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의 자리
2022년 1월 16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12-15
(5: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5:13)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5: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성령을 받아 형제라는 자들이라면서 왜 ‘약한 자’가 생겨나며 ‘규모없는 자’ 곧 ‘게으른 자’가 생겨나면 ‘악을 악으로 갚는 자’가 생겨나는 겁니까? 그것은 제대로된 인간성 노출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인간적으로 볼 때에 얼마나 불가능한 것이었는가를 계속 교회 안에 유지시키기 위함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자’와 ‘권하는 자’들의 존재와 결부되면서, 신약 시대의 교회는 구약의 광야 교회를 형식과 연속성이 있음이 드러납니다. 광야 때, 사람들은 어지간히도 지도자인 모세의 속을 썩게 했습니다. 민수기 11:13-15에 보면,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가로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3:4-5에 보면,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직접 독대했던 모세가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한다는 말은 ‘계시노선의 단일화’ 때문입니다. 계시가 흩으려지지 않고 모세를 통해 일원화되므로서, 사람이 이스라엘을 이끌어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을 이끄심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교회 내에 성령께서 다스리는 자와 가르치는 자를 두신 것은 ‘계시의 단일화’ 때문입니다.
나중에 사도들이 다 죽고 난 뒤에는 확립된 성령 말씀을 가지고 성령님께서 직접 성도들을 가르치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광야 생활을 거치면서 인간들의 본성들이 여지없이 노출됩니다. 인간에게는 생존의 욕구가 기본적으로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뭘 먹어야 하나님을 섬길 게 아닌가?”라는 불만이 정당함을 가지고 광야 길에 울러 퍼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조치는 이런 원망에 대해서 단호했습니다.
민수기 11:1-2,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인간들에게 있어 욕구는 생리적 욕구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면 보호받고 싶은 안전의 욕구가 생겨나고 그것이 충족되면 보다 안전한 미래까지 미리 챙길려고 어디에 소속하고 싶은 소속의 욕구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곧 혼인을 해서 누구로부터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무한 공급받은 싶은 행복한(?) 결혼을 꿈꾸는 공주심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욕구들이 생기면 그 상층부에 남들로부터 존경받고 싶은 욕구가 발생합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인정해주었으면 하는 욕구입니다. 그 다음 마지막 욕구는 타인과의 만남 자체도 번거럽고 귀찮아집니다. 그저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자기만 신이 되고 싶고 최고가 되고 싶은 겁니다.
즉 나 빼놓고 다 죽었으면 좋겠고 심지어 하나님마저 죽여서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고 싶은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궁극적인 욕구를 드러내도록 유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입자(粒子)는, 독보적인 알갱이는 악마의 모델임을 알리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선택해놓으시고 왜 버리신 겁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요 6:70) 즉 예수님께서는 사단을 입자화해서 지상에 드러내게 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그 드러낸 악마가 상대하고 싶은 최후의 입자, 곧 개별자는 예수님 자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은 두 입자 사이의 대결구조가 됩니다.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 6:71) 예수님께서 입자처럼 설쳐대던 사울을 택하여 사도로 삼으신 것은 그 사도를 입자로 여기지 않고 파동, 곧 흐름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흐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즉 사도의 입자성은 예수님의 입자성에 종속되는 상태로만 가능합니다.
이는 곧 유일한 입자인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 사이에, 그 어떤 인간들이 개입해내지 못한 아버지와 아들만의 파동을 스스로 가슴 열고 활짝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이를 쩍 벌어지게 하시는 겁니다. 악마도 관여할 수없고 인간도 관여할 수 없는 그 사이를 십자가의 효력으로 작용하는 언약적 파동이 작렬하는 겁니다.
바로 여기서 형성된 그 장소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어 자기 백성들로 합류시키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자신의 입자성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파동성으로 합류되면서 ‘공동의 자리’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에게는 그 어떤 돌도 쥐고 있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을 곧장 돌을 칠 기세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돌을 든 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 현장을 피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고 난 뒤, 본인도 예수님께서 발각시킨 돌 맞을 짓에 준해서 돌에 쳐맞아야 할 대상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그 현장을 떠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진즉에 죽어 마땅한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상태에서 여인에게는 선악지식이 토해집니다. 인간이 도저히 갈 수 없는 생명나무로 이동하도록 주님께서 주선하시기 위해 그 여인은 예수님과 공동의 자리를 형성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맞을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아버지로부터 벌을 받아야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여인은 예수님과 더불어, 공동의 운명으로서 십자가와 부활 사이를 건너갈 수가 있습니다. 여인은 자기를 위한 입자 역할이 아니라 입자로서는 죽어버린 파동역할자입니다.
사람들이 입자성을 유지하려는 이유는, 스스로 부끄럽지 않는 존재를 만들고 싶어서입니다. 하지만 정작 부끄럽지 않는 상태는 복음 안에서 예수님과 공동의 자리에 합류되는 겁니다.(롬 1:16) 이 자리는 ‘일한 것도 없이 의롭게 되는 자리’입니다.(롬 4:4-7) 핵폭탄으로부터맞을 때, 인간은 아픈 것이 아니라 사라집니다.
