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평산군(平山郡)은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황해북도에 있는 군이다.
동쪽은 금천군, 서쪽은 인산군·서흥군,
남쪽은 황해남도 평천군, 북쪽은 서흥군·신계군과 접해 있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평산읍, 청학·와현 노동자구, 월천리·탄교리·임산리·기탄리·예성리·평화리·복수리·
삼룡리·한포리·옥촌리·주포리·봉탄리·해월리·봉천리·삼천리·용궁리·상암리·산수리·산성리·청수리 등
1개읍 2개 노동자구 20개리로 되어 있다.
군소재지는 평산읍이다. 인구 134,524 추정(1990).
[고 대]
해상리 회골에 있는 고회암용식 동굴이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밝혀짐으로써, 구석기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역으로서 처음 다지홀(多知忽)이라고 불리다가 뒤에 대곡군(大谷郡)으로 편성되면서 개정되었다.
395년(광개토왕 5) 고구려군이 이 곳에서 백제군을 크게 격파했고, 523년(안장왕 5)에는 백제의 무령왕이 죽고 성왕이 즉위하는 틈을 타서 고구려군이 이 곳으로부터 백제에 침입한 일이 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국방 요충지로 부각되어 748년(경덕왕 7)대곡성을 수축하였다. 782년(선덕왕 3)에는 대곡성이 패강진(浿江鎭)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부터 군주(軍主)가 두어져 예성강 이북, 대동강 이남지역을 관할하는 지방행정 및 군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826년(흥덕왕 1)에는 300리에 달하는 패강장성이 축조된 바 있다. 패강진 관하의 10여 주현이 궁예(弓裔)에게 항복한 904년부터 평주(平州)로 부르게 되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운 박수문(朴守文) 박수경(朴守卿) 유금필(庾黔弼)·등 4명의
호족이 이 곳 출신이다.
[고 려]
995년(성종 14) 방어사진(防禦使鎭)으로 되었다가 1018년(현종 9) 이후 지주사(知州事)가 부임하였다. 1272년(원종 13)부터 잠시 복흥군(復興郡), 즉 배천에 예속되기도 하였다. 1231년(고종 18) 몽고군이 평주성에 돌입해 살육을 자행하자 성이 텅비게 되었는데, 1253년 몽고 장수 야굴(也屈)이 전주까지 침입했다가 환궁할때 교동의 별초(別抄)가 밖에 매복해 있다가 기습해 복수하였다.
[조 선]
1413년(태종 13)에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5세기 중엽의 인구는 총 2,130호 6,323명으로 해주에 버금가는 큰 고을이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 일행이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남천 동쪽 2㎞ 지점에 유숙한 일이 있는데, 그 터에 주필대(駐蹕臺)가 세워져 있으며, 병자호란 후 8년간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 일행이 돌아오다 유숙했던 인산면 기린리에는 영소대(靈昭臺)가 세워져 있다.
태백산성은 1733년(영조 9)에 개축되었는데, 4개의 몽성과 8개의 성문을 갖춘 요새로서 도호부사가 수성장을 겸하는 외에 별장과 승장을 따로 두었다. 자모산성(慈母山城)은 임꺽정(林巨正)이 웅거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조선 후기의 인구는 1759년에 총 8,424호 3만 6678명이었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이 곳은 인구증가율이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근 대]
1895년(고종 32)의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평산군으로 고쳐졌다. 이 곳은 전통적으로 유림의 조직이 강력한 곳이었으며, 1896년에는 유인석(柳麟錫)의 의병부대와 연계되어 일부는 제천에서, 일부는 황해도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박기섭(朴箕燮)을 대장으로 하는 평산의병이 조직되어 평산·배천·연안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천도교인 외에도 유림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특색을 보여주었다.
근대의 인물로는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해 활동한 바 있는 서의배(徐義培)·유상렬(柳相烈)·조창선(趙昌善) 등과 이완용(李完用)의 암살을 시도했던 정의도(丁義道) 등이 있다. 1906년 서남부의 6개 면이 연안군으로 이속되어 1930년 당시에는 14개 읍·면과 161개 이로 편성되었으며, 인구는 1942년에 총 2만 852호 11만 813명이었다.
