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고르와 기본소득
앙드레 고르는 한국에서도 꽤 유명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명성에 비해 그의 저작은 한국에 별로 소개된 것이 없다. 기껏해야 번역서가 최근에 두 개 나왔을 뿐이다.
<D에게 보낸 편지>
앙드레 고르 | 임희근 역 | 학고재 | 2007.11.30
<에콜로지카>
앙드레 고르 | 임희근 외 역 | 생각의나무 | 2008.11.26
<D에게 보낸 편지>는 여든세 살의 철학자가 여든두 살의 아내에게 바친 절절함이 묻어나는 편지다. 그는 아내 도린이 척추수술 후유증으로 불치병에 걸리자 1983년 이후 모든 사회 활동을 접고 아내를 간병해왔다.
<에콜로지카>는 고르가 아내와 동반자살하기 전에 구상하여, 이미 발표된 그의 글 중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7편의 글을 자신이 직접 선별하여 엮은 책이다. 이 책은 고르의 저작들이 아직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사상의 진면목을 개괄할 수 있는 훌륭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여기서는 <에콜로지카> 전반을 소개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기본소득과 관련된 고르의 생각을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그의 글에서 그 단초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게 세 군데를 짚어볼 수 있다.
“저마다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노동시간대를 조절하고, 노동을 연속적인 방식으로 혹은 불연속적인 방식으로 할지 자유롭게 정하고, 하나의 활동영역에서만 노동을 할지 혹은 여러 활동영역에서 노동을 할지를 자유롭게 정하여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을 2만 시간 하는 대신에 평생 사회수당을 보장받는 것, 이 모든 것은 조절과 ‘전반적 균형’을 담당하는 중앙기구, 즉 국가가 존재해야만 가능하다.”(위의 책, 109~110쪽)
이 대목은 <프롤레타리아여 안녕>(Galilée, 1980)이라는 책의 ‘파괴적 성장과 생산적 탈성장’이란 장에 있는 것이다. 고르는 여기서 “평생 사회수당”이라는 개념은 받아들이지만, ‘2만 시간의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오늘날 순수한 형태의 ‘조건 없는 기본소득(UBI)’ 구상에 가깝다기보다는 ‘참가형 기본소득(PI)’ 구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훗날 다음과 같이 변화하게 된다.
“생태사회적 정치는 주로, 노동시간과 상관없는(노동시간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노동 자체와도 상관없는 충분한 수입을 보장해주는 데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을 재분배하여 누구나 일할 수 있고 일을 좀 더 잘 하면서 덜 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 노동에서 놓여난 시간을 개개인이 그들이 선택한 활동 - 그들의 시장 의존과 직업적 혹은 행정적 책임을 줄여주고, 직접 체험된 연대의식과 사회성의 조직, 즉 상호부조, 서비스 교환, 무정형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조직을 다시 짜게끔 해줄 재화와 용역의 자가생산을 포함한 - 에 쓸 수 있는 자율성의 공간을 창출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시간의 해방, 기능적으로 특화된 타율적 노동의 해방은 전체의(전체를 아우르는) 정치로서 구상되어야 한다.”(위의 책, 70쪽)
이 글은 <액츄얼 마르크스> 12호(PUF, 1992, 주제 “생태학과 역사적 유물론”)의 ‘전문가정치와 자기제한 사이에 있는 정치적 생태학’이라는 장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노동 자체와도 상관없는 충분한 수입”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재분배와 함께 “자율성의 공간” 창출, 그리고 “타율적 노동의 해방”을 생태사회적 정치로 구상할 것을 주문한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 발 더 나아가 이 구상이 현재의 사회적, 경제적 위기에 대한 해결책임을 강조하면서 “전복적” 상상력을 지닐 것을 주문한다.
“노동시간과 노동 자체를 분리하여 생계수당을 요구하는 것은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오히려 2세기 전부터 생각해오던 대로의 ‘노동’이 더는 주요 생산력이 아님을 인정하고, 경제의 통상적 척도로 주요 생산력, 즉 체험을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각자가 투여한 시간의 양에 따라서 임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생계수당을 점진적으로, 평화롭게 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안토넬라 코르사니가 이렇게 얘기했지요. “… 생계수당을 재분배 논리 안에 위치시켜서는 특히 안 되며, 자본과 노동에 바탕을 둔 부를 급진적으로 넘어서려는 전복적 논리 내에 위치시켜야 한다.” 생계수당이라는 생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단절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게 하며 특히 가치형식을 띨 수 없는 부, 즉 돈과 상품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 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생계수당이 도입된다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화와는 다른 통화가 될 것입니다. 지금과 동일한 기능을 갖지도 않을 것이고요. 그것은 지배목적, 힘의 목적에 쓰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래로부터 만들어질 것이고, 밑으로부터 형성된 힘에 의해 나아갈 것이고, 동시에 자급생산협동조합들에 의해 추진될 것입니다. 이러한 협동조합들은 지금 느껴지는 다양한 종류의 위기들, 에너지 위기와 신용시스템 붕괴에 따른 통화위기 등의 위기 발생 상황에 대한 해결책입니다.”(위의 책, 166~167쪽)
<카데르누스 IHV 이데이아스> 31호(Unisinos, 2005)의 ‘가치 없는 부, 부 없는 가치’라는장에 실린 이 글은 많은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그는 우선 전통적인 노동가치론의 종말을 선언하면서 ‘지식경제론’을 편다. 이 부분은 다른 곳에서 따로 좀 더 상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노동가치론’을 ‘정보가치론’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맑스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노동가치론’에 기대기는 하지만, 이를 넘어서려 했다는 점 정도만 알아두자.
여기서 “생계수당”은 ‘기본소득’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겠다. 고르는 안토넬라 코르사니가 이를 “재분배 논리”가 아닌 “전복적 논리” 속에 위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적극적인 공감을 표한다. 그렇다. 기본소득은 단순히 재분배를 통해 복지를 확장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보편적 복지 실현에 대한 요구보다 더 큰 내용을 담고 있으며, 사회의 변화를 위한 다양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패러다임의 전환과 확산을 통해 기본소득의 실현가능성을 높이면서 그 가능성과 잠재력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기본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
여기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렇게 정의해 볼 수 있겠다. ‘임금노동형 완전고용 패러다임’에서 ‘사회적 필요노동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여기서 ‘사회적 필요노동’을 어렵게 이해할 필요는 없다. 노동과 고용의 성격이 오로지 자본의 이윤 창출이라는 목적에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 의해 재조직되고, 사회적 필요라는 목적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사회적 필요’를 좀 더 상세하게 정의하는 문제는 남아있다.
기본소득의 도입과 통화의 성격 변화, 그리고 이와 연관된 협동조합의 위상 문제는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고르 또한 이 글에서 개략적인 암시만 했을 뿐이다. 아무튼 최근의 논의 가운데에는 기본소득이 협동조합을 비롯한 새로운 경제 섹터의 창출에 긍정적 효과를 미칠 것이라는 언급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사회적 협동조합운동’에 착목하고 장기 전략을 마련하려는 사회당의 입장에서는 이 기본소득 운동과 협동조합 운동의 연결고리를 구체적으로 찾는 것이 결코 부차적인 문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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