인생이 아픈 것은 아직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는 입자가 되려는 헛된 시도를 종교의 밀림 밖으로 못나와서 그 안에서‘자기를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개를 개라고 밝혀주시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교회
22-01-16 21:00
21강-데살로니가전서 5장 12-15(공동의 자리)220116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15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2-15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스리는 자’ 또 ‘권면하는 자’ 그들의 수고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알아주니까 상당히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들이 다 다르지만 어떤 계시 노선이 단일화되어야 된다는 그 점에 대해서는 그 당시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사도라는 자들이 있었고 사도로부터 다스리는 은사로 인정받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이 성경이 다 확정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초창기 교회에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교회부터 먼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완성된다는 말은, 성경이 종착점에 이른다는 말은 사도들이 다 죽을 때나 가능하고 사도들은 초창기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통해서 성경을, 하나님의 확정된 계시를 구성하기 위해서 그들은 일시적으로 사도 역할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첫째, 둘째, 셋째의 특징이 뭐냐? 말씀 가르치는 은사와 관련된 사람입니다. 그때까지는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제일 오래 살았는데 사도 요한이 자기가 떠날 때가 되어서 사도가 죽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계속적으로 자기 백성을 관리하느냐? 그 점에 대해서 요한 1서 2장 27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것은 사람이 가르쳤다고 해서 사람에게 의존하는, 그에 대한 부작용이 필히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특별히 눈에 보이는 사람을 추종하다가는 이것은 무엇의 일과 충돌되느냐 하면 성령의 일과 마찰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해서 궁극적인 모든 정답은 성경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연세들이 있어 가지고 아무리 잘 가르친다, 하지만 그것도 자기 사견일 수가 있고요, 또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없고 주신 것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체를 다 아는 것은 성경 안의 내용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이 볼 때는 각자각자 자기 편한 대로 예수 믿는다고 욕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들의 계시의 노선의 단일화로 인하여 이미 성경을 해석하는 그 기준은 확정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가, 사도가 다 다르더라도 사도들의 설교를 따로 뽑아서 대조해보면 전부 다 한결같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일은 십자가, 십자가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게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나오는데 1장에 보면 그전에 뭔가 단서를 둬야 될 것이 있어요.
뭐냐? 사도 자신을 말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 진 적이 없다.” 나는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 진 적이 없다. 주님께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기는 하지만 너희를 위한 십자가는 내가 아니고 주님 자신이, 자신이 진 그 죽음만이 유일하게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것, 구원의 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그 당시 계시를 다 알고 그것도 본인의 사견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한테, 예수님한테 배웠던 사도가, 나 외에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받는다고 단언했던 그 사도가 핵심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 복음이에요. 이 십자가 복음, 일체 어떤 인간이 추가해서 더 보탤 것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인간의 추가적인 예수님의 공로 외에 어떤 추가적인 종교적인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은 천국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위한 나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천국을 인간이 가고 싶어해요. 인간이 천국 가고 싶어하는 것은 이해됩니다. 살다가 너무 힘드니까, 생로병사 힘드니까 불교도 천국 이야기 하고 다하는데 그렇게 천국은 가고 싶지요. 하지만 천국에 대한 그 인테리어, 그 공사, 그것은 인간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만든 인테리어 공사기 때문에 인간들한테는 상당히 낯선 공간입니다. 그 천국이라는 게. 우리가 생각한 천국이 아니에요.
인간들은 나름대로의 어떤 욕구가 있는데 그 욕구를 어떤 사람은 이렇게 정리했어요. 다섯 가지로 정리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아슬루(Abraham Harold Maslow, 1908-1970)라는 사람인데요. 첫 번째, 모든 인간은 생리적 욕구가 있다. 배고플 때 먹고 싶고 잠올 때 잠자고 싶고 그런 거요. 배설하고 플 때 배설하고 싶고요.
생리적 요구가 일단 되면 그다음에는 뭐냐 하면, 나를 좀 지켜줬으면 좋겠다. 나를 좀 보호해주면 좋겠다는 안전의 욕구가 있다는 겁니다. 일리가 있지요. 들어보니까 그럴싸하다는 말이에요. 생리적 욕구. 인간은 뭐 생존이지요, 생존, 생계, 생존,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배고픈데 그딴 게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지요.
생리적 욕구 그다음에 안전의 욕구. 추울 때, 바람 불 때 동굴에 들어가 피하고 싶은 욕구. 그냥 이것은 욕구에요. 본능이고 충동이고. 그 다음에 소속의 욕구. 가정이 있든 뭐가 있어서 누가 나를 좀 보호해줬으면 좋겠다. 누가 나를 지켜주면 좋겠다. 누가 나를 사랑해주면 좋겠다. 그런 거요.
이게 바로 결혼하고픈 욕구지요. 돈 벌기 힘든데 남편이 돈 벌어다 주면 난 살림만 살겠다, 남편이 번 돈으로 쇼핑하는 재미로 살면 좋겠다. 양손의 균형을 맞춰서 쇼핑백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균형이 맞아야 돼요. 한 손에는 다섯 개 들고 다른 손에는 여섯 개 들면 안 돼요. 양손에 균형 맞춰서 들고는 빠라바라빠라빰~! 이렇게 살고 싶은 거예요.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그다음에 소속의 욕구. 누구에 소속되어서 거기서 보호받았으면 좋겠다는 거요. 이민 가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전쟁 났을 때 자기나라 조국을 버리고 탈출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어떤 큰 나라에 살고 싶다. 내 자식의 교육 때문에 힘들다. 캐나다 가자’ 그런 것. 그래서 캐나다 가서 망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지만. 자식 교육, 영어도 배우고, 뭐 이런 것이 사랑받고 싶은 거예요. 지키고 싶은 거예요.
