 말, 코아의 메네리크 왕과 무기를 거래한다. 그러나 랭보는
메네리크에게 물품을 건네주고도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하여 손해를 본다.
|
1888~1890년 [34~36세] |
랭보는 사브레와 손잡고 무기의 밀수입과 상아, 커피 따위를
매매한다. 사업은 신통치 않았으며 다시 류마티즘에 걸린다. (이 동안에 노예매매도
한 것 같다는 주장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
1891년 [37세] |
2월, 그때까지도 류마티즘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오른쪽 발에 심한 고통을 느끼고 그만 일어설 수 없게 된다.
4월, 일기를 쓴 적이 없는 랭보는 병의 고통을 참아가면서 연필로 여행일지를 쓴다.
들것에 실리어 제이라에 도착하여 여기서 아덴으로 간다.
5월 22일, 마르세유의 콩세프숑 병원에 입원한다. 이 달 26일에 무릎의 악성종양이
악화되어, 어머니의 입회 아래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다. 어머니는 랭보의 동생 이자벨의
병과 밭일 때문에 랭보를 남겨두고 6월 10일 로셰로 돌아가 버린다.
7월 23일, 절단한 곳이 치유되어 퇴원, 로셰로 돌아간다. 그러나 보행의 곤란에
괴로워한다. 얼마 안있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8월 23일에 다시 마르세유의 병원에 입원한다.
이때 여동생 이자벨의 돌보아 준다. 이자벨은 랭보의 좋은 동조자였고, 그의 임종까지
곁에 있는다.
11월 10일, 랭보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