해상리의 동굴유적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각종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되었던 관계로 이 지역에는 평산면 산성리에 태백산성(太白山城), 마산면다보산에 자모산성(慈母山城), 서봉면 철봉리에 철봉산성(鐵峰山城) 등의 성지가 있으며, 성내에는 당시의 시설물인 장대(將臺)·문루·군기고·창고지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특히 태백산성은 대곡성·평산산성·성황산성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 영조때 개축된 것인데, 성내에는 태사사(太師祠)라는 사당이 있는 등 매우 큰 규모에 속하는 산성으로 주목된다. 태사사는 신숭겸(申崇謙)·유금필·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 등의 신상(神像)을 모신 곳으로, 고려 때 창건되었다가 1796년(정조 20)에 사액되었다.
왕실의 유적으로는 남천읍 보산리에 있는 주필대와 인산면 기린리의 영소대를 들 수 있다. 주필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실과 정부 일행이 서울을 버리고 서북방면으로 피난갈 때 하룻밤을 유숙했던 곳이다.
또 영소대는 병자호란 다음 해 이른바 남한산성조약에 따라 소현세자·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 등 왕자 일행이 중국 청나라로 끌려가 8년 동안 치욕적인 억류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 서울로 향하던 도중 하루를 묵은 곳이다.
불교유적으로는 원효가 창건했다는 인산면 기린리성적산에 관북사와, 평산면 은담리방원산에 있는 북수사(北岫寺)가 있다. 또한 서봉면 월봉리에서는 고려 후기에 속하는 종(鐘)이 출토된 바 있다. 금암면 제궁리에는 10∼11세기에 해당하는 청자도요지가 있다.
유교유적으로는 동양서원(東陽書院)과 구봉서원(九峰書院)이 있다. 평산온천 부근에는 고려 말의 신안이 종신하도록 이 곳에서 머물며 조선에서 보내는 녹봉을 받지 않았다는 내용의 배록동유허비(排祿洞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서울에서 서북쪽으로 향하는 큰 길이 이 지역을 동서로 횡단하고 있으며, 따라서 교통의 주요 시설인 역참(驛站)과 원점(院店)이 많았는데 그 유지가 아직도 다수 남아 있다.
『고려사』 병지(兵志)에서는 개경에서 서북으로 나가는 금교도(金郊道) 관하의 16개 우역(郵驛) 가운데 금암·보산·안성·반석·기린·온천 등의 6개 역이 이 곳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금암·보산·안성의 3개 역은 역정(驛丁) 75명씩을 배치한 일과역(一科驛), 즉 1등역에 속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평산면 빙고리에 평산향교(平山鄕校)가 있다.
서원으로는 마산면 당후리에 동양서원과 적암면 면곡리에 구봉서원이 있다.
동양서원은 1650년(효종 1)에 창건되어 1697년(숙종 23)에 사액되었는데
신숭겸과 이색(李穡)을 봉사한다.
구봉서원은 박세채(朴世采)를 배향하는 서원으로 역시 1697년에 사액되었다. 특히 이 서원에는 오늘날 중요 문헌으로 인정받고 있는 『의례』·『남계연보』·『중봉집(中峰集)』·『수심경(授心經)』·『사서당기(四書堂記)』 등을 소장하고 있다.
이 군은 본래 유교사상이 강해 갑오개혁 후에도 개화의 물결이 천천히 들어왔고 배일사상이 강한 고장이었다. 따라서 새 〈교육령〉에 의한 1면1교정책으로 각 면에 보통학교가 세워졌으나 사숙(私塾)이 널리 보급되었다.
군내의 유지들에 의해 육영학교(育英學校)·음월학교(陰月學校)·명신학교(明新學校)·양정의숙(養正義塾)·광명학교(光明學校) 등 약 60여 개의 사숙이 있었다. 중등교육기관은 광복 전까지는 없었고, 서울·평양·개성 등지로 유학하였다.