네 번째 욕구가 존경받고 싶은 거예요. 이제 배 좀 부르다 그 말이지요. 배부르니까 남들이 날 좀 우러러봤으면 좋겠다. 존경의 욕구. 다섯 번째 욕구, 마아슬루는 아주 심오하게 생각해서 다섯 번째 최후의 인간의 욕구가 뭐냐? 존경받는 것도 나중에는 귀찮아요. 팬들도 귀찮아. “이 재명! 이 재명!” 사람들이 외치는 이것도 귀찮아요. 사람들하고 악수하는 그것도 손 아파요. 나중에 멍 다 들고 안티프라민 발라야 돼요. 그래서 그것도 귀찮아요.
인간의 마지막 욕구는 뭐냐? 자아실현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이게 마지막 욕구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마아슬루의 인간의 욕구에서 빠진 게 있어요. 자아실현의 욕구에서 추구하는 것이 뭐냐? 천국 가고 싶어라. 죽어서 지옥 안가고 천국 가고 싶다는 거예요.
그런데 마아슬루 이 사람이 복음을 모르니까 굉장히 중요한 욕구를 빠트렸어요. 정말 꼬깃꼬깃 숨겨놓은 욕구가 모든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나 빼놓고 다 죽어버려. 나 빼놓고 나만 살고 나머지는 다 죽어버려’ 심지어 하나님도 죽이고 그 하나님 자리를 내가 차지하고 싶은 욕구. 이것은 성경에만 나오는 욕구에요.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성경은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다 담아놨다고요. 그래서 천국 가는데 ‘천국에는 내가 원하는 사람만 가고 내가 싫은 사람은 오지 마’ 이 욕구가 뭐냐 하면, 나만 나답게 살아야 되고 그 외에는 내가 용서하고 싶지를 않은 거예요. 이런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욕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어디를 가요? 천국을 가요? 그게 누구 좋은 나라인데 천국을 그렇게 갑니까? 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14절부터 보게 되면 분명히 ‘형제’예요. 하나님의 형제인데 뭐라고 권면해야 되느냐 하면, 계시의 단일화 노선에 포함된 이 가르치는 자, 사도와 선지자들은 뭐라고 그들에게 가르쳐야 되느냐 하면, 마음이 약한 자, 그다음에 힘이 없는 자, 마음이 약한 자를 위로해주고 힘이 없는 자는 붙들어 주고, 그다음에 15절에 보면 ‘악을 악으로 갚는 자’ 이런 자들이 교회 내에 그대로 등장하고 있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성령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불쑥불쑥 가시처럼 교회에서 이런 사람이 계속 등장하느냐? 이것을 설명하는 방법은 항상……, 이게 신약이거든요. 데살로니가전서가 신약이잖아요. 이것은 어디서 해명되어야 되느냐? 구약에 가면 이게 해결이 다 돼요. 신약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미 구약을 다 거쳤어요. 구약에서 시범케이스로 다 일어난 일들입니다.
이게 뭐냐? 광야에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분명히 유월절 어린양으로 피 발라서 기적적으로 남자만 한 60만 되는 많은 이스라엘을 끌고 건너올 수 없는 홍해를 건너왔습니다. 일단 홍해를 건너왔다. 죽음의 바다를 건너왔으니까 곧장 우리들의 욕구에 만족하는 나라가 오겠지, 라고 자기 욕구에 대해서 조금도 부정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욕구에 대해서.
방금 한 이야기 시간 지나서 다 잊어버렸지요. 생리적 욕구,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 배고프면. 안전의 욕구, 내가 안 지키면 누가 지키나? 안전의 욕구, 나는 사랑받고 싶어요. 소속의 욕구, 일단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는 일단 피동적으로 누구 것 챙기는 쪽이라면 이제부터는 일단 배부르다 그거지요. 존경받고 싶은 욕구, 존경받고 싶어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나를 부러워하고 나를 자신의 이상 모델로 여기게 하고 싶은 욕구.
마지막 다섯 번째 욕구는 뭐냐 하면, 아이고, 그것도 귀찮아. 형도 귀찮고 최고라는 그것도 짜증 나요. 그냥 자아실현의 욕구, 그냥 혼자서 구름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싶어요. 다 귀찮아요. 자식도 귀찮고, 남편도 귀찮고, 혼자 홀로 신이고 싶은 거예요. 물론 돈이 뒷 받침 되어야 되지 돈 뒷 받침 안 되면 소용없는 일이에요.
이런 욕구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예요. 어디에? 광야에서. 그래서 광야에서는 뭐부터 빼느냐 하면,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 존경받고 싶은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전부 다 빼버립니다. 기본적으로 생존 자체를 안되게 만들었어요. 생존 자체를.
이건 뭐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편히 쉴까, 희희낙락 희망에 잠겨 있던 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것은 나중 문제고요,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고, 먹을 것보다 더 시급한 게 마실 게 없네요. 물 없고 양식 없고, 하나님은 자동적으로 뒷전이지요. 내가 생리적 욕구부터 충족되지 않는데 그다음에 무슨 종교를 찾겠습니까?
백성들이 모세에게 얼마나 달려들었겠습니까? 사람들이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데 무슨 수로 힘이 남아서 하나님을 섬기겠느냐? 그러나 여러분 모세가 누굽니까? 모세가 물 없이, 양식 없이 40일 동안 살았던 사람입니다. 해병대 특수훈련 받은 게 아니에요. 40일을 버틴 게 아닙니다.
40일 버틴 게 아니고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 가지고, 물이 뭐예요? 짬뽕이 뭐예요? 짜장면이 뭐예요? 전혀 몰라요. 그냥 생명 나무, 하나님 계심에 그냥 살다 보니까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요. 세상에 40일이나 흘러버렸어요. 그게 모세입니다. 그 모세가 40일 있다가 땅에 내려오니까 땅에서는 다른 시공간에 적용받아요. 양식이 있어야 되고 물이 있어야 돼요.
그렇다면 모세로 하여금 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오게 만들고 다시 마태복음 17장에 변화산에서 모세로 하여금 예수님께 다시 올라가서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신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가 그렇게 시급하게 느껴진 그 세상에서, 허접한 세상에서 물 없이 양식 없이도 살 수 있는 세계로의 이끔, 이끄는 그 노선을 계시의 단일화 모습으로서 모세를 통해서 알려준 겁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땅에 사람들이 살면서 힘들어하고 원망하는 그것은 충분히 이해는 해요. 이해는 하지만 모세가 광야에 살면서 굉장히 답답해한 구석이 한두 곳 나타난 것이 아닌데 민수기 11장 11절을 보겠습니다. 민수기 11장 11절에 보면 백성들이 불만을 하니까 하나님께 서 불로써……, 남자만 60만인 이스라엘의 행렬이 죽 가는데 불평하는 사람은 어디로 가느냐? 꼭 뒤로 가잖아요. 뒤로, 뒤로 가요.
뒷좌석 주의하세요. 꼭 불평하는 사람이 뒤로 가서 하나님의 불이, 진노의 불이 진 마지막 끝에 낙오자 될까 말까, 합류하냐, 아예 때려치우고 옛날처럼 살까, 하고 경계선에 걸쳐 있는 진 끝에 있는 사람에게 불이 떨어져서 진 끝에 있는 사람들을 죽여버립니다. 11장 1절에 보면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모든 불만은 저 뒷구석에 나오는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그들이 뭐라고 불평하느냐? 4, 5절에 보면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그 탐욕이 뭐냐?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참외)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여기에 뭐라도 보탠다면 생강도 포함해야지요. 6절에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고기 먹어본 지 너무 오래됐고, 수박이나 참외 먹은 지 너무 오래 되었어요. 아무리 애굽에서 나왔지만 이 기억은 애굽에서 활용되고 사용한 그 두뇌 아닙니까? 그 두뇌 세포거든요. 그 기억이 그대로 옛날에 먹던 맛있는 것을 잊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광야에서 보면 모든 것이 불만스럽고 불평요소에요. 사는 게! 몸은 그대로인데 옛날에 살던 기억은 여전히 여기에 잔존하고 있고 그리고 모세가 인도한다 해놓고는 본인들이 원하지 않는 양식만 온종일 그것만 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렇게 하니까 여기서 모세도 화가 난 겁니다. 하나님께.
또 온 백성의 가족들이 울어요. 10절에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모세입장에서 난처합니다. 같이 인도해야 될 그 수백만 사람들은 모세의 이쪽에서는 울고 있고 또 모세의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이 화를 내고 있고. 그 중간에 끼어서 모세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 이럴 것 같으면 나 대장질 안 해.” 이렇게 된 거예요.
그게 민수기 11장 11절입니다.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오늘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13절 봅시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일함으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각별하게 너희를 다스리는 자를 가르치는 자를 각별하게 애정을 갖고 사랑하라. 그 이야기거든요.
각별하게 하라는 이 각별, 이미 광야 때 모세가 지독하게 당했던 그 일을 여전히 신약에서도 똑같이 당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다가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누나가, 미리암 누나가 모세가 혼인을 하는데 관여합니다. 주로 혼인할 때 가족인 여자들이 자기 전담업무라 해서 관여하잖아요. 모세가 흑인 여자하고 딱 결혼을 하니까 누나가 하는 말이 “너 왜 그런 여자 좋아하느냐? 뿌리도 근본도 없는 것과 왜 결혼하느냐?” 그래서 모세에게 “그 여자하고 헤어져라. 내가 알아봐 줄게.” 이런 식으로 나온 거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모세 중매에까지 개입하십니다. 누나에게 문둥병 걸리게 만들어요. 여 자의 무기는 미모입니다. 그런데 그 미모가 문둥병 되어보세요. 낯을 못 들지요. 가혹한 처벌을 누나에게 합니다. 그 근거가 뭐냐? 2절에 나옵니다. 민수기 12장 1-3절에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모세의 형하고 누나한테 하나님께서 화내는데 그 근거가 있어요. 그 근거가 뭐냐 하면, 모세는 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 이 세상의 지경, 지옥 같은 이 모습을, 사정을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안다. 왜? 하나님하고 같이 40일 동안 있어 봤기 때문에. 인간들은 자기 세계를 벗어나지를 못해 가지고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전부인 줄 알고 여기서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막 불만 불평, 막 몸부림치고 난리지요.
꼭 원숭이한테 바나나 주는 것과 같은 거예요. 원숭이가 얼마나 바보 같은지 아침에 세 개 주고 저녁에 네 개 주니까 화를 막 내는 거예요. 사람들은 화를 내는 이유를 몰랐지요. 나중에 아침에 네 개 주고 저녁에 세 개 주니까 원숭이들이 좋~다고 하는 거예요. 합하면 어느 쪽이나 일곱 개 거든요. 똑같이 일곱 개를 줘도 아침에 왜 적게 주냐, 그것 때문에 화내는 거예요. 이게 원숭이 세계의 한계입니다.
인간의 세계의 한계는 뭐냐?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 존경받고 싶은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이거 외에는 없어요. 이게 인간의 한계에요. 애굽의 생활이 한계라는 말이지요. 애굽에서 바로 약속의 땅에 보내지를 않았어요. 중간에 뭘 거칩니다. 중간에 거쳐야 돼요. 네가 환경 바뀜을 이해해야 돼요.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그 환경 바뀜을. 인간 바뀜이 아니고 환경 바뀜을. 환경이 바뀌어서 구원받거든요.