1930년에 2년제 남천공립농잠학교(南川公立農蠶學校)가 설립되었다. 194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4개교, 농잠학교 1개교, 심상고등소학교 2개교가 있다. 종교현황은 불교사찰 2개, 천주교성당 5개, 개신교교회 9개가 있다.
朴守卿, 平州人, 父大匡尉遲胤. 守卿性勇烈, 多權智, 事太祖爲元尹.
百濟數侵新羅, 太祖命守卿爲將軍往鎭之. 値甄萱再至, 守卿輒以奇計敗之.
曹物郡之戰,太祖部分三軍, 以大相帝弓爲上軍, 元尹王忠爲中軍,
守卿·殷寧爲下軍. 及戰, 上軍中軍失利, 守卿等獨戰勝.
박수경(朴守卿)은 평주(平州 : 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 사람이며,
아버지는 대광위(大匡尉) 박지윤(朴遲胤)이다.
박수경은 품성이 용감하고 굳세며 즉각 대응하는 지략이 많은 사람으로,
태조를 섬겨 원윤(元尹)이 되었다. 후백제가 신라를 자주 침범하자
태조는 박수경을 장군으로 삼아 그 곳에 가서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견훤이 재차 침범했지만, 박수경은 항상 기발한 작전으로 패배시켰다.
조물군(曹物郡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전투에서
태조가 전군을 삼군(三軍)으로 나누어 대상(大相) 제궁(帝弓)을 상군(上軍),
원윤(元尹) 왕충(王忠)을 중군(中軍),
박수경과 은영(殷寧)을 하군(下軍)으로 각각 삼았다.
전투가 벌어지자 상군과 중군은 패배했으나, 박수경 등의 하군만 승리했다.
太祖喜陞元甫, 守卿曰, “臣兄守文, 見爲元尹, 而臣位其上,
寧不自愧?” 遂幷爲元甫. 勃城之役, 太祖被圍, 賴守卿力戰得出, 又從太祖討神劒.
後定役分田, 視人性行善惡, 功勞大小, 給之有差, 特賜守卿田二百結.
定宗初卽位, 削平內難,守卿功居多, 尋轉大匡. 光宗十五年, 子佐丞承位·承景·大相承禮等,
被讒下獄,守卿憂恚而卒. 後累贈司徒三重大匡.
태조가 기뻐하여 원보(元甫)로 승진시키자
박수경은, “신의 형 박수문(朴守文)이 지금 원윤으로 있는데,
신의 벼슬자리가 그 위에 올라가면 어찌 스스로 부끄럽지 않겠습니까?”라고 아뢰므로
형제를 함께 원보로 삼았다.
발성(勃城) 전투에서 태조가 포위되었으나 박수경이 힘껏 싸운 덕분에 탈출할 수 있었으며,
또한 태조를 따라 신검(神劒)을 토벌하였다.
뒤에 역분전(役分田)을 제정하면서 사람들의 성행(性行)의 선악과 공로의 대소를 살펴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는데,
특별히 박수경에게는 토지 2백결(結)을 내려주었다.
정종이 처음 즉위하여 내부의 어려움을 평정하는 일에도 박수경의 공로가 컸으며,
얼마 뒤 대광(大匡)으로 전임되었다.
광종 15년(964)에 아들인 좌승(佐丞) 박승위(朴承位)·박승경(朴承景)과
대상(大相) 박승례(朴承禮) 등이 참소를 당하여 옥에 갇히자, 박수경은 울화병으로 죽었다.