그런데 그 바뀐 환경이 인간을 맞춰줄 수가 없어요. 왜 자기 자신이 얼마나 거만하고 교만한지를 상상도 못 하고 있어요. 1944년 9월에 2차대전이 한창일 때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던 그 시기에 ‘오노다히로’라고 일본사람인데 그 사람이 미군과 전투하기 위해서 필리핀 루방섬에 250명의 부하를 데리고 지휘관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노다히로라는 사람이 1944년 한창 전쟁 중일 때 와서 그 이후에 홀로 30년 동안 전쟁했어요. 바보 같은 사람이죠 정말. 그다음 해에 전쟁이 끝났거든요. 전쟁 언제 끝났습니까? 애들도 압니다.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1년도 안 되어서 끝났습니다. 끝나서 미군이 비행기 타고 다니면서 온 남태평양 필리핀 섬 일대에 일본말로 전단 다 뿌리고 그리고 항복한 일본당국도 자기 군대가 들어갔던 섬마다 다 전쟁 끝났으니 집에 가라고 항복 권유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돌아갔어요.
그런데 이 오노다히로라는 사람은요, 그게 미군이 일본 포로를 앞장세워서 유언비어를 퍼트린다고 자기신념에 미쳐 가지고 섬에서 나오지를 않는 거예요. 나오지를 않아요. 그래서 세월이 30년 지났어요. 처음에는 야자수나 이런저런 열매나 먹고 버티다 안 되어 가지고 필리핀 루방섬에서 자기하고 비슷한 처지의 패잔병이 두 명이 더 있었던 모양이라, 합해서 세 명이 무기는 있었겠다, 30년 동안 몇 명을 죽였느냐? 30명 죽이고 1백 명을 부상시키면서 테러 짓을 한 거예요.
그래서 도저히 안 되어서 또 일본에서 전쟁 끝나고 20년쯤 뒤에 “우리가 일본 정부에서 왔는데 전쟁이 끝난지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해도 “너는 미군의 앞잡이야. 아직 전쟁이 안 끝났어.” 그렇게 버틴 겁니다.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면서. 그래서 마르코스 대통령이요, 벌써 언제 적입니까,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이 그 사람을, 거기가 필리핀영토니까, 사면해준다고 통보해도, 필리핀 정부에서 말해도 안 믿어요. 다 유언비어라고.
결국은 어떤 일본의 모험가가 찾아가서 되어진 과정을 죽 설명하니까 그제야 그 사람이 자기 잘못을 알고 섬에서 나와 가지고 일본에 갔습니다. 그 사람이 그동안 서른 명이나 죽였어요. 그런데 일본에 왔다가 브라질로 가서 농장에서 돈을 벌었어요. 결혼도 하고요. 혼자서 살던 재주가 있었던지 돈 벌어서 다시 일본에 와서 언제 죽었느냐? 2014년도에 91세까지 살다가 죽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햇빛이 햇살이 창문까지 당도했어요. 커튼 열면 되는 겁니다. 자기 다섯 가지 욕구에 미쳐 가지고 이렇게 사는 게 옳다고, 자기가 살아오면서 누적된 자기 체험이 있는 것은 인정하는데, 그건 인정하는데, 사도바울이 성경을 통해서 언급했거든요, 이 세상은 어두움이라고, 사람들은 어두운 동굴에 빠져 있다고.
나오라, 이 말입니다. 그 종교라는 밀림에 빠지지 말고, 자기 잘난 맛에 살지 말고, 지금 햇빛은 창문가에 와 있어요, 커튼만 열면 돼요. 커튼만 열면! 꼭 사람들 살아가는 게 <여고 괴담>찍는 촬영장 같아요. 어두워요. 사람들이 자꾸 기어들어 가요. 오노다히로처럼 자꾸 기어들어 가요. 나를 꾀지 말라고 하면서.
참, 이 신념, 인간은 나는 내가 알아서 살아간다는 이 신념을 누가 그렇게 줬습니까? 이것은 누가 줬느냐에 대해서 인간들이 아무리 모여서 연구해봐야 알 길이 없습니다. 이 오노다 히로 이 사람이 왜 30년 동안 태평양 전쟁한다고 혼자서 밀림 속에서 못 나오고 있었던가? 물론 남들은 잘못된 신념이라 하는데 왜 그런 잘못된 신념을 가질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고 싶어서 그래요.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존재.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존재를 내 손으로 나를 만들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로마서 1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존재 되려 하지 말고 그냥 그 햇빛 앞에 커튼 제치고 나오면 돼요.
옛날 금성TV 보면 요 다이얼 돌리는 그 TV가 얼마나 귀했습니까? 그런데 그게 너무 귀하기 때문에 화면 앞에 여닫이문을 해놨어요. 그 여닫이문을 활짝 열면 되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나 스스로 부끄러운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열까 말까, 열까 말까, 그러고 있다고요. 밀림에서 나올까 말까 ,나올까 말까, 이래서 30년이에요.
내가 하나의 군인으로서, 군대 지휘관으로서 내가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존재일까 아닐까?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이미 전쟁 끝났거든요. 다 이루었다, 했잖아요. 로마서 4장 4절에서 8절의 이런 말씀은 그 인간들에게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에요.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라고 미군들이 남태평양 일본군에게 이걸 이야기해준다고요.