뒤에 여러 차례 추증되어 사도(司徒)·삼중대광(三重大匡)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고려사에서 인용)
[출처] 고려사 열전 (최지몽, 왕식렴, 박수경)|작성자 jaseodang
삼국시대에는 원래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4세기 말엽에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고구려의 지배기에 중심부인 우봉은 우리말로 수지의(首知矣), 즉 소재라 불렀고, 한자로는 우령(牛嶺) 또는 우잠(牛岑)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토산은 오사함달(烏舍含達) 또는 사달이라 했고, 강음은 굴어압(屈於押) 또는 굴압이라고 불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당군이 673년(문무왕 13)에야 우잠성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고 하므로, 신라가 당군을 크게 격파한 675년 이후에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는 먼저 예성강 이남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해 694년(효소왕 3) 우잠에 성을 축조하고, 757년(경덕왕 16)에는 세 지역을 모두 개칭해 우봉군(牛峰郡)·토산군(兎山郡)·강음현(江陰縣)으로 정하는 한편, 우봉과 토산은 한주(漢州)에, 강음은 송악군에 소속시켰다.
786년(원성왕 2)에는 대사(大舍) 무오(武烏)가 『병법』 15권과 〈화령도 花鈴圖〉를 지어 왕에게 바침으로써 굴압현령에 제수되었다. 우봉과 토산은 782년(선덕왕 3) 패강진(浿江鎭)이 설치됨에 따라 이에 이속되었다.
[고 려]
일찍부터 송악에 소속되어 있던 강음은 1018년(현종 9) 개성현의 속현으로서,
우봉과 토산은 각각 평산과 장단의 속현으로서 모두 상서도성(尙書都省)이 관할하다가
1062년(문종 16) 개성부의 직할령으로 개편되었다.
1106년(예종 1)에는 우봉과 토산에, 1145년(인종 23)에는 강음에 감무가 설치되었다.
수도인 개성의 서북쪽에 예성강을 끼고 접해 있다는 지리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금천은 고려조를 통해 육상·수상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1019년(현종 10) 거란족을 맞아 강감찬(姜邯贊)이 구주(龜州)에서 대첩을 올리자
왕이 직접 우봉의 영파역(迎波驛)에 나가 환영하고 역이름을 흥의역(興義驛)으로 고쳤다.
1216년(고종 3)에는 거란의 잔당이 대거 침입해 개성 가까이 온 것을 흥의역과 강음의 금교역(金郊驛) 사이에서 조충(趙沖)의 공로로 대파하였다. 몽고와 홍건적의 침입 때에도 금교역과 흥의역 사이가 격전장이 되었다. 1391년(공양왕 3) 금천지역은 모두 경기우도에 편입되었다.
[조 선]
우봉은 1395년(태조 4) 현으로 승격되어 현령이 두어졌고, 토산은 1412년(태종 12), 강음은 1413년에야 현으로 승격되어 모두 현감이 두어졌으며, 세 지역 모두 1413년에 황해도로 이속되었다.
1651년(효종 2) 우봉현과 강음현이 합쳐져 처음으로 금천군이 편성되었는데, 이는 비록 수도가 한양으로 옮겨졌지만 이곳이 금교역을 중심으로 여전히 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의 역할을 하는 데다가, 임진강변의 시변리와 조읍포가 물산의 집산지여서 그 중요성이 높았던 데 기인한 것이다.
시변리장터는 한강 이북에서는 가장 성대한 장시로 일컬어졌고, 조읍포는 황해도 황주·봉산·평산 이동지역의 조세양곡을 수납해 서울로 옮기는 곳이었다.
개성인삼이라고 이름 붙인 인삼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재배된 것도 발전에 큰 몫을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15세기 중엽 금천의 호수는 1,528호, 인구는 4,330명이었는데, 1828년(순조 28)에는 호수 4,119호, 인구 2만 700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근 대]
1895년 을미개혁에 의해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금천군과 토산군으로 편성되었다가 경술국치 직후인 1914년 토산군이 폐지되면서 미원면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모두 금천군에 소속되었다.
1935년 당시 총 15개 면 111개 이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1942년의 호구는 1만 2802호에 6만 8352명이었다. 근대인물로는 3·1운동 때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1925년 만주로 망명해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최고위원으로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한 이동락(李東洛)을 꼽을 수 있다.
고려사열전 박수경[朴守卿]
박수경(朴守卿)1)은 평주(平州 : 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 사람이며,
아버지는 대광위(大匡尉) 박지윤(朴遲胤)이다.
박수경은 품성이 용감하고 굳세며 즉각 대응하는 지략이 많은 사람으로,
태조를 섬겨 원윤(元尹)이 되었다.
후백제가 신라를 자주 침범하자 태조는
박수경을 장군으로 삼아 그 곳에 가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견훤이 재차 침범했지만, 박수경은 항상 기발한 작전으로 패배시켰다.
조물군(曹物郡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전투에서 태조가 전군을 삼군(三軍)으로 나누어
대상(大相) 제궁(帝弓)2)을 상군(上軍),
원윤(元尹) 왕충(王忠)3)을 중군(中軍),
박수경과 은영(殷寧)을 하군(下軍)으로 각각 삼았다.
전투가 벌어지자 상군과 중군은 패배했으나, 박수경 등의 하군만 승리했다.
태조가 기뻐하여 원보(元甫)로 승진시키자
박수경은, “신의 형 박수문(朴守文)4)이 지금 원윤으로 있는데,
신의 벼슬자리가 그 위에 올라가면 어찌 스스로 부끄럽지 않겠습니까?”라고 아뢰므로
형제를 함께 원보로 삼았다.
발성(勃城) 전투에서 태조가 포위되었으나
박수경이 힘껏 싸운 덕분에 탈출할 수 있었으며,
또한 태조를 따라 신검(神劒)을 토벌하였다.
뒤에 역분전(役分田)5)을 제정하면서 사람들의 성행(性行)의 선악과 공로의 대소를 살펴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는데, 특별히 박수경에게는 토지 2백결(結)6)을 내려주었다.
정종이 처음 즉위하여 내부의 어려움을 평정하는 일에도 박수경의 공로7)가 컸으며,
얼마 뒤 대광(大匡)으로 전임되었다.
광종 15년(964)에 아들인 좌승(佐丞) 박승위(朴承位)·박승경(朴承景)과 대상(大相) 박승례(朴承禮) 등이
참소를 당하여 옥에 갇히자, 박수경은 울화병으로 죽었다.
뒤에 여러 차례 추증되어 사도(司徒)·삼중대광(三重大匡)이 되었다.
각주
1 박수경(?~964) : 평산 박씨(平山朴氏) 박수경의 가계는 북경도위(北京都尉) 적오[赤烏·積古]가
신라 경덕왕 때 죽주[竹州·察山 ;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의 지방관으로 나가
찰산후(察山侯)가 됨으로써 토착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적오—박직윤(朴直胤)의 부자는 다시 평주(平州 : 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에 들어가
십곡성[十谷城·谷山] 등 13성을 설치하고
박직윤이 당시 패강진(浿江鎭) 관내의 행정·군사 책임자인 대감(大監)을 맡으면서
이 지역의 군진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박지윤[朴遲胤·朴智胤] 때에는 궁예가 패서(浿西)지역을 장악하는데 협력함으로써
그 자손이 번창하였다.
박지윤—박수문(朴守文)·박수경(朴守卿)의 세 부자는 태조 왕건의 집권에 협력하고,
후삼국 통일전쟁 및 국정운영에 중요 역할을 하는 등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의 딸들은 태조 왕건의
성무부인(聖茂夫人)과 월경원부인(月鏡院夫人)·몽량원부인(夢良院夫人)이 되었으며,
특히 박지윤—박수경—박승위(朴承位)의 삼대가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광종이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박수경의 세 아들 박승위·박승경(朴承景)·박승례(朴承禮)가 참소를 당해 체포되고
그로 인해 박수경이 죽게 되자,
서경西京세력을 대표한 이 가문도 크게 타격을 입어 평주지역의 토착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박수경의 손자 때부터는 평주에서 이탈하여 중앙관료를 지내다가
나중에 전 본관인 죽산(竹山)으로 옮겼으며,
그 결과 박인량(朴寅亮) 때에는 관향을 죽산과 평산으로 병기하였다.