“그냥 나와! 그냥 나와! 패잔병이라도 누구 욕할 사람 없으니 그냥 나와. 네가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존재 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벌거벗은 채로 나와. 복음만이 너를 부끄럽지 않게 해 줄 거야.” 바로 이 설교가 로마서에도 나오지만 사도바울이 성경 전체를 어떻게 단일계시로 단일화시켜서 해석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의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나를 지키는 일이 아니고 주께서 하신 일이 우리로 하여금 손들고 다 항복, 모든 것을 다 털고 어떤 나의 그동안의 나를 지키던 신념 다 버리고, 그냥 숨어 있지 말고 다 나와. 바깥은 다 이룬 거예요. 다 이뤘다는 거예요, 내가. 다 이뤘는데 네가 왜 끙끙 고민을 하느냐는 말이에요, 네가. 바깥에서 다 이뤄졌는데.
커튼만 열지 말고 창문까지 열어 버려야 돼요. 햇빛 들어오게. 언제까지 혼자서 <여고괴담> 촬영할 거예요. 온통 어두운데. 전부 다 창문 다 닫아놓고. 자기만의 세계에 거기에 몰입되어 가지고 혼자 자기가 자기에게 최면 걸면서. ‘나는 정당하다. 나는 미륵이다.’ 해가면서.
오늘 본문에서 광야에서 주님께서 그런 식으로 애굽에서 일어나는 그것과 약속의 땅의 차이점을 두시는 이유는, 바로 공통자리, 공동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동의 자리. 주님께서 그 당시에 가르치는 자, 사도, 아직 말씀이 확정되지 않았으니까 선지자, 사도, 교사,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은 그들이 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르치는 ‘형제’라고 구성시켜 놓았던 그 공동의 자리가 있어요.
그 공동의 자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언급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바리새인에 의해서 체포되어서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온 그 대목이 있거든요. 그럴 때 바리새인들은 여인을 끌고 오면서 자기들 손에 짱돌, 돌을 쥐고 있어요. 돌을 쥐고 있는 겁니다.
돌을 쥐고서, 율법에서는 이런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 하는데 예수님 당신은 이 여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당신의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이렇게 끌고 온 거예요. 이것은 바로 여자를 통해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지적질하고 고소해서 죽여버리려고 빌미를 얻기 위해서 한 겁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여기서 해설을 붙인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대화에 대해서 제가 해설을 붙인다면 이렇습니다. “너희들이 율법을 잘 지켜서 이 여자를 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라고 보는 모양인데 그래? 그래서 너희가 다 돌 들었지?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할게.” 하고 예수님께서 앉아서 땅에다 글씨를 썼습니다.
글씨를 쓰니까 돌 들었던, 예수님을 주목하던 자들이 예수님의 그 다음 행동에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예수님이 무슨 글을 쓰는가 보니까 율법에 의해서 돌에 쳐죽일 내용이 거기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도 각자 개별적으로. 그러니까 바리새인은, 그 여자 쳐 죽이기 위해서 들었던 그 돌에 이제는 돌 던지는 본인이 돌 맞아야 될 대상이 된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쓰시는 그 자체가 율법이기 때문에.
그걸 보고 자기 생각을 못 한 거예요. 저 여자는 나쁜 여자고 나는 저 여자에게 돌 던질 만큼 착해지려고 애쓰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봤는데 그 글 보니까 저 여자도 나쁘지만 그다음 차례는 자기 차례인 거예요. 그리고 요한복음 8장 이 본문에서 돌을 놓은 순서가 있어요. 나이 많은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9)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해서 하나둘씩 돌을 놔버렸어요.
왜 그러냐? 나이 많고 그만한 세월의 인생을 살았다는 것은 더러운 짓을 많이 했다는 뜻이거든요. 돌을 계속해서 맞고, 맞고, 또 맞아야 될 짓을 많이 해온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둘씩 돌을 놓고 도망치기 바빠요. 예수님께 도망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 자기를 지적하는 돌로 쳐 죽임 받아야 되는 그 말씀으로부터 도망치기 바빴던 겁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왜 안 갔느냐? 여인에게는 돌이 없었어요. 돌이 없었고 예수님과 그 여인은 공동자리를 마련해 준 겁니다. 여인에게 돌이 없다는 말은, 여인이 죄짓고 난 뒤에 더 이상 내가 살 출구가 없음을 여인은 처음으로 알게 된 겁니다. 여인이 속한 세상은 선악 지식으로 가득한 세계에요. 이 세계가 선악 지식으로.
그런데 성경에 보면 선악 지식을 안다는 것은 창세기 2장이 아니고 이미 창세기 3장으로 넘어온 세계에요. 창세기 2장은 생명 나무가 있던 시기였어요. 그러나 창세기 3장 끝에 보면 더 이상 인간들은 생명 나무가 없는 쪽으로 추방되는 세계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과 공동의 자리, 공통의 자리를 마련해 가지고 선악 체계가 없는, 생명 나무만 있는 세계로 그 여인을 이동시킨 겁니다. 데려간 거예요. 여인은 자기 속에 있는 그 선악 체계를 토해버린 겁니다.
더 이상 선과 악에 대해서 자기를 지적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누가 있느냐고 물었어요. 예수님이 여인보고 “누가 있느냐? 선악 체제에서 너를 지적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한 번 봐라.” “없나이다.” 없는 거예요. 창세기 3장에서 2장으로 인간은 못 넘어갑니다. 넘어갈 수가 없어요. 자기 잘난 체 한다고.
주님과의 공통의 자리, 주님 자체가 생명 나무거든요. 주님 자신이 생명 나무가 되어가지고 여인과 공동의 자리를 마련하니까 여인은 예수님에게 붙잡힌 바 된 자체가 그 여인은 뭐냐? 자유를 얻은 겁니다. 이게 빛이에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빛입니다. 선악 체계는 어두움이에요. 선악 체계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깜깜해요. 숨기 좋~다고 여기는 겁니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인간이 되려고 애씁니다.
그게 더 돌에 맞아 죽을 저주받을 짓인 것을 본인들이 몰랐던 거예요. 계속 은밀한 곳으로 숨어 들어가면 해결이 될 줄 알지요. 오늘 본문 사도바울이 주님의 뜻에 의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들이 귀해서가 아니라 너희들이 형제라고 불림을 받은 그 자리,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구성시킨 그 자리가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여기서 주님께서는 광야 시절처럼 악은 악으로 갚지 마라, 건방 떨지 마라, 잘난 체 하지 마라, 세상 것에 주눅 들어서 벌벌 떨지 말고, 또는 세상에서 좀 잘되었다고 그걸 자기 자랑거리로 삼지 말고, 라는 그러한 계시노선의 단일화를 추구하시면서 그들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빛을 알아? 너희들이 복음을 알아? 복음을 안다면 왜 악을 악으로 갚냐, 인간아!” 너는 너 혼자 있는 자리가 아니고 주님이 있는 자리거든요. 그러면 주님의 자리는 뭐냐?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 그 사이를 벌려 놔요. 마치 아코디언처럼 벌려놓습니다. 근력 키울 때 스프링 잡아당기는 것 있지요.
인간이 죄인인데 의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죄인을 의인 되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것은 인간은 모르고요, 예수님 자신의 존재 자체를 두 쪽으로 벌리는 거예요. 스프링 근력운동 하듯이. 쭉쭉, 그런 것 있지요. 아침에 당기는 것. 십자가 죽은 예수님과 부활한 예수님, 그 사이에만, 그 사이에만 구원될 수 없는 자가 구원될 수 있는 비밀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천국 갈 수 없는 사람이 천국 가는 그 비밀이 잡아당기는 데 있어요.
그걸 쉽게 하기 위해서 죽었던 예수님을 입자로 보고요, 입자, 그리고 부활하신 그분도 입자거든요. 그러면 그 사이에 뭐냐? 예수님은 죽어 계시기 때문에 그 사이에 흐르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언약, 파동, 이게 더 어려운 것인지 쉬운 것인지 모르겠는데요, 파동이 있는 겁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가 최종존재로 보기 때문에 입자로 봐요. 입자입니다. 입자로 보는데 어떤 할 일거리가 생겨버리면 인간은 입자인 것을 놓쳐버리고 파동으로 변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엄마가 미장원에서 일하고 있을 때는 파동이에요. 손님 머리 손질하는데 신경 씁니다.
거기에 몰입하고 있는데 여기에 갑자기 중학생 자기 아들이 엄마, 하면서 가방 던지면서 미장원에 들어왔다. 그다음부터 엄마는 입자가 돼요. ‘저 망나니가 손님들한테 무슨 짓을 할지’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정신없이 자기 일에 몰입할 때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려서 나는 개별자라는 생각이 없는데 갑자기 누구 하나 쓱 오니까 파동이 변해서 입자가 된 거예요. 자기를 의식하는 거예요.
언젠가 설교할 때 이걸 가지고 뭐냐? 자기를 의식 안 할 때는 이것을 ‘액체 자아’라 했는데 자기를 생각할 때는 ‘고체 자아’로 변해버리는 겁니다. ‘액체 자아’는요, 어느 그릇에든 다 담겨요. 흐름이니까, 파동이니까 구애받지 않아요.
그러나 입자가 되어버리면 충돌돼요. 마주치고 충돌하고 싸우고 그래요. 입자가 되니까. 자기 보기에 자기가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자기를 지켜야 되니까. 그래서 맨날 믿습니다, 그러고 있다고요. 입자는요, 입자가 구원받지를 못합니다. 유일한 구원자 입자는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가슴 쫙 열고 이걸 파동으로 한 그것만이 죽었던 예수님이 부활한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 70절에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를 선택해요. 사람들이 이걸 좀 궁금해 해야 됩니다. “목사님, 주님이 가룟유다는 선택해 놓고 왜 버리십니까?” 그러한 의문점에 답변이 돼야 돼요. 그 답변이 뭐냐? 70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너희 중에 한 사람은 사탄이라, 마귀니라, 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입자적 성격을 가질 때 이것은 바로 악마가 입자인 것을 드러내는 모델로서 인간은 다뤄지고 있다는 거예요. 악마가 인간의 배후에 있으니까 인간의 입자성은 모두 악마에서 주어진 입자성이에요. 선악과를 따먹으라 했으니까. 그러니까 악마의 입자성에서 인간은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자기밖에 몰라요. 자아실현이 최고 목표고, ‘남 다 내 앞에 꿇어!’ 이게 뭐 인간의 사는 본성입니다.
사람이 종교를 원하는 것은 남에게 지기 싫어해서 그래요.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이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게 90퍼센트, 더 올려야 돼요, 95퍼센트 인간의 심보에요. 지기 싫어하는 겁니다. 안 지려고 교회 가고, 안 지려고 절에 가고, 안 지려고 종교를 얻는 거예요. 그 종교의 밀림 속에 숨어버리는 겁니다. 안 지려고, 스스로 안 부끄러워하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옆에 사탄을 둬요. 악마를 둔다고요. 일부러 선택해서. 악마가 어떻게 입자가 입자 노릇을 하는가 보라는 말이지요. 결국 가룟유다는 하나님이 건지지 않습니다. 버림받아요. 왜? 끝까지 자기 입자성을 못 버리고 ‘내가 스스로를 배신하다니. 나는 죽는 게 마땅하다’ 자살해 버렸잖아요.