광종 때 타격을 입은 이들 가문은 박인량과 그의 아들때 명문으로 발전하였으며,
당대의 문벌인 인주 이씨(仁州李氏)·개성 왕씨(開城王氏)·
배천 조씨(白川趙氏) 등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박인량의 둘째 아들 박총서(朴聰諝)는
개경(開京)에 있던 화엄종(華嚴宗) 내지 유가종(瑜伽宗) 사원인
홍원사[洪圓寺·弘圓寺]의 주지가 되었고,
박소(朴翛)의 네 아들도 출가하였다.
김용선 편, 「박경인(朴景仁) 묘지명(墓誌銘)」
·「박총서(朴聰諝) 묘지명(墓誌銘)」
·「박소(朴翛) 묘지명(墓誌銘)」
·「박경산(朴景山) 묘지명(墓誌銘)」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이태진, 「김치양 난의 성격」 『한국사연구』 17, 1977, 86쪽.
이수건,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5, 154~159쪽.
정청주, 『신라말고려초호족연구』, 일조각, 1996, 23~24·37~63쪽.
2 제궁(?~?) : 고려 태조의 비인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 황보씨(皇甫氏)의 아버지 황보제궁(皇甫悌弓)이다. 그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 태조,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 황보씨(皇甫氏) 및 권92, 열전5, 유금필전(庾黔弼傳) 참조.
3 왕충(?~?) : 태조 때 장군·원윤(元尹)·원보(元甫)를 역임한 무신관료이다. 태조 7년(924) 7월 후백제의 견훤이 그의 아들 수미강(須彌康)과 양검(良劍) 등을 보내어 조물군(曹物郡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을 공격했을 때에는 장군 애선(哀宣)과 함께 태조의 명령을 받고 나가서 후백제 군대를 물리쳤으며, 같은 왕 11년에는 견훤이 장군 관흔(官昕)을 시켜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자, 명지성(命旨城 :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부근)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물리치는 등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4 박수문(?~?) : 평산 박씨(平山朴氏) 박수경(朴守卿)의 형으로,
태조~정종 때 원윤(元尹)·원보(元甫)·대상(大相)·대광(大匡)을 역임하고
태위(太尉)·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추증된 공신이며,
태조의 제27비 월경원부인(月鏡院夫人)의 아버지이다.
태조 때에는 전 시중(侍中) 유권열(劉權說)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광조사(廣照寺)의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을 사나내원(舍那內院)으로 초청하여
주지하게 하였다.
이지관, 「해주광조사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문」
『교감역주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문고, 18~24쪽.
5 역분전 : 태조 23년(940)에 후삼국통일과 고려개국에 공로가 있는 조신과 군사들에게 선악과 공로의 대소에 따라 지급한 토지를 말한다. 그 성격에 대해서는 수조권(收租權) 분급제인 전시과(田柴科)의 전신으로 파악하는 견해(①②③)와 훈전(勳田)의 계열로 파악하는 견해(④)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다시 통일전쟁의 수행과 관련한 논공행상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는 견해(①②)와 관료들의 관계에 따라 지급된 토지 즉 전시과와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제도로 파악하는 견해(③)가 있다.
① 강진철, 「건국직후의 상태와 역분전의 설치」 『고려토지제도사연구』, 일조각, 1980.
② 김재명, 「건국직후의 토지지배관계와 역분전의 설치」 『한국사』 14, 국사편찬위원회, 1993.
③ 황선영, 「고려초기 역분전의 성립」 『한국중세사연구』 4, 1997.
④ 홍승기, 「고려초기의 녹읍과 훈전」 『사총』 21·22, 1977.