그런데 다른 제자들은 성령이라는 흐름이 와요. 파동이 온다고요. 성령이 오니까 마치 수영선수가, 박 태환이지요, 박태환이 50미터, 짧은 거요, 긴 것 말고, 짧은 수영 할 때는 물속에 뛰어들자마자 잠영해 버려요. 잠영, 물 위로 나오지를 않아요. 선수 없어요. 물속에 들어가 있어요. ‘선수 어디 갔지?’ 물속에서 헤엄쳐야 돼요. 물속에 저항이 없으니까.
사도바울은 예수를 믿고 난 뒤에 뭐라고 하느냐? 나는 이미 죽었고. 입자가 죽었고, 입자가 죽었으니까 이것은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하는 파동이 되는 겁니다. 주인공은 주님이 되고 나는 그 주님이 움직이는 하나의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거예요. 잠영으로서 이미 물속에 잠긴 채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 사이를 통과하게 되는 거예요.
주께서는 죽은 자에게는 뭘 요구하지도 않아요. 그냥 죽은 거예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 자손 되게 한다, 했잖아요. 마태복음 3장 9절에서.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돌은 죽은 물체가 아니고 애초에 산 적이 없는 물체에요. 제가 여러분에게 문제 낼 테니 알아 맞춰 보세요. 원자폭탄이 여러분 머리 위에 떨어지면 1번, 아프다. 2번, 사라 진다. 몇번 입니까? 입자 같으면 아프고요, 제대로 원자폭탄 떨어지면 아플 리가 없어요. 섭씨 3천 도의 열에 사라져 버려요. 아플 여유가 없다고요. 복음은 원자폭탄보다 더 세요. 아픈 게 아니고 나를 입자로 간주를 하지 않는 이 복을 받습니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너는 나하고 공동의 영토가 된 이상, 자리가 마련된 이상 난 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 아무 일한 것도 없이 의롭게 되는 이 복이나 받아라, 인간아!” 그 사실을 반복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계속해서 주입 시키는 거예요. “지금 우리 자리가 이런 자리다. 창세기 3장에서 2장으로 넘어왔다. 이제는 생명 나무……, 선악과, ‘내가 잘했다 잘못했다’는 잊어라, 그만.” 이제는 생명이 어떻게 우리에게, 건널 수 없는 지옥에서 건너서 천국 백성, 형제가 되었느냐, 그것만 알면 된다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이 사실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혼인으로 설명해요. “전에는 너희가 율법하고 혼인했다. 뭐든지 완벽해야 되고, 철저해야 되고, 실수가 없어야 되고, 오류가 없어야 되고, 너희는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어야 되고……, 맨날 이런 식으로 잔소리, 잔소리, 잔소리, 잔소리가 늘 주어지던 그런 신부라면 이제는 성령이 오게 되면 잊어라. 그 딱딱했던 남편은 잊어버리고 성령이 우리에게 남편이 되어버리면 성령은 은혜로 말미암아…….”
성경대로 하면 이렇습니다. 네가 거기서 죽었으니까, 율법에 대해서 죽었으니까 다른 남자한테 갈아타기 해요. 그래서 그 남편이 뭐냐 하면, 성령의 남편입니다. 네가 율법에 대해서 죽음을 당했으니, 그냥 나오면 간음한 여인이 되겠지만 율법이 우리를 죽여줬으니까, 우리는 선악에 의해서 이미 죽은 자가 되었으니까 선악 체계에 의해서 정죄함을 받을 대상이 아니게 되었어요. 간음한 여인이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죽은 자로 간주되었으니까요.
여인은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어요. 이미 죽었으니까요. 이미 간음하고 이미 죽어버렸으니까 떠날 수가 없어요. 어쩔 수 없이 예수님과 공통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인은 뭐냐? 자기 자유를 예수님께 넘겨 줘버렸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바로 예수님의 자유에. 이 여인이 그 자유가 뭔가를 만끽하면서 그걸 외부에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 4절에 보면 “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시집을 갔으니까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바로 “이러한 죄인도 내 아내입니다”라는 열매를 맺히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한 게 아니고 주님이 필요해서 우리를 성도 되게 하고 성령이 오신 거예요. 나 천당 가라고 성령이 온 게 아니고 주님에게 주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 어떤 공로의 효과가 이 정도다, 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미천하고 죄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천국 백성으로 삼았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어디서부터 시작했고 어디로 갔는지를 우리 죽을 인간을 통해서 보게 하고 나 자신을 통해서 확인시키는 거예요. 아, 내가 안 부끄러워지려고, 잘난 체하려고 애썼던 그것,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피를 흘리셨구나, 그렇게 되는 거예요.
끝으로 전도서 3장 18, 19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똑같다 그 말이에요 똑같다.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것이 헛됨이로다”
개보고 개라 하는데 그게 섭섭합니까? 그게 섭섭해요? 아까 기도하신 그 내용처럼 개를 개로 들춰주시는 이 복이요, 이게 입자, 십자가로, 입자로 죽으신 주님, 그 앞에서 들통나게 하시고 그 다음에 부활의 입자가 되는 그 과정은 우리 소관 아닙니다.
주께서, 성령이 오셔서 주님이 건너가셨던, 잠영하신 그 파동, 힘이 그대로 우리에게 꽂히니까 우리는 입자의 자격이 아니라 주님의 입자에 속해 있는 형제의 자격으로 주님의 능력이라는 파동의 효력을 선물로 우리가 받은 겁니다.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바로 이것뿐입니다. 주님과 우리하고 공동의 자리를 함께 하기에 아무 일한 것도 없이 의인이 되었다는 이걸 통해서 주님께만 감사합시다.