6 결 : 전근대 결부법(結負法)에서 사용된 단위이다. 결부법은 파(把)·속(束)·부(負)·결(結)로 구성되는데, 10파(열 줌)는 1속(한 묶음), 10속은 1부(한 등짐), 1백부는 1결(한 먹·목·멱)로 산정된다. 결부제는 삼국시대부터 그 용례가 보이지만 통일신라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통일신라의 결부제는 다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이어졌는데, 결부법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는 고려후기에 와서였다. 통일신라와 고려 전기 결부법은 양척동일제(量尺同一制)로 토지의 비옥도에 관계없이 모든 토지에 동일한 척(尺)을 적용하였다. 반면에 고려후기와 조선 전기는 수등이척제(隨等異尺制)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다른 척을 적용한 제도였다. 결부제의 도입은 세금의 징수와 토지분급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고려후기로 접어들면서 각종 농서의 보급과 수리시설의 확충 등에 따른 농업생산력 증대에 따라 수등이척제로 변화한 것이다. 결부제 문제에서 현재 가장 논란이 있는 것은 1결의 면적이다. 논자에 따라서는 1결의 절대 면적을 17,000평 내외(①), 6,800평(②), 4,673.3평(③), 1,530평~1,600평(④), 3,550평(⑤), 1,400~1,500평(⑥), 1,200평(⑦)으로 산정하는 견해들이 있다.
① 김용섭, 「고려시기의 양전제」 『동방학지』 16, 1975 ; 「결부제의 전개과정」 『한국중세농업사연구』, 지식산업사, 2000.
② 강진철, 「결부제의 문제」 『고려토지제도사연구』, 일조각, 1980.
③ 박흥수, 「한국고대의 양전법과 양전척에 대한 연구」 『한불연구』 1, 1974.
④ 여은영, 「고려시대의 양전제」 『교남사학』 2, 1986.
⑤ 兼若逸之, 「“高麗史”‘方三十三步’ 및 “高麗圖經”‘每一百五十步’의 면적에 대하여」 『손보기박사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1988.
⑥ 이우태, 「전결제」 『한국사』 14, 국사편찬위원회, 1993.
⑦ 이종봉, 『한국중세도량형제연구』, 혜안, 2001.
7 공로 : 왕식렴(王式廉)세력과 함께 박수경(朴守卿)의 집안 평산 박씨(平山朴氏)가 정종(定宗)의 왕위 계승과정에서 그 후원세력이 된 사실을 말한다. 당시 왕식렴이 왕규(王規)를 제거하는 데 동원된 서경(西京)의 군사력에는 박수경의 군대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후 서경의 패서(浿西)세력들은 정종의 후원세력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고 서경천도를 계획하기도 하였다.
강희웅, 「고려 혜종조 왕위계승란의 신해석」 『한국학보』 7, 1977, 71~72쪽.
이종욱, 「고려초 940년대 왕위계승전과 그 정치적 성격」 『고려광종연구』, 일조각, 1981, 26~27쪽.
이혜옥, 「고려초기 서경세력에 대한 일고찰」 『한국학보』 26, 1982, 118~121쪽.
정청주, 『신라말고려초호족연구』, 일조각, 1996, 56~57쪽.
○ 朴守卿, 平州人, 父大匡尉 遲胤. 守卿性勇烈, 多權智, 事太祖爲元尹. 百濟數侵新羅, 太祖命守卿爲將軍往鎭之. 値甄萱再至, 守卿輒以奇計敗之. 曹物郡之戰, 太祖部分三軍, 以大相 帝弓爲上軍, 元尹 王忠爲中軍, 守卿·殷寧爲下軍. 及戰, 上軍·中軍失利, 守卿等獨戰勝. 太祖喜陞元甫, 守卿曰, “臣兄守文, 見爲元尹, 而臣位其上, 寧不自愧?” 遂幷爲元甫. 勃城之役, 太祖被圍, 賴守卿力戰得出, 又從太祖討神劒.
後定役分田, 視人性行善惡, 功勞大小, 給之有差, 特賜守卿田二百結. 定宗初卽位, 削平內難, 守卿功居多, 尋轉大匡. 光宗十五年, 子佐丞 承位·承景·大相 承禮等, 被讒下獄, 守卿憂恚而卒. 後累贈司徒·三重大匡.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